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딸이다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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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김 없이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도 능력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남의 마음을 그려 내는 것보다 내 마음을 그려 내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추측하는 것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둘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추측하는 게 좀 덜 힘들 것 같다. 내 마음을 내가 지켜 보는 일, 제대로 한다면 이게 참 곤란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다.


작가가 보여 주는 여자의 마음, 이번 책은 엄마와 딸의 마음을 그려 내고 있다. 엄마는 엄마라서, 딸은 딸이라서, 친한 듯 친하지 않을 수도 있는 관계. 나는 이런 사정이 우리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데 더 놀랐다. 이런 마음의 지도도 인간의 역사에서는 보편적인 모습이었구나, 우리나라나 영국이나 지금이나 옛날이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나 엄마와 딸의 관계나 참 묘하게도 신경이 쓰인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다는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가까운 가족끼리도 이렇게 엄청난 갈등을 품고 있을 수 있다니. 


질투라는 감정이 보다 근원적인 문제인 것일까. 내가 제일 잘나고 싶은 마음, 내가 제일 먼저이고 싶은 마음, 내가 제일 대접받고 싶은 마음 따위들. 그래서 질투에 사로잡히고 말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일까. 엄마든 딸이든, 혹은 세상의 그 누가 되든. 심지어 어떤 이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질투하기도 하니까.  


사는 게 편하니까, 먹고 살 걱정이 없으니까, 이런 문제로 갈등을 겪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이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로 가진 쪽 사람들이라 경제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는 상황으로 등장한다. 그러니 미묘한 심리 다툼이 가능한 것일 테다. 네가 날 어떻게 여기느냐, 네가 날 어떻게 대하느냐에 온 신경을 기울이면서 그에 맞춰 대응하려고 하니 자연히 힘겨루기가 되는 모양새다. 이 소설의 특징은 이걸 엄마와 딸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고. 


나도 한번 생각해 본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딸을.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내 처지를. 소설 속 상황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그런가 공감대를 못 찾겠다. 아니면 먹고 사는 문제가 있어서 우리 사이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럼에도 이렇게 적나라하게 인간의 심성을 보여 주는 작가의 글에는 감탄하게 된다. 아무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y에서 옮김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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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의 이런 하루 ㅣ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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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날이 그리 대단하지도 벅차지도 않다는 것을, 오히려 그날이 그날같고 내일도 오늘같을 것임을. 그래서 늘 비일상적인 것을 꿈꾸게 되고 이벤트를 마련하려고 하는 것일 테다.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삶이 마치 지루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루한 것을 견디는 일은 죄를 짓는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럴 수도 있다. 지루하니까 새로운 무언가를 꿈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늘 비슷비슷한 일상이 잘못된 것은 아닐 테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 생겼을 경우, 해결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 생겼을 경우 우리는 평온한 일상을 얼마나 그리워하게 되던가. 집을 떠나 돌아다니고 싶어하다가도 막상 떠나서는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어한 마음은 얼마나 간절했던가.


평범함의 고마움을 안다. 특별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기도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나이 드신 부모님과 나이 들어가는 딸이 함께 살아가는 집 이야기. 딸이 결혼적령기를 넘어 선 셈이니 부모로서는 걱정이 되기도 할 테지만, 여전히 결혼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염려하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가족간의 투닥거림과 토닥임이 정겹게 보이는 책이다. 아쉬운 대로 이렇게 함께 나이 들어 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가 가진 기본 마음가짐이나 생각에 내가 공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편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 (y에서 옮김201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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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치라이트와 유인등 ㅣ 에리사와 센 시리즈 1
사쿠라다 도모야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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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을 연달아 읽는다. 에리사와 센의 활약담을 이어서 본 셈이다. 책이 나온 순서가 바뀌었지만 별로 상관이 없었다. 특히 사서 보는 책이 아니라 공공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인데 이렇게 때를 맞추게 되면 만족도가 상당히 높아진다. 이 재미있는 책을 나만 읽고 있는 것일까? 혼자 흐뭇하게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두 권을 읽었지만 아직도 에리사와 센의 본 모습을 알지는 못하겠다. 곤충을 찾아다니는, 관찰력과 추리력을 갖춘, 겉보기로는 어수룩한 인물이라고 할 정도. 그러나 자신이 직접 겪은 사건에서도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중요한 핵심을 짚어서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작가 쪽에서 말한다면 이런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을 창조했다는 뜻이 되겠지. 적어도 잘나 보여서 괜한 미움이나 질투를 받을 일은 없겠다 싶은 캐릭터다. 앞으로 무슨 일이 얼마나 더 다양하게 에리사와에게 닥칠지는 읽는 내 쪽에서 기대할 일이고. 


더운 여름날에는 나의 고단한 현실과 떨어져 있는 이야기 속에 묻혀 있는 것도 더위를 피하는 방법이 될 것 같다. 공포까지는 무서워서 내 취향이 아니고 이 책처럼 추리나 미스터리 영역의 이야기는 내게 딱 알맞다. 당분간 이쪽 관련 이야기를 계속 구해 보아야겠다. 다른 다짐을 하고 싶지도 않고 할 동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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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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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 서 보게 한다. 내 것이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 죽음. 앞서 이 작가의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읽은 후 이 제목의 책을 냈다고 하여 궁금해서 빌린 책인데 앞책에 비해 다가오는 무게가 갑절 이상이다. 거대하고 조심스럽고 두렵다. 죽음 앞에서 정녕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겪은 가족의 죽음을 떠올려본다. 몇 가지로 나뉘어진다.

1. 외할머니-환갑을 갓 넘으셨을 때 아무런 병 없이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2. 아버지-마흔아홉에 말기 암 진단, 수술 한 번 후 3개월만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3. 시부모님-노화에 따른 당뇨와 뇌졸중 등의 병으로 몇 년 동안 수차례 병원을 다니시다 돌아가셨다.  

4. 할머니-백열 세, 몸도 마음도 아픈 곳 없이 다만 기력이 떨어져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2년 정도 요양원에서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5. 남편의 숙부님-암 진단, 수술 거부, 진통제의 도움만 받으시면서 1년 반 후에 돌아가셨다.

 

이쯤 쓰고 보니 이 책 속의 사례들과 겹친다. 결국 죽음의 유형도 비슷하다는 뜻이겠다. 특별히 불운한 사고가 아니라면 늙어서 죽든가 늙어서 아파 죽든가. 내 죽음 또한 이 유형에서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죽는 게 끝까지 사람다움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그럴 수 있기는 한가? 좋은 죽음이라는 게 있는가?  

 

의사인 작가는 죽어 가는 환자들을 보면서 많은 갈등을 겪는다. 어떤 처치가 환자를 위한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지금의 의료 상황이 환자 본인보다는 병원의 입장, 간병인의 입장을 더 우선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나 또한 잘 모르면서 그 상황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면 가족을 힘들게 하는 것보다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게 여러 모로 낫다고 여기면서. 정말 몰라서, 죽음이라는 게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지 몰라서 이제까지 잘못 생각해 왔던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몸의 존엄, 마음의 존엄.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도 답답하다. 내 죽음을 처리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내가 죽음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내 의사만이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사는 일도 이렇게나 고단한데 이제는 죽는 일조차 미리 헤아려 두어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자칫하면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두렵고, 그렇다고 아직 죽지도 않았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레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작가는 의사로서 느끼는 안타까움을 잔뜩 담아서 말하고 있다. 완전한 해결책은 없지만 조금 더 나은 방법을 찾고는 있다고. 억지로 살려 두는 것만이 환자를 위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말에는 마음이 떨리기까지 했다. 그렇지, 의사로서도 환자 가족들의 어떤 선택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내 죽음을, 내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도무지 모르겠다. 어렴풋이 방향은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기는 해도 이런 일은 정작 마주쳐야만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이에 따라 점점 몸의 부분들에 고장 신호가 온다. 약해지고 어긋나고 돌이킬 수 없어지고. 살아 있지만, 굳이 죽음에 매달릴 것까지는 없겠지만, 아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생각은 깊고, 마음이 어두워질 따름이다. 그래도 이 책을 읽은 것은 정말 다행이다.  (y에서 옮김20190809) 

결국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조망할 때는 단순히 매 순간을 평균 내서 평가하지 않는다. 어차피 삶은 대부분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간다. 인간에게 삶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한 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단위라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구도는 의미 있는 순간들, 즉 무슨 일인가 일어났던 순간들이 모여서 결정된다. 사람들이 매 순간 느끼는 즐거움과 고통을 측정한다는 건 인간의 근본적인 면을 간과하는 행위다. 겉으로는 곤경에 처한 것 같은 삶이 실은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경험하는 자아-순간에 몰입하는 자아-와 달리 기억하는 자아는 기쁨의 정점이나 비참함의 심연만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인식하려 한다. 그리고 이는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끝나는지에 따라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미식축구 팬이 마지막 몇 분 동안 일이 잘 안 풀렸다고 해서 이전 세 시간 동안 행복했던 시간을 모두 망쳤다고 기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경기가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에서는 결말이 중요하다. - P364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우리의 우선순위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이 무언지 불확실할 때는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기나긴 고통과 짧은 기쁨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 중에는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정점도 중요하고, 종점도 중요하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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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은 이제 개를 키우지 않는다 ㅣ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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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들끼리 함께 살 수 있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낯설다. 이전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살아갈 날이 얼마 남았을까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주어지는 매일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이 여겼으며, 내일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염려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일이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살아 있다는 게, 살아 있기만 하다는 게 마냥 행복하고 축복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장수는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고통이 될 것이라고 하니 막연한 두려움까지 인다.

 

그래서 이 만화도 낭만스럽게 읽지 못했다. 전혀 무겁지 않고 궁색하지 않게 그리고 있음에도 그림 사이사이, 글 사이사이로 시대의 우울을 읽는다. 40세의 독신 여성이 70세의 부모님과 함께 사는 이야기. 개를 키우는 일에 부담을 느끼는 나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아버렸을 때의 막막함, 그저 단순히 아끼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의 슬픔을 넘어 아주 오래 지켜본 후에 인정하는 체념 같은 것에 공감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아픈 슬픔이 아니라 약간 달콤한 슬픔 정도?

 

사는 게 그리 특별할 게 없다는 것을 매일 매순간 느끼면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고 사는 우리.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야말로 살아가는 데 지극히 행복한 여정인 것을 꼭 어긋난 것에 치이고 다치고 나서 깨닫곤 한다. 나이를 먹어도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고, 나이를 먹어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 일상을 보낼 수 있고, 적당한 지혜와 한껏 깊어진 여유로 조급하지 않게 살 수 있다면, 게다가 그 울타리가 가족을 안고 있다면 그건 참 행복한 모습일 텐데. 나는 사와무라 씨 댁 세 사람이 그지없이 평화로워 보이기만 한다.

 

달라지는 세태가 너무 빠르다 싶어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제 알 만큼 되었을 것 같다. 헛된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가뿐한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시절이다. 성공과 야망의 방향과 내용이 달라졌고, 삶의 의미와 가족의 중요성이 새삼스러워졌다. 밖에서 많이 떠돌았던 나의 관심과 열정들, 이제는 우리 가족 안으로 모아 들여야겠다는 내 생각이 마음에 든다. 늦지는 않았으리라 믿으면서. (y에서 옮김201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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