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여름이 지나가 버렸다. 온다는 인사도 없이 곁에 와 있는 가을, 여름 끝자락에 받은 이 책을 이 가을에 읽고 따라 쓴다. 꽤나 근사한 가을맞이다.
책 제본부터 인상적이다. 표지는 아주 두껍고 튼튼하며 여기에 창을 내어 속을 들여다 보게 한다. 큰 나무 아래서 책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나였으면 좋겠다. 표지를 넘기니 작가의 사인도 있다. 이런 횡재까지!!! 나는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작가가 천천히 오라고 하였으니 작가의 말을 충실하게 들을 작정이다.
모두 25편의 글. 먼저 순서대로 전체를 읽는다. 편집이 재미있다.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본문의 일부를 손글씨로 옮겨 놓은 것이 보인다. 작가의 어머니의 글씨라고 한다. 다음 장에는 편집 측에서 뽑은 글이 나오고 밑줄이 그어져 있는 여백도 마련되어 있다. 독자님도 따라 써 보라는 듯하다.
두 번째 읽으면서 나는 내 수준의 반항을 한다. 손글씨에 적힌 대목도 편집 측에서 제시한 대목도 아닌 곳에서 나만의 구절을 발견하려고 용을 쓴다.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헛된 반항심을 접는다.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책의 여백에 옮겨 쓰는 대신 타이핑을 한다. 그리고 여기에 올린다. 25편의 글 모두에서 다 얻지 못한 것을 미련으로 남겨 둔다.
이번에도 이 시인의 산문에 만족한다. 정녕 시집 서점의 주인인 이 시인을 만나 뵈러 가야 하나 어쩌나?
<우주님, 고마워요.>



문에는 턱이 있지. 그러니 닳겠지. - P18
마음의 각도가 아슬해지고 애틋해지면,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가보는 것이 상책이다. - P24
투명하지도 않으면서 투명해지려고 하는 사랑. - P38
답장이 어려운 것은 당신이 어렵기 때문이다. - P44
어쩌면 인생이란, 삶이란 숱한 사람과 주고받은 선물과 거기 담긴 추억으로 이어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 P57
불안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모르겠음이 부끄러운 상태가 아니듯. - P65
나는 ‘시’라는 것이 한 만년쯤 있었으면 좋겠다. - P82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 대 믿고 있던 세계는 느닷없이 투명해진다. - P89
내가 혼자 있음을 좋아하는 건 한껏 느려져도 되기 때문이다. - P97
기억은 죽어버린 일들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 P107
버스가 아니었다면 대체 어디서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발견할 것이며, 요즘 유행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리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 P113
일요일의 서점에서 구매한 일요일의 시집. - P122
어디든 가도 된다는 것은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 P141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지만 혼자서 한다. - P172
어쩌면 늙는다는 것은 단어를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 P181
‘창밖’은 세 종류가 있다. 닫힌 창밖, 열린 창밖, 기억 속의 창밖.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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