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눈이 내리다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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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한 편 공을 들여 읽는 재미. 긴 시간 동안 읽고 잊고 새로 읽고 또 잊고. 다시 펼치면 잊었다가도 되살아나는 앞선 감흥들. 아, 이랬지, 다시 봐도 신기하고 좀 무섭고 그래서 작가가 대단하게 보이고 읽고 있는 내가 기특해지는 기분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세상 무해한 존재가 된다고 했던 말이 칭송으로 들린다.  


모두 9편. 작품집을 내면서 제목이 된 첫 소설 '고래눈이 내리다'와 뒷부분에 실린 '귀신숲이 내리다'로 짝을 맞추었다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책을 내 본 적이 없으니 나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바이지만,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작가들은 글을 싣는 순서에도 정성을 기울이나 보다. 어떤 글을 어디에 배열할 것인? 어떻게 놓아야 독자들의 마음을 흘려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들쑥날쑥이던 작품집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뒤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책. 처음에는 심심했다가 뒤로 갈수록 강렬해지는 책. 처음에 인상적이었다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푹 꺼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책. 처음부터 아니어서 몇 편 보다가 치우게 되는 책.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르게 강했다. 나는 소설로부터 튕겨 나갈 듯하여 한번에 두 편을 읽지 않고 한 편만 읽는 것으로 버티었다. 다 읽기까지 오래 걸린 편이다. 아쉬움도 조바심도 전혀 남지 않는다.


이 작가의 SF적 상상력은 내게 도움이 많이 된다. 나로서는 꿈에도 그려 볼 수 없는 세상이 작가의 이야기로 펼쳐지는데 놀랍고 재미있고 고맙다. 나는 진정 믿고 싶다, 소설 속 세상들이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차원이 달라지든 우주가 달라지든 시공이 달라지든, 있을 수 없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이토록 엉망진창으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이 존재하는데. 사람이라는 존재 역시 시간이 흐른다고 문명이 발달한다고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으니 소설 속 누군가에게 빼앗기면서 이대로 멸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살펴보고 진단하면서 반성하고 깨닫게 하는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니, 재미있는 만큼 암담하다.


SF가 현실을 적극적으로 되비추는 장르라는 데에 갈수록 호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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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의 작은 부엌칼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문기업 옮김 / 문예춘추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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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기는 했는데 읽는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다. 아주 소설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서, 바꾸기 힘든 현실의 문제점을 그대로 견뎌야만 하는 것 같아서, 무기력해지는 의욕을 살릴 길이 보이지 않아서.

먼저 이 소설의 내용과 비슷한 글의 특징을 정리한 몇 가지. 일본소설이다(최근에는 우리 소설에서도 더러 보인다). 주인공은 젊은이. 성장 배경이 원만하지 않아 부모로 인한 결핍이나 상처를 안고 있다. 혼자 애를 써서 도시에서 생활했는데 실패했다(취업이든 연애든 결혼이든 사기를 당했든). 집도 없고 먹고 살 길이 없게 되었는데 시골에 기다려주는 친척 어른이 있다(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이모 등). 시골로 간다. 친척 어른의 도움으로 몸과 마음이 회복된다.

구성의 기본 가지다. 여기에 어떻게 잔가지를 내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가, 어떤 재미를 만들어 낼 것인가, 어떤 배경으로 독자를 이끌어들일 것인가, 작가의 몫이겠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에밀리가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부엌칼로 생선 요리를 배우게 되면서 자신이 입은 상처로부터 점차 회복된다는 내용을 보여 준다. 음식이 주된 소재라 흥미를 느끼며 읽어 나갔는데 익숙한 구성에 충분히 예측되는 결말이다 보니 싱거워지고 말았다. 내가 써 볼 것도 아니면서 이런 방식이라면 나도 쓰겠는 걸 싶은 허무맹랑한 자만심마저 들어버렸으니. 

자연스럽게도 김태리가 주인공으로 나온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다.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잘 먹을 수 있다면, 잘 먹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면, 잘 먹을 수 있을 환경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시골이라고 해도... 그런데 소설일 뿐. 현실과는 아주 동떨어진 그림 속 세상일 뿐. 소설인데 소설로만 읽히는 게 아닌 것이 보이지 않는 힘과 간섭에 속고 있는 느낌이 자꾸 든단 말이지.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쳐 있는 청춘들에게 시골에 가서 잘 먹고 기운 얻어서 돌아오라고 하는 듯이. 마치 이것이 놓치고 있던 진정한 힐링의 포인트라는 듯이.  

주인공이 돌아갈 시골의 배경을 어디로 할 것인가, 부모는 주인공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가, 주인공은 도시에서 누구로부터 어떤 상처를 받았는가, 시골에서는 어떤 일을 하며 지낼 것인가, 하루하루 무엇을 어떻게 요리해 먹을 것인가, 시골에서는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교류할 것인가, 마침내 회복하면서 얻은 새로운 능력은 무엇인가, 도시로 나갈 때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물음만 정리해도 단순하게 보인다. 

다음에는 어떤 책을 읽게 될까? (y에서 옮김202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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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잔 인생 한입 50
라즈웰 호소키 지음, 문기업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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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다. 하나의 주제로 오랜 시간(거의 25년) 같은 만화를 그려 온다는 게 여간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술 사랑과 직업 정신에 존경심을 느낀다.  

책이 나온 순서대로 보다가 궁금해서 이 책을 펼쳤다. 지금과 가장 가까운 시일에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았 놓았나. 만화를 그리는 작가와 만화를 읽는 독자는 시간을 따라 나이가 들었는데 작품 속 소다츠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권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실어 놓기는 했는데 그게 꼭 시간의 흐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소다츠가 50살을 넘긴 게 아닌 걸 보면. 소다츠는 여전히 젊고 혼자 살고 혼자 마시거나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 카스미와 마츠시마와 마시기도 하면서.

이번 호에는 전편-후편, 전편-중편-후편으로 이어지는 구성이 많아 보인다. 한 회로는 내용을 다 담을 수 없었던 것 같은데 술이나 안주에 대한 설명을 담는 공간이 많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읽는 내 입장에서는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그리는 작가는 신경이 쓰였겠다. 이걸 둘로 나누나 하나로 마무리짓나. 

덴푸라가 특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 덴푸라로 들었던 튀김. 어른들이 일본어를 썼던 탓이겠지. 튀김 요리를 아주 좋아한다. 술안주가 아니더라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술안주로 멋지게 장식까지 해 놓고 있어서 술을 마시고 싶을 정도였다. 특히나 각종 야채 튀김이라면...

술을 마실 때 한 종류만 마시는 게 아니라 안주에 따라 바꿔 가며 마시는 게 더 술맛 나는 일인가? 이제서야 궁금해진다.  (y에서 옮김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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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잔 인생 한입 49
라즈웰 호소키 지음, 문기업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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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된 순서대로 읽다가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을 일부러 구해 보았다. 작가가 서문에 2021년이라고 쓴 것을 보며 시간적 공간적 거리감을 확인한다. 알아서 뭘 어찌 하겠다는 건 아니고 이런 차이점을 고려해서 더듬어 보는 것도 내 방식대로의 재미이니까.


소다츠의 짧은 시 글자체가 바뀌었다. 약간 흘림 형태인데 읽기에는 편하지 않다. 이제는 이런 모양체의 글자가 안 읽히는 나이가 되고 만 것인가. 만화를 보면서 나이를 인식한다는 게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만화를 좋아하고 있으니 이것대로 괜찮다. 


잘 먹고 잘 마신다. 잘 먹고 잘 마실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누린다는 게 얼마나 건강한 삶이고 얼마나 풍요로운 생활인지 알고 있으니 만화 속 세상이라도 감탄스럽다. 사는 게 이것 이상일 필요도 없는 게 아닌가 싶고. 입맛이 없을 만큼 몸이 아프거나 술과 안주를 마련할 돈이 없거나 함께 먹고 마실 사람이 없다면… 나로서는 이 만화를 구할 형편이 안 된다면… 생각만 해도 슬프고 절망스러운 노릇이다. 


이 책을 꽂아 놓고 다시 앞에 나온 책으로, 읽던 순서대로 돌아갈 것이다. 오뎅탕이 점점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y에서 옮김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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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필로소퍼 2018 2호 - Vol 2 : 상품화된 세계 속의 인간 ㅣ 뉴필로소퍼 NewPhilosopher 2
뉴필로소퍼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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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지의 마지막 호이다. 발간 순서가 아니라 내가 구입한 순서로. 과월호까지 다 구해서 읽고 나란히 세워 놓으니 뭔가 흐뭇하다. 이 또한 물건을 소유한 행복 하나쯤 되겠다.

 

물건이란 무엇인가. 누가 어떤 물건을 얼마만큼 갖고 있는가. 우리들 각자는 어떤 물건을 더 더 더 갖고 싶어하는가. 나는 물건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따지고 보니 새삼스러운 생각은 아니었다. 이 책이 나온 시기 즈음부터 미니멀리즘이 유행하기 시작한 건지 그 전부터였는지는 모르겠는데(확인해 보고 싶지는 않고) 나도 꽤나 오랜 시간 물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물론 아주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고, 짐이다시피 하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물건을 갖지 않는 게 더 좋겠다는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갖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라고 해야겠다.(못 가지는 게 아니라 안 가지는 것이라고, 이게 사실은 아니지만) 

 

이 책도 그 시기에 읽었더라면 내게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 같다. 훨씬 빠르고 훨씬 수월하고 훨씬 가볍게 정리도 버림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나눌 만한 건 썩 없는 처지라 생략하고) 물건 하나를 사는 일도, 그 물건 하나를 갖고 관리하는 일도, 사소한 물건이라도 선물로 주고받는 일조차도 다 철학에 속한다는 것, 안다고 여겼다가도 순간순간 잊는다. 그리고는 단순한 욕망에 자신을 끌어들인다. 이건 해도 된다고, 이건 갖는 게 좋다고, 이건 가질 수밖에 없노라고 스스로를 채근하면서. 그리고 이어지는 후회와 한탄, 왜 그랬던가 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이 내 철학의 발현이 되는 시간이라는 걸, 지나서 깨닫는다. 이것조차 삶인 걸까.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여전히 넘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될 책이 아닐 것 같다. 기분 상하기에 딱 좋을 것 같으니까. 미니멀리즘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면? 좀 그럴 듯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겠다.

 

지속가능한 상태로 우리네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물건에 대한 탐구를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물건을 탐구하다 보면 쓰레기 문제는 저절로 뒤따르게 되는 셈이니. (y에서 옮김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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