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습관도 때론 바뀐다는 걸 알았다. 책을 읽을 때의 내 습성이 바뀌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표지를 접지도 않고 읽으며, 책에 밑줄도 긋지 않고, 속지에 이름이나 날짜 등을 적지도 않는다. 그러나 2년인가 전에 밑줄이 그어져 있고 날림 글씨체로 뭐라고 잔뜩 끄적여놓은 읽던 책을 선물 받은 후, 나는 조금 바뀌었다. 지저분해 보이기만 했던 책이 왠지 멋져 보였던 것이다. 물론 책을 선물한 이가 글도 잘 쓰고 말도 잘 했으며 내 글쓰기를 봐줬던 이유도 포함되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기 생각을 거리낌없이 책 중간중간에 적어놓는 '자신감'이 제일 멋져 보였다. 은밀한 독서를 하던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오픈 독서 쪽으로 선회했다.
처음엔 조금 힘들었다. 깨끗한 책에 자로 밑줄을 그어봤는데 으으윽..속이 너무 쓰린거다. 내 몸에 생채기를 내는 듯했다. 그래서 중단했다. 나는 역시나 책은 그저 보기만 하는 사람인가봐..그러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알게 되었고 책에 대한 조르바의 너무나 자유분방한 생각과 행동을 접하고나서 나도 조르바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책에 파묻힌 샌님 말고 책을 그저 친구 삼아 같이 한바탕 재미나게 놀고 싶었다. 난 '그리스인 조르바'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글도 끄적여놨고 낙서도 해봤다. 아! 너무 좋았다. 조르바가 나에게 "잘했어" 라고 등을 툭툭 쳐주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는 마음에 드는, 친구하고픈 책이 있으면 밑줄을 사정없이 좍좍 긋는다. 자도 대지 않고서! 아..그런데 최근의 이 멋진 책에는 밑줄을 그을 수가 없다. 왜냐면, 이 책은 빌린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밑줄을 긋고 싶은데..좋은 문구들이 너무 많은데..밑줄을 안 그으니 그 문장들과 같이 놀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답답하다. 에이! 몰라..장바구니에 담았다. ㅋ
내가 처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시인은 정현종 씨이다. 이름조차 처음 듣는 낯선 분이지만 (물론 내가 문학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일천하기 그지없는 사람이기에 그러하다. 이 분은 문학계에서 꽤, 아주 많이 유명하신 분이시다. ) 이 책의 지은이인 원재훈 시인의 정현종 씨에 대한 짧은 소개글을 읽고 나서 그의 작품이 무척이나 읽고 싶어졌다. 그는 70세도 훌쩍 넘어선, 대학에서도 퇴임하신 분인데 본인 스스로도 유명한 분이지만 고 기형도, 성석제 등의 선생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제 익명성 속으로 들어가서 생의 유유자적을 즐기고 싶어하는데 나는 이제사 그의 이름을 알게 되어 그의 '시'를 접한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 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아. 엉엉 울고 싶다. 이런 멋진 시라니..시에 홀딱 반해 이 시가 들어있는 시집을 찾아 헤맸다. 인터넷 바다에 첨벙 빠져서 운좋게 금방 시집 제목을 발견했는데, 위 시와 같은 제목의 시집이다. 얼씨구나~ 알라딘에 조회해보니 절판..허걱스..다른 사이트를 이 곳 저 곳 헤매기 시작한다. 여기도 절판, 저기도 절판..ㅠ.ㅠ 아...이래서 좋은 시집은 일찍 사야 되는 건데..앙..
마음에 그의 시를 담아야겠다. 시인도 그의 시집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의 '시'를 내 속에 담고 있는 것을 더 좋아하겠지. 그의 아름다운 시 한 편을 감상하고 원재훈 시인과 정현종 시인, 두 시인의 대화를 계속 따라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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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우리의 삶을 견디게 하기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고 했지요. 이런 식으로 자기 삶을 견디면서 남의 삶을 견디게 하면 좋습니다. 하여간, 아주 사적인 체험과 감정, 생각이 동기가 되어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은 시이고 반대의 경우는 나쁜거라고나 할까. 이건 재능의 차이겠지요. 그래요. 김소월, 한용운과 같은 좋은 시는 많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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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멋지다. 시인은 자기 삶 견디면서 남의 삶 견디게 해주는 존재라..너무 멋지다. 시인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한다. 시인에 대한 가장 정직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한 편의 시, 한 권의 소설에는 그런 대단한 능력이 있다. 당신의 시를 암송하며 삶의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라는 말을 듣는 것이 시인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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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상하고 참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무'의 상태로 비워두었어요. 텅 빈 상태에서 모든 걸 보고 말하는 거지요. 자기가 없다는 거,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자기가 좋은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참되게 몰입하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무런 심리적인 계산이 없어요. 이게 우리들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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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야누흐가 지은 <카프카와의 대화>를 언급하면서 정현종은 카프카란 인간을 이렇게 평한다. 카프카에게 새삼 관심이 간다. 일단 구스타프의 책을 먼저 질러서 읽어봐야겠다.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덜어내고 비우고 '흐르고 변하는 것'과 '아프고 아픈 것'들을 자기 몸으로 느끼는 것의 저릿함을 알고 싶다. 자기 자신을 '무'의 상태로 비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익히 봐왔지만, 그렇게 비운 사람이라고 정현종이 칭하는 사람인 카프카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이는 물론 정현종을 제대로 알기, 의 돌아가기 이겠다. 나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시 한 편으로 이미 정현종의 팬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