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오로라 레베카 시리즈
오사 라르손 지음, 신견식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페이지를 여는 순간 찬바람이 부는 겨울로 순간이동을 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스토리 전반을 지배하는 것이 다름 아닌 날씨와 관련된 묘사들이기 때문이다. 북극광이 용처럼 꿈틀거리며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한겨울 퍼런 어스름 속에서 뽀드득뽀드득 눈밭을 걷는 날씨.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쳐 뺨이 에는 듯이 아리고, 입으로 숨을 들이쉬면 목구멍과 허파까지 얼얼할 정도로 추운 계절. 눈 덮인 숲에 달빛이 내리비치고, 길가를 따라 눈 더미가 벽처럼 쌓여 있는 그곳. 스웨덴의 스톡홀름과 키루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곳의 날씨와 매우 밀접하게 닮아 있다. 특히 오로라라고도 불리는 북극광은 그 신비로운 풍광만큼이나 이야기의 밀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북극광은 여전히 하늘 위로 하얗고 푸르스름한 베일을 드리우고 있었다.

안나마리아는 고개를 뒤로 쳐들며 물었다. "도저히 믿기질 않아. 올겨울 내내 오로라가 보여.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아니. 태양 폭풍 때문이야. 멋지게 보이긴 해도 발암물질을 뿜어내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지. 방사능을 막으려면 은색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할지도 모를 일이야." 스벤에리크가 답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 지도자 빅토르는 생애 두 번째로 죽음을 맞는다. 첫 번째 죽음은 9년전 열일곱 살 때 있었는데, 그는 사고로 심정지 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난 후 종교적 계시를 받고 지역 종교 공동체의 간판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은 그때와 달리 누군가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걸로 젊은 그의 생은 그렇게 끝이 나 버린다. 그것도 바로 교회의 제단 아래에서 말이다. 빅토르의 누나 산나와 과거 절친한 사이였던 친구 레베카는 그녀의 연락을 받고 무려 7년 만에 자신의 고향 키루나를 찾게 된다.

현재 스톡홀름에서 세무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레베카는 오래 전 고향을 떠날 때,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로부터 교회를 나가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난 후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했었고, 살인 사건 덕분에 본의 아니게 키루나를 찾게 되지만, 어쩐지 친구였던 산나와의 사이도 마냥 편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대체 그녀에게 7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산나와 빅토르와 그녀와의 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더 있었던 걸까. 교회에 적이 없어 보일 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던 빅토르는 대체 누구에게 살해당한 것일까. 다시 찾은 고향에서 레베카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하고, 빅토르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산나가 용의자로 체포되자 레베카는 그의 죽음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건을 수사하는 여성 형사인 안나마리아는 임신 중이라 내근직이지만 여전히 남자 동료들의 도움 요청으로 현장을 다니며, 빅토르의 사건 수사를 함께 하기 시작한다.

"경치가 좋네요.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내리는 눈으로 된 커튼뿐이었다.

"뭐 어때서? 어쩌면 지금이 최고의 경치일지도 몰라. 아름답지. 겨울과 눈은. 모든 게 더 단순해지니까. 받아들일 게 줄어들어. 색도 적어지고, 냄새도 적어지고, 낮도 짧아지고. 머리도 쉴 수 있게 되지."

 

오로라는 태양 표면의 폭발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니 태양 폭풍이 강해질수록 오로라는 더욱 밝게 빛난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지구를 둘러싼 전리층에 갇힌 플라스마는 붉은색, 녹색, 푸른색과 보라색으로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을 동안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충돌을 그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을 수사하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들이 뒤엉키는 내내 하얗고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오로라가 그 배경에 존재한다. 그 모습은 잊어 버리고 싶었던 과거의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고, 끔찍한 살인사건을 파헤치면서 더욱 강하고 단단해지는 캐릭터 레베카의 모습과 오로라의 모습은 다른 듯 닮아 있어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준다.

오사 라르손은 레베카 시리즈의 두 번째, 다섯 번째 작품으로 최고의 스웨덴 범죄소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시리즈 전체는 스웨덴에서만 200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했고, 전 세계 23개국에서 출간되어 누적 판매량이 550만 부를 돌파했고, 내년에는 드라마로도 방영될 예정이라고 하니 엄청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여성이 읽어야 할 최고의 미스터리에 선정되었다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는데, 아무래도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매우 이상하기도 하고,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하고, 좀 특별하다.

"씹할, 입 닥쳐요!" 냅다 쏘아붙인 상소리에 자매들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 덕분에 다시 욕을 하고 싶어졌다. "내가 당연히 씹할, 복수하고 싶지. 하지만 내가 온 이유는 그게 아니야.

주요 여성 캐릭터들은 세 명인데, 우선 세법 관련 업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신참 변호사인 레베카 마르틴손, 그리고 수사팀 팀장인 안나마리아 멜라 형사, 살해된 빅터의 누나이자 레베카의 옛  친구인 산나 스트란드고르드이다. 산나와 레베카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어딘가 이상한 관계이다. 홀로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산나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의존형 인물인데, 자신이 위기에 처하자 레베카에게 도움을 요청해 그녀를 고향으로 돌아오게 만들지만, 사실 그녀에게 딱히 고마워하지 않는다. 레베카 역시 산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그녀의 곁에서 도움을 주려 하지만, 시종일관 속마음은 산나에게 좋지 않은 소리만 해대고 있으며, 그녀를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다. 대체 속으로 '우린 친구가 아냐.'라고 외치면서 왜 그 먼 곳까지 달려가서 그녀를 돕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말이다. 안나마리아 형사는 현재 임신 중이라 출산 전까지는 내근만 해야 되어 주로 사무실에서 서류 작업을 해야 하지만, 동료들의 부름에 종종 현장으로 불려 나간다. 게다가 태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잔인한 시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분석하며 사건을 조사한다.

이렇게만 정리하고 보니 긍정적인 캐릭터가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들 세 명의 여성 캐릭터는 좀 이상하고, 색깔이 강하다. 게다가 나는 '씹할'이라고 욕을 해대는 여주인공을 만난 기억이 없기에, 더욱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이 더 그녀를 생생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너무도 현실적인 캐릭터이기에,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더라도, 사실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 하고 나니, 책을 덮었는데도 눈 앞에 영롱한 초록빛의 오로라가 펼쳐지는 것 같은 기시감에 잠시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공간과 계절, 그리고 날씨가 엄청난 역할을 하는 독특한 스릴러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마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리어 왕> 4, 왕이 실성하는 장면이 극장에서 상연되는 중이었다. 리어 왕 역할을 맡은 51세의 배우 아서는 이 장면을 연기하다 심장마비로 죽게 된다. 그리고 세계는 급작스럽게 퍼지는 독감 바이러스로 응급실에 환자들이 넘쳐나고, 서서히 혼란스러운 상황이 만들어지려는 찰나였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끝이 나고, 20년 뒤 종말 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커스틴은 그 만화책을 애지중지했지만, 이젠 책장 모서리가 여기저기 접혀 있고 가장자리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1호를 펼치면 두 페이지에 걸친 그림이 나온다. 황혼녘, 닥터 일레븐이 거무스름한 바위에 서서 쪽빛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작은 배들이 섬들 사이를 오가고 수평선 위에서는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다. 그는 중절모를 들고 있다. 작은 하얀색 동물이 그의 곁에 서 있다. ……그림 아래쪽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나는 파괴된 내 집을 바라보면서 달콤했던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문명이 몰락하고 20년 후, 셰익스피어의 극을 공연하는 유랑 악단이 등장한다. 20년 전, 아서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리어 왕>에서 대사 없는 아역이었던 커스틴이 어느덧 숙녀가 된 채로 유랑 악단에서 공연 중이었다. 독감이 핵폭탄처럼 지구를 강타한 후 충격적인 문명의 몰락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다들 정착 가능한 곳을 찾아 정착했다. 안전을 위해 화물트럭 휴게소나 대형 레스토랑, 낡은 모텔 같은 곳에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딘가에 정착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길 위에 있었다. 그들은 클래식과 재즈, 문명 몰락 이전의 대중가요를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연주하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상연했다. 커스틴은 어린 시절 아서에게 받은 닥터 일레븐 만화책 두 권을 애지중지 여겼는데, 문명 몰락 20년이 되어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질 무렵 이 두 권을 몽땅 외우다시피했다. 이 만화책은 각 호가 딱 10분 세상에 존재하는 판본이었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스테이션 일레븐>은 아서의 첫 번째 아내였던 미란다가 그려낸 그래픽 노블로 자비로 출간했기에 세상에 딱 10부만 존재하는 만화책, 닥터 일레븐의 시리즈 제목이다. 물리학자인 닥터 일레븐이 작은 행성과 유사하게 설계된 첨단 우주정거장에서 살며,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한다.

만화책에서의 상황과 실제 현실의 상황이 교묘하게 겹치면서 묘한 울림을 주고, 세상이 끝나기 전의 상황과 그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이야기들이 교차되며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는 이 작품은 매우 놀랍다. 종말을 다룬 꽤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어 왔지만, 그 어떤 작품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끔찍하고, 무서운 장면들 대신,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라고나 할까. 이런 분위기의 종말 소설을 만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읽는 내내 감탄했다. 아마도 내가 만난 가장 밝고 따뜻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닥터 일레븐 시리즈를 그려내는 미란다라는 캐릭터였는데,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 지독하게 외로울 때, 삶이 공허할 때,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해 괴로울 때.. 언제나 그녀를 위로해주었던 것은 바로 그녀가 그려내는 허구의 세계였다.

"당신 작품이군." 아서가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데? 이 첫 번째 권의 표지는 LA의 스튜디오 벽인 것 같은데, 아닌가?"

"기억하네." 언젠가 아서가 말했던 이미지는 영화의 배경 장면 같았다. 도시의 날카로운 섬들과 거리들과 건물들과 바위들, 그 사이의 높은 다리들. 검은 바다 저 밑에는 언더시로 이어지는 기밀식 출입문들이 거대한 괴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아서가 첫 번째 권을 무작위로 펼치자 바다와 다리로 연결된 섬들과 황혼녘의 풍경과 포메라니안과 함께 바위 위에 서 있는 닥터 일레븐의 모습을 그린 두 페이지에 걸친 펼침 그림이 나타났다. 밑에 지문이 나와 있었다. 나는 파괴된 내 집을 바라보면서 달콤했던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연기 학교를 졸업하고 할리우드에서 작은 역할들을 맡다가, 이제 막 좀 더 큰 역할로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한 배우 아서는 어느 날 밤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다. 동네 잡화점 카페에서 일하던 수지의 조카딸 미란다가 이제 열일곱 살인데, 미술학교에 진학하려고 최근에 토론토에 갔다며, 아서가 만나서 점심이라도 한번 사주지 않겠느냐고. 열일곱의 미란다와 스물아홉의 아서는 그렇게 잠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여러 해 동안 서로를 잊은 채로 생활하다, 아서가 서른 여섯, 미란다가 스물 네 살이 되었을 때,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때 미란다는 해운업체의 이사 비서로 일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상사는 거의 매일 출장 중이라 대부분의 일은 오전에 금방 끝나 버렸고, 널찍한 비서실에서 그녀는 오후 내내 자신이 집필 중이던 그래픽 노블 시리즈를 스케치를 하면서 보내곤 했다. 함께 사는 남자친구 파블로는 일도 하지 않고 그림도 팔지 않는 화가였고 그녀의 유일한 낙은 바로 자신이 집필 중인 그래픽 노블 '스테이션 일레븐 시리즈'였다.

주인공 닥터 일레븐은 뛰어난 물리학자로 근처 은하계에 살던 적대적인 문명이 지구를 점령하자, 수백 명의 반군들을 조직해 우주정거장 스테이션 일레븐을 타고 웜홀을 통과해 깊은 우주 속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에 숨어 살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녀가 상상하는 우주선과 별, 외계의 행성들.. 그리고 붉은 사막 풍경들,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하늘은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아름다운, 난파된 우주정거장을 만들어낸다. 달콤했던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외로운 닥터 일레븐의 모습은 미란다의 실제 삶과도 교묘하게 겹쳐진다. 미란다는 남자친구 파블로와 헤어지고, 인기 배우 아서와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하고, 결혼 3주년 기념일에 파티의 낯선 사람들 틈에서 스스로가 낯선 행성에 고립되어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서와 그의 영화 관계자들 무리에 속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이상한 만화나 그리는, 친구도 없이 혼자 다니길 좋아하는 사람으로만 치부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스테이션 일레븐 시리즈 만화를 그리는 순간에만 자유롭고, 행복했다. 그리고 넉달 후 미란다는 스물입곱 살의 이혼녀가 되고, 이어 4~5년 후에는 여행가방을 끌며 전 세계를 제집처럼 드나들게 되고, 30대 중반이 되면 드디어 세상살이에 능숙해지고 퍼스트 클래스로 대양을 넘나들며 일에 빠져 살게 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밤마다 호텔 방에서 다시 스테이션 일레븐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 만화는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뒤, 그러니까 문명이 완전히 몰락한 뒤에도 남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며 읽힌다.단지 생존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유랑 극단과 마치 사이비 교주같기도 한 예언자라고 불리는 청년과 예전 세계의 공항에서 발전된 문명 박물관의 사람들까지. 흥미로운 건 종말을 다루고 있는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의 세계는 종말 후의 풍경이 평화롭고,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거다. 생존을 위한 다툼이나 학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그저 살아남는 것 외에,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종말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다 읽고 나면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를 되돌아보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세상이 모두 끝이 나 버린 다음에도 존재하는 그 삶에 대하여, 작가가 그려내는 묘사는 매우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고통스럽지만 끔찍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지만 너무도 아름답다. 종말 직전 아서의 죽음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종말 이후 20년 뒤 미래와 그 이전의 과거를 차례로 교차시켜 가다 다시 아서가 죽는 그날 밤으로 돌아간다.  세상이 끝이 나버렸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6-07-13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성격이 이상한가봐요 디스토피아 소설이 본능적으로 끌리더라구요 헐 ㅋ 이 소설도 꽤나 재밌어 보여요 혹시 추천 해 주실 디스토피아 소설 있나요? 1984는 읽었어요 ㅋ

피오나 2016-07-14 10:34   좋아요 0 | URL
하핫..디스토피아 소설에 본능적으로 끌리신다니 이 작품 어떨까 싶어요! 휴 하위의 <울> 이라는 작품 읽어보셨나요? 저는 재미있더라고요^^

루쉰P 2016-07-15 00:17   좋아요 0 | URL
<울>은 못 읽어 봤습니다. ㅋ 한번 읽어 볼께요 ㅎ 왜 저는 디스토피아 소설이 그리 끌리는지 몰겠어여 허허 그렇다고 염세적이거나 그런 성격은 아닌디....

책 추천 감사해요 ㅋ
 
지옥이 새겨진 소녀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독일의 남쪽,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북동쪽에 위치한 비너발트 숲. 피투성이가 된 채 반라의 상태로 노부부에게 발견된 소녀. 1년 전에 실종된 소녀는 입술을 움직여보지만, 그것이 말이 되어 소리가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소녀의 등은 온통 불과 피, 천사, 악마 모양의 문신으로 뒤덮여 있다. 대체 누가 이 어린 소녀에게 이런 짓을 한 걸까. 대체 소녀에게 1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슈나이더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이 자리는 빈의 오페라극장 무도회가 아니다. 우리는 특수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하루 종일 살인 사건에 몰두하고, 시신이나 심하게 몸이 훼손된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그 누구와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 배우자에게 '오늘 아주 흥미로운 사건을 접했어. 다섯 살짜리 여자애를 성폭행하고 죽인 사건이지. 크림 좀 줄래, 자기야?' 이렇게 말하겠나? 이런 사건을 접하면서 살아가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 없이는 여기서 2년을 버틸 수 없다."

전작인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에서 범인에게 어머니를 살해 당한 초보 여형사 자비네와 엄청난 괴짜 천재 프로파일러 슈나이더는 사건을 함께 해결하게 되면서 나름의 동료애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일반 적인 동료애와는 거리가 먼 사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뭐 슈나이더는 남을 배려할 줄은 당연히 모르고, 오로지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인물이라 그 누구와도 친분 관계를 가지기 어려워 보이는 캐릭터이긴 하다. 하지만 그 능력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기에, 항상 범죄심리 분석을 하고 싶었기에 프로파일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자비네가 그와 함께 일을 하게 된 것이 묘한 재미를 주었었다. 작품의 마지막에 슈나이더가 범죄수사국 국장과 얘기를 했다며, 비스바덴에 최고의 인재들을 교육하는 아카데미에 자비네가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을 했었다. 하지만 자비네는 슈나이더의 제안을 생각하며 세 딸을 혼자 돌보는 언니 모니카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 그러는 마음 한 켠으로 학창 시절 사귀었던 친구 에릭 도르퍼를 떠올리며 설레어 하기도 했었다.

, 이번엔 마르틴 슈나이더와 자비네 콤비의 두 번째 시리즈이다. 매년 연방범죄수사국 아카데미에 지원서를 냈지만 늘 합격하지 못했던 자비네가 그토록 염원하던 연방범죄수사국 아카데미에 입학 허가를 받아 2년간 교육을 받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동안 매년 수 차례 지원서를 냈었으나 거부당했는데, 이번에는 시험 하나 보지 않고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도착해서 한달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이자 연방범죄수사국에서 근무하는 에릭이 수사 중에 총에 맞아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빈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아동 성폭행 사건을 전담하고 있는 멜라니 디츠 검사는 등에 문신이 새겨진 채 반라 상태의 피투성이로 발견된 소녀 클라라를 면담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실종된 지 1년 만에 발견된 클라라의 등에는 어깨 밑부터 꼬리뼈까지 온통 불과 피, 천사, 악마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등장하는 시였다. 이후 클라라가 발견된 숲에서 3명의 여자아이 시신이 연이어 발견되고, 죽은 소녀들은 하나같이 등 전체 피부가 벗겨진 상태였다. 범인을 추적할 유일한 단서가 바로 등의 문신이었던 것이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너무 빈약한 이론이오. 분명 범행 방법이 다른 사건들이란 말이오. 그리고 혹시라도 이 세상에 실제로 매번 범행할 때마다 다른 방법을 쓰는 범인이 있다면 우리는 절대 그 범인을 잡을 수 없소.”

"그러니까 굉장히 지능적이라는 겁니다." 자비네가 반박했다.

"그럼 범인이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저도 모릅니다." 자비네는 인정했다.

한편 비스바덴의 슈나이더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자비네를 비롯한 신입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미제 사건들로 수업을 시작한다. 수감 중인 연쇄살인범의 수법을 모방해서 빌라에 살고 있던 일가족이 무참하게 살해되었고, 심리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이 정신병원 환자에 의해 살해당하고, 텔레비전 방송 사회자가 식인 성향을 가진 동성애자의 관습 및 의식을 연출해 살해당하고, 정치인이 S&M 장면에서 독이 묻은 채찍으로 살해되었다. 전혀 다른 범행 방법으로 공통점 없이 벌어진 살인 사건들에서 자비네는 연관성이 있다고 믿고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혀 패턴이 다른 사건들이었기에 공통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아카데미 연수생이라는 그녀의 신분 또한 번번히 길을 가로 막는다.

전작에서 과거와 두 가지 현재가 동시 진행되면서 궁금증을 자아내는 구조로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시켰던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이번 작품에서는 전혀 다른 곳, 다른 인물들이 완전히 다른 사건을 만나 조사하는 걸로 이야기를 교차 진행시킨다. 오스트리아 빈의 멜라니 검사와 독일 비스바덴의 자비네와 슈나이더가 쫓는 사건은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용의자들이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연쇄살인이 등에 문신이 새겨진 소녀 클라라의 실종 사건으로 이어지고, 자비네의 남자친구 에릭이 총에 맞은 사건과 만나면서 복잡한 플롯들이 하나로 정리되면서 거대한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기를 죽이고 스트레스를 주는 슈나이더의 성격도 여전하고, 사건을 재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해 절대 멈추지 않는 자비네의 무한 추진력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흥미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작가의 다른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마르틴 스나이더&자비네> 시리즈 두 번째 작품과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발터 풀라스키 형사>의 첫 번째 작품이다. 보통은 작가들이 한 시리즈를 길게 가져가거나, 시리즈 외에 스탠드얼론으로 작품을 쓰는데,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각각 시리즈의 주인공인 형사만 무려 세 명이다. 그렇다고 하면 각각의 캐릭터들엑 공통점이 있거나,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을까 싶을 수도 있는데, 흥미로운 건 각 시리즈의 인물들이 전혀 다른 색깔과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출간된 각각의 시리즈를 비교해보면서 읽는 재미도 놓치지 말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캐릭터는 마르틴 스나이더&자비네 시리즈가 조금 더 매력적이라 마음이 가고, 플롯은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된 발터 풀라스키 형사 시리즈가 조금 더 복잡하고 탄탄해서 재미있었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여름의 복수> <지옥이 새겨진 소녀>의 구성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하나의 사건 재구성을 위해 전혀 다른 곳의 다른 인물 둘이 양쪽에서 교차 진행되며 사건을 파고드는 구성이다. 오스트리아의 젊은 여변호사와 독일에 조기 퇴직을 앞두고 있는 늙은 형사,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열혈 여검사와 독일의 천재 프로파일러와 경찰 아카데미 학생 신분의 여형사로 각각 진행되다 작품의 후반부에 양쪽에서 쫓던 사건의 교집합이 생기는 순간의 짜릿함이란 엄청난 재미를 선사한다. 두 작품 모두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속도감 있고, 스릴 넘치는 완벽한 스릴러 작품이기도 했고 말이다.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줄 수 있는 궁극의 즐거움을 거의 무한대로 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이 두 작품으로 이제 무조건 믿고 보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다음 시리즈도 어서 빨리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관의 조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의 직업에 무려 '긍지'라는 것을 가지고 임하기란 사실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이 실제 꿈꾸던 일이랑 전혀 상관없는 것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오랜 시간 바래왔던 일을 하고 있지만 현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름에 좌절하는 사람에게도, 별 생각 없이 매일매일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일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은 어디 딴 세상 일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가족들을 돌볼 수도 없고, 매 순간 자신의 안위마저 저당 잡혀야 하고, 그렇다고 그만큼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의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가가야가 체포되었을 당시는 경시청 내부는 물론, 뒷 세계에서도 쾌재를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적을 만들기 쉬운 임무를 맡아 화려한 생활을 누려왔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2심이 시작되면서 가가야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각성제 수사나 권총 적발을 둘러싼 조직의 속사정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상사 명령이나 상사와의 관계에 대해 증언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경찰의 위신을 지켰다는 것이었다. 그와 연관되었던 뒷 세계나 폭력조직 관계자도 가가야를, 제 몸을 챙길 수 있었을 텐데도 그들을 팔아넘기지 않은 남자로 보기 시작했다. 폭력배들의 말에 따르면 가가야야말로 조폭 담당 형사의 귀감이라는 것이었다.

전작인 <경관의 피>에서 세이지, 다미오, 가즈야에 이르는 삼대가 모두 경찰로 일하는 모습을 그려내어 경찰 수사극보다는 가족 드라마에 가까운 이야기를 그려내었던 사사키 조는 이번 <경관의 조건>에서 가즈야를 중심으로 제대로 된 경찰 수사극을 보여주고 있다. 전작에서 아버지인 다미오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에, 아버지와 그다지 각별하지 못했던 아들 가즈야도 결국 경찰이 되었다. 가즈야는 가즈야는 문제 경찰관을 대상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라는 임무를 받게 된다. 폭력단을 담당하는 민완 형사 밑에서 일을 배우다 언젠가 증거를 쥐고 그의 뒤통수를 때릴 수밖에 없는 비밀 업무를 맡게 되었다. 아버지가 했던 잠입 수사와 색깔은 다르지만, 어찌되었던 비밀 업무를 말이다. 가즈야의 아버지 다미오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신결 질환으로 폭력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였고, 그 덕분에 가즈야는 살아 생전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지 못했었다.

<경관의 조건> <경관의 피>로부터 구 년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가즈야의 비밀 업무가 끝이 나면서 시작한다. 가즈야는 바로 어젯밤까지 아버지처럼 따랐던 상사 가가야를 각성제 소지 및 복용 의혹으로 상부에 고발한다. 각성제 단속법 위반으로 체포하는 건 가가야와 함께 밤을 보낸 여성 나가미 유카도 함께다. 나가미 유카는 얼마 전까지 안조 가즈야와 사귀었던 여성이다. 하지만 가즈야의 고발은 배신당한 여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 정해진 수순이었다. 가가야 히토시 경부는 폭력조직을 담당하는 수사원으로 도쿄의 뒷 세계에서 독자적인 정보 수집 루트를 구축했고, 권총 적발이나 각성제 거래 정보를 수집하는 데도 뛰어난 실적을 거둔 인물이었다. 다만 사생활이 엉망이라 뒷 세계와의 유착이 의심되었기에 상부에서는 그에게 부하를 붙여 그 소행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애초에 가즈야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가야는 의원면직되고, 가즈야는 상사를 팔아 넘겼다는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되지만,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구 년 후, 마약시장의 판도가 바뀌면서 상부에서는 가가야의 복직을 통해서 그 혼란을 해결하려 하고, 가가야와 가즈야는 상사와 부하가 아니라 라이벌로서 다시 대면하게 된다

아버지, 어째서 죽었습니까?

언젠가 아버지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맹세했는데,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에게, 어느 날 언젠가 손가락질을 하며 이제 당신이 폭군으로 군림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고 통고해줄 작정이었는데,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에 당신이 충격을 받고,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눈길을 떨어뜨리고, 몸을 작게 움츠릴 날을 기대했는데. 언젠가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그 괴로운 사춘기를 가출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지키며 참아냈는데.

그런데 아버지, 당신은 그 기회를 내게 주지도 않고, 멋대로 떠나버렸어요. 우리 가족 중 누구 하나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마지막 순간까지 이기적으로 가족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은 가족들 앞에서 사라진 겁니다.

사사키 조야 워낙 경찰 소설의 대가이지만, 새삼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경찰이라는 조직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탐구, 조사 없이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가야가 조직의 비정한 음모 속에서 경시청과 조폭단 양 조직으로부터 전설이 되는 과정도 대단하고, 이후 다시 만난 가가야와 나름 자신의 자리에서 동분서주하는 가즈야와의 대립 구도도 매우 흥미진진하다. 특히 실제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던 유명 연예인 각성제 사건을 모티프로 경찰의 조직개편 관련된 이야기는, 사사키 조가 이 작품의 구상부터 집필에 이르기까지 무려 사 년이라는 시간을 들였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경관의 피> <경관의 조건>은 모두 가즈야가 부는 호루라기 소리로 끝이 난다. 경찰의 필수 소지품인 호루라기는 범죄자를 쫓는 순간에도, 위험에 직면했을 때 동료를 부르기 위해서도 사용되는 소품이다. 가즈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재직 중에 몇 번이고 긍지를 품고 불었을 그 호루라기의 음색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이 배신했던 상사의 진심을 뒤늦게 알아 차리고 오열하듯이 호루라기를 분다.

가가야와 가즈야의 매우 흥미로웠던 구도가 마지막 장면에서 "대부님." "속 썩이기는."으로 마무리되면서, 아무래도 이 다음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되기도 한다. 사실 주인공은 가즈야였지만, 캐릭터로서의 임팩트는 다소 약했고, 가가야라는 인물이 훨씬 압도적이었어서 시리즈가 더 이어질까 우려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경관의 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호루라기가 <경관의 조건>에서는 더욱 묵직한 감동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시종일관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던 이야기의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해주고 있다. 그 호루라기는 상관을 과감히 고발했던 가즈야도, 부패와 탐욕의 상징이었던 가가야도, 그리고 자살로 처리되어 순직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할아버지 세이지도, 공안부의 스파이 노릇을 하다 불안신경증을 얻게 되어 아들의 존경을 받지는 못했던 아버지 다미오도, 역시나 모두 경관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코야마 히데오도, 곤노 빈도 일본 경찰 소설하면 언제나 제일 먼저 거론되는 작가들이지만, 사사키 조만큼 인간적인 경찰을 그리고 있는 작가는 없는 것 같다. '경관 안조' 시리즈 외에도 '제복경관 카와쿠보' 시리즈도, 나오키 상 수상작이었던 단편집 <폐허에 바라다>에서도 범죄를 수사하는 인물의 마음까지 그려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7-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이달의당산적으로 적극 추천합니다

피오나 2016-07-04 12:04   좋아요 0 | URL
아이고 이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판타지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허구의 이야기에서 뛰어난 상상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공중에 떠 있으면 읽는 동안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감정 이입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출발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의 비약과 과장마저도 마치 진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가 넓어진다. 그런 면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장편 소설 <>은 출간된 지 벌써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읽힌다. 무려 노예 제도가 나오고, 흑인 여성으로서의 불합리한 삶에 대해 그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루퍼스는 내가 지켜보는 동안에도 성장하고 있었다. 내가 지켜본 덕분에, 계속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자라고 있었다. 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

 

그날은 다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작가인 케빈과 작가 지망생인 다나 부부는 이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참이라 너무 지쳐 있었기에, 둘 다 생일을 기념할 계획이 딱히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책이 엄청나게 많았기에 책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방 안이 흐릿해지고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나는 그렇게 집도, 책도, 전부 다 사라지고, 난데없이 야외에서, 나무가 자란 흙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앞에 있던 넓은 강 한가운데에 어린아이 하나가 허우적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빠져 죽기 직전이었고, 다나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으로 달려가 아이에게 헤엄쳐 가 아이를 구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물가에 있던 아이의 엄마는 구해준 자신을 주먹으로 공격하고, 화가 난 남자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평생 처음 보는 긴 총신이 내려다 보였다. 그렇게 자신이 총에 맞는다는 생각에 딱 얼어붙은 순간, 다나는 다시 케빈 곁으로 돌아온다. 온통 젖고 진흙투성인 채로. 다나가 체감한 시간은 몇 분 정도였지만, 케빈은 실제 그녀가 사라진 시간은 기껏해야 십 초에서 십오 초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곳으로 가게 되는데, 처음 만났던 소년 루퍼스가 커튼에 불을 붙여 위험에 처했던 순간이었다. 소년은 처음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고, 루퍼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나는 그곳이 무려 100년 전인 1815년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인이 검둥이라 불리며 천시받고, 백인들이 노예들에게 채찍질을 해대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게다가 다나는 흑인 여성이었다. 그리고 루퍼스는 다나의 아주 먼 조상이었다.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 다나와 케빈은 자신이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지 루퍼스가 위험한 순간이었고, 다시 현재로 오게 되는 것은 다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체 언제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건지, 어떻게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닥쳐온 현실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경험에선 그 증상이 나타났을 때 케빈이 다나를 끌어 안았고, 케빈도 그녀와 함께 100년 전 시간 속으로 이동하게 된다.

나는 총을 보고, 그 총을 쥔 청년을 보았다. 계속 루퍼스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루퍼스는 계속 내가 틀렸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나는 그곳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맞아보기도 하고, 정신을 잃을 만큼 심한 벌을 받기도 하고, 흑인으로서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며 당시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질병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변변한 의술도 약도 없었으며, 흑인들은 백인들이 남긴 음식을 먹었으며, 주인의 눈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채찍을 맞거나 멀리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시대였다.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인종과 젠더 문제를 다른 소설들은 그 동안에도 꽤 읽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 내용들이 마음으로, 몸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을 전혀 겪지 못한 세대가 전쟁 이야기 자체를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너무도 비현실적인 부분이라 공감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극중 다나가 겪는 수많은 경험들과 생각들이 리트머스 종이처럼 고스란히 나에게 흡수되는 느낌이랄까. 이토록 생생하게, 이토록 무참하게,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하게 1800년대의 풍경을 그려내다니 책을 읽는 내내 너무 압도적이라 페이지를 덮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손목을 다쳤어? 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어! 설마 직접 그은 거야?"

". 그래서 집에 올 수 있었어."

"더 안전한 방법이 있었을 텐데."

나는 조심스럽게 손목을 문질렀다. "죽음 직전에 이르는 안전한 방법은 없어. 수면제는 무서웠어. 혹시...... 혹시 죽고 싶어지면 죽을 수 있게 챙겨간 수면제인데, 집에 오려고 그걸 썼다가는 당신 앞에서 죽거나, 어느 의사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낼까 봐 겁이 났어. 아니면 죽지는 않더라도 소름 끼치는 부작용이 남을지도 모르잖아. 괴저라든가."

 

애초에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단골 소재이다. 타임슬립은 판타지 및 SF의 클리셰로, 요즘에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TV 드라마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초자연현상 탓에 유발되는 타임슬립은 시간여행을 하게 된 맥락이나 과정을 설명하기 귀찮아하는 게으른 작가들에게 안성맞춤인 핑계꺼리이기도 해 허술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작품들도 꽤 많다. 타임슬립이 그저 이야기를 강요하기 위해 과거나 미래로 가는 가상의 복선에 지나지 않다면,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적 설명 따위야 별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타임 슬립' 이라는 소재를 진부하고 허술한 장치라고 생각했기에 그다지 반기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생각을 바꿔야 했다.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를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사용할 수도 있구나 감탄해야 했으니 말이다.

'타임 슬립'이 등장하는 작품에선 보통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 또는 미래에 떨어지게 되는데, 대부분 과거로 돌아간 이가 뭔가를 변화시켜 미래를 바꾼다는 설정이 많았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라는 아쉬움과 후회를 돌이키고 싶다는 열망이나 혹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때로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 속으로 뛰어 들어간 인물들의 모험이 주된 플롯인데, <>에서 주인공이 겪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SF가 미래나 우주뿐 아니라 시간 그 자체에 대해, 공간에 대해, 역사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 출간되었던 작품 <야생종>에서 서로를 미워하지만, 서로를 죽이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도로와 안얀우 처럼 <>에서 다나와 루퍼스 또한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애증의 관계이다. 루퍼스를 잃어버린 아들처럼 사랑했지만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던 다나와 그녀를 자신의 반쪽처럼 생각했지만 다나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소유욕이 먼저였던 루퍼스는 그렇게 시종일관 극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미국의 노예 제도와 선과 악, 그리고 목숨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묵직한 주제는 이 작품 속에서 매우 아름답고도 고통스럽게 녹아 들어 읽는 이의 심장을 툭툭 건드린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그리고 일 년에 가까운 인생과,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귀한 줄 몰랐던 편안함과 안전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라는 이 작품의 처음을 열었던 문장의 의미는 5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 ''이라는 개념은 결코 완전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을 때는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작가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이 문장은 작품 전체의 압도적인 서사에 방점을 찍으며 이 책을 결국 또 다시 읽게 만들어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