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도서관
조란 지브코비치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조란 지브코비치의 도서관은 모두 환상도서관이다. 그러나 결코 몽환적이거나 환상적이지 않다. 어떤 문을 열었을 때 내지는 어떤 책을 펼쳤을 때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초대 받아가는 일 같은 건 없다. 조란의 도서관은 그저 현실에서 잠시 몽상을 하거나 상상에 그치는 정도의 접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 몽상은 누구나 한 번 쯤 생각해 봄직한 것들이어서 그래, 나도 이런 생각 했더랬어, 와 같은 공감을 독자로부터 얻어낼 수 있으며 또한 환상도서관은 현실과 아주 미묘한 조금의 차이만을 가질 뿐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환상은 그 순간에는 빠져들기도 하나, 책을 덮고나면 그 괴리감에 되려 사람을 현실과 더 멀어지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조란이 독자에게 바라는 것이 무언지 알거 같았다. 조금의 웃음, 조금의 익살이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것처럼 조란의 환상도서관도 그러한 역할을 하기를 작가는 바라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요새는 이메일을 잘 쓰지 않는 추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길이가 있는 문장의 오고 감에는 이메일이 단연 으뜸이다. 게다가 요즈음의 작가들은 대부분 이메일을 사용할 것이다. 곧 계정은 노출될 것이고 잡다한 스팸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스팸을 지우면서 신경질도 낼 것이다. 그러다 문득, 혹시 진짜 내게 보내온 메일이 스팸으로 오인되어 버려지는 경우는 없을까, 란 염려도 될 것이다. 그순간 조란의 상상력은 발동되고 조란의 환상도서관에 불이 켜진다. 나는 언젠가 호기심에 스팸인줄 알면서도 메일을 죄다 열어본 작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즉석만남, 야한동영상무지많아요, 등등. 나는 그런 스팸을 단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기에 작가의 말이 신기하게 들렸다. 아, 그런거 열어보는 사람도 있구나..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작.가.라면? 작가의 호기심은 일반인의 호기심을 넘어설터. 작가의 그런 호기심이 바탕이 된다면 얼마든지 조란의 가상도서관이 만들어질 수 있겠다. 뚜껑을 열어본 가상도서관은 작가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제 겨우 3권만을 냈을 뿐인 자기에게 앞으로 최대 20권 정도의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나라면 단순하게 미래에 내가 저렇게 책을 많이 내? 라고 좋아할 것 같은데 작가는 저작권을 먼저 걱정하고 우롱당함을 기분나빠한다. 결국 환상의 세계와 잠시 접했음을 인지하지 못한 작가는 미래의 자기 책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도 잃어버리고 뒤늦게 후회하며 스팸메일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매번 열어본다. 

집안도서관은 매일같이 우편함을 확인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우편함에 들어있을 거라곤 월초에 우송되는 청구서가 고작이기에 그 기회는 한 달에 한 번 뿐인걸 알면서도 남자는 매일같이 우편함을 확인한다. 갑자기 남자의 외로움이 왈칵 느껴졌다. 그 달의 중순깨에 접었기 때문에 아직도 보름 이상이나 기다려야 청구서는 도착할 터인데 오늘도 남자는 우편함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우편함 안에는 짙은 노란색의 커다란 하드커버 책이 얌전히 들어 있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는 상황에서 남자는 기다렸다는듯이 책을 꺼내어 집에 들고 들어간다. 책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누군가가 나에게 우편함을 열었을 때 발견하는 무언가를 보냈다는 게 중요하다. 남자에게 집착증이 있을 수도 있고, 지독한 고독감을 견디는 중임을 상상할 수도 있다. 현대인 누구나가 조금씩은 이 남자와 같지 않을까. 누군가가 나를 지켜봐주고, 나에게 선물을 주고, 내 외로움의 시간을 잠시나마 덜어주기를 바라는 그런 간절함 말이다. 책을 들고 집으로 향하다 우편함을 청소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한 남자는 돌아서서 우편함을 다시 연다. 그순간 노란 책이 또 한 권 들어있음을 발견한다. 환상의 세계와 남자가 접한 것이다. 남자는 놀라지 않는다. 믿지 않고 회의했던 가상도서관의 남자와 달리 집안도서관의 남자는 놀라지 않고 집안으로 책 두 권을 갖다놓는다. 그리고 또 우편함을 열고 책 한 권을 꺼내고, 반복한다. 우편함을 기다리던 남자에게 이같은 선물이 또 어디 있으리. 책을 들여놓는데 집중한 남자는 수도없이 쏟아지는 책들을 집으로 옮긴다. 급기야 공간이 부족해지자 집안의 가재도구를 내다버린다.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는데 남자는 흥분한다. 책을 왜 그렇게 집안에 들이지 못해서 안달인걸까. 우스꽝스런 남자의 행동이지만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팔천삼백다섯 권의 책을 집안에 들인 남자는 그제야 일을 멈췄고, 그 웅장함에 감격했다. 쓰레기를 집안에 모으는 정신병자 할머니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무언가를 모으는 편집증이라면 차라리 쓰레기가 낫지 않을까. 읽지도 않을 책을 저렇게 쌓아올린다니,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다. 쓰레기를 집안에 모으는 할머니의 경우는 쓰레기에 온정을 느껴 애지중지하는거라 쓰레기가 대접받는 느낌이어서 할머니는 안쓰럽지만 쓰레기가 불쌍하다 생각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책으로 집안을 도배한 남자의 경우, 집안에 책들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책은 여러 명이 나눠서 읽는 것이 책의 존재이유로서는 최상일텐데 저렇게 한 집에 감옥처럼 갇혀있다니..책이 누군가의 손으로 가기 전에 책 창고에 그득한 책들을 보면서 누군가의 집에 갈 준비를 하고 행복해하고 있을 책과는 달리 저 남자네 집의 책은 너무 불쌍해보였다. 흥분한 남자가 퇴근했을 때 환상과의 접점이 풀려서 집안의 책이 싹 없어졌으면 좋겠다, 라고 바래본다.   

불꺼진 도서관을 볼 때마다 책들이 잠들어있는 도서관의 밤은 어떤 느낌일까, 한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불꺼진 건물에 들어가는 느낌은 색다르다. 저녁 운동을 마치고 다시 가방을 가지러 약국에 들르는 경우 껌껌한 공간에 작은 불 하나 켜고 들어올 때, 밤이 주는 긴장감을 느낀 적이 있다. 정상적이지 않은 근무시간 이외의 시간에 그 공간에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묘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 공간이 도서관이라면 그 긴장감은 더 커지겠다. 야간도서관에서는 또 어떤 환상의 접점이 일어날까. 조란은 지옥도서관, 초소형 도서관, 위대한 도서관을 차례로 구경시켜준다. 삶에서 이런 잠시의 환상에 접어들면서 그 접점의 순간을 즐겨보고싶다면, 이 책의 도움을 얻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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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7-0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안도서관 부분을 읽으면서 그 책들을 그는 다 읽나요? 라고 물으려 했는데 읽지 않는다고 말씀해주시네요. 문득 집안에 팔천삼백다섯권의 책이 있는 장면은 대체 어떨까 싶어서 상상해 보는데 좀처럼 그림이 그려지질 않아요. 그러나 그 책들은 모두 다른 종류의 책인거죠? 저도 팔천권의 책을 집에 쌓아두고 싶어요. 그리고 매일 사람들에게 놀러오라고 하고 매일 그중에 두세권을 꺼내서 선물로 안겨주고 싶어요. 이거 읽어봐, 이거 좋아, 하면서요. 그러나 그러려면 그 팔천권의 책들은 모두 제가 읽은 책들이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사람에 따라서 적당히 알아서 추천해주죠.

하루에 한권은 벅차고 한달에 한권쯤 제 우편함에도 제가 알지 못하는 기대하지 않았던 책들이 들어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기분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달사르 2011-07-15 22:48   좋아요 0 | URL
팔천삼백다섯권의 책이 모두 같다면 그야말로 지옥이겠지요? 게다가 책을 읽기는 커녕 건드리지도 못하게 벽을 둘러가며 꽉 채워놓았으니 말입니다.

하하. 다락방님의 상상을 들으니 지옥이 갑자기 멋진 공간으로 바뀌는 듯 합니다. 다락방님이 모두 읽은 팔천권의 멋진 책, 놀러오는 친구들, 나눠주는 책들. 와..저도 그 공간에 초대받아서 가고 싶습니다. ^^

다음에는 제가 다락방님 우편함에 기대하지 않던 책 한 권, 넣어드릴께요. ^^ 고마워요. ^^

pjy 2011-07-0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약 매일같이 우편함에 책이 한권씩 들어있다면? 첨엔 우와~~ 하겠지만 곧, 좁은 집안을 한탄할 것이며, 독서 속도에 맞지 않게 책이 들이닥치는 상황이나, 특히나 취향에 맞지않으면 책선정 기준에 대해 불평하게 될 듯 싶습니다^^; 원래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이 잘 안납니다-_-;
우편함을 열어보던 그 남자가 다른 사람의 우편함에 책을 넣어주는 그런 센스가 생기길 바라는건 오지랖이 넓은건가..하고 생각해봅니다요....

달사르 2011-07-15 22:52   좋아요 0 | URL
ㅎㅎ 맞지여? pjy님의 말씀이 정답같애요. 기왕 책을 주려면 책 읽는 속도에 맞춰서, 그리고 원하는 종류의 책을 주는 게 맞지요.
와~ 어쩜 그런 멋진 생각을!! 다른 사람의 우편함을 책을 넣어주다니요. 그런 멋진 생각이 떠오르는 pjy님은 더 멋진 사람!
 

책 제목, 환상도서관. 도서관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며 책 냄새에 어린 추억이 있는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아니 그런 유년기가 없이도 성인이 되어서 도서관에서 어떤 류의 기쁨을 맛봤던 사람이라면 책 제목에 끌려서 한 번쯤 접함직한 책이다. 여섯 부류의 환상적인 도서관을 읽으면서 낯선 느낌의 이름을 가진 저자에 관심이 생겼다. 책 말미에 저자와의 인터뷰가 있다. 저자의 이름은 조란 지브코비치. 제 3세계국가에서 2003년 환상문학대상을 거머쥔 사람이다. 세계적인 상이니만치 유명한 각종 환상문학들을 대표하는 소설이겠다.

인터뷰의 내용은 제3세계국가인데다 모국어마저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힘들었던 과정을 보여준다. 국내에서 유명한 상을 탔고, 해외로 눈을 돌려 자신의 책을 국제무대에 올리고팠으나 번역상의 문제가 힘들었던 저자는 각고의 노력 끝에 좋은 번역자와 일을 하게 되어 번역까지 마쳤다. 그러나 국제시장에 나가기 위해서는 에이전트가 있어야 했고, 에이전트는 돈이 되는 류의 새로운 책의 집필을 권고하기도 했고, 작가의 미국식 새로운 이름을 요구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나라이기에 이런 일들을 작가가 겪어야 했을까? 하고 들여다보니 작가의 나라는 세르비아였다.  

 

관심이 발동해서 세르비아를 위키에 검색을 해봤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이후 벌어졌던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어떤 전쟁이든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은 사람들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가지게 된다. 보스니아 내전을 겪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사람들 속에 작가도 물론 포함되겠다. 작가가 이를 치유의 목적으로 내지는 고발의 의미로 자발적인 글쓰기가 아닌, 전세계적으로 관심거리가 된 보스니아내전을 겪은 작가이기 때문에 잘 팔리겠다, 라는 의미가 포함된 글을 청탁받는다는건, 매문 이상이 아니었기에 작가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역시 자발적 의미의 개명이 아닌 글의 판매를 위한 개명 역시 거절했다.

전쟁을 겪은 모든 작가가 전쟁관련글을 써야만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쟁 중에 느낀 바가 있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1999년 베오그라드에서의 나토공격 당시 전쟁의 복판을 경험한 조란 지브코비치는 지금도 그 당시를 잊으려고 노력 중이고, 어쩌면 그 일환으로 환상소설을 쓰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77일간의 나토공습동안 전기가 들어오면 컴퓨터로 글을 썼고, 전기가 끊어지면 종이에 정신없이 글을 썼다고 하니 말이다.

   
  웃음이야말로 저를 지키는 길이고, 죽음으로부터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것이죠.
 
   


공감한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은 웃음일수도, 슬픔의 공감일수도, 상처의 직시일수도, 그 무엇일 수도 있다. 본인에게 가장 맞는 방식이라면, 그럼으로써 타인의 숨은 슬픔과 공명한다거나 타인의 위로를 받는다거나 더 나아가 웃음으로 그런 슬픔을 싹 날려버린다거나 한다면 개인의 슬픔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으리. 글을 통한 작가의 위대한 힘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문학의 세계시장 진출에 도전하고 도전해서 성공한 작가에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제3세계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세계관 역시 조금더 넓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첨가해본다.

 

 

인간이 단지 자신의 영혼의 괴물들하고만 싸우는 존재인 것처럼 믿게 하는 온갖 현란한 정신사조들을 흔들고 싶은 충동이 이 글을 쓰게 했다. 


 


변두리가 중심을 구할 것이다, 라는 제목의 글에 대한 작가의 발문 일부이다. 환상도서관에 대한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바로 떠올랐다. 어떤가. 연결지점이 발견되는가. 나는 조란 지브코비치가 다음 번에 보스니아 내전에 관한 글을 쓴다면, 기뻐하면서 기꺼이 독자가 될 생각이다. 조란 지브코비치의 글로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세는 내전에 관해서든 환상소설에 관해서든 마찬가지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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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의 방문>  
아직 아무도 방문해보지 않은 문장의 방문을 문득
받는 시인은 얼마나 외로울까,
문득 차 안에서
문득 신호들을 건너다가
문득 아침 커피를 마시려 동전을 기계 속으로 밀어넣다가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황당할까?

아주 어린 시절 헤어진
연인의 뒷덜미를 짧은 골목에서 본 것처럼
화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가난한 연인이 절임 반찬을 파는
가게 등불 밑에 서서
문득, 그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아릴까?

가는 고둥의 살을 빼어 먹다가
텅 빈 고둥 껍질 속에서 기어나오는
철근 마디로만 남은 피난민 거주지
다시 솟아오르는 폭탄을 보다가
문득,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쓰라릴까, 혹은

부드러운 바위를 베고 아이야 잘자라, 라는
노래를 하고 있던 고대 샤먼이
통곡의 거리로 들어와
부패한 영웅의 사진을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옛 노래를 잊어버린 시인이
그 문장의 방문을 받을 때
세계는 얼마나 속수무책일까?

블로그활동을 하다보면, 어떤 에피소드가 생기거나 재미있는 거리가 생기거나 사소한 삶의 성찰이 생길 때 '아! 빨리 글로 옮겨야지' 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올린 글이 다른 블로그 친구들의 빵 터지는 댓글을 주르륵 달게 되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생긴다. (한때 활발했던? 타 블록 활동 시절 이야기. 헤^^ ) 예상을 벗어나 별 반응이 없을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럴 경우에조차도 다음 번엔 지양하게 되므로 마찬가지로 뿌듯함은 남는다.

개인 블로거의 이런 사소한 경험담과 시인이 느끼는 '문장의 방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문장을 길게 써서 장편소설을 만들든 엑기스만을 추려서 시를 만들든간에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글에는 주제가 있기 마련이다. 드러내놓거나 숨겨놓거나 아예 감춰놓는 경우에 상관없이. 그 주제가 개인적인 사변에 그치면 개인 블로거의 에피소드 글이 될 것이고, 그 주제가 사변을 뛰어넘어서 통시적인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그 무언가에 도달한다면 그 글은 더이상 개인 블로거의 글이 아니라 예비 작가의 글이라 볼 수 있겠다. 굳이 등단했니 안 했니를 따질 필요없이 뛰어나게 우수한 글은 여기 알라딘에서도 꽤 볼 수 있다. 글의 질감이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만져질듯한 느낌의 글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 예비작가의 범주에 들어가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의 글쓴이가 느끼는 '문장의 방문'은 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리뷰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리뷰를 쓰고자할때 표준적인 모범답안은 존재할 것이다. 개략적인 줄거리를 어느정도 넣어주고, 이 지점에서는 감동의 포인트를 조금 높여주고, 또 어느 지점에서는 약간의 비평을 넣어주고 식의. 그러나 이 모범답안은 너무나 모범적이어서 개성이 소멸되는 부작용이 있다. 색깔이 사라진 리뷰는 잘 쓴 리뷰임에는 분명하나 시간이 흘렀을 때 누가 쓴 리뷰였는지 읽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게 되거나 흐릿하게 된다. 대신 위의 모범답안에서 벗어나나 자신이 감동받은 지점을 솔직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리뷰를 쓰는 사람의 경우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그 책을 떠올리면 그 리뷰가 같이 떠오른다거나, 어쩌면 리뷰가 먼저 떠오를 수도 있는 그런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이 양자간의 차이는 우선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의 강도세기가 있겠다. 이 솔직함은 스스로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정도의 것이어서 나조차도 솔직하다, 라고 섯불리 말하기는 어렵지만 계속 꾸준하게 스스로의 솔직함에 대해 탐구를 하다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램은 있다. 또 다른 차이는 뭐가 있을까. 책을 읽는 이유..같은 것도 해당이 될까. 김훈은 책에는 길이 없다, 라고 하지만 김훈이 책에는 길이 있다, 라고 한다고 해도 결국 김훈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같은 것일테다. 길이 없다, 는 의미일 때는 책만 에오라지 읽을 것이 아니라 책 밖의 현실도 같이 보라는 의미일테고, 길이 있다, 는 의미일 때는 책을 통해서 얻은 성찰을 들고 현실에 나아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의미일테니 말이다. 결국 책에 길이 있건 없건 길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책을 읽는 '이유'가 중요하겠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책을 읽는 것도 물론 '책을 읽는 이유'에 해당이 되겠다.

그럼 '문장의 방문'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보자. 속에서 터져나오는 그 무언가를 주체할 수 없어 글을, 시를 써야만 되는 일군의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 '문장의 방문'은 흔하지 않을 터이다. 고은 시인처럼 자연의 바람이 그대로 시인에게 투과되는 몇 몇 천재적인 존재를 제외하고 말이다. 시인들은 어떤 형식으로 문장의 방문을 맞이할까. 문장의 방문은 과연 똑똑, 노크라도 하고 시인을 찾아올까. 아니면 무방비의 시인에게 그냥 저돌적으로 들이닥칠까. 불시에 들이닥친 문장의 방문에 시인은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리고 얼마나 짜릿할까. 짜릿함이란 자고로 당황스러움이 동반되어야 맛이다. 스릴있는 짜릿함에 당황해하며, 입꼬리가 귀로 슬며시 넘어가는 시인의 '문장의 방문'기를 상상해본다.

시인은 일상에서, 일상 밖에서 아름다운 언어를 길어올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언어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그 언어의 생명력은 길지 못해 발 달린 인어의 생명 만큼이나 짧아질 것이다. 똑같은 언어를 발음하더라도 입 밖에 내는 자의 마음에 따라 듣는 이의 느낌이 상이하듯이, 똑같은 언어를 시어로 쓰더라도, 그 어감이 귀로 들리지 않더라도, 읽는 이는 신기하게도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읽는 이의 가슴에 와닿는 그런 느낌이 시인이 느끼는 '문장의 방문'과 같은 느낌일까.

시인의 외로움, 시인의 황당함, 시인의 가슴아린 저릿함, 시인의 쓰라림은 세상과 공명하는 시인의 감각이겠다. 이런 감각을 따라 느끼고 싶다. 속수무책인 세계는 또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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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특별판)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1.
구석기인의 눈으로 21세기를 들여다보면 어떨까. 내지는 22세기의 미래에서 현재로 여행을 오면 또 어떨까. 불과 십 년의 세월만 흘러도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초스피드를 자랑하는 현대에서 허수경은 머나먼 과거, 혹은 가까운 미래에서 현재까지의 거리만큼이나 저만치 멀리 있다. 멀리 있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시인이겠다만.

아직 야만은 시작되지도 않은 거라고 그가 말할 때 그 수많은 야만보다 오래전에 화석이 된 야만이 더 무서우냐고 물을 때
<그러나 아직 당신이 오지 않았는데 고생의 한 남자가>

유전인자 관리하던 실험실도 잠기고 그 안에서 태어나던 늑대들도 잠기고
<나의 도시>

어린 새들은 시간에 쫓기며 하늘을 건너간다 태양의 손가락 사이에 든 시간 날개 속에 시간을 집어넣느라 바람은 깃털 속에 자리를 잃었다.
..
시간들은 역사에 들어가지 않은 파편, 파편의 시간 속에 일그러진 자연
<바다 곁에서의 악몽> 

시간을 잘라 만든 혁대를 목에 감고 죽은 테러리스트가 살던 감방 안에서 자라던 작은 백합의 뿌리는 세계를 버티는 나무처럼 테러의 주검을 견뎌내고 있었어
아주 어린 중세가 대륙 저편에서 현대처럼 활개를 치고 있네
<거짓말의 기록>
 

허수경은 시인임과 동시에 고고학자이다. 두 개의 직업이 가지는 매력을 그는 시에서 풀어놓는다. 그는 발굴현장에서 과거의 것들과 조우할 때 어떤 생각을 가질까. 그는 아마도 시간과 대화를 하지 않을까. 우리네 과거에 존재했음이 분명한 그 어떤 것들과 마주칠 때, 과거와 미래가 스스로와 연결되어 있지만 현재만을 생각하고 사는 우리네와는 다른 그 어떤 감각이 그의 속에서 일깨워지지 않았을까. 그래서일까. 허수경의 시는 억겁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도 그 색을 잃지 않는 원시 구석기의 천연칼라빛 동굴벽화를 느끼게 해준다. 허수경은 또한 미래의 시간에서 날아와 생의 무상함과 대비되는 자연의 장엄을 보여주기도 하고, 참혹할 듯한 인류의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이 둘은 따로 있지 않고, 마구 섞인다. 그래서 허수경은 과거와 미래를 종횡무진한다. 이 느낌은 서로 맞물려서 구석기 동굴과 22세기 미래가 동시성을 가지고 현재의 내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허수경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사는 여자 같다. 아니, 모든 인류는 그러하겠다. 단지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두터운 과거의 퇴적층을 밟고 현재를 사는 우리는 한 발짝 미래가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또한 살아갈 수 있지만 과거와 미래의 감각을 잘 느끼지 못한다. 허수경같은 예민한 시인이 있기에 그나마 간접적으로 이런 감각을 '시'를 통해 우리들은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애
<수수께끼>

그는 현재 또한 세분해서 여러 곳을 동시에 산다. 그는 한국에서도 살고 있고, 독일에서도 살고 있다. 몸이 존재하는 곳만이 현재 사는 곳은 아니다. 태어났고 한때 살았던 한국이란 곳은 그에게는 여전히 지금도 살고 있는 공간이다.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숱한 이산자들과 같이. 그러나 그는 이제 더이상 고향만을 그리워하지는 않는 듯하다. 고향을 넘어서서 고향으로 상징되는 전체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는 그 슬픔의 감정까지도 겪게 되는 것이리. 그의 이런 정서의 망을 서영채는 집중하고 있다. 발문을 하신 서영채는 스물 몇 살에 이미 '주모'의 마음을 가진 허수경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 또한 알고 있다.그래서 작가의 이번 시집에 실린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에서 나오는 '향수'를 대표하는 나비와 잠자리에 집중을 했다. 서영채는 그 정서의 망의 존재 이유를 우리 마음의 보호막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망 너머에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어떤 무시무시한 것이 있다. 잠자리의 고향에 있는 그 무엇, 천상이거나 지하거나 우리의 삶의 원리나 정서의 한계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우리가 그것을 보거나 겪어버린다면 더이상 우리 마음의 삶뿐 아니라 몸의 삶도 불가능하게 될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삶 그 자체의 통렬한 허무감과도 같은 것이겠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정체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시를 통해 감각하게 되는 거미줄 같은 정서의 망이란, 바로 그 무시무시한 어떤 것으로부터 우리를 차단시켜주는 보호막으로 자리잡고 있다. 
 
   



2.
애니미즘이라 지칭해도 될 정도로 허수경의 시에서는 인간 아닌 것들이 인간과 동급으로 존재한다. 과거현재미래가 연속된 시간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 속에서 언제든 현재로 회귀될 수 있는 것처럼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 혹은 자연까지도 허수경에게는 똑같이 그저 자연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풍경'으로 존재한다. 천년의 시각으로 본다면, 만년을 늙어가는 산의 마음으로 본다면, 가능하겠다.

국수 소스를 끓이던 토마토는 나를 올리브기름으로 볶았다. 일생 동안 몇 개의 토마토가 만찬을 동반했던가...
자연 앞에서 식욕을 느낄 때 나는 생물이다 그런데 저 푸른 초장은 나보다 더 많이 자연을 퍼먹는다 양 때들이 태양을 향하여 한꺼번에 방귀를 뀔 때 태양은 대양을 건너가는 검은 배에 매달린 전구처럼 흔들린다
<바다 곁에서의 악몽>

21세기의 새들은 대륙을 건너다가 선술집에 들러 한잔했지
21세기의 모래들은 대륙과 대륙에 새 집을 짓다가 스시집에 들러 차가운 생선의 심장을 먹었어
<비행장을 떠나면서>

까르륵거리며 새들은 학교에서 돌아오고
도르륵거리며 다람쥐들은 철근공사판에서 돌아오는 나날이었지요
<추운 여름에 받은 편지>  



3.
허수경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예사로 넘나든다. 그에게는 그 경계가 없는 듯 보인다.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여행을 한다. 그 피할 수 없는 '사실'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외면을 당하는데 생이 소멸되는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리. 아니 어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의 감각이 마지막 순간보다 더 괴로울 수도 있겠다. 고고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머나먼 과거의 '죽음'과 매순간 마주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까. 과거의 죽음을 다시 들춰내서 먼지를 털어내고, 옛 영광의 그림자를 햇볕에 비춰보는 것일까. 

삶으로 머리칼을 묶고 죽음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도 모자라
<저녁 직전>

죽은 이들 봄 무렵이면 돌아와 혼자 들판을 걷다 새로 돋은 작은 풀의 몸을 만지면서 죽은 이들의 눈동자 자꾸자꾸 풀의 푸른 피부 속으로 들어가다 마치 숲이 커다란 눈동자 하나가 되어 그 눈동자 커다란 검은 호수가 되어 검은 호수가 작은 풀끝이 되어 나를 자꾸 바라보고 있는데 내버려두었다네, 죽은 이들이 자꾸 나를 바라보는데, 그것도 나의 생애였는데
<눈동자>

내 마음속 도저한 수압 속에서 살아가던 당신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던 그 아침
심해에 있던 기억이 표면으로 나와 헤엄을 치고 있었지,
두 시간가량, 주름상어처럼 죽음을 메고 조용히 조용히
죽을 것을 알고 헤엄을 치고 있었지.
<내 마음속 도저한 수압에서 당신은 살아간다, 내 기억이여, 표면으로 올라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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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5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2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2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장마비다. 비 오늘 날은 늘 기분이 좋았다. 들떴던 기분을 가라앉혀줘서 좋았고, 침울한 기분에는 동반자가 되주어서 좋았다. 젖을락 말락 가랑비는 간질거려서 좋았고, 억수같은 장대비는 시원해서 좋았고, 몰아치는 태풍은 엄청난 위력에 대견함과 겸손함이 생겨서 좋았다. 그런데, 이번 주는 내도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리는 비가 싫어졌다. 처음 있는 일이어서 내 감정을 눈치챘을땐 무척 당황스러웠다. 평생 애인 같은 느낌일줄 알았던 비가 싫어지기도 하다니 말이다. 물론, 여행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은 탓도 있다. 운동을 하면 조금 회복되는 느낌인데 그런 운동을 내리는 비 때문에 못하니 신경질나기도 할 터이다. 내 뜻대로 안되는 사람 감정에 마음 상한 것도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비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고작.. 

내 사랑은 고작..  

'비'에 대한 내 변덕을 알아차리면서 내 주제를 알았다고나 할까. 나는 고작..그렇고 그런 '인간'인 것을 알았다고나 할까. 천년의 세월을 한자리에 있는 바위의 정숙함도 모르고, 하늘에서 떨어져 메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시며 들어가는 비의 부드러움도 모르고, 고작 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애꿎은 비에다 화풀이만 해댄 것이다. 그것도 늘 그 존재에 감사해하는 비에다가! 어리석기 그지없는 하루살이 삶이로구나. 

아침에 출근을 하고보니 오늘도 종일 비가 올 태세다. 태풍이 몰아치는데 비가 동반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간만에 조용한 일요일 근무가 될 듯하다. 음악도 틀지 않고, 빗소리를 가만가만 들었다. 뒤죽박죽 엉망이었던 마음이 사르르 가라앉는다. 어제 하루 내 못된 행동들에 상처받았을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이제서야 드러난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왠 남자가 약국을 들어선다. 화상환자다. 무릎에 화상을 입었는데 집에 굴러다니던 접착형 메디폼으로 자가치료를 한다고는 했는데 뭐가 좀 이상하다며 오셨다. 환부를 들여다보니 상태가 별로다. 몇 일간 생으로 고생만 하시고 치료는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다. 화상을 입었을 때는 우선 흐르는 물에 환부의 열을 식히는 것부터해서, 리도가제를 붙여서 열독을 내리는 것까지 설명을 해주고, 환부에 화상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리고 접착형 메디폼 말고 좀 두터운 2미리짜리 메디폼을 붙여주고, 그 위에 반창고격인 픽싱롤까지 덧대주었다. 남자는 화상을 입었음에도,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오늘 경기가 있다면서 다리를 요리조리 움직여보더니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남자가 보기에도 내 처치가 대단히 만족스러운 눈치다. 그럼..내가 경력이 몇 년인데..컵라면을 먹는데도 물 붓다가 팔에 부어버려 화상 입는 사람인데..화상을 입지 않으면 요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화상경력이 좀 된다고 말을 해줬더니 남자가 웃는다. 몇 십분을 문을 연 약국을 찾아다녔다며 문 열어줘서 고맙다고 하고, 상처 치료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남자는 다시 쏟아지는 비 속으로 나갔다. 쏴아아~ 빗소리가 청량하게 들린다.  

마음이 안 좋은 날, 누군가를 치료해주게되면 내 다친 마음까지 같이 치료되는 느낌이다. 늘 받는 느낌이지만, 매번 고마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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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6-2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갑작스런 변심은 아니구요~~ 원래 집에서 놀면서 비올때! 부침개먹는 그런 비오는 날만 좋아하는 그런~~
착실했던 연인이신 달사르님보다야 참 변덕스러운 애인?인거죠^^;
화상과 요리는 절친인거죠ㅋ 어찌나 피부가 얇은지 명절이나 제삿날, 생신날 등등 본격적으로다가 전을 부쳐야되면 기름이 튀어서가 아니라 기냥 열기에 얼굴도 뎁니다... 여름엔 필수적으로다가 가재손수건 사용해서 땀을 찍어서 닦고요~ 심하면 노란화상약이 가제에 묻어있는 그거 (이름은 모름@@;) 볼따구에 붙이고 그럽니다.. 저 쫌 덴뇬이랍니다*^^*

저희동네에 달사르님처럼 친절하고 박식하신 약사님이 있었는데요~ 재개발재건축어쩌구해서 약국이 없어지면서 겸사겸사 은퇴하셔서 넘 아쉬워요~

달사르 2011-06-29 11:18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맞아요 맞아. 화상과 요리는 절친! 요리에 화상이 빠지면 뭐가 덜 들어간 느낌! 아고..열기에도 델 정도면 완전 요리의 달인이신데요? ^^ 평소에 매일같이 요리를 해야하는 주부님들은 그러고보면 정말 대단한 인내력을 가진 직군인거 같애요. 안녕하세요 pjy님. 만나서 반갑습니닷! 반갑게 내리는 비처럼 반갑네요 ^^

아...재개발되면서 단골약국이 없어졌군요. 저희 동네에도 지금 재개발문제 때문에 비슷한 경우가 생겨서 근처 약사님들이 많이 곤란해하시는걸 봤어요. 재개발이라는게 참..

2011-06-29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0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