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작가 생활
존 스칼지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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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제발. 정신줄 좀 잡으시라. 이 한 문장에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네. 하나만 들겠다. 환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작가가 환상을 가져봐야 하나 쓸모가 없다. 자신의 재능, 출판계의 상황,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생에 대해 환상을 가진 작가는 분명 계속해서 실망하게 된다. 현실은 당신의 환상에 전혀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반면, 당신이 잘하는 게 뭔지, 출판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당신의 일반적인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면, 작가로서의 당신의 꿈(책이 정식으로 출판되는 것 포함)을 실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p.152

 

이 책의 원제는 ' You're Not Fooling Anyone When You Take Your Laptop to a Coffee Shop(노트북을 들고 커피숍에 가봤자 아무도 속일 수 없어)'이다. 제목만큼이나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하고, 뼈를 때리는 직언으로 가득하지만, 그만큼 또 너무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노인의 전쟁> 시리즈를 비롯, <상호의존성단> 시리즈 등 20여 년간 수많은 SF 소설을 발표해온 존 스칼지가 2001년부터 2006년 초까지 5년간 자신의 개인 블로그 Whatever에 썼던 에세이를 엮었다. 글쓰기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과 금전적인 부분을 비롯한 작가 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작가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들과 SF에 관련된 이야기를 수록했다.

 

글쓰기를 다루는 책이지만, 글쓰기 방법에 관한 책은 아니라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책은 그보다는 작가들이 다른 작가들과 소통하는 방법, 각기 종류가 다른 글에 대한 다양한 생각, 작가와 출판사, 작가와 독자의 소통 방법, 그리고 작가들의 돈벌이에 대해 극사실적인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 무엇보다 스칼지 특유의 블랙 유머와 촌철살인 멘트들이 재미를 주는데, 작가가 되고 싶어요. 뭘 하면 되죠? 라는 질문에 "이런, 글을 써야죠. 멍청한 양반아" 라고 대답한다던가, 글을 한두 편 팔았으니 이제 본업을 그만둬도 되냐는 질문에 "맙소사, 안 된다. 멍청한 짓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여러분보다 재능은 부족한데 돈은 더 많이 버는 사람은 언제든지 있다. 왜냐고? 인생은(그리고 출판계는) 변덕스럽고 잔인하다"고 하는 식이라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내가 만난 고용 작가 중에는 글쓰기가 거룩한 사명이며 영혼의 표현이라는 등등의 헛소리를 끝없이 토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는 전기요금을 내는 문제에서는 뒷전으로 밀리기 때문이고, 어떤 작가가 '말로만 말고 실제로 보여 줘야' 하는 일을 지금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면 그 일에 대해 따로 지껄일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또는 그래야만 한다. 사실 나는 누가 나에게 글쓰기의 거룩한 사명에 대해 지껄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이 물속에서 흡혈 거머리에 뒤덮인 채 점차 산소 부족으로 새파래져 가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재미있어 할 것 같다. 그렇다. 꽤 그럴싸한 이미지다.                p.284

 

존 스칼지가 들려주는 조언들은 그 어떤 글쓰기 강의에서도 얻을 수 없는 팁들이다. 글쓰기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작가란 글쓰기가 낭만적이고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하지 않아도 어쨌든 써야 하는 직업이라는 경고, 그리고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들이 종사하려는 직업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등 프로 작가 경력이 어느 정도 되어야만 알 수 있는 현실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가감없이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작가의 급여가 낮아지게 만드는 비밀, 작가의 고료가 매우 짠데도 불구하고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 출판계에서 연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쓰는 글의 차이점, 원고를 거절하는 방법 등등 작가와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궁금했던 내용이 가득 들어있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 일반인을 위한 글쓰기 팁'도 있다. 작가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글을 더 잘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이다. 자신이 쓴 것을 소리 내어 읽어보고, 구두점을 언제 찍어야 하는지 공부하고, 문장은 긴 것보다 짧은 게 낫고, '빌어먹을' 철자법을 제대로 배워야 하고, 제대로 모르는 단어는 쓰면 안 되며, 요점을 앞에 배치해야 한다는 등 존 스칼지가 알려주는 10가지 팁들은 작가 지망생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다. 현실의 출판 계약, 작가의 수입, 책에 대한 비평, 불법 복제와 저작권, 작가 워크숍 등 20여 년 전에 쓰인 책이지만, 기술적인 일부분을 제외하고 출판계의 현실이 당시와 다르지 않다는 점도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 준다. 작가를 직업으로 하고 싶다면, 출판계 현실이 궁금하다면, 작가 생활의 실제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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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천개산 패밀리 1~2 세트 - 전2권 특서 어린이문학
박현숙 지음, 길개 그림 / 특서주니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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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이 다 나쁜 건 아니야. 좋은 사람도......"
"시끄러워! 너는 똥 더미 위에서 굶고 살았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고 싶니? 네 주인이 누군지 나는 몰라. 하지만 너를 짧은 줄로 묶어 놓고 밥도 안 주었던 걸 보면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나는 살면서 좋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썩은 음식 쓰레기를 주던 농장 주인, 트럭을 몰고 왔던 그 남자, 다 똑같았어."
나는 목에서 넘어오는 울음을 꿀꺽 삼켰다.         - 1권, p.57

 

최근에 충격적인 뉴스 보도를 본 적이 있다. 경기도 화성에서 최대 규모의 불법 강아지 번식장이 적발됐는데, 그곳에서 심각한 동물학대행위가 일어나고 있었던 거다. 무려 1400여 마리가 있는 불법 개번식장의 사진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믿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행히 보도된 곳의 개들은 모두 구조가 되었지만, 사실 알려지지 않은 곳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만약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방치하고 사육한 인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 끔찍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개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편에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천개산 패밀리>는 초등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수상한 시리즈>의 박현숙 작가가 새롭게 시작하는 시리즈이다. 기존 수상한 시리즈가 아파트를 시작으로, 우리 반, 학원, 친구 집, 식당, 편의점, 도서관, 화장실, 운동장, 기차역, 방송실, 놀이터, 지하실, 교장실 등 일상 속 아이들에게 친근한 장소들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면, 이번에는 천개산에 모여 사는 유기견들의 이야기이다. 천개산 산66번지에는 모두 다섯 마리의 개가 살고 있다. 철창 안에서 냄새나는 음식 쓰레기를 먹으며 살다 그 끔찍한 개 농장에서 탈출한 얼룩이, 어깨가 쫙 벌어지고 덩치도 큰 대장, 길고 긴 하얀 털을 가진 덩치가 작은 바다, 주인이 이사 가 버린 빈 동네에 버려진 진돗개 번개, 길에서 똥 더미 위에 묶여 있다가 탈출한 미소까지 모두 주인에게 버려졌거나 방치되어 있다 탈출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개들이다. 그들은 천개산에서 서로 어울려 살면서 때로는 다투기도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위하며 가족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럼 그 사람도 마을 사람들과 같이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거야? 너무해. 우리가 의심을 받고 누명을 쓰고 있으면 절대 천개산 들개들 짓이 아니라고 우리 편을 들어 주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 사람에게 체온을 나눠 주다가 얼마나 아팠는데. 어쩜 그럴 수가 있어? 먹이를 물고 계곡으로 내려가다가 미끄러져서 다치기도 했단 말이다. 그리고 대장과 번개가 싸운 것도, 번개가 여기를 떠난 것도 그 사람 때문이라고. 은혜도 모르는 사람 같으니라고. 너무 화나.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미소야, 우리가 바보 같은 짓을 한 거 같아."            - 2권, p.35

 

그러던 어느 날 천개산 산 66번지 근처에서 부상을 당한 인간이 발견된다. 모두들 사람에게 상처받고, 배신당한 경험이 있어 인간이라는 존재자체를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니 그냥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거긴 깊고 험한 산속이었고, 그들이 모른 척 하면 산속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개들은 인간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 물론 그 중에는 사람이 싫다고 도와주기 싫다는 개도 있었고, 도와주고 싶어도 어떤 식으로 도와주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개도 있었다. 버림받은 주제에 사람 편을 들다니 한심하다고, 왜 그 사람한테 신경을 쓰냐고 화를 내는 개도 물론 있었다. 그렇게 조난 당한 인간을 두고 서로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모아둔 식량이 사라지고, 개들은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

 

추위와 굶주림으로부터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사람에게 배신 당한 경험이 있으면서도 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느냐는 의견도 모두 말이 되기에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식량을 훔쳐간 것은 누구일까. 그리고 개들은 자신들의 아지트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2권에서는 조난 당한 사람이 헬기로 구조되어 가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인 산아래 예쁜 집들이 모인 전원주택 마을에서 닭과 오리가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떠돌이 들개의 소행이라고 의심할테고, 구조 당한 사람은 천개산에 들개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괜히 사람을 도와주는 바람에 이들은 자신들의 아지트를 옮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사라진 번개를 찾아 다니다가 마을에서 사라지는 닭과 오리 사건의 범인이 혹시 번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마을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누런 개의 거짓말에 속아 큰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천개산 패밀리는 위험에서 빠져 나와 번개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개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위험에 빠뜨렸던 인간들을 끝까지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못하는 마음 약한 존재라는 점이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실제 현실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개들은 자신을 버리고 간 주인을 같은 자리에서 긴 시간 기다리기도 하고,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주인을 찾아 헤매다 사고를 당하기도 하니 말이다. 해마다 명절 연휴나 휴가철에는 반려동물 유기가 크게 늘어난다고 한다.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지는 동물이 최근 2년여간 4백 마리가 넘는다고 하니,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개들의 사연을 그저 허구의 이야기라고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버리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사람과 동물이 함께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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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 문병욱
이상교 지음, 한연진 그림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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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이 된 예지는 교실로 찾아가는 길이 아직 낯설다. 시끌시끌 북적대는 교실에서 병욱이는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다. 아이들은 병욱이가 말도 잘 안 하고 날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닌다며, 바보라고, 좀 이상한 애라고 수근댄다. 하지만 예지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바보인 건 아닌데. 병욱이는 문구점에서 주인 아저씨에게 물건을 훔쳤다는 오해를 받아도, 친구들이 뒤에서 이상한 소문을 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예지는 개학식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났던 병욱이와 병욱이네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쪼글쪼글 웃어 주었던 할머니의 미소도 기억한다.

 

 

어느 날 미술 시간에 친구 얼굴 그리기를 한다. 예지는 은솔이 얼굴을 그리다 망쳐서 친구와 함께 막 웃는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 중 다섯 장을 골라 교실 뒤에 붙여 놓았다. 그런데 병욱이가 그린 그림 속 아이가 꼭 예지같다며 옆에서 선민이가 큭큭 웃는다. 결코 잘 그렸다고는 할 수 없는 그림이었지만, 진한 눈썹도,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도, 양갈래로 묶은 머리도 꼭 자신 같아서 예지는 그림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

 

예지는 아이들이 바라보는 방식이 아닌, 자신이 보고 느끼는 대로 병욱이를 지켜본다. 그리고 예지의 그 작은 마음이 병욱이를 향한 친구들의 마음도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새학기가 시작이 될 때마다, 새로운 학년이 될 때마다 설레는 마음과 함께 긴장되는 기분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친한 친구와 같은 반이 되면 든든한 지원군이라도 생긴 것처럼 안심이 되었지만, 어쩐지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되고 나면 교실 전체가 낯설게 느껴지고 서먹한 시간이 한동안 지속되었으니 말이다. 그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던 나였기에, 그렇게 불편한 시기엔 보통 책을 펴들고 앉아 있었다.

 

나중에 단짝이 된 친구가 말해주었는데, 쉬는 시간마다 혼자 책을 읽고 있어서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친구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어서, 먼저 말을 건네주어서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용기 내어 내민 딱 한 걸음 덕분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 시절 나와 내 친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마도 비슷한 학창 시절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 동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그림책 작가인 이상교의 글과 <눈물문어>, <옥두두두두> 등의 그림책을 쓰고 그린 한연진 화가의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이어지지 않은 테두리, 형태를 벗어나 서로를 침범하고 물드는 색과 패턴으로 새롭게 시도한 그림 스타일이 예쁘기도 하지만, 작품의 주제를 더욱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 좋았던 작품이다.

 

뭐든 시작이 어렵다고 딱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쉽지 않다. 이는 아이들의 관계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누군가 한 명이 쟤는 저래서 이상해, 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어쩐지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그 아이 주변에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벽이 생겨 버린다. 그럴 때 누군가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기라도 하면, 쉽게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건데 말이다. 이 작품 속 예지처럼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용기가 우리의 내일을 더욱 단단하고 빛나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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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 평생을 수치심과 싸워온 우리의 이야기
로라 베이츠 지음, 황가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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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목록을 만들어라. 그것은 당신의 이야기다. 그것으로 뭘 할 건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좋은 의도 또는 성차별적이고 구시대적인 핑계로 그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가거나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묵살하거나 없애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신의 것, 당신만의 것이다. 그것은 진짜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이 목록들을 우리의 역사, 우리의 유산, 우리의 일부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것의 어마어마하고 방대한 영향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29

 

한 여자는 상사의 성희롱에 겁먹어서 이직할 자리를 구하지도 않고 직장을 그만뒀다. 어느 성 노동자는 강간을 신고하려다가 경찰관에게 비웃음을 샀다. 한 여학생은 학교에 가던 도중에 성인 남자들이 자신을 향해 외설적인 표현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으며, 한 자매는 공원에서 소풍을 즐기다가 낯선 남자의 신체 부위를 강제로 봐야 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경험담 중 극히 일부인 이러한 사례들은 결코 머나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공공기관 간부가 여성 직원들에게 화장 좀 하고 다니라는 성차별 발언을 해 파면 당했고, 학교에서, 회사에서, 지하철에서 거의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상의 풍경이다.

 

이 책의 저자인 로라 베이츠는 2012년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성차별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라는 사이트(everydaysexism.com)를 만들었다. 2015년 전 세계 각지에서 도착한 사연은 10만 건에 이르렀고,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 왔다. 이 책에 수록된 온갖 불평등 이야기들, 성차별적인 농담, 부적절한 신체 접촉,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직장 내 차별, 성추행 등의 사건은 여성들 각자의 ‘목록’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이것은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한테도 말해본 적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로라 베이츠는 생각한다. 여성의 삶이 오직 성별 때문에 공포, 학대, 괴롭힘, 차별로 얼룩지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라고 우리는 반복해서 서로에게 말해야 한다. 서로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슬퍼하고 애도하고 화내고, 이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우리 미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우리가 겪은 괴롭힘과 억압이 아니라 그런 일이 없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모든 여자가 무력하고 상처 입고 웅크린 피해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중 다수, 아니, 대다수가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뜻이다.            p.240~241

 

이 책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일상화된 불평등의 원인을 사회의 제도적, 구조적 시스템에서 찾는다. 그 누구보다 평등을 지향해야 할 교육, 경찰, 사법, 정치, 언론이 어떤 식으로 여자들에게 수치심을 주고 그들의 입을 막고 좌절하게 하는지 들여다본다. 여성들이 제일 먼저 취해야 할 가장 작고 간단하고 시급한 저항의 행동이 바로 목록을 만드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더 많은 여성들이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라고 싶어졌다. 사람들의 무관심이나 우리가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의 일축으로 인해 잊고 잃어버리고 도둑맞은 순간들을 깨닫고 분노해 그 순간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나긴 이야기 목록을 거의 모든 여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내가 뭔가 잘못했을 수도 있다고, 자초한 것일 수도 있다고, 운이 나빴다고,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바꿀 이유와 힘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길을 걷다가 남자들이 모여 있으면 반대편으로 건너가기, 조명이 어둡거나 나무가 우거진 곳을 피하기 위해 멀리 돌아가기, 혼자 살지 않는 척하려고 자동응답기에 남자 목소리 녹음해놓기, 가짜 결혼반지 끼기, 친구나 연인에게 내 위치를 전송하는 앱 사용하기, 화장실에 여럿이 같이 가기, 호루라기나 경보기 가지고 다니기, 성희롱을 피하기 위해 옷차림 바꾸기 등등... 이는 여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습관들의 목록이다. 이는 거의 매 순간 내 안위를 걱정해야 함을 경험으로 배우는 세상,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고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믿게끔 사회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란 결과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새삼 개탄하게 된다. 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그들의 세계를 깨부수는 계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성들이여, 지금 당신의 목록을 만들기를.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당신만의 이야기를 담은 목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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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라진 날
할런 코벤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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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은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선택과 나쁜 결정들, 여러 갈림길을 떠올렸다. 그리고 페이지가 둔 어떤 수가, 그녀가 통과한 어떤 문이 아이를 이런 지옥 같은 곳으로 이끌었을까 생각했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을까. 어쩐 점에서는 당연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비효과. 하나를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만일이라는 단어가 꼬리를 물었다. 과거로 돌아가 무언가 바꿀 수만 있다면... 페이지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훌륭한 딸이었다. 나쁜 일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했고, 아주 작은 일로 문제가 생겨도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면 사이먼은 참지 못하고 아이를 꾸짖었다. 그때 참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p.100~101

 

뉴욕 증권가에서 일하는 사이먼, 소아청소년과 의사인 아내, 명문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새 학기를 준비 중인 아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던 그의 삶은 딸인 페이지가 마약에 빠져 가출해버린 뒤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착한 딸이었던 페이지는 대학에 가서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남자 에런을 만나게 되면서 완전히 변해 버렸다. 에런은 페이지를 마약에 빠뜨렸고, 그녀가 가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장본인이었다. 사이먼은 수소문 끝에 길거리 공연을 하며 구걸하는 모습으로 있는 딸을 발견하지만, 페이지는 아빠를 마주하자 다시 도망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얼마 뒤 사이먼은 에런이 살해당했으며, 그와 함께 살던 페이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딸의 흔적을 뒤쫓기 시작한다. 딸을 구하려는 아빠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할런 코벤의 신작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평범한 일상의 균열이 깨지면서 시작되고, 누군가 사라지면서 본격화되는데, 평범한 우리의 주인공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숱한 역경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믿음과 비밀, 그리고 거짓말과 진실 사이를 오가는 거듭되는 반전으로 아찔한 스릴을 선사하며 치밀하게 설계된 퍼즐 조각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한다. 할런 코벤의 작품들은 롤러 코스터처럼 극강의 스릴과 재미를 선사하는데, 이번 작품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모든 캐릭터와 사건이 한 방향으로 향해 달려가며 빈틈없이 정교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단언컨대 할런 코벤 최고의 작품'이라는 언론평처럼 스릴러의 거장이 제대로 솜씨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위험한 순간에 봉착하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한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총알을 보고 피할 수 있던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시간은 일정하게 흘러간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는 이유 역시 설명할 수 있다. 어릴 때는 모든 경험이 새로워서 기억이 신선하고 깊게 각인된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특히나 틀에 박힌 일상에 갇힐수록, 새롭고 선명한 기억이 거의 생성되지 않아서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낀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 때 시간이 영원히 멈춘 것처럼 느껴지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어른들에게는 눈깜짝할 만큼의 시간이다. 지금, 사이먼이 총알을 뚫고 울려 퍼지는 루서의 외침을 듣는 이 순간, 사이먼에게 시간은 끈적한 시럽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p.443~444

 

이야기는 사라진 딸을 찾아 나선 사이먼을 중심으로 미국 전역을 돌며 ‘타깃’을 사냥하는 2인조와 실종사건을 추적하는 FBI 출신 사설 여성 수사관 엘레나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사이먼은 아내인 잉그리드와 함께 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에런이 살해당한 곳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잉그리드가 총을 맞고 혼수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게 되고, 사이먼은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슬픔을 애써 누르며 에런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딸과의 관계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로부터 의뢰를 받고 청부 살인을 하는 2인조의 정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그들이 사이비 종교와 뭔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고,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별개의 사건을 추적하다가 뜻밖의 고리로 연결되며 알게된 사설 수사관 엘레나는 뛰어난 수사 실력으로 사이먼에게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두툼한 페이지의 중반에 이르러서도 독자들은 전제척인 그림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그만큼 정교하게 짜인 구성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부모가 그럴 것이다 자식이 바깥세상에서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자신이 부모로서 충분히 아이에게 관심을 보였는지, 너무 엄격하거나 느슨한 부모는 아니었는지, 자신이 아이를 키우면서 내렸던 결정들을 수백만 번 되묻고 곱씹게 된다. 파멸의 불씨가 될 만한 모든 순간을 곱씹고 찾으려고 해보지만, 사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어둠이 아이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일이 생기면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이 사이먼 역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돌아본다. 특히나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고, 한발 물러나 아이를 믿어주는 것이 더 좋은 아빠가 되는 길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자신이 뭔가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아내 대신 나서서 총을 맞을 수도 있었다고, 딸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보호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지만, 그럴수록 독자들은 이야기에 점점 더 몰입하게 된다.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방심할 틈을 주지 않는 작품이었다. 최근에 나왔던 할런 코벤 작품 중에 가장 완성도 높고 뛰어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니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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