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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R 1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평점 :
시인의 생각을 따라 읽는 일은 늘 설렌다. 시인이 전하고자 한 바를 제대로 전해 받았다고는 절대로 장담하지 못하겠으나, 시인의 언어와 내 생각이 아주 일부만 겹치면서 만난다고 해도 나로서는 족하다. 그 만남조차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 것인가.
시인이 한 겹 혹은 여러 겹을 덧씌웠거나 벗겨 놓은 세상,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을 내가 내멋대로 덧씌우고 벗겨서 읽었을 수도 있고, 온전한 현실이든 온전한 허구이든 일부든 아니든 내가 서 있는 땅을 내것이 아닌 다른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눈을 빌려 슬쩍 볼 수 있는 기회, 고마운 일이다.
이성복 시인의 이 시집을 몰랐다. 몰랐던 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다. 읽어 주었어야 하는데, 진작 읽고 이번에 새로 읽었어야 할 일인데, 진작 읽지 못해 놓쳐 버린 예쁜 구절들을 이제와서 어찌할 것인가.
일반적인 시집이 아니란다. 외국 시를 읽다가 마음이 머무는 구절을 붙잡았고, 그 구절에 이어 시를 지었단다. 시와 시 사이의 거리감이 꽤 멀지만, 어떤 시는 내 능력으로 연결점을 도무지 이을 수도 없었지만, 구절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거리감은 시인의 삶과 내 삶 사이의 거리감이기도 할 것이므로, 나는 내 몫만 챙겨도 좋았으니까.
마냥 아름다운 시들은 아니다. 괴기스럽다고 하기도 한단다. 일부 그런 이미지를 그리는 시도 있다. 나는 대체로 괴기스러운 시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성복 시인의 글에서만큼은 괴기스럽다고 하더라도 끔찍하거나 질리거나 무섭지 않다. 그래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고 싶을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100편이다. 이런 구조를 가진 글쓰기, 소박하게 꿈꾼다. (y에서 옮김20130307)
그날 푸른 사금파리 위 종일 햇빛 내리고 - P12
기다림이 오래 깊어 헛것을 보았던가 - P14
확신하지 않는 것들에게만 돌아오는 물빛 - P16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 P30
오래전부터 한 울음이 울고 있었다. 울음은 엄나무 뿌리와 은모래를 적시고, 남은 울음은 그물에 걸린 새의 부리 속으로 들어갔다. - P58
나날이 내 얼굴 초췌해지는 것은 당신이 내 속에서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 P59
온몸이 집이라면 당신은 어느 문으로 나오겠는가. - P62
아플 만큼 아팠는데 어둠은 자꾸 아프고, 미안한 빛은 꾸물거리며 지나가네. - P64
우리 살아서는 펄펄 끓는 육체의 가마솥에 수제비 같은 사랑 떠 넣는 수밖에.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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