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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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그저 초반 몇 페이지만 읽어도 결판이 난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지 아닌지. 이 책을 여러 번 읽어야 하는지, 대충 한번 읽어야 하는지 말이다.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는 명백히 전자이다. 나는 이 책의 초반 백 여 페이지를 여러 번 계속해서 읽었다. 거기까지의 내용이라고 해 봤자, 고작 미술관에서 사고가 나는 것까지 정도 밖에 없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 장면들을 읽고 또 읽느라 이야기의 진도를 한참이나 넘어가지 못했다. 너무도 유려한 문장은 마치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웠고, 장면들이 그림처럼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묘사는 책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년과 엄마가 함께 도로를 걷고, 미술관에 들어서고, 그림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사고가 난 직후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보이는 황폐한 풍경들은 끔찍한 사고라는 자각이 들지 않을 만큼 몽환적이고 매혹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엄마의 죽음은 내 삶을 전과 후로 가르는 표시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인정하려니 참 쓸쓸하지만, 나는 엄마가 날 사랑했던 것만큼 나를 사랑하는 듯한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살아났다. 엄마가 비추는 마법 같고 연극 같은 빛 때문에 엄마의 눈을 통해서 보면 무엇이든 평소보다 밝게 보였다.

14년 전 4 10일 뉴욕, 지극히 평범한 날이었지만 이제는 녹슨 못처럼 달력 위로 불룩 튀어나와 있는 그날. 지난밤에 폭풍이 불고 큰비가 내려 상점가에 물이 들어차고 지하철 역 두 곳이 폐쇄되었던 날, 비를 품어 부푼 구름들이 마천루 위 높은 하늘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던 그날. 당시 열세 살이었던 테오가 학교에서 정학을 받는 바람에 엄마와 함께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학교의 회의만이 참담한 걱정거리였던 그때, 어린 소년에게는 곧 다가올 어두운 미래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택시를 탔지만 곧 택시 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엄마가 멀미를 하고 중간에 내려 걷게 된다. 그러나 하늘은 급속도로 흐려지고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비가 쏟아져 내리며, 거대한 돌풍이 몰려왔고, 거리의 사람들은 신문과 서류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미술관 현관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들 역시 비가 멎을 때까지 미술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림을 보고 나가기 전, 엄마는 얼른 가서 <해부학 강의>를 한 번만 더 보고 오겠다고 말한다. 테오는 전시실에서 만났던 마음을 빼앗긴 소녀에게 말을 걸 기회다 싶어 엄마와 헤어져 기념품 가게에서 보기로 약속을 한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전시실을 지나가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양팔을 들고 비명을 지르고 뛰쳐 나오더니, 엄청나게 큰,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전시실을 뒤흔든다. 폭탄 테러로 미술관에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테오는 그곳에서 결코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알까? 우리는 반박의 여지없는 상투적인 문화를 어린 시절부터 계속 주입받는다. 윌리엄 블레이크부터 레이디 가가까지, 장 자크 루소부터 잘랄라딘 무함마드 루미까지, <토스카>부터 <로저스 씨의 동네>까지-상류층부터 하류층까지-이상하게도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메시지를 전한다. 정신과 의사와 진로 상담사, 디즈니 만화의 공주들은 모두 답을 안다. "너 자신을 잃지마.""네 마음을 따라가렴."

하지만 내가 정말로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신뢰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몇 달 전 엄마와 테오를 버리고 떠난 아빠는 돈도, 양육비도, 연락 받을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갑자기 사라져버렸고, 엄마와 단 둘이 살았던 테오에게 엄마의 죽음이란 아마도 세상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죽고 난 이후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전부 자신의 선택이었으므로)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그는 엄마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이끌어줄 지표가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자신을 더 행복한 곳으로 이끌어줄 지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우러져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지표 말이다.

사고 현장에서 그는 죽어가는 노인의 부탁으로 얼결에 그림 하나를 가지고 오게 되고, 그것은 그 이후 그의 인생은 그가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세상은 사라진 그림 <황금방울새>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그는 처음에는 그림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기회를 놓치고, 결국에는 자신이 평생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림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게 되어 집착하게 된다. <황금방울새>는 네덜란드 델프트의 화약창고 폭발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카럴 파브리티우스(1622~1654)의 실제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에서 시작한 미스터리는 소년의 성장담과 연결되고, 미술관에서의 사고 이후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게 된 소년이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매혹적인 풍경과 더불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아마존 킨들의 완독률 98.5프로라는 압도적인 수치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구나 싶을 만큼 쉽사리 책장을 놓을 수가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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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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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살 오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삿대질을 하고, 다그치고, 노려보는 남자. 평생 자명종 없이 6 15분 전에 눈을 떴고, 40년 가까이 매일 아침마다 정확히 똑같은 양의 커피를 내려 마시고, 항상 동네 시찰을 하러 거리로 나가는 남자. 뭐든 간에 발길질을 하면서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분리수거가 제대로 되지 않은 쓰레기통을 차며 욕설을 내뱉는 남자. 그렇게 까칠한 그는 여느 때처럼 동네 시찰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고 전화국 가입과 신문 구독을 취소한다. 수도꼭지며, 문손잡이를 수리하고, 다락방과 헛간에 있는 도구들을 정리한다. 그리고 라디에이터, 커피 여과기, 전등을 모두 꺼버린다. 그는 지금 자살을 하려는 중이다.

"여유를 좀 가지세요." 그들은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컴퓨터로 일을 하고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길 거부하는, 건방이나 떨고 앉아 있는 수많은 서른한 살짜리들이. 아무도 트레일러를 후진시킬 줄 모르는 이 사회 전체가. 그러더니 자기한테 더 이상 당신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왜냐하면 한 세기의 3분의 1을 한 직장에서 보낸 그는 며칠 전 조금 느긋하게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며 해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친구이자, 그의 편이었던 아내가 죽은 지 벌써 6개월이 지난 참이었다. 사실 아내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죽음을 실행했었어야 하지만, 그 당시 그에게는 챙겨야 할 직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살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사방에서 출근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떤 꼴이 되겠냐고 생각한 그는, 아내가 금요일에 죽고, 일요일에 장례를 치르고, 바로 다음 월요일에 출근했던 것이다. 고지식하게 보일 정도로 그렇게 세상에 성실했던 그지만, 결국 나이에 밀려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물론 그도 그의 인생이 이렇게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가 자신보다 먼저 죽어 그의 삶이 다 멈춰 버릴 거라고, 그 와중에도 직장에 출근했지만 나이가 많다고 해고 당할 거라고는 몰랐을 것이다.

이제 그는 책임져야 할 일도 없고, 자신이 보살펴야 할 가족도 없고, 세상에 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장의사에게 돈도 내고, 교회 묘지에 묻힌 아내 옆에 자기 묏자리를 만드는 것도 동의하고,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도 쓰고, 청구서도 다 지불하고, 융자도 빚도 없고, 집에 이사올 누군가를 위해 집 수리도 끝냈고, 신문 구독도 끊고, 하물며 설거지 거리들도 모두 다 씻어놨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평화롭게 죽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진지하게 자살을 하려던 그 순간, 뭔가 길게 찌익하고 긁히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머저리가 자동차를 몰다가 오베의 집 외벽을 긁어 버린 것이다. 화가 나서 커튼을 열어 젖히자, 키 크고 비쩍 마른 금발의 사내와 검은 단발 머리의 임산부를 발견한다. 그의 집 맞은편에 위치한 오베의 집과 똑같이 생긴 주택에 이사온 아이가 딸린 외국인 가족이었던 것이다.

"아저씨 웃겨요!" 세 살배기가 웃었다.

오베는 세 살배기를 보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 저기, 자기를 너무 못되게 보이려 하진 마세요."

그렇게 이웃집에 이사온 이상한 외국인 가족 덕분에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오베. 그는 매번 그들에게 휘말려 자신의 자살을 하루 뒤로, 그 다음 날로 계속 미루게 된다. 독특한 이웃들과 성가신 고양이와 그가 계속 싸워온 하얀 셔츠들은 그가 아내 곁으로 가는 것을 매번 방해한다. 항상 규칙적이고, 변하지 않는 일상을 사랑했던 그인데 새로운 이웃이 이사온 뒤로 단 한 순간도 평화롭지 못하게 시끌 벅적 어수선해지고 만다. 오베가 6개월 동안 준비했던 그 계획은 그가 시도할 때마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방해하는 덕분에 번번이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한다.

매 순간 세상 전부와 싸우고 있는 듯한 오베는 동네에서 지나가다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까칠한 이웃이다 가도, 아내를 잃어버리고 종일 그녀를 그리워하는 외로운 노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누구든 걸리기만 해봐 라는 식으로 버럭버럭 아무한테나 소리 지르고 화를 내지만, 그 모습이 마냥 미워 보이지 만은 않아 더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이야기는 자살을 하려는 오베와 그를 방해하는 이웃들의 현재와 그가 아내를 만나게 되고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과거와 교차되어 진행된다. 아내를 비롯해 사람들은 그를 보며 세상 모든 것에 시비를 건다 말하지만, 하지만 그는 시비 따위를 거는 게 아니라 그저 옳은 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세상은 흑과 백.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내가 챙겨줘야 할 사람과 상관없는 사람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과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날 속이면 안 돼요, 여보. 아무도 안 볼 때 당신의 내면은 춤을 추고 있어요, 오베. 그리고 저는 그 점 때문에 언제까지고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오베의 죽은 아내 또한 오베 만큼이나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사람들이 오베와 오베의 아내가 밤과 낮 같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은 전혀 다른, 상반된 사람들이었다. 오베 조차 그녀가 왜 자기를 택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오베의 아내는 음악이나 책이나 이상한 단어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사랑했고, 오베는 드라이버와 기름 여과기처럼 손에 쥘 수 있는 것들로만 채워진 남자 였다. 따라서 오베의 친구들 또한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는데, 왜 오베 처럼 심술 궂은 사람을 만난 건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정의와, 페어플레이와, 근면한 노동과, 옳은 것이 옳은 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확고하게 믿는 남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오베가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듯이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우린 사느라 바쁠 수도 있고 죽느라 바쁠 수도 있어요, 오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오베와 그의 아내가 만나게 된 사연,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사고가 생기고, 이후 오베가 세상 전체와 싸워야 했던 이야기들은 현재의 까칠하고 독불 장군 같은 그의 성격에 설득력과 타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밉지만 짠한, 무섭지만 뭉클한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유쾌하면서도 울컥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작품은 너무 오랜만이라 어느 연령대의 독자라도 모두 만족시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노련한 스토리, 그리고 입에 척척 달라붙는 음식처럼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문장들은 잠시도 한 눈을 팔 수 없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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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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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여인이 살해당하고, 그녀의 남편이 살인자로 지목된다. 문제는 사체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범인은 지문은 물론이고 머리카락조차 남기지 않았다. 몇 년 전에 개봉했었던 영화 의뢰인의 줄거리이다. 이야기는 그를 변호하는 변호인과 그를 구속하려는 검사 쪽의 대결구도로 진행되었는데, 당시 흥미로웠던 건 검사 쪽의 계획이었다. 살인자로 지목된 남자는 그 전에 있었던 살인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수사팀은 범인이라고 확신했지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상태, 즉 기소할 수 없는 상태로 어쩔 수 없이 그를 풀어줘야 했던 검사는 이후 비공식적으로 그를 주시해왔다는 것이다. 모든 정황으로 미뤄볼 때 명백한 범인임에도 그저 정황증거만으로 범인에게 처벌을 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정의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게 해주었던 영화였다.

시즈쿠이 슈스케는 거기에 아직까지도 존폐논란이 끊이지 않는 '공소시효'라는 사법계의 영원한 숙제를 추가한다. 지난 달에 일명 태완이법이라 불리는 공소시효 폐지에 관한 개정안이 법사위 소위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1999년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의 피해 아동이었던 김태완 군이 숨지고 나서 지난 2014년 공소시효가 끝날 예정이었으나 제정신청을 통해 공소시효가 정지된 상태이다. 원래 공소시효라는 것은 범죄의 경중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라면 25,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해당하는 범죄는 15년이다. 하지만 수많은 살인 사건들이 공소시효라는 걸림돌 덕분에 미제 사건으로 남겨졌고, 그 사건들은 영화의 소재로도 자주 활용되어 왔다. 몽타주, 아이들, 그 놈 목소리, 내가 살인범이다, 공범 등등...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전 사건의 범인을 처벌하기 위해 부단히 뛰어다니는 스토리는 무엇보다 감정이입을 끌어내고, 제한된 시간이라는 긴장감 또한 부여하기 때문에 영화적인 소재로 자주 이용되는 게 아닌가 싶다.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는 측은 이것이 사건의 피해자에게 불리한 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공소시효가 지난 뒤 범인이 밝혀진다면 그에 대한 형벌권이 없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고, 따라서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공소시효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측은 공소시효 기간 동안 범죄자의 고통은 형벌을 받는 것과 맞먹기 때문에 처벌의 필요성이 낮아지고, 검찰과 경찰의 업무가 한 사건에만 인력과 시간을 쏟아붓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양측 모두 각각의 이유가 합리적이어서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는 사실 매우 어렵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관련해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 작품의 질문은 사실 간단하다.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건의 범인을 처벌하기 위해, 현재 벌어진 다른 사건의 범인으로 그 사람을 몰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하려는 것을 과연 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아오토의 설명을 흘려 들으며 모가미는 단 한 가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마쓰쿠라가 진범이기를 바란다는 생각.

어떤 사건이든 범인이 특정 인물이기를 바라며 수사에 임한 적은 없었다. 이 녀석은 결백할지도 모른다, 이 녀석은 범인이 틀림없다 뭔가에 근거한 판단 말고, 이를테면 희망이 포함된 사심을 검찰 수사에 개입시킨 적은 없었다.

하지만 현재 모가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각 속에 있었다.

이 흉악 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아직 부각되지 않았다. 마쓰쿠라가 범인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한 점에 기대를 걸었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23년 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던 사람을, 현재 다른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다가 발견했다면, 그렇다면 누구라도 내심 바라게 되지 않을까. 그가 이번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으면. 그래서 지난 살인 사건의 피해자의 못다한 한이라도 풀 수 있기를, 분하게도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할 수 없었던 법의 정당한 심판을 받을 수 있기를 말이다.

70대 노부부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아마도 계획적인 범행으로 보이고, 돈까지 얽혀 있는 걸로 조사되어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용의자가 추려진다. 용의 선상에 오른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해 용의자 범위를 압축하는 작업 중에 베테랑 검사 모가미는 명단에서 낯익은 이름을 하나 발견한다. 바로 자신이 대학 시절 하숙을 했던 기숙사 관리인의 딸 살해 사건에서 마지막까지 범인으로 지목됐었던 남자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무려 23년이 지나 이미 공소 시효가 지나버렸지만,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관리인 부부의 외동딸 유키가 만약 아직 살아 있다면 벌써 결혼해 아이도 있을 지 모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녀의 미래를 잔인하게 빼앗아 버린 범인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유히 거리를 활보하며 살.... 것이다. 당연히 모가미는 그가 이번 노부부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으면 하고 바랄 수밖에 없다. 설령 지금 그가 과거의 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아무런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없지만, 그가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면 그 동안 미뤄졌던 법의 심판을 받아 죗값을 치를 수 있는 것이다.

오키노 역시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과가의 죄를 청산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취조할 때 서슴없이 폭언을 퍼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사건의 죄까지 덮어씌워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야 거의 사적 제재의 영역이다....원죄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정말로 심판 받아야 할 사람이 심판 받지 않고 법망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단추를 하나 잘못 끼우면 이치에 어긋나는 결과가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과거의 살인 사건을 저질렀지만 시효가 성립되어 처벌받지 않았다면,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는 죄를 뒤집어씌워도 상관없는 것일까? 범인상을 미리 정해놓고 철저히 억측으로 수사를 하더라도, 과거에 살인을 저질렀던 살인자를 벌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세상의 정의를 지키는 것일까? 만약 이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공소시효를 빌미로 아무런 제재 없이 빠져 나가버린 범죄자를 심판하는 일은 누가 할 수 있을까? 피해자는 그저 단순히 운이 나빴을 뿐이고, 범인은 그저 운이 너무 좋았을 뿐이라고 치부해야 하는 건가? 세상에 이런 정의가 어디 있단 말인가.

베테랑 검사 모가미의 정의는 "죄를 저지른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에게 다른 죄를 뒤집어씌우게 되더라도, 어차피 그가 과거에 저지른 원래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모가미의 제자이자 새내기 검사인 오키노의 정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법은 지켜져야 한다"이다. 원죄를 만드는 것은 수사 측이 저지르는 죄이므로,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설사 그것이 과거의 살인을 저지른 자일지라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현재의 죄를 뒤집어씌우면, 결국 현재 사건의 범인은 역시나 또 처벌받지 않고 살아 갈테니 말이다.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모가미의 정의와 오키노의 정의는 극과 극이지만, 사실 어느 한 쪽의 입장을 편들고 싶지는 않다. 모가미의 행동도 이해가 가고 오키노의 생각도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죄를 저지른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법은 지켜져야 한다.

설사 그것이 과거에 살인을 저지른 자를 보호하는 것일지라도.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 싶다. 시즈쿠이 슈스케는공소시효를 빌미로 달아난 범죄자를 심판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진지한 의문에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현직 검사들을 취재해서 작품의 리얼리티를 생생하게 그려내어 현행 사법제도의 복잡한 딜레마를 인간적인 드라마로 만들어내고 있다. 애초에 공소시효라는 것만 없었더라도. 라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한다. 여러 가지 생각들을 남겨주는 멋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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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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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저지른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법은 지켜져야 한다. 설사 그것이 과거에 살인을 저지른 자를 보호하는 것일지라도.
시즈쿠이 슈스케는 현행 사법제도의 복잡한 딜레마를 인간적인 드라마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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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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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이 작품을 만났던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냐하면 당시에 친한 친구에게 책을 빌려주고 나서 그 아이가 갑자기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기는 바람에 책을 여태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반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아이였던 나는 그 이후로는 좋아하는 책은 친구에게 절대 빌려주지 않게 되었다.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책들은 친구들에게 읽게 하고 싶어서 마구 빌려주곤 했었는데, 책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이 몇 번 반복이 되고 나니 누군가 책을 빌려달라고 할 때, 내가 과연 이 책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부터 계산하게 되는 내가 싫어져 그냥 빌려주지 않게 된 것이다. 근데 재미있는 건 내가 당시에 읽었던 버전은 한겨레에서 출판된 버전의 표지인데, 지금 찾아보니 출간 년도가 1999년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닌가. 분명 나는 그것보다 한참 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말이다. 이번에 역자 후기를 보아하니, 2003년에 문예 출판사가 정식 판권을 획득하기 전에 국내에서는 그 동안 해적판으로 나돌았다고 되어 있다. 나도 몰랐지만, 정식 버전이 아닌 해적판을 읽고 마음 속에 그렇게 오래 남겨두었었구나 생각하니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번역이 조금 아쉽거나 어설프거나, 어쨌거나 정식 판권으로 출간된 책이 아니었어도 이 책은 어린이에게조차 감동을 줄 수 있는 책이었던 거다.

서두가 길었지만, 어쨌건 이번에 굉장히 오랜만에 새 판형으로 예쁘게 다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그냥 가슴이 마구 설레었었다. 드디어 이 책을 다시 만나는 구나 싶은 생각에 마치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 말이다. 특히나 이번에는 역자가 기존에 출간 되었던 버전의 번역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거의 새로 번역하다시피 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색하거나 부정확한 어휘나 표현을 바로 잡고, 평어체 문장을 경어체 문장으로 바꾼 점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인데, 사실 주인공 스카웃이 아홉 살 어린이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듯이 들려주는 형식이라 경어체 문장은 생각보다 더 감정 이입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지금의 이 번역이라면 나처럼 초등학교 시절에 이 책을 만나더라도 조금 더 빠르고, 쉽게 이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이 책의 주인공은 스카웃이라는 소녀이다. 스카웃은 네 살 위의 오빠 젬과 변호사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보고 들으며 이해하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 읽었을 때와 현재 어른이 된 다음에 읽었을 때의 감동이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좋은 책은 십 년, 이십 년의 터울을 두고 한번씩 다시 읽어봐야 하는 것 같다. 스카웃이 첫날 수업에서 알파벳을 읽어 나가자, 어린 그녀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게 못마땅했던 캐럴라인 선생님이 아빠에게 앞으로 더 이상 스카웃을 가르치지 말라고 전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카웃의 아빠는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고, 젬 오빠 말로는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글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선생님에게 하자 그 말을 믿지 않고, 아빠는 가르치는 방법을 잘 모르고 계신다며 뜬구름 잡는 망상은 그만하라고 한다. 그게 속상했던 스카웃은 집에 돌아가 아빠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며 자신을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한다. 그러자 아빠는 스카웃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초등학교 시절의 내가 기억하기로, 나는 이 대목에서 스카웃의 아빠가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체 왜 아빠가 선생님 편을 드는 걸까. 싶었고, 스카웃의 불평을 아빠가 그냥 어른처럼 대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이 대목을 다시 읽어보니 스카웃의 아빠가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걸 어린 딸에게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너무도 멋지게 보였다.

"너희 아빠 말씀이 옳아." 아줌마가 말씀하셨습니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몰린 흑인을 스카웃의 아버지가 변호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법정 공방 또한 다시 읽어봐도 매우 흥미로웠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이 부분 때문에 법정 드라마에 관심이 많이 생겨서 관련 책들을 찾아보곤 했었다. 물론 당시에는 인종차별이니, 흑백갈등이니 하는 건 잘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편견에 맞서는 용기와 자신이 믿고자 하는 걸 꿋꿋하게 밀어 붙이는 신념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사회의 엄격한 규범을 깨뜨렸을 뿐입니다. 그 규범은 너무 엄격하여 누구든지 그것을 깨뜨리면 우리와 함께 살기에 부적합한 인물로 추방당합니다."

"배심원 여러분은 진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 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흑인은 거짓말을 하고, 또 어떤 흑인은 부도덕하며, 또 어떤 흑인에게는 여자를-백인이건 흑인이건 말이지요-옆에 맡겨 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 전체에 해당하는 진리이지 어느 특정한 인종에만 적용되는 진리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만들어진 것인가. 사법 제도라는 것은 과연 정의의 심판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책을 읽어나갈 수록 어린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르면서 묘한 향수에 빠지기도,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적인 울림도, 그리고 어른이 된 내가 새롭게 깨닫게 되는 감동들도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고전이 아닐까 싶다. 내 아이가 자라면 꼭 읽어보게 하고 싶은 책 중에 단연코 선두에 놓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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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08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가 다문화사회가 될수록 인종을 차별하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어요. 여전히 흑인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기도 하죠. 하퍼 리의 소설을 아이에게 권하는 피오나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

피오나 2015-07-09 11:01   좋아요 0 | URL
맞아요.다문화사회가되면서우리나라도좀그렇죠.편견이란참무서운거같아요.아이가읽으면서저처럼좋다고느끼면금상첨화일텐데요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7-24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에게 권하면 정말 좋은 소설이죠. 소설 자체가 무척 재미있기도 하고... 제가 알기로는 모범적인 플롯으로 이 소설을 뽑고는 하더군요....

피오나 2015-07-25 19:27   좋아요 0 | URL
오..그렇군요ㅎㅎ 모범적인 플롯으로 꼽히는 책인줄은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