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판타지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허구의 이야기에서 뛰어난 상상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공중에 떠 있으면 읽는 동안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감정 이입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출발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의 비약과 과장마저도 마치 진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가 넓어진다. 그런 면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장편 소설 <킨>은 출간된 지 벌써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읽힌다. 무려 노예 제도가 나오고, 흑인 여성으로서의 불합리한 삶에 대해 그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루퍼스는 내가 지켜보는 동안에도 성장하고 있었다. 내가 지켜본 덕분에, 계속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자라고 있었다. 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
그날은 다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작가인 케빈과 작가 지망생인 다나 부부는 이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참이라 너무 지쳐 있었기에, 둘 다 생일을 기념할 계획이 딱히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책이 엄청나게 많았기에 책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방 안이 흐릿해지고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나는 그렇게 집도, 책도, 전부 다 사라지고, 난데없이 야외에서, 나무가 자란 흙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앞에 있던 넓은 강 한가운데에 어린아이 하나가 허우적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빠져 죽기 직전이었고, 다나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으로 달려가 아이에게 헤엄쳐 가 아이를 구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물가에 있던 아이의 엄마는 구해준 자신을 주먹으로 공격하고, 화가 난 남자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평생 처음 보는 긴 총신이 내려다 보였다. 그렇게 자신이 총에 맞는다는 생각에 딱 얼어붙은 순간, 다나는 다시 케빈 곁으로 돌아온다. 온통 젖고 진흙투성인 채로. 다나가 체감한 시간은 몇 분 정도였지만, 케빈은 실제 그녀가 사라진 시간은 기껏해야 십 초에서 십오 초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곳으로 가게 되는데, 처음 만났던 소년 루퍼스가 커튼에 불을 붙여 위험에 처했던 순간이었다. 소년은 처음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고, 루퍼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나는 그곳이 무려 100년 전인 1815년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인이 검둥이라 불리며 천시받고, 백인들이 노예들에게 채찍질을 해대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게다가 다나는 흑인 여성이었다. 그리고 루퍼스는 다나의 아주 먼 조상이었다.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 다나와 케빈은 자신이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지 루퍼스가 위험한 순간이었고, 다시 현재로 오게 되는 것은 다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체 언제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건지, 어떻게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닥쳐온 현실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경험에선 그 증상이 나타났을 때 케빈이 다나를 끌어 안았고, 케빈도 그녀와 함께 100년 전 시간 속으로 이동하게 된다.
나는 총을 보고, 그 총을 쥔 청년을 보았다. 계속 루퍼스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루퍼스는 계속 내가 틀렸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나는 그곳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맞아보기도 하고, 정신을 잃을 만큼 심한 벌을 받기도 하고, 흑인으로서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며 당시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질병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변변한 의술도 약도 없었으며, 흑인들은 백인들이 남긴 음식을 먹었으며, 주인의 눈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채찍을 맞거나 멀리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시대였다.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인종과 젠더 문제를 다른 소설들은 그 동안에도 꽤 읽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 내용들이 마음으로, 몸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을 전혀 겪지 못한 세대가 전쟁 이야기 자체를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너무도 비현실적인 부분이라 공감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극중 다나가 겪는 수많은 경험들과 생각들이 리트머스 종이처럼 고스란히 나에게 흡수되는 느낌이랄까. 이토록 생생하게, 이토록 무참하게,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하게 1800년대의 풍경을 그려내다니 책을 읽는 내내 너무 압도적이라 페이지를 덮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손목을 다쳤어? 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어! 설마 직접 그은 거야?"
"응. 그래서 집에 올 수 있었어."
"더 안전한 방법이 있었을 텐데."
나는 조심스럽게 손목을 문질렀다. "죽음 직전에 이르는 안전한 방법은 없어. 수면제는 무서웠어. 혹시...... 혹시 죽고 싶어지면 죽을 수 있게 챙겨간 수면제인데, 집에 오려고 그걸 썼다가는 당신 앞에서 죽거나, 어느 의사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낼까 봐 겁이 났어. 아니면 죽지는 않더라도 소름 끼치는 부작용이 남을지도 모르잖아. 괴저라든가."
애초에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단골 소재이다. 타임슬립은 판타지 및 SF의 클리셰로, 요즘에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TV 드라마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초자연현상 탓에 유발되는 타임슬립은 시간여행을 하게 된 맥락이나 과정을 설명하기 귀찮아하는 게으른 작가들에게 안성맞춤인 핑계꺼리이기도 해 허술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작품들도 꽤 많다. 타임슬립이 그저 이야기를 강요하기 위해 과거나 미래로 가는 가상의 복선에 지나지 않다면,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적 설명 따위야 별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타임 슬립' 이라는 소재를 진부하고 허술한 장치라고 생각했기에 그다지 반기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생각을 바꿔야 했다.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를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사용할 수도 있구나 감탄해야 했으니 말이다.
'타임 슬립'이 등장하는 작품에선 보통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 또는 미래에 떨어지게 되는데, 대부분 과거로 돌아간 이가 뭔가를 변화시켜 미래를 바꾼다는 설정이 많았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라는 아쉬움과 후회를 돌이키고 싶다는 열망이나 혹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때로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 속으로 뛰어 들어간 인물들의 모험이 주된 플롯인데, <킨>에서 주인공이 겪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SF가 미래나 우주뿐 아니라 시간 그 자체에 대해, 공간에 대해, 역사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 출간되었던 작품 <야생종>에서 서로를 미워하지만, 서로를 죽이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도로와 안얀우 처럼 <킨>에서 다나와 루퍼스 또한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애증의 관계이다. 루퍼스를 잃어버린 아들처럼 사랑했지만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던 다나와 그녀를 자신의 반쪽처럼 생각했지만 다나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소유욕이 먼저였던 루퍼스는 그렇게 시종일관 극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미국의 노예 제도와 선과 악, 그리고 목숨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묵직한 주제는 이 작품 속에서 매우 아름답고도 고통스럽게 녹아 들어 읽는 이의 심장을 툭툭 건드린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그리고 일 년에 가까운 인생과,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귀한 줄 몰랐던 편안함과 안전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라는 이 작품의 처음을 열었던 문장의 의미는 5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결코 완전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을 때는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작가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이 문장은 작품 전체의 압도적인 서사에 방점을 찍으며 이 책을 결국 또 다시 읽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