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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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읽기 3번째.

그의 데뷔작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박완서는 40의 나이에 등단햇다. 요즘이라고 해도 여자 나이 40이면 첫 시작을 하기에는 자신감이 결핍될 듯한 나이인데 1970년에 여자 나이 40에 등단을 했으니 아마도 그 때 문단에서는 약간이라도 센세이션이 되었음직하다.

 

<니목>은 박완서 작가가 취직하여 다녔던 미군PX의 경험을 일부 반영하여 쓴 소설이다. 그때 만났던 박수근 작가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20대 젊은 여성들이 전쟁이라는 참상을 어떻게 겪고 느꼈는지가 옥희도(아마도 박수근)라는 인물을 가운데 두고 그려내었다.

 

1.4후퇴 후 전쟁이 약간은 익숙해져 벼린 날에 경아는 서울의 아주 오래된 한옥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고있다. 경아는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가게에서 미군을 상대로 스카프나 손수건에 그림을 그리라고 영업을 하고 정산을 하는 일을 하고 있다. 4명의 환쟁들이 일을 하고 있는 가게에 진짜 화가인 유부남 옥희도가 생계를 위해 합류한다. 전기수리공인 황태수가 경아에게 호감을 느끼며 다가오는 중인데 경아는 유부남인 옥희도에게 마음이 끌려 그를 사랑하게 되고 만다. 그것은 유부남 옥희도도 마찬가지. 서로는 각자가 가지고 있던 결핍과 불안을 잠시라도 녹여줄 그런 대상이 필요했던 것인데 마침 그 곳이 각자가 서있었던 것이다.

참담한 전쟁의 가운데 경아는 전쟁이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고서야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쩌면 어서 빨리 황폐해지기를, 그러기 전에 자기가 먼저 황폐해지기를 바라며 버티고 있는 삶이다. 그 속에서 순수한 맑은 눈빛을 한 옥희도는 경아에게 어쩌면 빨리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또 어쩌면 황폐해져가고 있는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라고 잠재 의식 속에서 생각했었을 지 모르겠다. 소설의 끝부분에 이유가 밝혀지긴 하지만 경아는 전쟁이 준 고통속에서 엄마를 미워하며 엄마의 모습을 한 오래된 한옥을 죽기만큼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하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전 어느 즈음부터 아직 그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 겨우 몇 개월을 그렸을 뿐이다. 그런데 600페이지가 얼추 되는 제법 두껴운 책은 경아의 생각과 느낌의 절절한 묘사와 그가 바라보고 느끼는 전쟁 중 서울, 전쟁을 견뎌내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으로 가득차 있다. 그 묘사와 서술이 너무도 생생하고 박완서 특유의 생경하면서도 상상가능한 비유와 은유로 인하여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스하고 조금은 건조한 시선으로 하여 나는 오히려 익숙해져버린 그 전쟁이 한층 더 무섭게 다가왔다. '역시 전쟁은 안돼. 두 번 다시 전쟁은 절대 안돼.'라는 생각을 박 작가의 담담한 표현으로 인하여 역설적으로 전쟁과 죽음과 학살을 더 절절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참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종아하게 되었던 재미는 책인데도 첫 부분에 경아가 싱그러운 젊음을 가진 태수보다도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멀쑥한 옥희도에게 연정을 느끼고 사랑을 갈구할 때 나는 경아가 미웠다. "아니 젊은 아가씨가 어떻게 남의 남자를. 멀쩡한 가정을 깨려고 하나. 저 밖에 모르는 나쁜 가스나"라는 생각을 하며 주인공인데도 애착이 가지 않았고 오히려 경아를 일편단심 좋아하고 위해주는 태수를 응원하였다.

이것은 소설인데, 아니 현실일지라도 그들이 가진 감정을 제 3자가 뭐라 할 수 있겠냐마는, 유부남이라면 처음부터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있었나 보다, 나는. 경아가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소설의 도입부분에서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이 안되니 속도가 조금은 더뎠던 것 같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아, 나는 내가 인지하고 있던 것보다 좀 많이 보수적이구나'라고.

어쨌든 나중에 경아의 그런 마음 끌림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등장하여서 그 미움으로 책을 마무리하지않을 수 있었어 좋았다.

 

국문학과를 입학하지 마자 전쟁이 일어나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23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여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육아와 가사로 전혀 글을 쓰지 못하다가 거의 20년 세월이 지난 후 박완서는 첫 작품을 내었다. 첫 작품 발표때까지 20년이 걸렸지만 첫 등단이후 박 작가는 그야말로 소설, 산문, 동화, 콩트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작품을 어느 젊은 작가 못지 않게 왕성하게 써내었다. 책 뒤에 붙은 작가 이력을 보니 그야말로 후덜덜하다. 20년 묵은 솜씨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쓰고 소진하겠다는 결의까지 엿보였다. 그가 일생동안 써내었던 작품 수에 비하면 잘 알려진 소설은 의외로 몇 개 되지 않는 것 같다. 역시 후대에 길이 길이 이름이 남거나 혹은 시대에 두루 두루 회자되는 작품은 그만큼 어려운 가 보다. 하긴 모든 작품이 다 히트작이고 다 별 5개짜지이면 그 사람도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몇 개의 작품이라도 이렇게 오래도록 앞으로도 더 널리널리 읽힐 만한 작품을 쓰려면 역시 많이 일고 많이 써보아야 하는 것 같다. 박 작가의 두툼한 이력을 보며 누구나 다 아는 진리 하나를 또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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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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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재미있게 읽었고 밑줄 그은 문장도 되게 많았는데 감상문을 남기려고 하니 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걸까? 컴퓨터 앞에 앉아 손가락을 키보드 자판위에 올려둔 채 움직이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만 있다. 분명 지난 주 책을 막 덮었을 땐 할 말이 많았는데.

 

<자기 앞의 생>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모모라는 애칭을 쓰는 모하메드라는 10세 소년(나중에 14살이라는 것이 밝혀지지만)은 어느 건물 7층에서 창녀들의 아이를 주로 맡아 키우는 로자 아줌마 집에서 다른 창녀의 아이들과 같이 살고 있다. 이웃에는 많은 좋은 인생 선생님들이 있다. 양탄자 행상을 하는 하밀할아버지, 5층에 사는 여장남자 롤라 아줌마, 의사인 키츠 선생님, 자수성가한 포주 은다 아메데씨. 모모가 사는 벨빌(아름다은 마을이라는 뜻)은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이나 창녀, 포주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들은 당시 프랑스 기준에서도 정상적인 사회에 빌붙어서 사회를 좀 먹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모모에게는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인생의 진리와 삶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 등을 가르치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살아있는 학교이자 선생님들이었다. 10살이었던 모모가 몇 달 만에 14살이 되고 부모와 다름없는 로자 아줌마가 늙고 병들어 그녀와 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데 이 과정을 어린 모모의 시각에서 그린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모모의 시점에 씌여지긴 했지만 에밀 아자르의 생각임에 틀림이 없을 모모의 사람에 대한 시각, 세상에 대한 관점 그리고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는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 마다 보석같은 언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줄을 긋다긋다 못해 나중에는 줄긋기를 포기했는데 줄을 계속 긋다가는 모든 글을 다 필사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이 책을 읽었던 지인들은 모모와 로자 아줌마와의 끈끈한 관계와 사랑, 휴머니즘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 사랑과 인간애를 이야기했고 시간을 이야기했고 안락사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14살 모모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내가 아는 온갖 현학적인 말로 사랑을 아는 체 했고 죽음에 대한 관념적인 말들로 감상을 채웠다. 혹자는 그런 나에게 느낀 점이 많았나 보다라거나 생각을 깊이 했나보다라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나는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돌보는 모모가 기특하긴 했어도 아직 세상 물정을 알기엔 어린 아이로 느껴진다. 모모는 아직 14살 밖에 안 되었으니까 온 주변의 좋은 이웃선생님들이 모모더러 로자 아줌마를 병원으로 모셔야 한다고 합창하듯 이야기해도 로자 아줌마가 싫어하니까 죽어가는 사람도 인권이 있으니까라고 생각하며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을 책임진다. 그래 그건 모모가 고작 14살이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14살 무렵에 80이 넘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생업과 살림에 바쁜 부모님 대신 나는 내 유년의 많은 시간을 할머니와 보냈다. 할머니와 서로 정이 각별하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흘 내내 울었다. 입에서 자만 나와도 할머니의 쭈글한 얼굴과 바짝 말라서 살갗이 접히는 손등이 생각나서 또 울었다. 상을 치르고도 거의 일 년은 할머니글자만 봐도 생각만 해도 꺼이꺼이 울음을 내었다.

내 기억에 엄마는 달랐다. 엄마가 20살에 시집오고 50이 다 되어서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거의 30년을 한 집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사신 거다. 엄마는 슬픈 시늉만 내는 것 같았다. 14살 무렵의 나는 엄마가 왜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엄마가 약간은 이중인격자처럼 보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엄마 나이 20살에 아직 환갑도 안 된 시어머니와 한 집에서 살았던 것이고 할머니는 며느리를 봤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30년 가까이 사신 거다. 그것도 마지막 몇 년은 아이같이 행동하셨다. 엄마가 왜 슬픈 시늉만 냈는지 너무도 이해가 된다.

 

그런 엄마가 이제 80이 넘었다. 그렇게 초롱하고 눈치 빠르던 엄마도 이제 당신이 슬픈 시늉을 보였던 당사자처럼 되어 가고 있다. 몸도 병들고 마음도 아이처럼 변하고 있다. 당신은 변해가는 자신을 모습에 슬퍼할까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감사하며 기뻐할까

 

투정 많고 유치해지는 엄마를 바라보는 나는 자꾸만 슬프다. 시들어가는 엄마를 보며 옛날 우리 엄마가 할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엄마처럼 되어가는 것 같아서 슬프다. 밖에서는 효녀인 척 세상없는 부모 생각하는 척하지만 철없는 아이 같은 엄마 앞에선 말 안 듣는 아이 나무라듯 자꾸 엄마를 나무란다. 내가 나쁜 건지 엄마가 나쁜 건지. 내가 슬픈 건지 엄마가 슬픈 건지

 

로자 아줌마는 겨우 몇 주 아팠고 겨우 3주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요즘같이 의학이 발달되어 과학이 사람의 생명을 강제 연장시키고 있는 현실에서도 이웃선생님들은 어린 보호자 모모의 말을 듣고 기다려줬을까? 그리고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3주가 아니라 3달을 아니 3년을 생과 사의 경계를 왔다 갔다 했다고 해도 끝까지 아줌마 곁에서 같이 있어주었을까?

 

적당한 기간 3주만을 견디었기 때문에 모모는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기도 않게 적당히 인생을 배우고 죽음을 관조하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하여 철학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모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적당한 기간이 아니고 징글징글한 기간이 되어 나의 원천을 배반하고 죽음을 원망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에게도 모모처럼 버틸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이 주어지기를. 내가 당하는 쪽이든 내가 견디는 쪽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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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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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박완서의 작품을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집 앞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대여 가능한 한 권짜리 책이 뭐가 있나 찾았는데 그것이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다.

 

목차를 훎어 보니 실린 작품 수가 꽤 많아서 수필집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빌려와서 책의 서문을 읽어보니 수필집이 아니라 아주 짧은 소설이었다. 내가 빌린 책의 서문은 박 작가의 딸인 호원숙씨가 썼는데 생전에 그의 엄마가 써놓은 짧은 단편들을 모아 재출간했다고 한다.

 

서문 뒤에 박완서 작가의 발간사도 있다. 등단 이후 주로 70년대에 썼던 글을 모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짧은 소설-박 작가는 발간사에서 콩트라고 칭했다-을 쓴 이유는 당시 한창 유행하던 대기업의 사보들이 원하는 것이 이런 종류의 짧은 콩트 글이었고 문예지나 글을 발표할 만한 공간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기업의 사보나마 청탁이 오면 글을 써서 발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간 하다가 그만두었는데 원고료가 문예지보다 후한 편이어서 주부와 작가를 겸한 자신보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에게 더 기회가 가야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여기에 실린 46편의 소설은 대부분 70년대에 씌여졌다. ‘마른 꽃잎의 추억’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그리고 열쇠~’아파트~’로 시작하는 소설들은 연작 소설이다. 같은 등장인물이나 같은 주인공인데 다른 주인공 다른 관점으로 된 작품이다. 그 외에도 작가의 경험으로 짐작되는 작품도 몇 보이는 것 같다.

시대를 반영하듯 70년대 한참 붐이 일던 아파트에 관련된 이야기,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 엄마나 할머니, 고부 간 등 전통 가족 이야기, 당시의 연애, 결혼에 대한 이야기 등이 주류를 이룬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에는 그야말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이다. 요즘 티브이에서 유행하는 실장님, 재벌 3, 캔디는 없다. 시대는 다를지라도 바로 우리네 삶 우리 엎집의 삶을 소박하고 담백한 국어로 감칠맛나게 버무려놓았다. 그래서 더 정감 있고 재미있게 느껴진다.

 

처음 책을 집어 들고서는 10쪽 내외의 짧은 소설이니 가볍게 읽고 넘기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오산이었다. 비록 단편소설 축에도 끼지 못할 짧은 분량이나 그 안에는 소설이 갖춰야 할 요소가 다 들어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몇 개만을 읽었을 때는 이 정도 분량 이 정도 수준이면 나도 자신을 가져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야기 하나 하나가 너무 재미있어서 내가 쓴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 자세히 읽어보니 짧다고 해서 그냥 막 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짧은 글 안에도 작가가 표현한 온갖 직유, 은유, 비유의 문장들은 참신함을 갖고 있었고 독자들에게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짧지만 그 안에서 독자가 알아낼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감정, 느낌, 상황은 그저 길게 풀어쓴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짧게 쓰더라도 얼마든지 재미와 공감과 감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것을 알고 나서부터 이 작품은 나에게 하나의 좋은 교과서였다. 오죽하면 책을 하나 사서 두고두고 교과서처럼 자주 읽으면서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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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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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먼저 읽은 친구가 말했다.

"프랑스판 82년생 김지영이야"

나는 생각했다. '선진국인 프랑스라 해도 여성이 느끼는 여성의 삶은 별반 차이가 없나보지? 이런 책이 히트하고 좋은 평판을 받은 걸 보면.'

 

책을 다 읽은 지금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82년생 김지여의 탈을 쓸 뻔한 장르 소설쪽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작가인 레일라 슬리마니는 아이, 보모, 엄마의 삼각 관계를 두고 공포라는 감정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 평단도 이런 작가의 의도에 공감했는지 이 작품은 2016년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미리암은 앞날이 창창한 변호사였으나 결혼과 두 번의 임신, 출산으로 인해 경력을 포기하고 전업 주부로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으로 살아간다. 남편 폴은 음악작업을 하는 상업예술가로 가정을 사랑하는 다정한 남편이지만 너저분한 가정과 찌들어가는 미리암을 보는 것이 힘겨워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을 꺼려하는 가장이다. 여기까지는 딱 82년생 김지영이다.

 

경제적 어려움과 찌들어가는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둘은 루이즈라는 보모를 고용한다. 루이즈가 집 안에 들어온 첫 날부터 미리암과 폴의 인생은 구질구질한 일상에서 산뜻한 여피족으로 변화에 성공하게 된다. 보모로 고용된 루이즈는 밀라와 아당의 육아, 보육, 건강에 완벽하게 책임질 뿐만 아니라 청소, 요리, 정리정돈까지 완벽한 메리 포핀스를 구현해낸다. 그런 루이즈덕분에 미리암과 폴은 제 2의 신혼을 만끽하며 아이는 믿고 맡길만한 루이즈에 의지하면서 오롯이 자신들의 경력을 위주로 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루이즈가 달라지고 있다. 월급은 또박또박 받아가지만 생활은 늘 궁핍한 것 같고 살이 마르고 있고 가끔은 미리암 흉내를 내는 것 같고 밀라와 아당의 실제 엄마가 미리암이 아닌 루이즈인 것 같이 행동도 하고 뭔지 모르게 의뭉스럽고 불안을 가지게 만든다. 자기 집에 가는 것을 꺼리며 미리암의 침대에서 눕기도 하고 미리암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그녀의 화장품 향수를 쓰기도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영화 '위험한 독신녀'가 떠오르며 이 소설의 장르가 사회비판분야에서 스릴러로 넘어가는가 보다 생각했다. 나쁘지 않다. 나는 추리, 스릴러, 미스터리 분야를 좋아한다.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루이즈의 이런 행동에 대한 배경 설명을 위해서인지 루이즈의 어린 시절 이야기기가 회상된다. 그녀의 과거, 그녀가 왜 이런 성마른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아이에 집착하는지 등에 대한 것을 독자는 루이즈의 회상으로 인해 어느 정도 납득을 해간다. 하지만 소설의 전개는 왠지 불안해지고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다. 아니,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왜냐면, 소설의 첫머리에 "아이가 죽었다"라는 다소 파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처음부터 독자들은 알 수 있다. 루이즈가 그저 선하고 좋은 보모가 아님을 그녀로 인해 한 아이가 죽게됨을 그리하여 미리암과 폴은 필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임을.

 

그래서 어찌 보면 이 소설은 왜 루이즈가 아이를 죽였는지를 사건 발생 이전 시점부터 돌아가서 그 시작과 전개를 보여주는 소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소설은 루이즈가 어떻게 아이를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과 이유는 제외되어 버렸다. 그래서 독자는 유아 살인 사건에 대하여 내막을 짐작을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와 이유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제일 마지막 장에 가서는 이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니나 도르발 경감이 등장한다. 범인도 명확한 이 사건을 그냥 종결할 수도 있지만 도르발 경감은 뭔지 모를 찝찝함으로 사건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수사하고자 한다. 이유도 명확히 알고 싶고 루이즈라는 인물의 내막도 캐야만 할 것 같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도르발 경감이 나오는 부분은 전체 292페이지 중 겨우 11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여자 수사 경감이 차지하는 역할은 꽤 크다. 아마 책의 첫 부분부터 이 소설은 내레이션하고 끌고 가는 사람이 바로 이 도르발 경감일 것 같다는 생각을 마지막 챕터 도르발 경감이 등장하고서야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이 소설은 추리 소설로 장르를 바꾸었고 나는 넬레 노어하우스의 <산 자와 죽은 자>를 연상하며 읽었다. 넬레 노어하우스의 추리소설은 여느 추리 소설이 그렇듯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수사반장이 쫓아가면서 진행되지만 <달콤한 노래>는 그 순서가 도치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점이 그런데 참 신선하다. 왜냐면 독자는 처음부터 살인사건의 존재를 알고 범인을 알고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은 시종일관 독자의 흥미를 끌고 다음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공쿠르상까지 받을 만한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요새는 장르소설도 문학상을 받는다면 그럴수도 있겠다. 나는 <달콤한 노래>를 '위험한 독신녀'나 '산 자와 죽은 자' 혹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같은 추리 추적 소설로 보아 지기 때문이다.

하긴 뭐 그런 상 받는 게 중요하겠나, 재미있다는 것이 나에겐 중요할 뿐이다. 책을 쥐고 놓지 않고 한 5시간을 들여 책 한권 떼고 싶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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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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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고 배움을 구하는 것은 매번 좋다. 나라면 하지 않을 것들은 다른 이와 새로운 배움을 통해서 접하게 된다. 저변의 확대이다.

 

심리책이나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는다. 고로, '당신이 옳다'도 혼자라면 선택하지 않았었을 책이다. 공교롭게도 하나의 배움과 또 하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나는 이 책을 읽어낼 수 밖에 없었다.

 

'적정심리학', 이 얼마나 적정한 말인가. 현대심리학과 정신의학은(난 실은 잘 모르지만) 많이 치우쳐져 있는 것 같고 극단으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도 같아 보인다. 프로이드, 융, MBTI 애니어그램 등등. 이제는 지식이라기 보단 상식과 보통명사처럼 되어버린 심리학 용어와 마음, 치유, 소통, 공감 등의 언어들. 이 넘쳐나는 상식과 명사들이 자주 내 맘을 혹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들은 정하지 못하고 지식과 주장에 의하여 '너 감정은 이런 거야. 이쪽에 가까워. 그러니 이렇게 해야 돼'라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정'심리학이라는 이름이 우선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든 이름처럼, 책의 내용도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공감이라는 것을 잘 정의내려주는 것 같고 공감의 방법론까지 잘 설명해주었다. 이론은 늘 좋다. 문제는 실천이지.

 

나는 이 책에서 두 부분이 내 마음을 건드렸다.

"이는 자기 존재의 상태를 주목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을 찾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 옆의 어른들은 수건 돌리기하듯 아이의 고통을 다음 사람에게 순차적으로 넘기고 있었던 셈이다. 상담 교사는 부모에게, 부모는 정신과 의사에게, 정신과 의사는 약물치료와 다음 만남으로 공을 넘겼다. 이런 행태는 ‘일상의 외주화‘이다. - P76"

 

큰아이가 중2였을 때 아이도 힘들어했고 그 때문에 나도 힘들었다. 당시로 나이 50이 넘으셨던 여자 담임선생님은 우리 아이를 약간 산만한 문제아 취급을 하셨을 때인데 학교에서 해마다 하는 우울증 검사, 심리 검사같은 것을 했는데 아이의 결과지가 좀 심각하게 나왔다고 한다. 어느 날, 학교 상담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하시는 말씀이 우리 아이가 자살징후를 보이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으니 병원을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놀란 가슴에 담임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아이의 학교 생활을 물어보고 담임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담임은 자기도 결과지를 보고 놀래서 상담선생님께 결과를 넘기고 학부모와 연락해보라고 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 아이의 결과지를 보고 담임은 상담선생님에게 상담선생님은 학부모인 나에게 넘긴 것이었다. 상담선생님은 학부모인 내가 의사에게로 넘길 것을 당연히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담임이나 상담선생님 그 누구도 아이를 불러서 대면하여 결과지를 놓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애가 사춘기를 심하게 앓고 있긴 해서도 그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기에 학원을 마치고 오는 아이에게 대놓고 물었고 이야기를 하였다. 아이말인 즉슨, 담임선생님이 자기와 자기 친구들을 문제아 및 말썽쟁이로 취급하길래 미운 마음에 고생좀 해보시라고 심리검사 때 일부러 우울한 쪽으로 체크를 했다고 하면서 자신은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 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회사 생활이나 잘 하라고 이렇게 엄마에게까지 학교에서 연락오고 할 줄은 생각못했다고 오히려 내가 놀랬을까봐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담임선생님과 상담선생님이 한 행동이 바로 '일상의 외주화'였을 것이다. 비단 이 분들 뿐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 너무 열심인 나머지 어떤 문제 하나가 발생하면 스스로 정면 돌파를 하기보단 그 문제를 외주주려고 하는 경향을 많이 보인다. 일상이 힘들어서 발생한 문제들이 나의 일상을 더 힘들게 하고 내 몸과 정신을 귀찮게 하기 때문에 내버려두던지 아니면 외주를 주는 것이다. 나도 많은 부분 외주를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아이가 중2였을 때 그러지 않았던 것이 나 자신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대견하였다.

 

또 다른 한 부분은 다음 대목이다.

언제나 나를 놓쳐선 안 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중략...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 낼 수 없다. 둘 다 늪에 빠진다.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 P120

 

당신이 옳다는 제목은 나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감정은 옳다 그러니 그 감정을 우선적으로 인정해야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어져 살기 위해서 때로는 자기 감정을 숨기고 헛된 미소와 치장된 말로 남들을 기쁘게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집에 돌아와서 내가 뭐하는 짓인가하며 그 공허한 시간을 아까워 한다. 반면에, 때로는 솔직한 내 감정을 드러내놓고서는 내 감정에 혹시 다른 사람이 속상했을까 안절부절하며 그들의 표정을 살피기도 한다. 돌아와서는 '그 때 그 말을 하면 안되는 거였어 조금만 누르고 참으면 될걸'하고 실제로는 솔직했던 내 감정을 후회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한 '당신이 옳다'는 명제와 '언제나 내가 옳다'는 명제는 위의 이러한 상반된 두 가지 상황에서 다 적용하며 내 마음의 주관을 세울 수 있는 명제였다. 전자의 경우이든 후자의 경우이든 모두 다 그 마음은 옳았다. 내 맘 뿐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도 다 옳다. 그 옳은 마음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서 가진 마음이 찝찝했던 것이다.

듣기에 따라 애매모호할 수도 있겠으나 내 맘도 옳고 그 맘도 옳다는 명제를 정신과 의사에게서 확인받고 나니 더할 나위 없이 내 맘이 편해졌다.

 

평소 내가 선호하는 종류의 책은 아니었으나 모든 것에서 베울 것이 있는 법이다. 나는 과거 내가 잘했던 부분을 기억하며 뿌듯해 하였고 어지러웠던 내 감정의 원인도 나름 정리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이 책에서 얻는 배움은 또 흐릿해지겠지만 흐릿해져도 흔적은 남을 것이라는 것은 믿는다. 흐릿해져서 흔적조차 가물해지면 이 감상문을 다시 찾아오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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