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방문>  
아직 아무도 방문해보지 않은 문장의 방문을 문득
받는 시인은 얼마나 외로울까,
문득 차 안에서
문득 신호들을 건너다가
문득 아침 커피를 마시려 동전을 기계 속으로 밀어넣다가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황당할까?

아주 어린 시절 헤어진
연인의 뒷덜미를 짧은 골목에서 본 것처럼
화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가난한 연인이 절임 반찬을 파는
가게 등불 밑에 서서
문득, 그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아릴까?

가는 고둥의 살을 빼어 먹다가
텅 빈 고둥 껍질 속에서 기어나오는
철근 마디로만 남은 피난민 거주지
다시 솟아오르는 폭탄을 보다가
문득,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쓰라릴까, 혹은

부드러운 바위를 베고 아이야 잘자라, 라는
노래를 하고 있던 고대 샤먼이
통곡의 거리로 들어와
부패한 영웅의 사진을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옛 노래를 잊어버린 시인이
그 문장의 방문을 받을 때
세계는 얼마나 속수무책일까?

블로그활동을 하다보면, 어떤 에피소드가 생기거나 재미있는 거리가 생기거나 사소한 삶의 성찰이 생길 때 '아! 빨리 글로 옮겨야지' 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올린 글이 다른 블로그 친구들의 빵 터지는 댓글을 주르륵 달게 되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생긴다. (한때 활발했던? 타 블록 활동 시절 이야기. 헤^^ ) 예상을 벗어나 별 반응이 없을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럴 경우에조차도 다음 번엔 지양하게 되므로 마찬가지로 뿌듯함은 남는다.

개인 블로거의 이런 사소한 경험담과 시인이 느끼는 '문장의 방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문장을 길게 써서 장편소설을 만들든 엑기스만을 추려서 시를 만들든간에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글에는 주제가 있기 마련이다. 드러내놓거나 숨겨놓거나 아예 감춰놓는 경우에 상관없이. 그 주제가 개인적인 사변에 그치면 개인 블로거의 에피소드 글이 될 것이고, 그 주제가 사변을 뛰어넘어서 통시적인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그 무언가에 도달한다면 그 글은 더이상 개인 블로거의 글이 아니라 예비 작가의 글이라 볼 수 있겠다. 굳이 등단했니 안 했니를 따질 필요없이 뛰어나게 우수한 글은 여기 알라딘에서도 꽤 볼 수 있다. 글의 질감이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만져질듯한 느낌의 글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 예비작가의 범주에 들어가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의 글쓴이가 느끼는 '문장의 방문'은 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리뷰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리뷰를 쓰고자할때 표준적인 모범답안은 존재할 것이다. 개략적인 줄거리를 어느정도 넣어주고, 이 지점에서는 감동의 포인트를 조금 높여주고, 또 어느 지점에서는 약간의 비평을 넣어주고 식의. 그러나 이 모범답안은 너무나 모범적이어서 개성이 소멸되는 부작용이 있다. 색깔이 사라진 리뷰는 잘 쓴 리뷰임에는 분명하나 시간이 흘렀을 때 누가 쓴 리뷰였는지 읽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게 되거나 흐릿하게 된다. 대신 위의 모범답안에서 벗어나나 자신이 감동받은 지점을 솔직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리뷰를 쓰는 사람의 경우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그 책을 떠올리면 그 리뷰가 같이 떠오른다거나, 어쩌면 리뷰가 먼저 떠오를 수도 있는 그런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이 양자간의 차이는 우선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의 강도세기가 있겠다. 이 솔직함은 스스로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정도의 것이어서 나조차도 솔직하다, 라고 섯불리 말하기는 어렵지만 계속 꾸준하게 스스로의 솔직함에 대해 탐구를 하다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램은 있다. 또 다른 차이는 뭐가 있을까. 책을 읽는 이유..같은 것도 해당이 될까. 김훈은 책에는 길이 없다, 라고 하지만 김훈이 책에는 길이 있다, 라고 한다고 해도 결국 김훈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같은 것일테다. 길이 없다, 는 의미일 때는 책만 에오라지 읽을 것이 아니라 책 밖의 현실도 같이 보라는 의미일테고, 길이 있다, 는 의미일 때는 책을 통해서 얻은 성찰을 들고 현실에 나아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의미일테니 말이다. 결국 책에 길이 있건 없건 길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책을 읽는 '이유'가 중요하겠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책을 읽는 것도 물론 '책을 읽는 이유'에 해당이 되겠다.

그럼 '문장의 방문'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보자. 속에서 터져나오는 그 무언가를 주체할 수 없어 글을, 시를 써야만 되는 일군의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 '문장의 방문'은 흔하지 않을 터이다. 고은 시인처럼 자연의 바람이 그대로 시인에게 투과되는 몇 몇 천재적인 존재를 제외하고 말이다. 시인들은 어떤 형식으로 문장의 방문을 맞이할까. 문장의 방문은 과연 똑똑, 노크라도 하고 시인을 찾아올까. 아니면 무방비의 시인에게 그냥 저돌적으로 들이닥칠까. 불시에 들이닥친 문장의 방문에 시인은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리고 얼마나 짜릿할까. 짜릿함이란 자고로 당황스러움이 동반되어야 맛이다. 스릴있는 짜릿함에 당황해하며, 입꼬리가 귀로 슬며시 넘어가는 시인의 '문장의 방문'기를 상상해본다.

시인은 일상에서, 일상 밖에서 아름다운 언어를 길어올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언어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그 언어의 생명력은 길지 못해 발 달린 인어의 생명 만큼이나 짧아질 것이다. 똑같은 언어를 발음하더라도 입 밖에 내는 자의 마음에 따라 듣는 이의 느낌이 상이하듯이, 똑같은 언어를 시어로 쓰더라도, 그 어감이 귀로 들리지 않더라도, 읽는 이는 신기하게도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읽는 이의 가슴에 와닿는 그런 느낌이 시인이 느끼는 '문장의 방문'과 같은 느낌일까.

시인의 외로움, 시인의 황당함, 시인의 가슴아린 저릿함, 시인의 쓰라림은 세상과 공명하는 시인의 감각이겠다. 이런 감각을 따라 느끼고 싶다. 속수무책인 세계는 또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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