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와 시인의 마음을 받아쓰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필사 에세이
유희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갑자기 여름이 지나가 버렸다. 온다는 인사도 없이 곁에 와 있는 가을, 여름 끝자락에 받은 이 책을 이 가을에 읽고 따라 쓴다. 꽤나 근사한 가을맞이다.


책 제본부터 인상적이다. 표지는 아주 두껍고 튼튼하며 여기에 창을 내어 속을 들여다 보게 한다. 큰 나무 아래서 책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나였으면 좋겠다. 표지를 넘기니 작가의 사인도 있다. 이런 횡재까지!!! 나는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작가가 천천히 오라고 하였으니 작가의 말을 충실하게 들을 작정이다.


모두 25편의 글. 먼저 순서대로 전체를 읽는다. 편집이 재미있다.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본문의 일부를 손글씨로 옮겨 놓은 것이 보인다. 작가의 어머니의 글씨라고 한다. 다음 장에는 편집 측에서 뽑은 글이 나오고 밑줄이 그어져 있는 여백도 마련되어 있다. 독자님도 따라 써 보라는 듯하다. 


두 번째 읽으면서 나는 내 수준의 반항을 한다. 손글씨에 적힌 대목도 편집 측에서 제시한 대목도 아닌 곳에서 나만의 구절을 발견하려고 용을 쓴다.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헛된 반항심을 접는다.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책의 여백에 옮겨 쓰는 대신 타이핑을 한다. 그리고 여기에 올린다. 25편의 글 모두에서 다 얻지 못한 것을 미련으로 남겨 둔다. 


이번에도 이 시인의 산문에 만족한다. 정녕 시집 서점의 주인인 이 시인을 만나 뵈러 가야 하나 어쩌나? 


<우주님, 고마워요.>






문에는 턱이 있지. 그러니 닳겠지. - P18

마음의 각도가 아슬해지고 애틋해지면,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가보는 것이 상책이다. - P24

투명하지도 않으면서 투명해지려고 하는 사랑. - P38

답장이 어려운 것은 당신이 어렵기 때문이다. - P44

어쩌면 인생이란, 삶이란 숱한 사람과 주고받은 선물과 거기 담긴 추억으로 이어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 P57

불안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모르겠음이 부끄러운 상태가 아니듯. - P65

이 슬픔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 P72

나는 ‘시’라는 것이 한 만년쯤 있었으면 좋겠다. - P82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 대 믿고 있던 세계는 느닷없이 투명해진다. - P89

내가 혼자 있음을 좋아하는 건 한껏 느려져도 되기 때문이다. - P97

기억은 죽어버린 일들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 P107

버스가 아니었다면 대체 어디서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발견할 것이며, 요즘 유행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리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 P113

일요일의 서점에서 구매한 일요일의 시집. - P122

어디든 가도 된다는 것은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 P141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지만 혼자서 한다. - P172

어쩌면 늙는다는 것은 단어를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 P181

‘창밖’은 세 종류가 있다. 닫힌 창밖, 열린 창밖, 기억 속의 창밖. - P187

낡아가는 건 우리일지도 몰라, - P20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10-07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09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 시인선 128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는다는 것 혹은 견딘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 일일까. 같이 있고 싶은데 떨어져 있는 거리를 참아야 하는 것, 사랑하는데 그 마음을 숨기면서 견뎌야 하는 것, 아픈데 도무지 캄캄하기만 하여 눈물이 날 지경인데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참아야 하는 것... 시를 읽으면서 나는 그 안타까움이 손에 잡혀 이대로 내가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참 무수히도 했다.


이성복의 시는 정신을 차려 읽지 않으면 책장을 그냥 넘겨버리고 말게 된다. 언제 읽었는지도 모르는데 나도 모르게 끝줄에 닿아 있음을 갑자기 깨닫는 때가 종종 있다. 무엇이 그런 집중을 요구하는 것인지, 아마도 그게 시적 긴장이라는 것일 텐데 나로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마음 놓고 편안하게 읽어낼 수는 없는 시라는 것, 읽고 생각하는 공을 들여야만 어렴풋이나마 시인의 마음 한 켠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면 그의 시집을 찾게 된다. 이 시집은 1993년에 발간된 것이므로 이미 10년이 라는 세월을 건넌 셈이다. 그 세월 속에서 무수히 피고 진 꽃들과 나무들. 그 꽃과 나무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사랑은 깊고도 깊다. 마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고스란히 쏟아붓기라도 할 것처럼.


가끔씩은 아주 어려운 생각 속에 파묻히고 싶을 때가 있다. 내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 굳이 풀지 않아도 괜찮은 문제, 그러나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하는 그것만으로도 스스로 가슴 뿌듯한 문제들. 난 그 문제들을 이성복의 시집에서 발견하곤 한다. (y에서 옮김20020313)


[인상깊은구절]

열린 창이여, 나는 너를 통해 아무것도 내보낸 것이 없는데 이렇게 많은 것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구나 지금까지 내가 버린 것이 내가 간직한 것과 다른 것이 아니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 (완전판) - 살인을 예고합니다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시간을 보내기에 이만한 추리소설만한 건 없지. 다 알고 있는 듯한 착각만이 남아 있고 실제로 읽은 작품은 몇 되지 않는 작가의 글이다. 집에 20권이 있는데 세 번째로 읽은 책이지 싶다.


아들이 6권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는 게 좋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6권은 단편이고 이 책은 장편이라 나는 이걸 먼저 택했다. 택하고 보니 마플 여사가 나오는 것이었는데 6권에서 마플 여사가 먼저 등장하는 모양이다. 마플 여사는 일찍이 텔레비전 외화 드라마로 만난 적이 있고 내용은 다 잊었으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활약이 대단했다는 인상만은 강하게 남아 있다.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이 없었으니까. 이 책에서도 중반 정도 마플 여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답답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녀가 나타나고부터는 괜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추리소설은 재미가 단연 으뜸이다. 이 작가의 추리 기법들은 너무도 대단하고 치밀하여 현재의 추리소설가들이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단순한 독자인 나로서는 그저 즐거울 따름이다. 사건이 해결되어 나가는 과정을 읽을 때는 독자로서 따라가다가 문득문득 작가의 입장에서 배치했을 사전의 장치들에 머물러 있어 보면(이것조차 결국 작가보다는 늦은 추리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참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범죄 추리 소설에는 어쩔 수 없이 교훈을 담게 되는 것 같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징계하려고 하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 돈에 욕심을 낸다거나 원한을 갚는다거나 복수를 한다거나 하는 설정들, 그러나 그게 결국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만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준다. 이건 이것대로 또 좋다고 본다. 소설을 읽고 좋은 마음, 좋은 다짐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즐거운 독서 시간을 보낸 후에 얻는 깨달음이라면. 그래서 나는 청소년들이 이런 추리 소설을 겨 읽었으면 좋겠다.(범죄자를 추종하는 마음이 드는 부작용은 제외하고서)


덤으로 20세기 초반의 영국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것도 내게는 흥미로운 설정이다. (y에서 옮김201809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시안셔스
연여름 지음 / 황금가지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처음으로 반한 작가의 책이다. 이제야 읽은 게 못내 아쉽고 이제라도 읽어서 다행인 글들이었다. 

개인의 불행한 요소와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을 절묘하게 연결시켜 놓은 SF 소설들로 채워져 있다. 입양, 자살, SNS와 덕질, 전염병, 장애인과 이민자, 성소수자, 존엄사 등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신기하고도 마법 같은 환상 세계와 이어져 있는 것이다. 정녕 이러하였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바뀐 공간이 다른 행성이든 다른 우주든 또다른 평행 세계 안이든.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의 현실이 지긋지긋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으니 누구 탓을 해야 할지.

모두 9편. 어느 하나도 놓치게 되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안타깝던지.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일었다. 이게 내 병이지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감정이입, 살아 있는 것들이 온통 가여워서 나는 계속 주제넘는 생각만 했다. 내가 뭘 할 수 있나, 뭘 해야 하나, 고작 글이나 읽고 있을 뿐이면서. SF 소설이 본질적으로 반항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이 소설집에 대한 찬사를 놓을 수가 없었다. 이토록 멋지고도 날카로운 반항이라니. 이대로 우리 사회의 곳곳을 콕콕 찔러 주었으면 싶다. 아프게 또 깊게. 

<제 오류는 아주 심각한 것 같아요>에 나오는 설정이다. 주인공은 어느 행성으로 여행을 떠난다. 6개월이 걸리는데 그동안 동면을 할 수도 있고 내내 깨어 있을 수도 있다. 나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깨어 있는 쪽,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을 얻고 싶다. 설령 심심하고 지겨워서 견디기 힘들 정도라고 하더라도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하여. 모처럼 이런 상상도 해 본다. 이 소설집이 이만큼 좋다.  

리시안셔스는 장미와 비슷해 보이는 꽃의 이름이다. 구해서 키워 보고 싶다. (y에서 옮김20250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문학과지성 시인선 R 1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의 생각을 따라 읽는 일은 늘 설렌다. 시인이 전하고자 한 바를 제대로 전해 받았다고는 절대로 장담하지 못하겠으나, 시인의 언어와 내 생각이 아주 일부만 겹치면서 만난다고 해도 나로서는 족하다. 그 만남조차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 것인가. 


시인이 한 겹 혹은 여러 겹을 덧씌웠거나 벗겨 놓은 세상,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을 내가 내멋대로 덧씌우고 벗겨서 읽었을 수도 있고, 온전한 현실이든 온전한 허구이든 일부든 아니든 내가 서 있는 땅을 내것이 아닌 다른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눈을 빌려 슬쩍 볼 수 있는 기회, 고마운 일이다. 


이성복 시인의 이 시집을 몰랐다. 몰랐던 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다. 읽어 주었어야 하는데, 진작 읽고 이번에 새로 읽었어야 할 일인데, 진작 읽지 못해 놓쳐 버린 예쁜 구절들을 이제와서 어찌할 것인가. 


일반적인 시집이 아니란다. 외국 시를 읽다가 마음이 머무는 구절을 붙잡았고, 그 구절에 이어 시를 지었단다. 시와 시 사이의 거리감이 꽤 멀지만, 어떤 시는 내 능력으로 연결점을 도무지 이을 수도 없었지만, 구절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거리감은 시인의 삶과 내 삶 사이의 거리감이기도 할 것이므로, 나는 내 몫만 챙겨도 좋았으니까. 


마냥 아름다운 시들은 아니다. 괴기스럽다고 하기도 한단다. 일부 그런 이미지를 그리는 시도 있다. 나는 대체로 괴기스러운 시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성복 시인의 글에서만큼은 괴기스럽다고 하더라도 끔찍하거나 질리거나 무섭지 않다. 그래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고 싶을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100편이다. 이런 구조를 가진 글쓰기, 소박하게 꿈꾼다.  (y에서 옮김20130307)

그날 푸른 사금파리 위 종일 햇빛 내리고 - P12

기다림이 오래 깊어 헛것을 보았던가 - P14

확신하지 않는 것들에게만 돌아오는 물빛 - P16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 P30

오래전부터 한 울음이 울고 있었다. 울음은 엄나무 뿌리와 은모래를 적시고, 남은 울음은 그물에 걸린 새의 부리 속으로 들어갔다. - P58

나날이 내 얼굴 초췌해지는 것은 당신이 내 속에서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 P59

온몸이 집이라면 당신은 어느 문으로 나오겠는가. - P62

아플 만큼 아팠는데 어둠은 자꾸 아프고, 미안한 빛은 꾸물거리며 지나가네. - P64

우리 살아서는 펄펄 끓는 육체의 가마솥에 수제비 같은 사랑 떠 넣는 수밖에. - P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