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번 자매는 뭉쳤다. 생의 굵은 마디는 주기를 가지는 느낌이다. 벌써 십 년도 훨 넘었다. 그때, 언니와 나는 어마하게 큰 사건을 둘이서 끙끙대며 해치웠다. 이번에도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뇌경색이란 질환이 호락호락하지는 않기에 신경쓸만한 일들은 우리 둘의 선에서 대부분 해결한다. 언니는 혼자서 몇 일을 끙끙 앓다가 저번주에 나에게 털어놓았다. tv에서나 나올듯한 금융사기를 다시 한 번 겪은 것이다. 해당종금에는 기자들이 들이닥쳐 사진을 찍어가고 난리였다고 하더니 정작 기사로는 나오지 않는다.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음일까. 언니는 수시로 가게에 내려와 상의를 했고, 퇴근후엔 내 방에 둘이 모여 쑥덕모의를 했다. 그렇게 둘이서 뭐든지 이야기를 나눠야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그날을 떠올린다. 그날보다 더 힘든지 아닌지 비교해본다. 조금은 덜 힘들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또 견뎌내야지.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이 없다는 부모님의 자식 사랑 못지 않게, 자식은 부모님의 아픔이 본인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다.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견뎌낸다. 생리학적이기만 했던 가족의 울타리는 아픔이라는 아교가 섞이면서 견고한 울타리가 된다. 서로의 불편, 아픔을 먼저 생각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견디는 것이다.
시무룩해 있던 월요일, 멋진 선물을 하나 받았다. 계기는 오수연 작가 때문이었는데 나는 책을 받자마자 좋아하는 김훈 작가의 에세이를 먼저 읽었다.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맞바람이 치던 야산 언덕이었다. 언 땅이 곡괭이를 튕겨내서, 모닥불을 질러서 땅을 녹이고 파내려갔다. 벌써 30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육군에서 막 제대한 무직자였다.
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병장 계급장을 달고 외출 나와서 가끔 아래를 살펴드렸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 언저리에 와 있었다.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그리고,
나도..울었다..
김훈의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부모의 아래를 봐드리는다는 건, 부모의 늙어감을 보는 서글픔과는 다른 의미이다. 나를 몸으로 낳아주신 당신의 그곳을 봐드린다는 건, 한때는 수풀이었을 그곳의 이제는 듬성한 공간을 본다는 건, 생의 지난함을 견뎌내는 존재의 노골적인 적나라함과 같다. 풍선같던 그곳은 시간이 흘러 점점 가라앉았지만 후유증은 오래도록 남아 당신의 육체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그리고 두 자매는 정신적인 상흔을 견뎌야했다.
한때는 복수를 꿈꾸었다. 마음의 칼을 모질게 갈아도 보았다. 그러나 최고의 복수를 계속 꿈꾸던 나는 해답이 '잊어버림', '놓아버림'임을 어느순간 깨달았다. '원수'를 가슴 속에 계속 담아두는 일이 내게는 힘겹기도 했지만, 철저하게 잊어버리는 일이 제일 큰 복수임을 알고 나는 아주 행복하게 손을 놓아버렸다. 그러나 목표를 정하고 갈았던 칼은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왔고 그 칼은 놓아버렸음에도 나에게 생채기를 냈다. 그 생채기조차 견디며 시간을 흘렸고, 이제는 일 이년에 한 번 정도나 자매는 그때 일을 떠올린다. 이번에도 사태가 커져서 둘이서 감당하기 버겁게 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때 일을 입에 올린다.
"우리, 그때 참 잘 견뎠어. 그때 일에 비하면 지금 이런거 쯤이야.. 우리, 이번에도 견딜 수 있겠지?
서로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니가 있어서, 나는 견딜 수 있었어."
"언니, 나도 언니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어."
벌써..열흘이 지났다. 열흘을 견뎠다. 그러니까, 이 글은 책 선물에 감사하다는 그런 긴 편지라고 하면 되겠다. 당신의 책 선물 덕에 많은 위안을 받아서 행복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그 말을 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