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이 작품을 만났던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냐하면 당시에 친한 친구에게 책을 빌려주고 나서 그 아이가 갑자기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기는 바람에 책을 여태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반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아이였던 나는 그 이후로는 좋아하는 책은 친구에게 절대 빌려주지 않게 되었다.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책들은 친구들에게 읽게 하고 싶어서 마구 빌려주곤 했었는데, 책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이 몇 번 반복이 되고 나니 누군가 책을 빌려달라고 할 때, 내가 과연 이 책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부터 계산하게 되는 내가 싫어져 그냥 빌려주지 않게 된 것이다. 근데 재미있는 건 내가 당시에 읽었던 버전은 한겨레에서 출판된 버전의 표지인데, 지금 찾아보니 출간 년도가 1999년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닌가. 분명 나는 그것보다 한참 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말이다. 이번에 역자 후기를 보아하니, 2003년에 문예 출판사가 정식 판권을 획득하기 전에 국내에서는 그 동안 해적판으로 나돌았다고 되어 있다. 나도 몰랐지만, 정식 버전이 아닌 해적판을 읽고 마음 속에 그렇게 오래 남겨두었었구나 생각하니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번역이 조금 아쉽거나 어설프거나, 어쨌거나 정식 판권으로 출간된 책이 아니었어도 이 책은 어린이에게조차 감동을 줄 수 있는 책이었던 거다.
서두가 길었지만, 어쨌건 이번에 굉장히 오랜만에 새 판형으로 예쁘게 다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그냥 가슴이 마구 설레었었다. 드디어 이 책을 다시 만나는 구나 싶은 생각에 마치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 말이다. 특히나 이번에는 역자가 기존에 출간 되었던 버전의 번역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거의 새로 번역하다시피 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색하거나 부정확한 어휘나 표현을 바로 잡고, 평어체 문장을 경어체 문장으로 바꾼 점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인데, 사실 주인공 스카웃이 아홉 살 어린이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듯이 들려주는 형식이라 경어체 문장은 생각보다 더 감정 이입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지금의 이 번역이라면 나처럼 초등학교 시절에 이 책을 만나더라도 조금 더 빠르고, 쉽게 이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네?"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이 책의 주인공은 스카웃이라는 소녀이다. 스카웃은 네 살 위의 오빠 젬과 변호사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보고 들으며 이해하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 읽었을 때와 현재 어른이 된 다음에 읽었을 때의 감동이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좋은 책은 십 년, 이십 년의 터울을 두고 한번씩 다시 읽어봐야 하는 것 같다. 스카웃이 첫날 수업에서 알파벳을 읽어 나가자, 어린 그녀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게 못마땅했던 캐럴라인 선생님이 아빠에게 앞으로 더 이상 스카웃을 가르치지 말라고 전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카웃의 아빠는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고, 젬 오빠 말로는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글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선생님에게 하자 그 말을 믿지 않고, 아빠는 가르치는 방법을 잘 모르고 계신다며 뜬구름 잡는 망상은 그만하라고 한다. 그게 속상했던 스카웃은 집에 돌아가 아빠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며 자신을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한다. 그러자 아빠는 스카웃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초등학교 시절의 내가 기억하기로, 나는 이 대목에서 스카웃의 아빠가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체 왜 아빠가 선생님 편을 드는 걸까. 싶었고, 스카웃의 불평을 아빠가 그냥 어른처럼 대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이 대목을 다시 읽어보니 스카웃의 아빠가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걸 어린 딸에게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너무도 멋지게 보였다.
"너희 아빠 말씀이 옳아." 아줌마가 말씀하셨습니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몰린 흑인을 스카웃의 아버지가 변호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법정 공방 또한 다시 읽어봐도 매우 흥미로웠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이 부분 때문에 법정 드라마에 관심이 많이 생겨서 관련 책들을 찾아보곤 했었다. 물론 당시에는 인종차별이니, 흑백갈등이니 하는 건 잘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편견에 맞서는 용기와 자신이 믿고자 하는 걸 꿋꿋하게 밀어 붙이는 신념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사회의 엄격한 규범을 깨뜨렸을 뿐입니다. 그 규범은 너무 엄격하여 누구든지 그것을 깨뜨리면 우리와 함께 살기에 부적합한 인물로 추방당합니다."
"배심원 여러분은 진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 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흑인은 거짓말을 하고, 또 어떤 흑인은 부도덕하며, 또 어떤 흑인에게는 여자를-백인이건 흑인이건 말이지요-옆에 맡겨 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 전체에 해당하는 진리이지 어느 특정한 인종에만 적용되는 진리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만들어진 것인가. 사법 제도라는 것은 과연 정의의 심판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책을 읽어나갈 수록 어린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르면서 묘한 향수에 빠지기도,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적인 울림도, 그리고 어른이 된 내가 새롭게 깨닫게 되는 감동들도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고전이 아닐까 싶다. 내 아이가 자라면 꼭 읽어보게 하고 싶은 책 중에 단연코 선두에 놓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