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 시인선 128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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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는다는 것 혹은 견딘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 일일까. 같이 있고 싶은데 떨어져 있는 거리를 참아야 하는 것, 사랑하는데 그 마음을 숨기면서 견뎌야 하는 것, 아픈데 도무지 캄캄하기만 하여 눈물이 날 지경인데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참아야 하는 것... 시를 읽으면서 나는 그 안타까움이 손에 잡혀 이대로 내가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참 무수히도 했다.


이성복의 시는 정신을 차려 읽지 않으면 책장을 그냥 넘겨버리고 말게 된다. 언제 읽었는지도 모르는데 나도 모르게 끝줄에 닿아 있음을 갑자기 깨닫는 때가 종종 있다. 무엇이 그런 집중을 요구하는 것인지, 아마도 그게 시적 긴장이라는 것일 텐데 나로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마음 놓고 편안하게 읽어낼 수는 없는 시라는 것, 읽고 생각하는 공을 들여야만 어렴풋이나마 시인의 마음 한 켠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면 그의 시집을 찾게 된다. 이 시집은 1993년에 발간된 것이므로 이미 10년이 라는 세월을 건넌 셈이다. 그 세월 속에서 무수히 피고 진 꽃들과 나무들. 그 꽃과 나무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사랑은 깊고도 깊다. 마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고스란히 쏟아붓기라도 할 것처럼.


가끔씩은 아주 어려운 생각 속에 파묻히고 싶을 때가 있다. 내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 굳이 풀지 않아도 괜찮은 문제, 그러나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하는 그것만으로도 스스로 가슴 뿌듯한 문제들. 난 그 문제들을 이성복의 시집에서 발견하곤 한다. (y에서 옮김20020313)


[인상깊은구절]

열린 창이여, 나는 너를 통해 아무것도 내보낸 것이 없는데 이렇게 많은 것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구나 지금까지 내가 버린 것이 내가 간직한 것과 다른 것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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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 (완전판) - 살인을 예고합니다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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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보내기에 이만한 추리소설만한 건 없지. 다 알고 있는 듯한 착각만이 남아 있고 실제로 읽은 작품은 몇 되지 않는 작가의 글이다. 집에 20권이 있는데 세 번째로 읽은 책이지 싶다.


아들이 6권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는 게 좋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6권은 단편이고 이 책은 장편이라 나는 이걸 먼저 택했다. 택하고 보니 마플 여사가 나오는 것이었는데 6권에서 마플 여사가 먼저 등장하는 모양이다. 마플 여사는 일찍이 텔레비전 외화 드라마로 만난 적이 있고 내용은 다 잊었으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활약이 대단했다는 인상만은 강하게 남아 있다.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이 없었으니까. 이 책에서도 중반 정도 마플 여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답답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녀가 나타나고부터는 괜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추리소설은 재미가 단연 으뜸이다. 이 작가의 추리 기법들은 너무도 대단하고 치밀하여 현재의 추리소설가들이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단순한 독자인 나로서는 그저 즐거울 따름이다. 사건이 해결되어 나가는 과정을 읽을 때는 독자로서 따라가다가 문득문득 작가의 입장에서 배치했을 사전의 장치들에 머물러 있어 보면(이것조차 결국 작가보다는 늦은 추리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참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범죄 추리 소설에는 어쩔 수 없이 교훈을 담게 되는 것 같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징계하려고 하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 돈에 욕심을 낸다거나 원한을 갚는다거나 복수를 한다거나 하는 설정들, 그러나 그게 결국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만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준다. 이건 이것대로 또 좋다고 본다. 소설을 읽고 좋은 마음, 좋은 다짐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즐거운 독서 시간을 보낸 후에 얻는 깨달음이라면. 그래서 나는 청소년들이 이런 추리 소설을 겨 읽었으면 좋겠다.(범죄자를 추종하는 마음이 드는 부작용은 제외하고서)


덤으로 20세기 초반의 영국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것도 내게는 흥미로운 설정이다. (y에서 옮김201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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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안셔스
연여름 지음 / 황금가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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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으로 반한 작가의 책이다. 이제야 읽은 게 못내 아쉽고 이제라도 읽어서 다행인 글들이었다. 

개인의 불행한 요소와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을 절묘하게 연결시켜 놓은 SF 소설들로 채워져 있다. 입양, 자살, SNS와 덕질, 전염병, 장애인과 이민자, 성소수자, 존엄사 등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신기하고도 마법 같은 환상 세계와 이어져 있는 것이다. 정녕 이러하였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바뀐 공간이 다른 행성이든 다른 우주든 또다른 평행 세계 안이든.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의 현실이 지긋지긋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으니 누구 탓을 해야 할지.

모두 9편. 어느 하나도 놓치게 되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안타깝던지.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일었다. 이게 내 병이지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감정이입, 살아 있는 것들이 온통 가여워서 나는 계속 주제넘는 생각만 했다. 내가 뭘 할 수 있나, 뭘 해야 하나, 고작 글이나 읽고 있을 뿐이면서. SF 소설이 본질적으로 반항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이 소설집에 대한 찬사를 놓을 수가 없었다. 이토록 멋지고도 날카로운 반항이라니. 이대로 우리 사회의 곳곳을 콕콕 찔러 주었으면 싶다. 아프게 또 깊게. 

<제 오류는 아주 심각한 것 같아요>에 나오는 설정이다. 주인공은 어느 행성으로 여행을 떠난다. 6개월이 걸리는데 그동안 동면을 할 수도 있고 내내 깨어 있을 수도 있다. 나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깨어 있는 쪽,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을 얻고 싶다. 설령 심심하고 지겨워서 견디기 힘들 정도라고 하더라도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하여. 모처럼 이런 상상도 해 본다. 이 소설집이 이만큼 좋다.  

리시안셔스는 장미와 비슷해 보이는 꽃의 이름이다. 구해서 키워 보고 싶다. (y에서 옮김202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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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문학과지성 시인선 R 1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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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생각을 따라 읽는 일은 늘 설렌다. 시인이 전하고자 한 바를 제대로 전해 받았다고는 절대로 장담하지 못하겠으나, 시인의 언어와 내 생각이 아주 일부만 겹치면서 만난다고 해도 나로서는 족하다. 그 만남조차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 것인가. 


시인이 한 겹 혹은 여러 겹을 덧씌웠거나 벗겨 놓은 세상,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을 내가 내멋대로 덧씌우고 벗겨서 읽었을 수도 있고, 온전한 현실이든 온전한 허구이든 일부든 아니든 내가 서 있는 땅을 내것이 아닌 다른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눈을 빌려 슬쩍 볼 수 있는 기회, 고마운 일이다. 


이성복 시인의 이 시집을 몰랐다. 몰랐던 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다. 읽어 주었어야 하는데, 진작 읽고 이번에 새로 읽었어야 할 일인데, 진작 읽지 못해 놓쳐 버린 예쁜 구절들을 이제와서 어찌할 것인가. 


일반적인 시집이 아니란다. 외국 시를 읽다가 마음이 머무는 구절을 붙잡았고, 그 구절에 이어 시를 지었단다. 시와 시 사이의 거리감이 꽤 멀지만, 어떤 시는 내 능력으로 연결점을 도무지 이을 수도 없었지만, 구절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거리감은 시인의 삶과 내 삶 사이의 거리감이기도 할 것이므로, 나는 내 몫만 챙겨도 좋았으니까. 


마냥 아름다운 시들은 아니다. 괴기스럽다고 하기도 한단다. 일부 그런 이미지를 그리는 시도 있다. 나는 대체로 괴기스러운 시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성복 시인의 글에서만큼은 괴기스럽다고 하더라도 끔찍하거나 질리거나 무섭지 않다. 그래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고 싶을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100편이다. 이런 구조를 가진 글쓰기, 소박하게 꿈꾼다.  (y에서 옮김20130307)

그날 푸른 사금파리 위 종일 햇빛 내리고 - P12

기다림이 오래 깊어 헛것을 보았던가 - P14

확신하지 않는 것들에게만 돌아오는 물빛 - P16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 P30

오래전부터 한 울음이 울고 있었다. 울음은 엄나무 뿌리와 은모래를 적시고, 남은 울음은 그물에 걸린 새의 부리 속으로 들어갔다. - P58

나날이 내 얼굴 초췌해지는 것은 당신이 내 속에서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 P59

온몸이 집이라면 당신은 어느 문으로 나오겠는가. - P62

아플 만큼 아팠는데 어둠은 자꾸 아프고, 미안한 빛은 꾸물거리며 지나가네. - P64

우리 살아서는 펄펄 끓는 육체의 가마솥에 수제비 같은 사랑 떠 넣는 수밖에.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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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속의 여인 캐드펠 수사 시리즈 6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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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살면서 비밀을 갖게 되기도 한다. 내 비밀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도 모르는 내 비밀이라, 비밀인 줄도 모르게 자라고 있을 나의 서사 몇 조각들. 궁금하지만 궁금한 대로 모르는 채로 살아가게 될 것 같은데. 이번 책에서 알게 되는 캐드펠 수사의 비밀. 당혹스러웠으나 또 이해가 되었고 이쪽 저쪽으로 연결을 잘 시킨 작가의 구성 능력에 감탄했다. 출생의 비밀이 허구의 세계에서는 이토록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다니. 내가 현실 세계의 한 면을 아주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전이 있는 나라에서 살기란 얼마나 고단한 노릇일까. 어느 쪽에 붙어야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래도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민일 것이고. 아무런 권력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평민 계층의 사람들은 언제 어디로부터 삶을 습격당할지 모르는데,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 삶을 지킬 능력도 없고, 나는 이 소설로 또 삶의 속성을 배운다. 살아 남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놀라운 능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캐드펠 수사는 이웃 수도원으로부터 환자 수사를 보살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수사를 돌보면서 실종된 귀족 남매를 찾아야 하는 일에도 얽힌다. 그 안에 사랑도 있고 배신도 있고 범죄도 있고 죄의식도 있고 사람이 갖고 있고 드러낼 수 있는 온갖 감정들이 다 담겨 있다. 캐드펠 수사는 능력도 뛰어나지, 다 헤아리고 다 찾아내고 다 배려한다. 휴 베링어와의 관계는 또 얼마나 멋지고 부러운 모습인지.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벗이 한 명만 있어도 삶이 참으로 부드러워질 것만 같다. 소설이라서 가능한가? 


몇 권 읽었지만 이 작가의 반전 전개에는 익숙하지 않다. 21권을 다 읽도록 끝내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른다.(내 독서 능력이 그래 왔으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듯) 그래서 매우 재미있다. 결말의 평온한 분위기만큼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위기-절정 대목에서는 두근두근한다. 어쩌겠는가, 그만큼 실감나게 묘사가 되어 있는 것을. 


주요 인물들은 이어져 있으나 사건은 독립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12세기, 잉글랜드 내전, 십자군 원정, 베네딕도 수도원, 이들 배경이 상당히 흥미롭다. 호감으로 관심을 계속 키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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