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을 일찍 먹었다. 평소에 즐겨먹지는 않는 죽을 먹었다. 걱정 많은 나를 위해 직원언니가 한 턱 쏜 본죽의 호박죽과 해물죽이다. 죽들과 반찬들을 주욱 늘어놓고 숟가락을 하나씩 쿡 찔러넣은 다음 개인접시에 덜어서 뷔페식으로 먹었다. 환자식인 죽을 먹는대도 속이 더부룩하다. 아마 내일의 일이 걱정되어서겠지.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눈 둘 곳이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약, 약, 약이다. 어느 한 켠, 눈을 시원하게 하는 곳이 있어 쳐다봤더니 책장이다. 주욱 훓어보다 한 지점에 눈이 멎었는데 저번에 읽다가 멈춘 시리즈 중 한 권이다. 가슴을 저리게 만들어 읽다가 그만둔 시리즈. 2권을 집어들었다. 몇 줄 읽어보니, 1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몇 줄 더 읽으니 퇴근시간이다.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집에 와서 가방을 정리했다. 통장들을 꺼내놓고, 장지갑도 꺼내놓고, 잡다한 물건들을 죄다 꺼냈다. 지갑에 카드도 한 장만 남겨놓았고, 신분증이 있는지 챙겼다. 혹시나 싶어 지갑에 지폐를 몇 장 넣으려고 지갑 안을 펼친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가 주고간 외국화폐다.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나의 미래를 그가 예비한 것일까. 외국화폐를 꺼내어 손에 잡고 하나하나 구경을 했다. 외국화폐에서는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고, 심하게 뛰던 내 심장박동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1분, 2분, 시간이 흘렀고 나는 이제 내일 차를 탈 수 있겠다,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6시가 조금 넘었다. 아침을 굶고, 물도 먹지 못하고, 준비를 마치고 차를 탔다. 운전은 언니가 했다. 외국화폐는 여전히 가방 속 지갑 안에 얌전히 들어있었다. 조금씩 불안함을 느낄 때마다 가방을 만지작거렸고 차가 톨게이트를 하이패스로 지나쳐 고속도로에 얌전히 얹혔을 때 왠지모를 자신감이 조금씩 차올랐다. 괜찮다. 외국화폐가 나를 지켜줄거야. 나는 괜찮을거야. 1시간 30 분 가량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고 파킹을 했다.
의사와 면담 후 환자복으로 갈아입는 동안 검사순서가 정해졌다. MRI가 첫번째 검사종목이었다. MRI 검사 도중 시끄러운 소리와 밀폐감에 없던 공포증이 생겨 일 년이상 안정제를 드시는 분의 사례를 알고 있기에, 간이 작은 나는 미리부터 수면으로 신청을 했다. 검사항목을 코디하시는 분이 영어로 주사제 이름을 적더니 크게 별표를 쳐놨고, 가는 곳마다 이 분은 폐쇄공포증 있으시니 수면이다, 주의하라, 는 말을 서로간에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꽤 철저하게 하는구나, 생각을 하는동안 앞 사람의 검사가 끝이 났다. 검사 직전, 담당직원이 이것저것 물어봤다. "전에 MRI 검사 받고 놀란 적이 있으세요? 아니면 폐쇄공포증 진단 받은 적이 있으세요?" "아니요..그저, 겁이 나서요.." "아, 그러세요. 그럼 그냥 일단 기계 안에 들어가봤다가 무서운지 견딜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나서 수면을 선택하시는게 어때요? 어차피 수면으로 해도 완전 수면은 아니기에 시끄러운 소리가 조금은 들리거든요." 친절한 직원분의 말에 용기를 내어 그냥 해보기로 했다. 손에 외국화폐는 안 쥐었지만 내 마음의 눈에 외국화폐가 찍혀있으니 용기가 조금 났다. 기계 안에 들어갔고 감은 눈을 떴다. 눈에서 한 15센치 정도 떨어진 곳에 MRI통이 보였고 많이 갑갑했으나 다리쪽이 트였기 때문에 겁이 덜 났다. 할 수 있겠다, 고 말을 하니 머리에 헤드셋을 씌워줬고 얼굴에 보안통을 끼워줬다. 정 무서우면 말소리는 안 들리니 다리를 번쩍 들면 검사를 중단해주겠다, 라는 말까지 듣고 검사를 시작했다.
헤드셋 밖으로 시끄러운 음악이 조금씩 들렸고 헤드셋 안으로 "검사 시작합니다. 큰소리가 나도 놀라지 마세요" 라는 말이 들려왔다. 이윽고 쿵쾅쿵쾅 소리가 온몸으로 전해졌고 심장이 박자를 맞추느라 같이 쿵쾅거렸다. 나는 악착같이 외국화폐를 떠올렸고 심장은 두근거림의 강도를 올리다가 어느순간 진정되었다. 됐다! 몇 분간 진동과 같이 울리던 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또 안내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다른 진동에 다른 소리가 들리더니 시트까지 같이 들썩거린다. 눈을 감고 놀이동산에 놀러왔다고 상상했다. 기분이 좋아진다. 무서움이 저멀리 달아나는게 보인다. 시끄럽고 조용하고를 몇 번 반복하더니 담당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끝, 은 아니었고 안심을 시키러 들어온 눈치였다. 내가 떨지 않고 있음을 확인한 담당직원이 나간 후 들려온 마지막의 소음은 그야말로 기절할 정도였다. 아! 이래서 들어왔구나. 그렇지만 내게는 외국화폐가 있어! 난 참을거야. 참을 수 있어! 결국 나는 소리를 이겼고 문이 열렸고 나는 기계 밖으로 걸어나왔다. 이겼다! 내가 나에게 이겼어! 나는 검사결과보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검사를 받아낸 내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로 검사를 순서대로 계속 받았다. 초음파, CT, 각종 검사, 검사, 검사들이 줄을 이었고 자신감 충만한 나는 씩씩하게 검사를 계속 받았다. 마지막 검사인 위내시경 차례가 왔고 나는 용기를 내어 생목으로 한다고 말을 했다. 위내시경실로 가는 길에 위내시경을 마치고 시트 위에 주욱 누워있는 검사자들이 보였다. 문득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네들을 보는 순간 수면으로 하고 싶은 약간의 욕구조차 사라졌다. 나는 저렇게 누워있기 싫다, 라는 생각이 용솟음친 것이다. 나는 나의 정신의 '의지'를 믿고야 말테다. 나는 MRI까지 맨정신으로 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나는 겁쟁이가 아니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트에 누웠고 간호사들이 내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엉덩이는 뒤로 뺀 엉거주춤 자세를 만들더디 입에 나팔모양 깔때기를 물게 한다. 뭐하는지도 모르고 물고 있었는데 관이 쑤욱, 목 안으로 들어왔다. 어, 뭐야뭐야! 놀라는 나에게 간호사들이 진정을 시킨다. 침을 삼키지 마세요. 그냥 흐르게 놔두세요....이 사람들아.. 침은 나올 생각도 안 한다구요... 켁켁거리는 나를 모른 척하고 의사는 길다란 관을 넣었다 뺐다, 한다. 관이 목구멍을 한참 지나 위까지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겨우 참을만 하다 싶으면 관을 쑥 빼내어 다시 깊숙하게 쑤셔넣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웩웩거린다. "위가 엄청 깨끗한데..검사할 필요도 없겠는데.." 의사가 한마디 한다. ㅠㅠ
모든 검사를 마치고 나니 죽과 녹차를 직원이 가져다준다. 와..배불리, 감사하게 먹었다. 검사결과는 바로 나왔고 이상무, 라는 답을 들었다. 검사를 하는 나보다 더 걱정스런 마음으로 함께한 언니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을 굶어야하는 나를 위해 같이 아침을 먹지 않았던 언니는 이제야 배고픈 생각이 든다, 라고 말을 하며 웃었다. 돌아가는 길에 문득 차 소음이 들리지 않는걸 느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갇힌 공간을 무서워하는 나는 창문을 항상 조금씩 열어놔야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창문이 닫혀진 채로 십여분 이상이 흘렀는데도 몰랐고, 그걸 인식하고 나서도 숨이 가빠오지 않았다. MRI 검사는 이상무, 라는 검사결과와 함께 나의 공포증까지 같이 치료한 것이다.
집에 도착 후 방에 들어오니 어제 읽다만 책이 눈에 들어온다. '타인의 증거' 나는 몇 페이지를 더 읽다가 지갑 속의 외국화폐를 꺼내서 물끄러미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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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어떻게 한담?
-예전처럼 아침이면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자고,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면 되는 거지.
-오래 걸릴 거야.
-어쩌면 평생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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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에게 엄청난 일이 생겼다. 아니 실은 그전에도 계속 엄청난 일들이 생기고 생겼다. 그러나 루카스는 견딜 수 있었다. 그의 쌍둥이 클라우스가 그 모든 일을 함께 했기 때문에.
이제 클라우스는 가고 없다. 아버지가 죽은 사실, 어머니와 아기가 죽은 사실, 할머니가 죽은 사실, 버림받은 사실, 구박받은 사실,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있으나 클라우스가 떠나고 없는 사실은 그를 멍하게 만들었다. 혹은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엄청난 일이 생기고 난 후에도, 삶은 지속된다. 클라우스가 없는 지난한 삶을 견디는 루카스에게는 삶의 또다른 사건이 계속 생긴다. 의미가 없어보이는 삶도 견뎌야함을 알게 되고, 의미가 있어보이는 삶도 그다지 우쭐댈 것이 아니라는 겸손함을 배운다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 나는 그 위대함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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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더 지나고 오늘 아침,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출근을 했다. 세콤을 끄고 열쇠로 문을 여니 꽃향기가 난다. 놀라면서 뒷문으로 들어와보니 활짝 핀 꽃이 향기를 진하게 풍기며 나를 반긴다. 아! 엊그제 마도로스 할아버지가 웃으며 주고가신 꽃이다. 상사화. 이름만큼이나 수줍게 활짝 핀 꽃을 보면서 나는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루가 또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