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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특별판) ㅣ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1.
구석기인의 눈으로 21세기를 들여다보면 어떨까. 내지는 22세기의 미래에서 현재로 여행을 오면 또 어떨까. 불과 십 년의 세월만 흘러도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초스피드를 자랑하는 현대에서 허수경은 머나먼 과거, 혹은 가까운 미래에서 현재까지의 거리만큼이나 저만치 멀리 있다. 멀리 있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시인이겠다만.
아직 야만은 시작되지도 않은 거라고 그가 말할 때 그 수많은 야만보다 오래전에 화석이 된 야만이 더 무서우냐고 물을 때
<그러나 아직 당신이 오지 않았는데 고생의 한 남자가>
유전인자 관리하던 실험실도 잠기고 그 안에서 태어나던 늑대들도 잠기고
<나의 도시>
어린 새들은 시간에 쫓기며 하늘을 건너간다 태양의 손가락 사이에 든 시간 날개 속에 시간을 집어넣느라 바람은 깃털 속에 자리를 잃었다.
..
시간들은 역사에 들어가지 않은 파편, 파편의 시간 속에 일그러진 자연
<바다 곁에서의 악몽>
시간을 잘라 만든 혁대를 목에 감고 죽은 테러리스트가 살던 감방 안에서 자라던 작은 백합의 뿌리는 세계를 버티는 나무처럼 테러의 주검을 견뎌내고 있었어
아주 어린 중세가 대륙 저편에서 현대처럼 활개를 치고 있네
<거짓말의 기록>
허수경은 시인임과 동시에 고고학자이다. 두 개의 직업이 가지는 매력을 그는 시에서 풀어놓는다. 그는 발굴현장에서 과거의 것들과 조우할 때 어떤 생각을 가질까. 그는 아마도 시간과 대화를 하지 않을까. 우리네 과거에 존재했음이 분명한 그 어떤 것들과 마주칠 때, 과거와 미래가 스스로와 연결되어 있지만 현재만을 생각하고 사는 우리네와는 다른 그 어떤 감각이 그의 속에서 일깨워지지 않았을까. 그래서일까. 허수경의 시는 억겁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도 그 색을 잃지 않는 원시 구석기의 천연칼라빛 동굴벽화를 느끼게 해준다. 허수경은 또한 미래의 시간에서 날아와 생의 무상함과 대비되는 자연의 장엄을 보여주기도 하고, 참혹할 듯한 인류의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이 둘은 따로 있지 않고, 마구 섞인다. 그래서 허수경은 과거와 미래를 종횡무진한다. 이 느낌은 서로 맞물려서 구석기 동굴과 22세기 미래가 동시성을 가지고 현재의 내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허수경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사는 여자 같다. 아니, 모든 인류는 그러하겠다. 단지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두터운 과거의 퇴적층을 밟고 현재를 사는 우리는 한 발짝 미래가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또한 살아갈 수 있지만 과거와 미래의 감각을 잘 느끼지 못한다. 허수경같은 예민한 시인이 있기에 그나마 간접적으로 이런 감각을 '시'를 통해 우리들은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애
<수수께끼>
그는 현재 또한 세분해서 여러 곳을 동시에 산다. 그는 한국에서도 살고 있고, 독일에서도 살고 있다. 몸이 존재하는 곳만이 현재 사는 곳은 아니다. 태어났고 한때 살았던 한국이란 곳은 그에게는 여전히 지금도 살고 있는 공간이다.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숱한 이산자들과 같이. 그러나 그는 이제 더이상 고향만을 그리워하지는 않는 듯하다. 고향을 넘어서서 고향으로 상징되는 전체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는 그 슬픔의 감정까지도 겪게 되는 것이리. 그의 이런 정서의 망을 서영채는 집중하고 있다. 발문을 하신 서영채는 스물 몇 살에 이미 '주모'의 마음을 가진 허수경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 또한 알고 있다.그래서 작가의 이번 시집에 실린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에서 나오는 '향수'를 대표하는 나비와 잠자리에 집중을 했다. 서영채는 그 정서의 망의 존재 이유를 우리 마음의 보호막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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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 너머에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어떤 무시무시한 것이 있다. 잠자리의 고향에 있는 그 무엇, 천상이거나 지하거나 우리의 삶의 원리나 정서의 한계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우리가 그것을 보거나 겪어버린다면 더이상 우리 마음의 삶뿐 아니라 몸의 삶도 불가능하게 될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삶 그 자체의 통렬한 허무감과도 같은 것이겠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정체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시를 통해 감각하게 되는 거미줄 같은 정서의 망이란, 바로 그 무시무시한 어떤 것으로부터 우리를 차단시켜주는 보호막으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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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니미즘이라 지칭해도 될 정도로 허수경의 시에서는 인간 아닌 것들이 인간과 동급으로 존재한다. 과거현재미래가 연속된 시간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 속에서 언제든 현재로 회귀될 수 있는 것처럼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 혹은 자연까지도 허수경에게는 똑같이 그저 자연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풍경'으로 존재한다. 천년의 시각으로 본다면, 만년을 늙어가는 산의 마음으로 본다면, 가능하겠다.
국수 소스를 끓이던 토마토는 나를 올리브기름으로 볶았다. 일생 동안 몇 개의 토마토가 만찬을 동반했던가...
자연 앞에서 식욕을 느낄 때 나는 생물이다 그런데 저 푸른 초장은 나보다 더 많이 자연을 퍼먹는다 양 때들이 태양을 향하여 한꺼번에 방귀를 뀔 때 태양은 대양을 건너가는 검은 배에 매달린 전구처럼 흔들린다
<바다 곁에서의 악몽>
21세기의 새들은 대륙을 건너다가 선술집에 들러 한잔했지
21세기의 모래들은 대륙과 대륙에 새 집을 짓다가 스시집에 들러 차가운 생선의 심장을 먹었어
<비행장을 떠나면서>
까르륵거리며 새들은 학교에서 돌아오고
도르륵거리며 다람쥐들은 철근공사판에서 돌아오는 나날이었지요
<추운 여름에 받은 편지>
3.
허수경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예사로 넘나든다. 그에게는 그 경계가 없는 듯 보인다.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여행을 한다. 그 피할 수 없는 '사실'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외면을 당하는데 생이 소멸되는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리. 아니 어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의 감각이 마지막 순간보다 더 괴로울 수도 있겠다. 고고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머나먼 과거의 '죽음'과 매순간 마주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까. 과거의 죽음을 다시 들춰내서 먼지를 털어내고, 옛 영광의 그림자를 햇볕에 비춰보는 것일까.
삶으로 머리칼을 묶고 죽음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도 모자라
<저녁 직전>
죽은 이들 봄 무렵이면 돌아와 혼자 들판을 걷다 새로 돋은 작은 풀의 몸을 만지면서 죽은 이들의 눈동자 자꾸자꾸 풀의 푸른 피부 속으로 들어가다 마치 숲이 커다란 눈동자 하나가 되어 그 눈동자 커다란 검은 호수가 되어 검은 호수가 작은 풀끝이 되어 나를 자꾸 바라보고 있는데 내버려두었다네, 죽은 이들이 자꾸 나를 바라보는데, 그것도 나의 생애였는데
<눈동자>
내 마음속 도저한 수압 속에서 살아가던 당신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던 그 아침
심해에 있던 기억이 표면으로 나와 헤엄을 치고 있었지,
두 시간가량, 주름상어처럼 죽음을 메고 조용히 조용히
죽을 것을 알고 헤엄을 치고 있었지.
<내 마음속 도저한 수압에서 당신은 살아간다, 내 기억이여, 표면으로 올라오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