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6
양윤옥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Jc 드브니 각색, PMGL 만화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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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그길로 사라졌어요. 연기처럼. 그 뒤로 전혀 아무 소식도 없어요. 24층과 26층 사이 계단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아홉 편이 각각 한 권의 만화로 재탄생했다. 프랑스 만화가 PMGL과 아트 디렉터 Jc 드브니는 독창적 이미지 연출을 선보이면서도 원작 소설의 스토리와 인물, 대사 등을 왜곡 없이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원작의 문장들을 손실 없이 담아내 하루키 소설 특유의 글맛을 살렸고, 창의적인 컷 분할, 디테일한 그림에는 애독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의미와 장치를 가득 채웠다. 권마다 그림체를 다르게 해 단편소설 각각의 분위기를 살렸다. 〈빵가게 재습격〉과 같은 초기작부터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를 거쳐 〈타일랜드〉 〈셰에라자드〉 등 최근작까지 만나볼 수 있다.

 

 

먼저 만나본 것은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라는 작품이다. 이 단편은 '도쿄기담집'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래픽노블로 연출된 스토리가 원작 단편소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탐정이 여성 의뢰인을 만나 실종된 사람을 찾아 다니는 것이 주요 스토리인데, 의뢰의 내용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편을 찾아 달라는 내용이다. 남편은 같은 아파트의 24층에 사는 시어머니 집에 갔다가 26층인 그들의 집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탐정은 26층과 24층 사이를 샅샅이 뒤지면서 계단을 지나가는 이웃들과 말을 나누기 시작한다. 과연 사라진 남자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근데 아저씨,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어제도 여기 있었죠, 언뜻 봤는데."
"이 근처에서 뭘 좀 찾고 있어."
"뭘 찾는데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문 같은 걸 거야. 잘 모르겠네. 어쩌면 그건 문조차 아닐 수 있어."

 

의뢰인의 시아버지가 삼 년 전에 전차에 치여 돌아가신 뒤, 시어머니는 불안신경증에 걸렸다. 특히나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증세가 심해지곤 한다. 시어머니는 그들 부부가 살고 있는 맨션의 다른 층으로 이사를 왔고, 부부는 26층, 시어머니는 24층에 살고 있었다. 불안신경증세가 생길 때마다 그들이 내려가서 진정시켜 드리곤 했다고 한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사건 당일, 골프를 치러 갈 예정이었으나 비가 오는 덕분에 취소되어 집에 있었다. 일요일 오전, 어머니에게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현기증이 난다고 전화가 왔고, 남편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아침 식사를 준비해달라고 아내에게 말한다. 이십 오분 뒤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와 어머니가 안정되셨으니 지금 계단으로 가겠다고, 배가 고프다고 한다. 아내는 팬케이크를 굽고, 베이컨을 볶으며 아침 식사를 준비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어머니 집에 전화했더니 한참 전에 돌아갔다는 얘기만 하시고, 남편은 아무 소식도 없이 그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평소에도 비좁은 곳에 밀폐되는 걸 참을 수 없어했던 남편은 엘리베이터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계단을 이용했다. 그러니까 그는 24층과 26층 사이의 계단 중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갑도 면허증도 신용카드도 시계도 없이 맨손으로 말이다. 누구나 별다른 이유 없이 생에서 그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는 것, 물론 실제로 일상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 사라지는 초현실적인 사건은 상상 속에서만 벌어지곤 하지만 말이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의뢰인과의 마지막 통화 후에 탐정은 생각한다. '나는 다시 어딘가 또 다른 곳에서 찾아 다닐 것이다.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라고. 처음부터 의뢰인의 의뢰는 받지만 사례비는 받지 않겠다는 탐정의 미스터리한 사연 또한 그렇게 여운을 남긴 채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딘가 불가사의하고 기묘해서 전혀 실제로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소설이 아니라 만화 형식으로 읽다 보니 그게 또 어쩐지 현실감을 부여해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게다가 처음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졌던 그림체가 읽다 보니 너무도 하루키의 작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굉장히 색다른 그래픽노블 작품이었다. 소설을 보다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이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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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의 디자인 - 자기만의 감각으로 삶을 이끄는 기술
아키타 미치오 지음, 최지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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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설 때는 유머와 좋은 기분을 주머니에 넣어두자." 저는 이 문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제가 썼지만요... 나 자신을 풍경이라고 생각했을 때 이왕이면 아름다운 풍경이면 좋겠다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주변에서 보면 내 모습도 풍경의 일부일 뿐이거든요. 세상이 아름답길 바란다면 그 풍경의 일부인 나부터 먼저 그렇게 되자는 거죠. 제가 좋은 기분을 특별히 더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p.19


7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 디자이너로 활약하는 아키타 미치오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트위터리안이기도 하다. 그는 제품 디자이너로 켄우드, 소니 등의 제조업체에서 일했고, 일상생활과 관련 있는 제품 디자인에 폭넓게 참여해왔다.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는 20년이 넘도록 자신의 문장을 블로그에 기록해왔고, 뒤늦게 시작한 트위터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느낀 것을 짧게 올리면서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팔로워 수가 10만 명이 넘는다. 그는 '좋은 기분으로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기분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은 가장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문장들을 두고 저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트위터에서 못 다한 더 깊은 이야기를 담아냈다. 



집을 나설 때는 유머와 좋은 기분을 주머니에 넣어두자는 문장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좋은 기분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고방식부터 다르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보면 내 모습도 풍경의 일부일 뿐이니, 그 풍경의 일부인 나부터 아름다운 풍경이 되자는 것이다.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라거나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였으면 해서가 아니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애용은 하더라도 애착은 갖지 말자'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특정 인물이나 조직, 브랜드에 집착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 그래야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집착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잃지 않는 다는 것, 그래서 그는 기대하지 않고, 특별함을 바라지 않고, 억지로 보람을 찾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장 주의하려고 하는 건 멋있어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단 물건을 빈틈없이 채워놓지 않으려고 조심해요. 괜찮은 물건을 과시하듯이 늘어놓으면 꽤 멋있게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제가 추구하는 이미지는 좋은 물건을 자연스럽게 배치하는 것이에요. 신중하게 장식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무심코 있는 게 멋있어요. 하지만 상품 하나하나는 신경 써서 고릅니다. 언제든 물건이 말해주니까요. 무심코 있으면서도 말하는 힘이 있는 물건을 좋아해요. 이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p.188~189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면 주위에 기대하지 않는다, 애용은 하더라도 애착은 갖지 않는다, 힘들게 호감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사랑받기 위해서 비굴해지지 않는다, 정직한 것과 솔직한 것은 다르다, 형태가 없는 모호한 것을 쫓지 않는다, 호기심을 적극으로 낭비한다, 무조건 상냥한 태도가 친절은 아니다, 나의 형태를 단정 짓지 않는다 등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기분을 살피고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 작은 일에 신경쓰지 않고 대범하게 지나칠 수 있는 마음과 아무리 바쁘더라도 여유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나 비슷한 수준의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업무에 관련된 유용한 팁들도 가득하다.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궁금한 부분들에 대한 꼭 필요하고, 알기 쉬운 내용들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의 답변들도 있었는데, 아주 흥미로웠다. 집요한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질문에 대해, 아키타 미치오는 '말을 70센티 높이에 놓는다'라고 상상하고, 던지는 게 아니라 슬쩍 두는 방식으로 말하라고 대답한다. 상대방이 가져가고 싶을 때 가져가기 편하도록, 너무 낮지도 않고 너무 높지도 않은 높이에 말을 둔다는 것은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쓸데없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힘들게 호감을 얻으려 하지 않고, 서로 지치지 않는 관계 맺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인생을 오래 살아온 만큼의 깊이와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46년 차 디자이너가 들려주는 삶을 디자인하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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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단어들의 지도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원의 지적 여정
데버라 워런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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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u(독감)는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병입니다. 원말인 influenza는 이탈리아어로 '별이 끼치는 영향influence of the stars'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굴뚝의 flue(연통)와 혼동하면 안 되겠죠. 물론 개의 flews도 전혀 다른 것으로, 일부 견종의 '축 늘어진 윗입술'을 가리킵니다. 그것으로 침을 사방에 뿌려대는데 저희 집에서 키우는 뉴펀들랜드종 강아지는 용케 천장까지 침을 날려 보냈답니다. 어쨌든 요즘 부모들은 세균 걱정에 벌벌 떨면서 틈만 나면 손 세정제를 찾죠. 자식을 고치 속 애벌레처럼 꽁꽁 감싸서 키우는 셈입니다.            p.90~91

 

단어의 세계에서는 옛 단어와 새 단어가 서로 경쟁한 끝에 옛 단어가 힘을 잃고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개념을 가리킬 적당한 말이 없을 때 기존의 단어를 활용하기도 하며, 한 단어가 서로 교류가 없는 여러 문화권으로 전해져 각기 다르게 분화하기도 한다. 언어는 돌연변이의 연속이며, 단어는 생명체처럼 진화한다. 의도도 목적도 목표도 없이, 앞 못 보는 아메바처럼 이리저리 되는 대로 나아간다. 단어의 기원을 파보면 자잘한 실수가 굳어진 것들이 노다지처럼 쏟아지는데,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만 해도 원래는 '털가죽'으로 된 신발이었으나, 구전되면서 동음이의어인 '유리'로 바뀌어 그대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은 평범한 일상의 단어들을 통해 영어 어원의 미로를 탐험한다. 저자인 데버라 워런은 취미가 라틴어와 프랑스어 독서이고, 영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교사였으며, 프로그램 언어로 코딩을 하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데, 언어라면 가리지 않고 빠져드는 언어 덕후인 동시에 다채로운 수상 경력에 빛나는 시인이기도 하다. 영어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정석이 아니라, 이곳저곳 샛길로 빠지면서 온갖 것에 참견하고 놀라운 재미를 찾아내며 단어의 기발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베이글, 비스킷, 에클레르 같은 먹을거리부터 뮬, 튀튀 같은 패션 아이템, 소렌토나 팰리세이드 같은 자동차 이름까지 익숙한 사물들에 숨겨진 배경과 사연을 읽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별 생각없이 사용하는 모든 것들에는 각각 이름이 있게 마련이고, 그 이름에는 긴 역사가 서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은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단어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무의미한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숨소리 한번 내는 것과 다를 게 없죠. 그러나 단어는 곧 역사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로지 언어가 변천해온 모습을 통해서만 과거를 살펴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OK,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전쟁과 국경선, 유물도 중요하지만, 단어야말로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평범한 일상과 비범한 모험을 생생히 전해주는 수단이니까요. 단어는 스냅사진이 아니라 천년짜리 영상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언어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해도 다 할 수 없는 게 ‘말’이니까요.              p.321~322

 

과일이 들어간 관용어는 긍정적인 것이 많은데, 달갑지 않은 과일들도 있다. go bananas, 그러니까 바나나로 돌진하면 '화가 나서 돌아버리는' 것이 되고, 레몬 lemon 은 '불량 상품', 말린 자두인 prune 은 '불평꾼'이 되며, sour grapes, 즉 시큼한 포도는 '못 먹는 감'이 되는 식이다. '미끄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는 우리 말과 뜻이 같은 관용어로 '썩은 사과 하나 때문에 다른 사과를 다 버린다'고 하고, '누군가의 손에 들린 복숭아'라는 단어가 '동료를 밀고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빵’이라는 이름에 관한 역사는 ‘빵’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고, 꽃은 이름의 기원을 알고 나면 더 예뻐 보이는 게 많았다. 청바지의 탄생에 엮여 있는 남유럽의 두 도시 이야기를 비롯해 ‘격리’를 뜻하는 영단어의 어원에 중세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이 라는 배경이 있었다는 사실 등 역사의 구석구석, 골목골목을 다니며 단어의 지도가 완성되어 간다.

 

윌북에서 출간된 단어와 어원에 관련된 책들을 재미있게 읽어 왔다. 마크 포사이스의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수지 덴트의 <옥스퍼드 오늘의 단어책>, 앤드루 톰슨의 <걸어 다니는 표현 사전>, 그리고 앨버트 잭의 <미식가의 어원 사전> 등 세상을 둘러싼 단어들과 그것의 유래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책들을 인상깊게 읽었다면, 이번에 나온 데버라 워런의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도 분명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음식, 술, 꽃, 옷, 동물, 색깔, 지명, 스포츠, 게임 등등 삶의 모든 부분을 두루 살펴가며 각 단어들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단어를 익히게 되어 학습 효과도 있을 뿐더러, 시작부터 끝까지 지루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 저자의 입담이 무겁거나 진지하다기보다 유쾌하고 장난스러워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단어 너머에 숨어 있는 의미심장한 사연이 궁금하다면, 삶의 도처에 있는 단어들의 기원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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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스강의 작은 서점
프리다 쉬베크 지음, 심연희 옮김 / 열림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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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여기는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녀는 고갯짓으로 거리를 가리켰다.
"바깥은 좀 정신이 없잖아요. 사람이 지나다니고, 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불빛이 번쩍거리지만, 서점 안은 아주 조용해요.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 여기만 다른 시간대인 듯해요. 그 점을 고객들이 알아야 해요. 이 서점에 들어오는 건 하나의 신기한 경험이라는 걸요."               p.171

 

스웨덴에 사는 샬로테는 지금 난생 처음 런던에 도착한 참이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모가 런던의 오래된 서점을 물려 주었기 때문이다. 남편인 알렉스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부터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는 일에 파묻혀 지냈던 그녀는 여전히 외로웠고,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삶을 살고 있었다. 런던에 오긴 했지만 변호사가 상속받은 재산을 직접 와서 봐야 한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서점을 운영할 생각도, 런던에서 살 생각도 전혀 없었다. 8년 전 남편과 같이 설립한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수익이 충분했고,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바깥에서 잠깐 건물만 보고 가려던 그녀는 서점의 외관을 보고는 눈길을 떼지 못한다. 바닥을 열었더니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가 나온 것처럼, 이 오래된 서점이 마법의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긴 것이다.

 

샬로테는 서점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직원 마르티니크와 시간제로 일하는 직원 샘, 그리고 이웃에 사는 소설가 윌리엄과 사라가 생전에 돌봤던 고양이 테니슨을 만나게 된다. 서점의 2층에 있는 사라 이모의 집은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지만, 집 안은 사방에 널려 있는 물건들과 쌓여 있는 거대한 책 더미들로 난장판이었다. 타고난 정리꾼으로 청소를 무척 좋아했던 샬로테조차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그곳에서 그녀는 점차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샬로테는 왜 이모가 이토록 오래된 건물을 자신에게 남겼는지, 왜 엄마는 이모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지 궁금했지만, 그 대답을 들려줄 사람은 이제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이모가 살던 집에서 그녀는 의문투성이였던 엄마와 이모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씩 단서를 찾게 되고, 비밀에 다가가게 된다.

 

 

 

"템스 강변에 있는 리버사이드 서점은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온 고풍스러운 매력을 간직한 곳이다. 천장까지 뻗은 서가와 사다리, 소박한 가구가 어우러진 공간에는 세기말의 마법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최근에는 스웨덴식 '피카'를 제공하는 카페를 같이 운영하고 있으며, 전문가적 기량을 갖춘 직원들이 방문하는 손님을 책 세상으로 즐거이 안내하고 있다. 서점의 새 주인 샬로테 뤼드베리 씨에 따르면, 이런 낭독회는 앞으로 필수적인 서점 행사로 자리매김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이 서점이 지역사회에 능동적인 일부가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사우스뱅크 지역에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런던에서 가장 친절한 서점에 한번 들러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p.532

 

이야기는 서점을 물려 받게 된 현재의 샬로테와 1982년 이모와 엄마, 두 자매가 영국에 처음 왔던 그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자신의 사업을 운영해 온 샬로테였기에 변호사로부터 받은 서류들을 검토하며 서점이 거의 파산직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운영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매출이 나지 않았고, 직원 급여를 주고 신규 서적을 구매하기에 충분한 이익을 전혀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거의 망한 거나 다름없는 사업장을 다시 살린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보였다. 대체 사라 이모는 어떻게 먹고 산 거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서점은 살릴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샬로테는 점점 이 서점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고, 사람들과도 가까워진다. 과연 샬로테는 위기에 처한 서점을 구해낼 수 있을까. 엄마와 이모 사이에는 어떤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서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언제나 설레임을 안겨 준다. 완두콩 색으로 칠한 오래된 계단 난간, 계속 새로 천을 씌워 긴 세월 동안 사용해온 해진 소파, 녹색 대리석 장식 선반이 달린 낡은 벽난로, 한 세기도 전에 직접 손으로 짠 짙은 색 나무 서가, 고집불통 늙은 고양이,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환상적인 템스강 풍경... 이 작은 서점에 들어서면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는 표현에서부터 페이지 속으로 훅 빠져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독서 애호가들에게 더 없이 완벽한 장소, 아늑하고, 따스하고, 편안한 곳이지만, 서점을 운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현실에서도 대부분의 작은 서점들이 운영난에 허덕이고,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욱 이 작품의 후반부에 벌어지는 약간은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상황이 뭉클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현실의 작은 서점들이 부디 힘을 내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고 말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은 작은 마음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기적을 이뤄내는 과정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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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아이사카 토마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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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세라피마의 등줄기에 오싹하게 차가운 기운이 내달렸다. 이리나가 말을 걸어 모아 온 소녀는 전부 고아들이다. 아무리 비슷한 처지의 아이가 많은 시절이라곤 해도 이게 우연일 리 없다. 죽어도 슬퍼할 자가 아무도 없는 고아를 저격병으로 키운다는 발상. 즉,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사병死兵'을 키우겠다는 발상 아닌가. 세라피마는 머릿속에 떠오른 잔혹한 발상에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이리나에게서는 그런 인상을 씻어줄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싸울 것인가, 죽을 것인가. 이리나의 가치 기준은 오로지 그것이다.                 p.84

 

1942년 2월, 초목이 움트는 향기와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장작 패는 소리가 들리는 소소한 활기로 가득한 작은 농촌 마을. 이바노프스카야는 주민 수가 고작 마흔에 불과한 마을이다.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열여섯 소녀 세라피마는 단발식 소총을 거머쥐고 사슴을 사냥하는 중이다. 그녀는 고등교육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가을이 되면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전쟁 중이었지만 마을이 위치가 중계 지점이었기에, 사람들은 멀리서 울리는 포성을 들으면서도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엄마와 사냥을 마치고 마을로 향했을 때 그 모든 평화가 사라지고 만다. 마을을 급습한 독일군에 의해 엄마와 마을 사람들 전부가 사살되고, 뒤늦게 나타난 붉은 군대 덕분에 세라피마만 겨우 목숨을 건진다. 저격병 출신의 지휘관 아리나는 세라피마에게 '싸우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 질문을 건네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녀는 저격병이 되어 복수를 꿈꾸게 된다.

 

세라피마는 이리나가 교관으로 있는 여성 저격병 훈련학교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소녀들과 만난다. 모두 적에 의해 가족을 잃었고, 고향을 잃었고, 이리나가 제시한 싸움과 죽음의 선택지 사이에서 싸우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혹독하고,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점차 어엿한 저격병으로 거듭나게 된다. 매일 욕설을 듣고 철두철미한 훈련을 주입 받다 보니 적에 대한 결의만이 단단해졌고, 이탈할 생각할 여유 조차 전혀 없었다. 그 속에서 소녀들은 뜨거운 전우애를 나누며, 서로를 의지하고 마음을 다진다. 그리고 같은 소대가 될 학생들과 동료들, 능욕당하고 살해당하는 여성들이 더 이상 없도록 그들을 지키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라피마가 소속된 저격소대는 드디어 임무를 받고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로 향한다. 그곳은 소련 병사의 평균 생존시간이 24시간에, 7초마다 한 명의 독일 병사가 죽어나간다는 격전지였다. 세라피마는 저격병으로서 전쟁의 끔찍함을 어떻게 이겨내고, 겪어 낼 것인가. 저격병이 되기로 결의했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까.

 

 

 

나는 붉은 군대 병사다. 나는 나치에게 복수하기 위해 싸웠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는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대답해라.
저는 여성을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그래, 나는 여성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야나는 모르는 독일인 소년을 지켜냈다.
여성을 지키기 위해 싸워라, 세라피마 동지. 망설이지 말고 적을 죽여라.
하지만 나는 너처럼은 되지 않아. 너처럼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아.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사람의 도리를 행할 거야.              p.497

 

지금 일본 문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신인 아이사카 토마의 데뷔작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땅에서 80년 전에 벌어졌던 독소전쟁을 소재로 하는 전쟁소설이자 반전소설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3개월 전에 출간되었다. 아마추어로 소설을 쓰던 작가가 현실에서 벌어질 참혹한 전쟁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로 인해 시의성 있게 주목받게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과거를 돌아보고, 현실의 전쟁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쟁은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속 풍경들을 산산이 부순다. 공원에서 순진무구하게 노는 아이들, 아무런 격식 없이 다정하게 웃는 연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도시 전체가 불타 무너지고 파괴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 그대로 죽어서 절대로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폐허에 둘러싸여 꿈도 희망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전쟁의 참상이다.

 

'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 중 소련만이 그 많은 여군을 전투병으로 동원하였는가'라는 의문을 오래 전부터 가졌던 작가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전쟁을 그린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 속 여성들은 저격병으로 교육받으면서, 전장에 나가 싸우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지. 바로 그 점이 여타의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과의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핑계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상황이 닥쳐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을 지키며 어긋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는 한해 전쟁으로 24만 명이 죽어나가는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가 이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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