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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 년전 읽었던 멋진 신세계를 독서모임에서 다시 읽었다. 혼자 읽을 때와 같이 읽을 때는 그 느끼는 바가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이 함께 읽기를 하고 굳이 불편을 감수하고 독서 토론과 독서 클럽을 조직하는 것일게다.
멋진 신세계는 올더시 헉슬리가 1932년에 쓴 미래 세계를 예언하듯 그린 소설이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미래 과학 문명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한 소설로 읽어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묘사와 장면들이 여기 저기 많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본 사회와 인물들이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와 매트릭스 안에서 살며 진실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네오(키아누 리브스)일행을 잡으려는 스미스 군단-생김도 똑같고 역할도 똑같은 스미스들을 우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볼 수 있다.
멋진 신세계에는 여러 계급이 있다. 제일 지적인 일을 담당하는 알파와 베타, 육체 노동과 잡일 담당하는 감마와 델타, 사회의 하층 계급으로 가장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앱실론. 알파 계급의 경우 생김이 다양하지만 하위로 갈수록 생김의 종류가 단순하다. 그래서 앱실론 계급은 수 만명의 사람(과연 사람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이 단지 서너 종류의 외모만을 갖고 있고 생김에 차별이 없어서 매트릭스의 스미스처럼 보는 것만으로는 구별을 할 수 없다. 매트릭스에서처럼 개체는 인공 부화로 태어나 부모가 없고 개인적 인연이 없다. 모든 교육은 국가가 계획하에 시행된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통제되어-심지어 아름다움까지도-불안과 불안정이 없다. 이것이 신세계이다.
몇 년전 베스트셀러였던 기억전달자(The Giver)에서 모든 불안과 불확실성이 제거되어 평안과 편안만이 존재하는 세상 역시 멋진 신세계에 존재하는 세계이다. 전쟁, 기아, 고통, 불행, 이별, 슬픔, 눈물이 없어진 세상에서 이것들은 오직 기억전달자로 선정된 사람만이 세대를 거쳐 기록도 영상도 아닌 기억만으로 전달되고 남겨지고 있다.
멋진 신세계에는 기억전달자가 아닌 포드님(하느님과 같은)이라고 불려지는 통제관이 바로 그 역할이다. 그는 과거를 알고 문학을 알고 과학을 알지만 오직 그만 가지고 있고 신세계는 이것이 배제된 사람의 역할과 감각과 순간의 즐거움만이 존재한다. 신세계에는 "오늘 누려도 되는 즐거음을 내일로 미루지마라"라는 말이 지배한다. 항상 욕망을 충족한다. 그래서 욕망과 욕구가 없다. 결핍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 기시감을 느낀다. 어디서 본 것이고 어디서 들은 것이다. 제목은 멋진 신세계이지만 작품 내용은 하나도 신세계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언뜻보면 소재와 주제의 재탕 삼탕같아서 실망을 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기시감의 원류는 바로 이 '멋진 신세계'다. 이 소설은 1932년에 나왔다. 지금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봐온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컨텐츠들은 실은 멋진 신세계가 그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전혀 아니다. 영화 매트릭스, 가타카, 블레이드러너, 아일랜드 등 인간 복제, 편리와 편안, 고뇌가 없는 세상 등 전부 신세계에서 다룬 아이템들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본다면 그 당시에 작가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써내려갔을까하는 생각에 그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신세계는 이런 사회이다.
"사회적인 불안정이 없으면 비극을 생산할 길이 없으니까요.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P333)
신세계의 포드님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신세계에 행복은 없다. 다만 즐거움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행복과 즐거움은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일상이 늘 똑같이 편안할 때 행복을 늘 느끼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행복을 느낄 때는 어제보다 더 즐거울 때, 어제 고통과 번뇌가 찾아들었는데 오늘 그것이 사라졌을 때 힘든 노동을 인내하고 잠시의 휴식을 가질 때 우리는 보통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즉, 반드시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은 인간은 바닥이 있어야 고점이 있고 고통이 있어야 행복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거다. 그래서 지금 내가 행복하더라도 남을 돌아볼 줄 알고 겸손할 줄 아는 것이고 반대로 지금 내가 불행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뒤따를 행복을 기대하며 희망을 가지며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꼭 고통과 불행과 인내가 있어야만 하나? 신세계처럼 늘 즐거움만 있으면 안되나? 신세계의 세계관을 굳이 삐딱하게 봐야할까?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항상 즐거운 것이 곧 행복아닐까?
책에는 세 명의 인물이 있다. 약간의 신체적 결함을 가진 신세계 사람 버나드, 정신적으로 과잉스러운 신세계 사람 헬름홀츠, 신세계가 아닌 보호구역에서 살았던 야만인 존.
버나드는 자신의 신체적 결함으로 자유과 생각을 하곤 했던 인물이지만 결국 신세계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세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을 선택했다.
존은 세익스피어를 이미 읽어버린 야만인(신세계 기준으로)으로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을 원하고 죄악을 원하며 '사실상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며 스스로 고통의 삶을 선택하여 결국 자살을 택했다.
헬름홀츠는 이유는 모르지만 다른 알파와 달리 정신적 과잉을 가지게 되어 자유과 번뇌를 아는 알파 계급으로 그는 100% 고통의 삶 혹은 신세계에 적응하는 삶 대신 신세계가 지배하는 아일랜드로의 유배를 스스로 선택하여 비록 지루하고 즐거움이 없더라도 시와 과학을 연구하는 것을 삶을 선택했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지금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나는 헬름홀츠의 삶을 선택할 것 같다. 하지만 신세계에서 태어나고 신세계에서만 살았더라면 과연 나는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통제관 포드가 멋지다고 역설한 신세계의 삶이 이론적으로 완벽해 보이고 설핏 혹하기도 하지만, 이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나는 '멋진 신세계'에서 멋진 삶을 살고있는 버나드와 레니나와 헨리 포스터가 그렇게 멋져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내 나름으로 멋진 삶을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