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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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그저 초반 몇 페이지만 읽어도 결판이 난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지 아닌지. 이 책을 여러 번 읽어야 하는지, 대충 한번 읽어야 하는지 말이다.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는 명백히 전자이다. 나는 이 책의 초반 백 여 페이지를 여러 번 계속해서 읽었다. 거기까지의 내용이라고 해 봤자, 고작 미술관에서 사고가 나는 것까지 정도 밖에 없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 장면들을 읽고 또 읽느라 이야기의 진도를 한참이나 넘어가지 못했다. 너무도 유려한 문장은 마치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웠고, 장면들이 그림처럼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묘사는 책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년과 엄마가 함께 도로를 걷고, 미술관에 들어서고, 그림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사고가 난 직후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보이는 황폐한 풍경들은 끔찍한 사고라는 자각이 들지 않을 만큼 몽환적이고 매혹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엄마의 죽음은 내 삶을 전과 후로 가르는 표시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인정하려니 참 쓸쓸하지만, 나는 엄마가 날 사랑했던 것만큼 나를 사랑하는 듯한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살아났다. 엄마가 비추는 마법 같고 연극 같은 빛 때문에 엄마의 눈을 통해서 보면 무엇이든 평소보다 밝게 보였다.

14년 전 4 10일 뉴욕, 지극히 평범한 날이었지만 이제는 녹슨 못처럼 달력 위로 불룩 튀어나와 있는 그날. 지난밤에 폭풍이 불고 큰비가 내려 상점가에 물이 들어차고 지하철 역 두 곳이 폐쇄되었던 날, 비를 품어 부푼 구름들이 마천루 위 높은 하늘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던 그날. 당시 열세 살이었던 테오가 학교에서 정학을 받는 바람에 엄마와 함께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학교의 회의만이 참담한 걱정거리였던 그때, 어린 소년에게는 곧 다가올 어두운 미래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택시를 탔지만 곧 택시 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엄마가 멀미를 하고 중간에 내려 걷게 된다. 그러나 하늘은 급속도로 흐려지고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비가 쏟아져 내리며, 거대한 돌풍이 몰려왔고, 거리의 사람들은 신문과 서류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미술관 현관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들 역시 비가 멎을 때까지 미술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림을 보고 나가기 전, 엄마는 얼른 가서 <해부학 강의>를 한 번만 더 보고 오겠다고 말한다. 테오는 전시실에서 만났던 마음을 빼앗긴 소녀에게 말을 걸 기회다 싶어 엄마와 헤어져 기념품 가게에서 보기로 약속을 한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전시실을 지나가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양팔을 들고 비명을 지르고 뛰쳐 나오더니, 엄청나게 큰,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전시실을 뒤흔든다. 폭탄 테러로 미술관에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테오는 그곳에서 결코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알까? 우리는 반박의 여지없는 상투적인 문화를 어린 시절부터 계속 주입받는다. 윌리엄 블레이크부터 레이디 가가까지, 장 자크 루소부터 잘랄라딘 무함마드 루미까지, <토스카>부터 <로저스 씨의 동네>까지-상류층부터 하류층까지-이상하게도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메시지를 전한다. 정신과 의사와 진로 상담사, 디즈니 만화의 공주들은 모두 답을 안다. "너 자신을 잃지마.""네 마음을 따라가렴."

하지만 내가 정말로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신뢰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몇 달 전 엄마와 테오를 버리고 떠난 아빠는 돈도, 양육비도, 연락 받을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갑자기 사라져버렸고, 엄마와 단 둘이 살았던 테오에게 엄마의 죽음이란 아마도 세상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죽고 난 이후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전부 자신의 선택이었으므로)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그는 엄마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이끌어줄 지표가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자신을 더 행복한 곳으로 이끌어줄 지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우러져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지표 말이다.

사고 현장에서 그는 죽어가는 노인의 부탁으로 얼결에 그림 하나를 가지고 오게 되고, 그것은 그 이후 그의 인생은 그가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세상은 사라진 그림 <황금방울새>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그는 처음에는 그림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기회를 놓치고, 결국에는 자신이 평생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림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게 되어 집착하게 된다. <황금방울새>는 네덜란드 델프트의 화약창고 폭발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카럴 파브리티우스(1622~1654)의 실제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에서 시작한 미스터리는 소년의 성장담과 연결되고, 미술관에서의 사고 이후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게 된 소년이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매혹적인 풍경과 더불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아마존 킨들의 완독률 98.5프로라는 압도적인 수치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구나 싶을 만큼 쉽사리 책장을 놓을 수가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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