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코와 술 12
신큐 치에 지음, 문기업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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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전달하고 받는 데에 글의 길이는 원래 상관이 없을 것이다. 짧은 만화 한 편을 통해서도 받을 의미는 다 받게 되는 것이니까. 이 만화의 한 에피소드에서처럼.

 

앞선 책과 다를 건 없다. 와카코는 여전히 혼자서 아늑한 술집을 찾아다니며 맛있게 술을 마신다. 술이름도 모르는 나는 와카코가 마시는 모습만으로도 기분좋게 취하는 느낌을 받는다. 술도 술과 함께 나오는 안주(고기를 안 좋아하니 어쩔 수 없다)도 내가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거의 없는데 분위기만큼은 홀로 그윽한 게 그지없이 좋다.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가 홀로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한 권씩 뽑아 보리라.

 

이번 책에서 특별 에피소드로 '콘노 씨의 우울'이라는 게 있다. 제목과 내용은 우울한데 나는 우울하지 않게 봤다. 만화 속에서 콘노 씨는 계속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알자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나름 부족한 게 있는데 스스로를 조절하는 모습이다. 나는 이 대목을 내 처지에 맞게 끌어와서 받아들인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스스로에게 다시 만족하자고.

 

이 만화를 보고 있고, 이 만화책을 살 수 있는 형편이고, 이 만화를 볼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고, 이 만화를 봤다고 이렇게 주절주절대도 괜찮은 공간이 있고......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겠는가. 이 작가의 [타카코 씨 4]편을 또 사고 싶기는 하지만.  

 

세상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로 꽁꽁 묶여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이 안에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을 느끼고 고마움을 느끼는 것도 좋겠다 싶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발랄하고 도전적인 젊은이는 아니니까 이쯤 해도 괜찮은 거다.  (y에서 옮김20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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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박현주 지음 / Lik-it(라이킷)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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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과 관련된 산문으로 여기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책이 운전 사이로 들어왔다. 운전도 독서도 비슷한 듯 다르게 사람을 이끌어간다. 작가에게는 안전거리가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나는? 내 운전은? 그리고 내 독서는?


내가 운전을 하게 된 지는 오래되었고, 오래 한 만큼 운전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하고, 독서를 하게 된 것은 그보다 한참 오래되었고, 독서를 나는 좋아하고 또 나대로 잘하고 있다고도 싶고. 둘을 이어서 이렇게 다양한 독백을, 긴 독백을 할 수도 있구나, 새삼스럽게 작가에게 감탄을 한다. 


운전도 독서도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의 축이 된다. 둘 다 평생 안 하고 살 수도 있겠지만 둘 다 잘한다면 세상을 사는 일이 한결 풍요로워지리라. 나는 행복이 배 이상으로 늘어나리라고 여긴다. 운전을 좀 많이 못하는 편이라 이 점은 아쉽지만 독서에서 얻는 기쁨으로 바꿔도 괜찮겠다. 작가가 글을 통해 털어놓은 운전의 고충에는 강한 공감과 안타까움으로, 운전하는 일과 관련시켜 소개하는 책들에는 친숙함과 호기심으로 응했다. 


다만 가볍지 않고 진지한 서술에서 살짝 거리감을 느꼈다(이것도 작가가 의도한 안전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쑥 다가서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눈치가 보였다. 확 다가서고 싶은 사람으로서는 당황스럽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로. 그래도 나는 끄덕였다. 이것이 낫겠네, 이만큼 떨어져 보고 이만큼 떨어져 읽고 이만큼 떨어져서 생각해 주는 것이 서로에게 낫겠네. 


한번에 확 빠지는 호감 대신 천천히 오래 곁을 지키고 싶은 호감에 대해 궁리하는 시절이다. 나는 생을 아껴서 보내고 싶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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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자 소설 - 세상에서 가장 짧고 기발한 99가지 특별한 이야기
곽재식 지음, 방아깨비 그림 / 구픽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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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환경 때문에 사람들이 긴 글을 안 읽는다고 하고, 그럼에도 소설을 읽히고 싶은 소설가의 열망은 살아 있고, 그래서 작가가 이런 시도를 해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 열망에는 일단 박수를 드린다.

 

분량이 짧으니 읽기에는 부담이 없다. 시처럼 상징이나 은유가 노골적인 게 아니어서 더 수월하게 읽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직설적인 것은 아니다. 140자 줄글에도 감추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감출 수 있고, 이 책의 작가도 그렇게 하고 있다. 마냥 편하게만 읽고 넘겨 버려도 좋을 글들은 아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좀 아쉬웠다. 충분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140자라는 한계에 도전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압축미도 긴장미도 아직은 자리를 잡지 못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완성된 작품들이 아니라 연습 중인 글이라는 느낌, 좀더 다듬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 이전에 읽고 감탄했던 참신함을 얻지 못해 섭섭하기도 했고.

 

그렇지만, 그래도 실망까지는 아니다. 여전히 더 읽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작가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  (y에서 옮김2017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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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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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끌림이었다. 지극히 사소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사소함이 누군가의 인생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사람의 밝혀지지 않은 삶을 되짚는 일은 온전히 추리의 과정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그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이든,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든,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이든, 그 모두에 대해서. 


인생의 초반, 학창시절. 100세 기준으로 볼 때 20%도 되지 않는 기간인데, 이 기간의 일들은 그 사람의 남은 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제각기 다른 빛깔로 채워지고, 더러는 흐려지거나 비워지기도 하면서 그래도 괜찮은 어른으로 살아갈 준비를 해나가는 기간인데, 이 과정이 참 만만치 않은 것이다. 하기야 우리 생에 만만한 기간이 어디 한 순간이라도 있기는 한가 싶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같지 않다는 느낌으로 시작했는데, 살인이나 음모나 피를 등장시키지 않고도 충분히 긴장감 있는 추리소설로 엮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으로 확인한다.(딸이 내 취향에 맞을 것이라고 이 책을 강력하게 권했는데, 이로써 내 딸은 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알겠다.) 


가끔 나도 내 삶을 반추한다. 어린 날,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했던 것인지, 왜 하지 않았던 것인지, 그렇게 하고 하지 않았음으로 인하여 그 뒷일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던 것인지, ... 등등에 관하여. 이미 후회를 하는 나이는 지났으므로 다 받아들이게는 되었으나, 아쉬움마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때 그러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까, 그때 그렇게 했으면 더 나았을까, 설령 다르게 행동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까 하면서. 소설로서는 전혀 매력이 없을 것만 같았던 내 평범한 삶도 이 소설에 비추니 그런 대로 꾸며질 수 있을 것 같은 찬란한 구석이 몇 곳 짚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 삶을 소설로 쓰겠다는 것은 아니고. 


나를, 내 시간을, 내 주변을 지금보다 조금 더 아끼고 보살필 일이다. 지금보다 또 더 나이가 들어 흐뭇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y에서 옮김201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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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소디 인 베를린
구효서 지음 / 뿔(웅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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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는 이 사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인연이다. 다른 곳도 아닌, 다른 때도 아닌 딱 지금 이곳에 있는 나. 지상에 천국은 원래 없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위해 우리는 이모저모 애를 쓸 수 있을 뿐인데, 지금 이 시기에 여기 있다는 게 나로서는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지. 나는 정녕 세상의 다른 어딘가에 가 있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의 흐름과 평행선을 달리면서 한 생각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처지와 고난과 사랑과 순간의 행복들이 편한 곳에서 글이나 읽고 있는 내 처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안타까워하고 절망도 했다가 곧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가 했다. 나는 이대로 요만큼 안전하구나. 


소설의 시작은 우아했다. 고전음악이라니, 서양의 교회 음악이라니, 클라비코드라는 악기까지. 내가 모르는 18세기 후반 서양의 궁정음악 세계 안으로 불쑥 들어선 기분에 내내 당황스러웠다. 이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어렵게 여겨지는데 알아들을 수 있기는 할까? 이 작가의 글이 어려웠던가?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한동안 이 작가의 글을 놓치고 있었구나,... 소설 밖 어지러운 잡생각이 읽기를 계속 방해하기는 했는데. 


재미있었다. 점점 빠져들었다. 현재 시점의 주인공 하나코와 김상호, 18세기 후반의 주인공 아이블링거와 힌트마이어. 이야기는 교차된다. 정신을 차려야 앞에 읽은 내용을 기억한 채로 이어 읽을 수 있다. 얼마 만인가? 내 의식을 붙잡고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낀 것이. 그래, 이런 힘을 보여 준 작가였지. 다시 관심을 세운다, 이 작가의 글을 찾아본다, 안 읽은 책이 많이 있구나, 내가 놀았구나, 나는 다시 바빠지고 즐거워지고 행복해지겠구나... 음악과 관련된 용어가 나올 때마다 헤매었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나아갔다. 나는 음악이 아니라 소설의 길로 가고 있었으니. 


낱낱의 삶은 개별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네 삶은 모조리 이어져 있다. 운명도 행복도 슬픔도 원한도 모두 다. 지금 당대가 다 맡지 못한다면 대를 이어서라도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라도. 이것이 역사인가 보다. 이름을 널리 남기지 못한다고 해도 살아서 맡은 사명이라는 게 바로 삶의 이 흔적이 아닌지. 살다가 갔다는 것. 너도 나도 우리 모두는. 훗날 찾아주는 이가 있어도 또 없다고 해도. 애틋하지 않은 생명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환멸은 남는다.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안 해야 하는 것을.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이나 이곳에서나 저지르는 이들은 저지른다. 저지르고 비난을 받고 결국 죽는다. 이게 그들의 사명일까? 마치 악마가 있어야 천사의 존재가 대접을 받는 것처럼? 아니면 불안전한 인간 존재의 한계일까? 불량품 같은? 영원히 나아질 수 없는? 나는 어느 정도로 불안전한 사람일까? 어떤 잘못을 얼마나 저질러 왔을까? 나로 인해 불행했을 사람은 얼마나 있었을까?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물음은 끝이 없이 떠오른다.


시간은 흘렀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지? 나의 짧은 인생에 긴 예술의 은혜만을 기다리며 산다. 남은 날들에는 조금씩이라도 덜 나쁘게 살아야 할 텐데. 이 작가가 도와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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