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실로도 어둠을 짤 수 있지 문학동네 시인선 237
조혜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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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시집에서 얻는 게 몇 있다. 구절 몇 개라든가 온전한 시 몇 편이라든가 시집 전체를 통으로 얻는다든가. 시에 담긴 시인의 마음에 완전히 포개지는 일은 없을 것이고, 우리는 많이 다른 사람들이니까. 그래도 쉽게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구절을 만날 때마다 한숨을 쉬며 반한다. 내 안의 시적 영역이 아직 메마르지 않았구나 안도하면서.


시의 언어와 소설의 언어가 내게 전해 주는 아픔의 차이를 생각한다. 소설에서의 아픔은 직접적인 서술로 강하게 와 닿아 몹시 불편해지게 하는데 비해 시에서는 은근히 깊이 베고 머문다. 그리고는 아픈 채로 견디게 한다. 이까짓 것? 아니다. 더 아프게 만들 것을 눈치채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이끈다. 시의 언어에 잡히면 빠져나갈 수가 없다, 어떤 경우에도, 좋아서. 이 시집처럼.


시를 통해 알게 되는, 알게 되었다고 여기게 되는 몇몇 정보들이 가슴 막히게 한다. 이건 좀 나쁜 이야기다 싶은데, 시에서는 따질 수가 없다. 나쁜 사람, 나쁜 세상, 나쁜 사랑, 나쁜 오해들. 시인이 다치는 것인지 시적 화자가 다치는 것인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하고,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쁜 요인으로 다친다면 그것만큼 나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싶고. 나는 띄엄띄엄 시인의 시를 통해 타인의 아픔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나쁜 것들이 더 빨리 자라는 것만 같아서 슬프다.


'여름 불청객'을 몽땅 옮기는 동안 아픔과 행복을 동시에 느끼는 기분을 맛보았다.


무료함도 얼굴도 너의 골목도 이름도 머금고 - P12

자꾸만 틀리는 감정이 부끄러워 사람을 낭비했어 - P14

너는
머물게 하고 싶지만 갔어야 하는 사람
무례하게도 선량한 슬픈 사람 - P17

미안한 마음을 지우려고 바다에 갔다가
독한 마음만 안고 돌아왔다 - P19

사람들은 아직도 서로가 그렇게 소중할까 - P24

마음에 둔다고 둘 수 있는 게 있을까
마음에 든다고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있을까 - P27

모든 것이 나아진다고 해도 아무것도 좋아지지 않을 거야 - P31

너무 맑은 어둠은 자신의 공간에서 사람을 분리한다
그날의 너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내게만 있는 사람 - P37

모든 것이 나아진다고 해도 당신은 그저 그런 당신이라서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내가 쏘아올린 혐오가 비처럼 내리는 것 같아서 - P43

나는 말라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멀리 있는 것에 마음을 두기로 합니다 - P52

차 밖으로 손 흔드는 사람을 보며, 가장 깊은 외로움은 다가설 수 없는 괴로움이라고. - P59

웃고 돌아서면 왜 잘못한 기분이 들까
진심은 무표정을 닮아 무참하고 - P70

어떤 초록은 가슴이 미어져
못 견디게 그리운 사람 같아서 가슴을 뜯어내어 그 길을 걷고 싶게 한다는 것을 - P81

따뜻한 구석을 찾아 헤매면 질투일까 질서일까 사랑했던 사람의 살아 있음을 요란하게 바라보았어요 누구도 기만하지 않는 이야기를 바랐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모른다는 게 아는 것의 전부야 - P92

마음 편히 더 아파 보이기로 익숙한 약속을 하면
익숙함으로 익숙하게 거듭나면
덜 아픈 사람을 멸시하는 것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 - P106

나는 떠나온 자리에 남겨진 것들을 잊을 수 있을까. 해변의 모래처럼 주머니를 뒤집을 때마다 생겨나는 치욕들. - P111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주인공은 어떻게든 죽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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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와 고전부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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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소설(번역된)을 거의 다 읽었다고 알고 있을 정도로 팬인지라 망설이지 않고 구해 본 책이다. 고전부라고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만나 펼쳐지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읽어도 읽어도 지겹지 않고 매번 새로워서 감탄을 했는데, 그 배경에 대해 작가가 친절하게 알려 주겠노라 하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인터뷰 기사를 비롯해서 다른 작가와의 대담도 실려 있고 고전부의 인물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흥미 있게 담아 놓았다. 이 가운데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글은 당연히 신작 단편이었고. 


작가들은, 특히 소설가들은 종종 자신이 쓰는 소설에 대해 소설 밖 세상에 나와 이야기를 한다. 어떤 소설을 쓰려고 하는지, 소설을 통해 꿈꾸는 바가 무엇인지, 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소설을 쓰면서 독자와 세상에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등등. 그런데 이런 물음과 답을 소설가로부터 직접 듣는 것에 대한 내 반응이 소설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이 책으로 알게 되었다. 궁금해서 한마디라도 듣고 싶은 소설가가 있는 반면 소설 자체로 만족스러워서 굳이 더 듣고 싶지는 않은 소설가가 있다는.


이건 뭘까. 어떤 차이에서 생긴 것일까. 내가 얼마나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가의 농도 차이? 아니면 내가 다 이해하지 못했으리라는, 이해하고 싶은데 못했다는 그 한계에서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고 없음의 차이? 더 알고 싶음과 이만하면 되었다의 경계를 아직 확실히 긋지 못했다 보니 오락가락하는 때가 잦기는 한데. 소설가의 친절을 어디까지 받아들이면 좋을지.


단편으로 읽은 이번의 고전부 이야기는 여전히 재미있고 놀라웠다. 이렇게 쓸 수 있기도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아주 가끔은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 볼 때도 있다. 워낙 기억을 못하는 탓도 있고, 그래서 또 읽어도 또 재미를 느낀다. 이 작가의 경우, 내게는 소설만으로 충분한 모양이다. 독자들에게 색다른 선물처럼 들려 주고 싶은 말을 책으로 엮었으리라는 작가와 편집자의 의도는 짐작되지만. 이 작가의 이번 책은 내게 그리 흥미롭지 못했다, 아쉽게도.  (y에서 옮김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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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도가니 - 1993년 제1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상문학상 작품집
최수철 외 / 문학사상사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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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의 수상작 최수철의 소설은 그냥 마음 놓고 읽기에는 수월하지 않다. 재미있는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제잡기가 쉽지도 않다. 그래서 그의 소설 중 어떤 작품은 읽는 도중에서 포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하나라도 다 읽고 나면 참으로 뿌듯해진다. 결국 내가 이 소설을 읽고 말았구나. 그러면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조금이라도 가닥을 잡을 수 있으면 그 기쁨은 더할 나위가 없다. 자신이 공연히 고급독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을 갖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상문학상수상작은 수상집 이름에 이상 시인의 이름을 걸어놓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는 소설을 선정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 국문학의 영역을 한 단계 넓혀줄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그들의 실험성을 인정하면서 우리말과 우리 문학의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수상집의 작품들의 성향들이 대체로 우리들에게는 낯설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다소 낯설게 여겨지는 부분이 남아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작품 하나하나에 작가들이 쏟은 정신의 공이 보인다. 결코 쉽게 읽히는 글이 아니어서 내게는 더 마음에 드는 책이다.  (y에서 옮김20010121)

[인상깊은구절]
현대의 신은 일상이다. 현대에는 일상이 곧 신이다. 일상은 우리를 바위에 단단히 비끄러매어 놓은 뒤 우리를 짐승처럼 마비시켜서 우리의 간과 심장에 살이 붙게 한다. 그리고는 독수리의 부리로 그 살점을 쪼아먹는다. 그러나 그 신은 관대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로 하여금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게끔 세심하게 배려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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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눈이 내리다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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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한 편 공을 들여 읽는 재미. 긴 시간 동안 읽고 잊고 새로 읽고 또 잊고. 다시 펼치면 잊었다가도 되살아나는 앞선 감흥들. 아, 이랬지, 다시 봐도 신기하고 좀 무섭고 그래서 작가가 대단하게 보이고 읽고 있는 내가 기특해지는 기분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세상 무해한 존재가 된다고 했던 말이 칭송으로 들린다.  


모두 9편. 작품집을 내면서 제목이 된 첫 소설 '고래눈이 내리다'와 뒷부분에 실린 '귀신숲이 내리다'로 짝을 맞추었다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책을 내 본 적이 없으니 나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바이지만,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작가들은 글을 싣는 순서에도 정성을 기울이나 보다. 어떤 글을 어디에 배열할 것인? 어떻게 놓아야 독자들의 마음을 흘려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들쑥날쑥이던 작품집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뒤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책. 처음에는 심심했다가 뒤로 갈수록 강렬해지는 책. 처음에 인상적이었다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푹 꺼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책. 처음부터 아니어서 몇 편 보다가 치우게 되는 책.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르게 강했다. 나는 소설로부터 튕겨 나갈 듯하여 한번에 두 편을 읽지 않고 한 편만 읽는 것으로 버티었다. 다 읽기까지 오래 걸린 편이다. 아쉬움도 조바심도 전혀 남지 않는다.


이 작가의 SF적 상상력은 내게 도움이 많이 된다. 나로서는 꿈에도 그려 볼 수 없는 세상이 작가의 이야기로 펼쳐지는데 놀랍고 재미있고 고맙다. 나는 진정 믿고 싶다, 소설 속 세상들이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차원이 달라지든 우주가 달라지든 시공이 달라지든, 있을 수 없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이토록 엉망진창으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이 존재하는데. 사람이라는 존재 역시 시간이 흐른다고 문명이 발달한다고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으니 소설 속 누군가에게 빼앗기면서 이대로 멸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살펴보고 진단하면서 반성하고 깨닫게 하는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니, 재미있는 만큼 암담하다.


SF가 현실을 적극적으로 되비추는 장르라는 데에 갈수록 호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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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의 작은 부엌칼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문기업 옮김 / 문예춘추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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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기는 했는데 읽는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다. 아주 소설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서, 바꾸기 힘든 현실의 문제점을 그대로 견뎌야만 하는 것 같아서, 무기력해지는 의욕을 살릴 길이 보이지 않아서.

먼저 이 소설의 내용과 비슷한 글의 특징을 정리한 몇 가지. 일본소설이다(최근에는 우리 소설에서도 더러 보인다). 주인공은 젊은이. 성장 배경이 원만하지 않아 부모로 인한 결핍이나 상처를 안고 있다. 혼자 애를 써서 도시에서 생활했는데 실패했다(취업이든 연애든 결혼이든 사기를 당했든). 집도 없고 먹고 살 길이 없게 되었는데 시골에 기다려주는 친척 어른이 있다(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이모 등). 시골로 간다. 친척 어른의 도움으로 몸과 마음이 회복된다.

구성의 기본 가지다. 여기에 어떻게 잔가지를 내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가, 어떤 재미를 만들어 낼 것인가, 어떤 배경으로 독자를 이끌어들일 것인가, 작가의 몫이겠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에밀리가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부엌칼로 생선 요리를 배우게 되면서 자신이 입은 상처로부터 점차 회복된다는 내용을 보여 준다. 음식이 주된 소재라 흥미를 느끼며 읽어 나갔는데 익숙한 구성에 충분히 예측되는 결말이다 보니 싱거워지고 말았다. 내가 써 볼 것도 아니면서 이런 방식이라면 나도 쓰겠는 걸 싶은 허무맹랑한 자만심마저 들어버렸으니. 

자연스럽게도 김태리가 주인공으로 나온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다.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잘 먹을 수 있다면, 잘 먹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면, 잘 먹을 수 있을 환경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시골이라고 해도... 그런데 소설일 뿐. 현실과는 아주 동떨어진 그림 속 세상일 뿐. 소설인데 소설로만 읽히는 게 아닌 것이 보이지 않는 힘과 간섭에 속고 있는 느낌이 자꾸 든단 말이지.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쳐 있는 청춘들에게 시골에 가서 잘 먹고 기운 얻어서 돌아오라고 하는 듯이. 마치 이것이 놓치고 있던 진정한 힐링의 포인트라는 듯이.  

주인공이 돌아갈 시골의 배경을 어디로 할 것인가, 부모는 주인공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가, 주인공은 도시에서 누구로부터 어떤 상처를 받았는가, 시골에서는 어떤 일을 하며 지낼 것인가, 하루하루 무엇을 어떻게 요리해 먹을 것인가, 시골에서는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교류할 것인가, 마침내 회복하면서 얻은 새로운 능력은 무엇인가, 도시로 나갈 때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물음만 정리해도 단순하게 보인다. 

다음에는 어떤 책을 읽게 될까? (y에서 옮김202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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