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습관도 때론 바뀐다는 걸 알았다. 책을 읽을 때의 내 습성이 바뀌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표지를 접지도 않고 읽으며, 책에 밑줄도 긋지 않고, 속지에 이름이나 날짜 등을 적지도 않는다. 그러나 2년인가 전에 밑줄이 그어져 있고 날림 글씨체로 뭐라고 잔뜩 끄적여놓은 읽던 책을 선물 받은 후, 나는 조금 바뀌었다. 지저분해 보이기만 했던 책이 왠지 멋져 보였던 것이다. 물론 책을 선물한 이가 글도 잘 쓰고 말도 잘 했으며 내 글쓰기를 봐줬던 이유도 포함되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기 생각을 거리낌없이 책 중간중간에 적어놓는 '자신감'이 제일 멋져 보였다. 은밀한 독서를 하던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오픈 독서 쪽으로 선회했다.  

처음엔 조금 힘들었다. 깨끗한 책에 자로 밑줄을 그어봤는데 으으윽..속이 너무 쓰린거다. 내 몸에 생채기를 내는 듯했다. 그래서 중단했다. 나는 역시나 책은 그저 보기만 하는 사람인가봐..그러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알게 되었고 책에 대한 조르바의 너무나 자유분방한 생각과 행동을 접하고나서 나도 조르바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책에 파묻힌 샌님 말고 책을 그저 친구 삼아 같이 한바탕 재미나게 놀고 싶었다. 난 '그리스인 조르바'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글도 끄적여놨고 낙서도 해봤다. 아! 너무 좋았다. 조르바가 나에게 "잘했어" 라고 등을 툭툭 쳐주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는 마음에 드는, 친구하고픈 책이 있으면 밑줄을 사정없이 좍좍 긋는다. 자도 대지 않고서! 아..그런데 최근의 이 멋진 책에는 밑줄을 그을 수가 없다. 왜냐면, 이 책은 빌린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밑줄을 긋고 싶은데..좋은 문구들이 너무 많은데..밑줄을 안 그으니 그 문장들과 같이 놀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답답하다. 에이! 몰라..장바구니에 담았다. ㅋ

  

 

 

 

 

 

 

  

내가 처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시인은 정현종 씨이다. 이름조차 처음 듣는 낯선 분이지만 (물론 내가 문학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일천하기 그지없는 사람이기에 그러하다. 이 분은 문학계에서 꽤, 아주 많이 유명하신 분이시다. ) 이 책의 지은이인 원재훈 시인의 정현종 씨에 대한 짧은 소개글을 읽고 나서 그의 작품이 무척이나 읽고 싶어졌다. 그는 70세도 훌쩍 넘어선, 대학에서도 퇴임하신 분인데 본인 스스로도 유명한 분이지만 고 기형도, 성석제 등의 선생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제 익명성 속으로 들어가서 생의 유유자적을 즐기고 싶어하는데 나는 이제사 그의 이름을 알게 되어 그의 '시'를 접한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 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아. 엉엉 울고 싶다. 이런 멋진 시라니..시에 홀딱 반해 이 시가 들어있는 시집을 찾아 헤맸다. 인터넷 바다에 첨벙 빠져서 운좋게 금방 시집 제목을 발견했는데, 위 시와 같은 제목의 시집이다. 얼씨구나~ 알라딘에 조회해보니 절판..허걱스..다른 사이트를 이 곳 저 곳 헤매기 시작한다. 여기도 절판, 저기도 절판..ㅠ.ㅠ 아...이래서 좋은 시집은 일찍 사야 되는 건데..앙..  

마음에 그의 시를 담아야겠다. 시인도 그의 시집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의 '시'를 내 속에 담고 있는 것을 더 좋아하겠지. 그의 아름다운 시 한 편을 감상하고 원재훈 시인과 정현종 시인, 두 시인의 대화를 계속 따라가본다.  

 

   
  니체는 우리의 삶을 견디게 하기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고 했지요. 이런 식으로 자기 삶을 견디면서 남의 삶을 견디게 하면 좋습니다. 하여간, 아주 사적인 체험과 감정, 생각이 동기가 되어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은 시이고 반대의 경우는 나쁜거라고나 할까. 이건 재능의 차이겠지요. 그래요. 김소월, 한용운과 같은 좋은 시는 많지 않습니다.  
   

 아..멋지다. 시인은 자기 삶 견디면서 남의 삶 견디게 해주는 존재라..너무 멋지다. 시인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한다. 시인에 대한 가장 정직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한 편의 시, 한 권의 소설에는 그런 대단한 능력이 있다. 당신의 시를 암송하며 삶의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라는 말을 듣는 것이 시인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리.  

 

   
 

이 비상하고 참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무'의 상태로 비워두었어요. 텅 빈 상태에서 모든 걸 보고 말하는 거지요. 자기가 없다는 거,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자기가 좋은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참되게 몰입하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무런 심리적인 계산이 없어요. 이게 우리들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요? 

 
   

구스타프 야누흐가 지은 <카프카와의 대화>를 언급하면서 정현종은 카프카란 인간을 이렇게 평한다. 카프카에게 새삼 관심이 간다. 일단 구스타프의 책을 먼저 질러서 읽어봐야겠다.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덜어내고 비우고 '흐르고 변하는 것'과 '아프고 아픈 것'들을 자기 몸으로 느끼는 것의 저릿함을 알고 싶다. 자기 자신을 '무'의 상태로 비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익히 봐왔지만, 그렇게 비운 사람이라고 정현종이 칭하는 사람인 카프카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이는 물론 정현종을 제대로 알기, 의 돌아가기 이겠다. 나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시 한 편으로 이미 정현종의 팬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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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달라요. 나는요.  

우선 '원스'같은 음악영화를 좋아하죠. 돈을 팍팍 들인 티가 나는 영화는 되려 싫어하구요, 소자본 느낌 나는 영화 좋아해요. 무엇보다 음악으로, 열정으로 승부하는 그런 영화 좋아해요. 내가 '원스'를 보고 얼마나 펑펑 울었는데요. 음..경태씨도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다구요? 뭐, 그렇담..뭐..그래도 썩 싫지는 않았지요? 예술영화는 느낌이거든요. 

아, 그리고 영화 보는 동안 팝콘 먹는 거 싫어하시는군요? 아니, 팝콘이란걸 먹으며 영화 본 적이 처음이시라구요? 몇 개 먹고 말았는데 같이 영화 본 여자가 팝콘 사달라고 졸라놓고, 그리고 태반을 먹어놓고선, 영화 끝나고 나서 그거 안 들어줬다고 삐졌대요? 참 이상한 여자네요. 자기 먹을거를 왜 남보고 들어달라고 그래요? 뭐, 나도 한때 남친에게 가방 심부름도 시켜보기도 했지만 그게 다 한때거든요. 재미없어요. 지 물건은 지가 들어야지요. 그리고, 영화관에서 나올 때 아주 큰 비닐봉지가 앞에 있잖아요? 거기에 사람들이 먹다남은거 다들 버리던데요? 지가 들기 싫었으면 거기 버리면 되었잖아요. 아까웠다면 걍 지가 들고 먹었으면 되구요. 아, 뾰족구두를 신었다구요? 그래서 다리가 아파서 양 팔에 팝콘과 콜라를 들기가 부담스러웠다구요? 그렇다면 입이 있잖아요. 뒀다 뭐해요. 좀 들어달라고 애교 섞인 말로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남자가 그걸 미리 눈치 못채고 못 들어줬다고 입이 그렇게나 댓발이나 나와있어요? 에이..연경씨도 차암..

연경씨는 얼굴도 이쁘고 몸매도 착한데, 마음씨까지 배려심 있으면서 그날따라 왜 그랬대요? 경태씨와 첫만남에서 술주정뱅이로 화한 경태씨의 작은 '실수'까지 배려해주는 깊은 마음씨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래요? 경태씨가 자꾸 비아냥거리고,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을 배려해주지 않아서 그랬어요? 그동안 서러웠던게, 차곡차곡 담아뒀던게, 그날에 모두 폭발한 거였어요? 아..그랬군요. 그럼요. 연경씨가 고작 팝콘 하나 땜에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하진 않았을 거에요. 안내하는 직원에게 눈을 부리라며 나가는 출구 이외의 장소로, 그러니까 영화를 다 봤기 때문에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장소인, 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장소로, 굳이굳이 가겠다고 길을 비켜달라고 강요를 했던 건 고작 팝콘 하나 때문이 아니었어요. 그렇죠? 연경씨 스스로도 낯이 뜨거운 걸 참았던거죠?  에유..그렇게 참고 참았는데 경태씨는 그것도 몰라주고..연경씨를 되려 타박하는 경태씨 때문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거로군요. 게다가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장소가 하필이면 사람들이 엄청 많은 극장 안이었구요..

맞아요. 더는 참을 수 없는 그런 시간이 있어요.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죠. 뭐. 그냥 폭발하게 냅두는 수 밖에요. 경태씨와 연경씨는 그 참을 수 없는 시간마저 같은 시간대였군요. 누구 한 사람, 양보가 안되는 그런 시간을 지나고 나면 다시 만나기는 힘이 들죠. 나는 내가 연경씨가 된 것처럼 상상하고 책을 읽었더랬어요. 연경씨와 나는 닮은 곳도 있었고 다른 곳도 있었죠. 연애를 시작하면 누구나가 그럴 거에요. 몇 십년동안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로 지내온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데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겠어요. 조금씩 나와 다른 타인의 여러 가지 것들을 인정하면서 연애를 하는 거죠. 그런데 그 속에 하필이면 종교가 있었군요. 후우..힘드네요.. 

연경씨는 원래 불교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했군요. 우리나라는 뭐든 종교가 개입되면 민감해져서 연애도 힘들게 힘들게 하더라구요. 저야 뭐 아무것도 아니어서 누가 뭐를 믿든 상관 안 하지만 말입니다. 단, 나를 개종시키려 드는 순간부터는 힘이 들긴 하지요. 하하. 연경씨는 그래, 경태씨를 개종시키고 싶었어요? 본인 스스로 은혜입음에 무척 감동받았나봐요. 그 순간이 벅차기도 했을까요? 그랬군요..연경씨, 그건 개인적으로 참 축복스런 시간이었겠어요. 그러나 그건 연경씨의 개인적인 축복이지 타인의 행복과는 조금 차이가 나지 않을까요? 그런 축복스런 시간을 타인과 나누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그렇게 연애하는 사람에게 개종을 권하는 식의, 당신네 교회 나와보라는 이야기는 좀 오버이지 않았을까요? 이미 한국의 종교는 다양할 때로 다양하고 그 속에서 개인의 행복추구를 위한 믿음 역시 다양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듯이 당신은 독실한 이슬람교인 역시 인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종교의 자유, 인거지요. 그런 자유로움이 있어야 연애도 아름답게 하지 않겠어요? 연애는 구속이 아니거든요. 연애를 함으로써 충만감을 느끼고 행복해지는건, 타인의 가슴을 더 넓히는 일이기 때문이거든요.  

경태씨와 연애하면서 많이 힘들었죠? 경태씨를 바꾸려해서 그래요. 사람은 쉬이 바뀌지 않아요. 그리고 애써 바꿔봤자 시들어버린 꽃, 일텐데 그런 사내가 또 눈에 차겠어요? 그러니 연경씨. 앞으로는 연애할 때 꼭 명심하자구요. 이번의 실수를 발판으로 삼아, 다음 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구요. 종교문제는 그렇게 상대방의 자유를 인정하는게 좋아요. 연경씨도 앞으로 또 언제 다른 종교로 개종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사람의 미래는 모르는 일이거든요. 아! 그렇게 말하는 내가 연애박사같다구요? 연경씨도 차암..연애박사는 이런 글 쓸 시간이나 있겠어요? 나도 그저 연애에 매번 실패하는 그런 노처녀인게지요. 내 입으로 그런 말을 차암..연경씨를 보니 동지의식이 느껴져서 쓸데없이 이런 간섭이나 하고 앉았네요. 음화화. 그치만 연경씨. 다음 번엔 잘 해봐요. 다음 번엔 성공할 거에요. 꼭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래요. 연경씨, 팟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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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을 일찍 먹었다. 평소에 즐겨먹지는 않는 죽을 먹었다. 걱정 많은 나를 위해 직원언니가 한 턱 쏜 본죽의 호박죽과 해물죽이다. 죽들과 반찬들을 주욱 늘어놓고 숟가락을 하나씩 쿡 찔러넣은 다음 개인접시에 덜어서 뷔페식으로 먹었다. 환자식인 죽을 먹는대도 속이 더부룩하다. 아마 내일의 일이 걱정되어서겠지.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눈 둘 곳이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약, 약, 약이다. 어느 한 켠, 눈을 시원하게 하는 곳이 있어 쳐다봤더니 책장이다. 주욱 훓어보다 한 지점에 눈이 멎었는데 저번에 읽다가 멈춘 시리즈 중 한 권이다. 가슴을 저리게 만들어 읽다가 그만둔 시리즈. 2권을 집어들었다. 몇 줄 읽어보니, 1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몇 줄 더 읽으니 퇴근시간이다.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집에 와서 가방을 정리했다. 통장들을 꺼내놓고, 장지갑도 꺼내놓고, 잡다한 물건들을 죄다 꺼냈다. 지갑에 카드도 한 장만 남겨놓았고, 신분증이 있는지 챙겼다. 혹시나 싶어 지갑에 지폐를 몇 장 넣으려고 지갑 안을 펼친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가 주고간 외국화폐다.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나의 미래를 그가 예비한 것일까. 외국화폐를 꺼내어 손에 잡고 하나하나 구경을 했다. 외국화폐에서는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고, 심하게 뛰던 내 심장박동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1분, 2분, 시간이 흘렀고 나는 이제 내일 차를 탈 수 있겠다,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6시가 조금 넘었다. 아침을 굶고, 물도 먹지 못하고, 준비를 마치고 차를 탔다. 운전은 언니가 했다. 외국화폐는 여전히 가방 속 지갑 안에 얌전히 들어있었다. 조금씩 불안함을 느낄 때마다 가방을 만지작거렸고 차가 톨게이트를 하이패스로 지나쳐 고속도로에 얌전히 얹혔을 때 왠지모를 자신감이 조금씩 차올랐다. 괜찮다. 외국화폐가 나를 지켜줄거야. 나는 괜찮을거야. 1시간 30 분 가량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고 파킹을 했다. 

의사와 면담 후 환자복으로 갈아입는 동안 검사순서가 정해졌다. MRI가 첫번째 검사종목이었다. MRI 검사 도중 시끄러운 소리와 밀폐감에 없던 공포증이 생겨 일 년이상 안정제를 드시는 분의 사례를 알고 있기에, 간이 작은 나는 미리부터 수면으로 신청을 했다. 검사항목을 코디하시는 분이 영어로 주사제 이름을 적더니 크게 별표를 쳐놨고, 가는 곳마다 이 분은 폐쇄공포증 있으시니 수면이다, 주의하라, 는 말을 서로간에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꽤 철저하게 하는구나, 생각을 하는동안 앞 사람의 검사가 끝이 났다. 검사 직전, 담당직원이 이것저것 물어봤다. "전에 MRI 검사 받고 놀란 적이 있으세요? 아니면 폐쇄공포증 진단 받은 적이 있으세요?"  "아니요..그저, 겁이 나서요.."  "아, 그러세요. 그럼 그냥 일단 기계 안에 들어가봤다가 무서운지 견딜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나서 수면을 선택하시는게 어때요? 어차피 수면으로 해도 완전 수면은 아니기에 시끄러운 소리가 조금은 들리거든요." 친절한 직원분의 말에 용기를 내어 그냥 해보기로 했다. 손에 외국화폐는 안 쥐었지만 내 마음의 눈에 외국화폐가 찍혀있으니 용기가 조금 났다. 기계 안에 들어갔고 감은 눈을 떴다. 눈에서 한 15센치 정도 떨어진 곳에 MRI통이 보였고 많이 갑갑했으나 다리쪽이 트였기 때문에 겁이 덜 났다. 할 수 있겠다, 고 말을 하니 머리에 헤드셋을 씌워줬고 얼굴에 보안통을 끼워줬다. 정 무서우면 말소리는 안 들리니 다리를 번쩍 들면 검사를 중단해주겠다, 라는 말까지 듣고 검사를 시작했다. 

헤드셋 밖으로 시끄러운 음악이 조금씩 들렸고 헤드셋 안으로 "검사 시작합니다. 큰소리가 나도 놀라지 마세요" 라는 말이 들려왔다. 이윽고 쿵쾅쿵쾅 소리가 온몸으로 전해졌고 심장이 박자를 맞추느라 같이 쿵쾅거렸다. 나는 악착같이 외국화폐를 떠올렸고 심장은 두근거림의 강도를 올리다가 어느순간 진정되었다. 됐다! 몇 분간 진동과 같이 울리던 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또 안내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다른 진동에 다른 소리가 들리더니 시트까지 같이 들썩거린다. 눈을 감고 놀이동산에 놀러왔다고 상상했다. 기분이 좋아진다. 무서움이 저멀리 달아나는게 보인다. 시끄럽고 조용하고를 몇 번 반복하더니 담당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끝, 은 아니었고 안심을 시키러 들어온 눈치였다. 내가 떨지 않고 있음을 확인한 담당직원이 나간 후 들려온 마지막의 소음은 그야말로 기절할 정도였다. 아! 이래서 들어왔구나. 그렇지만 내게는 외국화폐가 있어! 난 참을거야. 참을 수 있어! 결국 나는 소리를 이겼고 문이 열렸고 나는 기계 밖으로 걸어나왔다. 이겼다! 내가 나에게 이겼어! 나는 검사결과보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검사를 받아낸 내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로 검사를 순서대로 계속 받았다. 초음파, CT, 각종 검사, 검사, 검사들이 줄을 이었고 자신감 충만한 나는 씩씩하게 검사를 계속 받았다. 마지막 검사인 위내시경 차례가 왔고 나는 용기를 내어 생목으로 한다고 말을 했다. 위내시경실로 가는 길에 위내시경을 마치고 시트 위에 주욱 누워있는 검사자들이 보였다. 문득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네들을 보는 순간 수면으로 하고 싶은 약간의 욕구조차 사라졌다. 나는 저렇게 누워있기 싫다, 라는 생각이 용솟음친 것이다. 나는 나의 정신의 '의지'를 믿고야 말테다. 나는 MRI까지 맨정신으로 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나는 겁쟁이가 아니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트에 누웠고 간호사들이 내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엉덩이는 뒤로 뺀 엉거주춤 자세를 만들더디 입에 나팔모양 깔때기를 물게 한다. 뭐하는지도 모르고 물고 있었는데 관이 쑤욱, 목 안으로 들어왔다. 어, 뭐야뭐야! 놀라는 나에게 간호사들이 진정을 시킨다. 침을 삼키지 마세요. 그냥 흐르게 놔두세요....이 사람들아.. 침은 나올 생각도 안 한다구요... 켁켁거리는 나를 모른 척하고 의사는 길다란 관을 넣었다 뺐다, 한다. 관이 목구멍을 한참 지나 위까지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겨우 참을만 하다 싶으면 관을 쑥 빼내어 다시 깊숙하게 쑤셔넣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웩웩거린다. "위가 엄청 깨끗한데..검사할 필요도 없겠는데.." 의사가 한마디 한다. ㅠㅠ 

모든 검사를 마치고 나니 죽과 녹차를 직원이 가져다준다. 와..배불리, 감사하게 먹었다. 검사결과는 바로 나왔고 이상무, 라는 답을 들었다. 검사를 하는 나보다 더 걱정스런 마음으로 함께한 언니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을 굶어야하는 나를 위해 같이 아침을 먹지 않았던 언니는 이제야 배고픈 생각이 든다, 라고 말을 하며 웃었다. 돌아가는 길에 문득 차 소음이 들리지 않는걸 느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갇힌 공간을 무서워하는 나는 창문을 항상 조금씩 열어놔야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창문이 닫혀진 채로 십여분 이상이 흘렀는데도 몰랐고, 그걸 인식하고 나서도 숨이 가빠오지 않았다. MRI 검사는 이상무, 라는 검사결과와 함께 나의 공포증까지 같이 치료한 것이다.  

집에 도착 후 방에 들어오니 어제 읽다만 책이 눈에 들어온다. '타인의 증거' 나는 몇 페이지를 더 읽다가 지갑 속의 외국화폐를 꺼내서 물끄러미 쳐다봤다.

   
 

 - 이제 어떻게 한담?
-예전처럼 아침이면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자고,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면 되는 거지.
-오래 걸릴 거야.
-어쩌면 평생 동안.

 
   

  

 

 

 

 

 

 

루카스에게 엄청난 일이 생겼다. 아니 실은 그전에도 계속 엄청난 일들이 생기고 생겼다. 그러나 루카스는 견딜 수 있었다. 그의 쌍둥이 클라우스가 그 모든 일을 함께 했기 때문에.  

이제 클라우스는 가고 없다. 아버지가 죽은 사실, 어머니와 아기가 죽은 사실, 할머니가 죽은 사실, 버림받은 사실, 구박받은 사실,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있으나 클라우스가 떠나고 없는 사실은 그를 멍하게 만들었다. 혹은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엄청난 일이 생기고 난 후에도, 삶은 지속된다. 클라우스가 없는 지난한 삶을 견디는 루카스에게는 삶의 또다른 사건이 계속 생긴다. 의미가 없어보이는 삶도 견뎌야함을 알게 되고, 의미가 있어보이는 삶도 그다지 우쭐댈 것이 아니라는 겸손함을 배운다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 나는 그 위대함을 배우고 싶다. 

..... 

하루가 더 지나고 오늘 아침,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출근을 했다. 세콤을 끄고 열쇠로 문을 여니 꽃향기가 난다. 놀라면서 뒷문으로 들어와보니 활짝 핀 꽃이 향기를 진하게 풍기며 나를 반긴다. 아! 엊그제 마도로스 할아버지가 웃으며 주고가신 꽃이다. 상사화. 이름만큼이나 수줍게 활짝 핀 꽃을 보면서 나는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루가 또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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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8-14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의 위가 깨끗할 수 있다니. 놀라워요, 달사르님! 그리고 다행이구요. 아마도 그동안 달사르님 주변에서 달사르님을 공격하던 그 많은 일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랬는가봐요. 모든 고통과 병은 마음에서 오잖아요.

오늘은 어떤 점심을 드셨어요? 이젠 저녁을 드실 시간이에요, 달사르님.

달사르 2011-08-16 15:11   좋아요 0 | URL
아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닷. 한동안 금주를 하는 생활을 했더니 위가 깨끗해졌나봐요. 히.
아..좀..그런 것도 작용하겠지여? 에구..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은 해도 해도, 덜 되나봐요.

오늘은 낚지가 들어간 점심을 먹었어요. 전 누군가 낚지요리를 사주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해버리는 단순한 사람이랍니다. ^^ 다락방님도 낚지요리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

pjy 2011-08-1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위내시경만 간단하게 해봤는데 정말 힘들더군요-_-; 첨에 그냥 해봤고 나중에 다시 할때는 수면으로~~그게 수면이든 아니든 먼저 먹는 마취하는 이상한 약때문에 다 토해요ㅠ.ㅠ 차라리 목구녕을 쌩으로 후비는건 눈물콧물 질질 견디겠어요~
다행히 달사르님처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병보다도 검사가 더 고달프고 힘들더라구요~

달사르 2011-08-16 15:56   좋아요 0 | URL
아...위내시경 해보셨군요! 맞지여. 정말 힘들어요..
수면으로 할 때는 마취주사를 맞을테고.. 그전에 먹는 약이라면...아하~ 가소콜 액 말씀이시구나~
그거는 배 속에 혹시나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가스 제거해주는 목적으로 미리 먹는 걸로 알고 있어요. 시메치콘이라고 흔히 먹는 소화제 알약에도 들어있는 성분이에요. 그게 맛이 좀 상당히 없지여. 저도 그거 먹고 속이 니글거려서 혼났어요. 물도 못 먹고 말이죠. ㅠ.ㅠ

ㅋㅋㅋ 목구녕을 쌩으로. ㅎㅎㅎㅎ 완전 공감공감 ^^
우리 둘 다 다행히, 검사결과가 좋았군요. 서로, 고생했어요~ 라고 말을 건넬까요? ^^
 

오늘도 비가 오락가락한다. 조금 내리다가 그치는 듯하더니 갑자기 소나기로 변해서는 길 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소나기가 내리길래 약국문을 활짝 열어놨다. 아스팔트에 흥건한 빗물을 가르며 자동차들이 경쾌하게 스쳐 지나간다. 갑자기 여학생 둘이서 손을 잡고 약국을 뛰어들어온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었을까. 깜찍한 반바지에 시원한 티셔츠를 걸쳤는데 옷에 뭐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1회용 밴드 하나 주시구요. 그리고 소독약도..저기, 그런데 돈이..모자라서.." 

한 아이의 손에는 1000원짜리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아이들의 행색이 이상해서 매대 밖으로 나가봤더니 아이들은 빗속에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반바지 엉덩이부분이 죄다 젖어있었고 진흙이 여기저기 묻어 엉망이었다. 무릎은 깨져서 핏물이랑 흙이랑 엉겨서 줄줄 흐르고 있었고 팔꿈치랑 손바닥에도 군데군데 상처가 보였다. 

"얘들아. 우선 저기 밖에 수돗가에 가서 씻고 보자. 이리 따라와" 

수돗물을 틀더니 아이들이 서로 씻겨준다. 나도 거들어서 아이들 종아리를 씻겨주다보니 멀쩡해보이는 다리에도 흙이 죄다 묻어있어 흙투성이였다. 까진 무릎에 흐르는 물을 갖다대니 시원한지 아이들이 슬며시 웃는다. 어..처방손님이 들어오신다. 두 사람의 약을 짓고 다시 나와보니 아이들이 다 씻고 엉거주춤 서 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많이들 다친거냐고 물었더니 급작스레 내리는 비를 피하느라 뛰다가 넘어졌단다. 에고..둘이서 손 잡고 뛰다가 같이 넘어졌구나..

"자, 여기 수건. 핏물 묻어도 되니 뽀송뽀송하게 다들 닦고, 여기 의자에 앉아. 의자 젖어도 괜찮으니 앉아도 돼." 

외상을 해도 되니 빨리 낫는 메디폼을 할래, 대신 이건 비싼데 엄마에게 말을 할 수 있겠니? 라고 물으니 아이들이 난감해한다. 그럼 집에 연고는 있어? 아..있구나. 그럼 이렇게 하자. 상처면을 소독할 과산화수소랑, 밴드랑만 사가자. 그래서 집에 들어갈 때까지만 임시로 상처를 감싸는거야. 집에 가서는 연고를 바르고 다시 밴드를 붙여. 알았지? 과산화수소를 상처면에 부으니 아이들이 따겁다고 신음을 하면서도 잘 참는다. 그래, 너희들은 용감한 아이들이니 잘 참는구나. 탈지면으로 상처면을 다시 닦아내고 밴드를 붙였다. 절반쯤 붙이다가 생각하니 냉장고에 샘플용으로 놔둔 상처연고가 생각났다. 아! 마침 연고가 있구나. 안되겠다. 연고를 다시 바르자. 붙였던 밴드를 살짝 떼어내니 아이들이 또 신음을 한다. 그래, 잘 참는구나. 연고를 발랐으니 금방 나을거야. 연고 위에 밴드를 다시 붙여줬다.  

"자, 이제 다 했다. 너희는 지금 1000원 있구, 밴드가 대형, 일반형, 두 통을 썼으니 2000원이야. 집에 과산화수소는 있니? 그럼 이건 가져가지 말고 계산도 하지 말자. 총 2000원에 너희가 1000원을 냈으니, 이제 외상은 1000원만 남은거야. 다음에 1000원 갚으러 오면 돼. 알았지? " 

아이들이 아주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간다. 용기있게 약국을 들어설 때와는 달리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나간다. 아이들이 나간 자리를 보니 바닥은 아이들에게서 뚝뚝 떨어진 빗물이 흥건했고, 의자 위에는 물이 섞인 진흙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다음에 외상값을 갚으러올 때 아이들의 표정이 궁금하다.  

"어이, 사이좋고 용감한 아이들, 왔어?" 라고 말을 해줘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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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8-11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에피소드를 흘려보내지 않고 포착하시는 달사르님~ ^^

달사르 2011-08-14 16:00   좋아요 0 | URL
넹. 아이들이 너무 깜찍해서 막 글로 옮기고 싶어지더라구요. hnine님 댓글을 읽으니 제가 왠지 예리한 눈을 가진 것 같애서 뿌듯해집니당~

마노아 2011-08-11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이야기네요. 돈이 모자라도 일단 약국문을 두드릴 용기가 있는 아이들도 대견하고요, 그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달사르님도 참 멋지네요.^^

달사르 2011-08-14 16:02   좋아요 0 | URL
아. 안녕하세요. 마노아님. 최근에 마노아님 블럭을 들렀더랬어요. 볼 것이 많아서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미처 댓글은 달지 못했나봐요. 먼저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요! ^^

그렇지요? 돈이 없어도 약국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은..어릴 때 읽은 사탕가게 아저씨와 아이, 이야기를 연상시켜서 늘 뿌듯해요. 음..그리고, 저를 멋있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히.

마노아 2011-08-14 23:26   좋아요 0 | URL
아악, '이해의 선물'이요! 제가 참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며칠 전에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을 했었는데 여기서 마주치니 넘흐 반가워요.(>_<)

달사르 2011-08-16 15:58   좋아요 0 | URL
이힛. 이 소설의 제목이 '이해의 선물' 이었군요!! 와우~
약국에서는 종종 이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되거든요. 그때마다 이 소설을 떠올리면서 나도 저렇게 멋진 아저씨처럼 행동해야지..생각한답니다. 저 아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까지 혼자 생각하면서 막 뿌듯해하구요. ㅎ
마노아님 덕분에 좋아하던 소설의 제목을 알게 되었네요. 저도 넘흐넘흐 반가워요. ^^ 히힛.

2011-08-14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4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명불허전] 김광석 다시 듣기
10cm (십센치) 외 노래 /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Stone Music Ent.)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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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통하는 사람들 덕분에 김광석을 다시 추억할 수 있는 행복 만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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