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환상도서관. 도서관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며 책 냄새에 어린 추억이 있는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아니 그런 유년기가 없이도 성인이 되어서 도서관에서 어떤 류의 기쁨을 맛봤던 사람이라면 책 제목에 끌려서 한 번쯤 접함직한 책이다. 여섯 부류의 환상적인 도서관을 읽으면서 낯선 느낌의 이름을 가진 저자에 관심이 생겼다. 책 말미에 저자와의 인터뷰가 있다. 저자의 이름은 조란 지브코비치. 제 3세계국가에서 2003년 환상문학대상을 거머쥔 사람이다. 세계적인 상이니만치 유명한 각종 환상문학들을 대표하는 소설이겠다.
인터뷰의 내용은 제3세계국가인데다 모국어마저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힘들었던 과정을 보여준다. 국내에서 유명한 상을 탔고, 해외로 눈을 돌려 자신의 책을 국제무대에 올리고팠으나 번역상의 문제가 힘들었던 저자는 각고의 노력 끝에 좋은 번역자와 일을 하게 되어 번역까지 마쳤다. 그러나 국제시장에 나가기 위해서는 에이전트가 있어야 했고, 에이전트는 돈이 되는 류의 새로운 책의 집필을 권고하기도 했고, 작가의 미국식 새로운 이름을 요구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나라이기에 이런 일들을 작가가 겪어야 했을까? 하고 들여다보니 작가의 나라는 세르비아였다.
관심이 발동해서 세르비아를 위키에 검색을 해봤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이후 벌어졌던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어떤 전쟁이든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은 사람들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가지게 된다. 보스니아 내전을 겪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사람들 속에 작가도 물론 포함되겠다. 작가가 이를 치유의 목적으로 내지는 고발의 의미로 자발적인 글쓰기가 아닌, 전세계적으로 관심거리가 된 보스니아내전을 겪은 작가이기 때문에 잘 팔리겠다, 라는 의미가 포함된 글을 청탁받는다는건, 매문 이상이 아니었기에 작가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역시 자발적 의미의 개명이 아닌 글의 판매를 위한 개명 역시 거절했다.
전쟁을 겪은 모든 작가가 전쟁관련글을 써야만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쟁 중에 느낀 바가 있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1999년 베오그라드에서의 나토공격 당시 전쟁의 복판을 경험한 조란 지브코비치는 지금도 그 당시를 잊으려고 노력 중이고, 어쩌면 그 일환으로 환상소설을 쓰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77일간의 나토공습동안 전기가 들어오면 컴퓨터로 글을 썼고, 전기가 끊어지면 종이에 정신없이 글을 썼다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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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야말로 저를 지키는 길이고, 죽음으로부터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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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한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은 웃음일수도, 슬픔의 공감일수도, 상처의 직시일수도, 그 무엇일 수도 있다. 본인에게 가장 맞는 방식이라면, 그럼으로써 타인의 숨은 슬픔과 공명한다거나 타인의 위로를 받는다거나 더 나아가 웃음으로 그런 슬픔을 싹 날려버린다거나 한다면 개인의 슬픔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으리. 글을 통한 작가의 위대한 힘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문학의 세계시장 진출에 도전하고 도전해서 성공한 작가에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제3세계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세계관 역시 조금더 넓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첨가해본다.
인간이 단지 자신의 영혼의 괴물들하고만 싸우는 존재인 것처럼 믿게 하는 온갖 현란한 정신사조들을 흔들고 싶은 충동이 이 글을 쓰게 했다.
변두리가 중심을 구할 것이다, 라는 제목의 글에 대한 작가의 발문 일부이다. 환상도서관에 대한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바로 떠올랐다. 어떤가. 연결지점이 발견되는가. 나는 조란 지브코비치가 다음 번에 보스니아 내전에 관한 글을 쓴다면, 기뻐하면서 기꺼이 독자가 될 생각이다. 조란 지브코비치의 글로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세는 내전에 관해서든 환상소설에 관해서든 마찬가지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