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도서관
조란 지브코비치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조란 지브코비치의 도서관은 모두 환상도서관이다. 그러나 결코 몽환적이거나 환상적이지 않다. 어떤 문을 열었을 때 내지는 어떤 책을 펼쳤을 때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초대 받아가는 일 같은 건 없다. 조란의 도서관은 그저 현실에서 잠시 몽상을 하거나 상상에 그치는 정도의 접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 몽상은 누구나 한 번 쯤 생각해 봄직한 것들이어서 그래, 나도 이런 생각 했더랬어, 와 같은 공감을 독자로부터 얻어낼 수 있으며 또한 환상도서관은 현실과 아주 미묘한 조금의 차이만을 가질 뿐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환상은 그 순간에는 빠져들기도 하나, 책을 덮고나면 그 괴리감에 되려 사람을 현실과 더 멀어지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조란이 독자에게 바라는 것이 무언지 알거 같았다. 조금의 웃음, 조금의 익살이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것처럼 조란의 환상도서관도 그러한 역할을 하기를 작가는 바라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요새는 이메일을 잘 쓰지 않는 추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길이가 있는 문장의 오고 감에는 이메일이 단연 으뜸이다. 게다가 요즈음의 작가들은 대부분 이메일을 사용할 것이다. 곧 계정은 노출될 것이고 잡다한 스팸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스팸을 지우면서 신경질도 낼 것이다. 그러다 문득, 혹시 진짜 내게 보내온 메일이 스팸으로 오인되어 버려지는 경우는 없을까, 란 염려도 될 것이다. 그순간 조란의 상상력은 발동되고 조란의 환상도서관에 불이 켜진다. 나는 언젠가 호기심에 스팸인줄 알면서도 메일을 죄다 열어본 작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즉석만남, 야한동영상무지많아요, 등등. 나는 그런 스팸을 단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기에 작가의 말이 신기하게 들렸다. 아, 그런거 열어보는 사람도 있구나..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작.가.라면? 작가의 호기심은 일반인의 호기심을 넘어설터. 작가의 그런 호기심이 바탕이 된다면 얼마든지 조란의 가상도서관이 만들어질 수 있겠다. 뚜껑을 열어본 가상도서관은 작가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제 겨우 3권만을 냈을 뿐인 자기에게 앞으로 최대 20권 정도의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나라면 단순하게 미래에 내가 저렇게 책을 많이 내? 라고 좋아할 것 같은데 작가는 저작권을 먼저 걱정하고 우롱당함을 기분나빠한다. 결국 환상의 세계와 잠시 접했음을 인지하지 못한 작가는 미래의 자기 책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도 잃어버리고 뒤늦게 후회하며 스팸메일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매번 열어본다. 

집안도서관은 매일같이 우편함을 확인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우편함에 들어있을 거라곤 월초에 우송되는 청구서가 고작이기에 그 기회는 한 달에 한 번 뿐인걸 알면서도 남자는 매일같이 우편함을 확인한다. 갑자기 남자의 외로움이 왈칵 느껴졌다. 그 달의 중순깨에 접었기 때문에 아직도 보름 이상이나 기다려야 청구서는 도착할 터인데 오늘도 남자는 우편함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우편함 안에는 짙은 노란색의 커다란 하드커버 책이 얌전히 들어 있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는 상황에서 남자는 기다렸다는듯이 책을 꺼내어 집에 들고 들어간다. 책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누군가가 나에게 우편함을 열었을 때 발견하는 무언가를 보냈다는 게 중요하다. 남자에게 집착증이 있을 수도 있고, 지독한 고독감을 견디는 중임을 상상할 수도 있다. 현대인 누구나가 조금씩은 이 남자와 같지 않을까. 누군가가 나를 지켜봐주고, 나에게 선물을 주고, 내 외로움의 시간을 잠시나마 덜어주기를 바라는 그런 간절함 말이다. 책을 들고 집으로 향하다 우편함을 청소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한 남자는 돌아서서 우편함을 다시 연다. 그순간 노란 책이 또 한 권 들어있음을 발견한다. 환상의 세계와 남자가 접한 것이다. 남자는 놀라지 않는다. 믿지 않고 회의했던 가상도서관의 남자와 달리 집안도서관의 남자는 놀라지 않고 집안으로 책 두 권을 갖다놓는다. 그리고 또 우편함을 열고 책 한 권을 꺼내고, 반복한다. 우편함을 기다리던 남자에게 이같은 선물이 또 어디 있으리. 책을 들여놓는데 집중한 남자는 수도없이 쏟아지는 책들을 집으로 옮긴다. 급기야 공간이 부족해지자 집안의 가재도구를 내다버린다.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는데 남자는 흥분한다. 책을 왜 그렇게 집안에 들이지 못해서 안달인걸까. 우스꽝스런 남자의 행동이지만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팔천삼백다섯 권의 책을 집안에 들인 남자는 그제야 일을 멈췄고, 그 웅장함에 감격했다. 쓰레기를 집안에 모으는 정신병자 할머니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무언가를 모으는 편집증이라면 차라리 쓰레기가 낫지 않을까. 읽지도 않을 책을 저렇게 쌓아올린다니,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다. 쓰레기를 집안에 모으는 할머니의 경우는 쓰레기에 온정을 느껴 애지중지하는거라 쓰레기가 대접받는 느낌이어서 할머니는 안쓰럽지만 쓰레기가 불쌍하다 생각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책으로 집안을 도배한 남자의 경우, 집안에 책들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책은 여러 명이 나눠서 읽는 것이 책의 존재이유로서는 최상일텐데 저렇게 한 집에 감옥처럼 갇혀있다니..책이 누군가의 손으로 가기 전에 책 창고에 그득한 책들을 보면서 누군가의 집에 갈 준비를 하고 행복해하고 있을 책과는 달리 저 남자네 집의 책은 너무 불쌍해보였다. 흥분한 남자가 퇴근했을 때 환상과의 접점이 풀려서 집안의 책이 싹 없어졌으면 좋겠다, 라고 바래본다.   

불꺼진 도서관을 볼 때마다 책들이 잠들어있는 도서관의 밤은 어떤 느낌일까, 한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불꺼진 건물에 들어가는 느낌은 색다르다. 저녁 운동을 마치고 다시 가방을 가지러 약국에 들르는 경우 껌껌한 공간에 작은 불 하나 켜고 들어올 때, 밤이 주는 긴장감을 느낀 적이 있다. 정상적이지 않은 근무시간 이외의 시간에 그 공간에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묘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 공간이 도서관이라면 그 긴장감은 더 커지겠다. 야간도서관에서는 또 어떤 환상의 접점이 일어날까. 조란은 지옥도서관, 초소형 도서관, 위대한 도서관을 차례로 구경시켜준다. 삶에서 이런 잠시의 환상에 접어들면서 그 접점의 순간을 즐겨보고싶다면, 이 책의 도움을 얻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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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7-0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안도서관 부분을 읽으면서 그 책들을 그는 다 읽나요? 라고 물으려 했는데 읽지 않는다고 말씀해주시네요. 문득 집안에 팔천삼백다섯권의 책이 있는 장면은 대체 어떨까 싶어서 상상해 보는데 좀처럼 그림이 그려지질 않아요. 그러나 그 책들은 모두 다른 종류의 책인거죠? 저도 팔천권의 책을 집에 쌓아두고 싶어요. 그리고 매일 사람들에게 놀러오라고 하고 매일 그중에 두세권을 꺼내서 선물로 안겨주고 싶어요. 이거 읽어봐, 이거 좋아, 하면서요. 그러나 그러려면 그 팔천권의 책들은 모두 제가 읽은 책들이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사람에 따라서 적당히 알아서 추천해주죠.

하루에 한권은 벅차고 한달에 한권쯤 제 우편함에도 제가 알지 못하는 기대하지 않았던 책들이 들어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기분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달사르 2011-07-15 22:48   좋아요 0 | URL
팔천삼백다섯권의 책이 모두 같다면 그야말로 지옥이겠지요? 게다가 책을 읽기는 커녕 건드리지도 못하게 벽을 둘러가며 꽉 채워놓았으니 말입니다.

하하. 다락방님의 상상을 들으니 지옥이 갑자기 멋진 공간으로 바뀌는 듯 합니다. 다락방님이 모두 읽은 팔천권의 멋진 책, 놀러오는 친구들, 나눠주는 책들. 와..저도 그 공간에 초대받아서 가고 싶습니다. ^^

다음에는 제가 다락방님 우편함에 기대하지 않던 책 한 권, 넣어드릴께요. ^^ 고마워요. ^^

pjy 2011-07-0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약 매일같이 우편함에 책이 한권씩 들어있다면? 첨엔 우와~~ 하겠지만 곧, 좁은 집안을 한탄할 것이며, 독서 속도에 맞지 않게 책이 들이닥치는 상황이나, 특히나 취향에 맞지않으면 책선정 기준에 대해 불평하게 될 듯 싶습니다^^; 원래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이 잘 안납니다-_-;
우편함을 열어보던 그 남자가 다른 사람의 우편함에 책을 넣어주는 그런 센스가 생기길 바라는건 오지랖이 넓은건가..하고 생각해봅니다요....

달사르 2011-07-15 22:52   좋아요 0 | URL
ㅎㅎ 맞지여? pjy님의 말씀이 정답같애요. 기왕 책을 주려면 책 읽는 속도에 맞춰서, 그리고 원하는 종류의 책을 주는 게 맞지요.
와~ 어쩜 그런 멋진 생각을!! 다른 사람의 우편함을 책을 넣어주다니요. 그런 멋진 생각이 떠오르는 pjy님은 더 멋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