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남쪽,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북동쪽에 위치한 비너발트 숲. 피투성이가 된 채 반라의 상태로 노부부에게 발견된 소녀. 1년 전에 실종된 소녀는 입술을 움직여보지만, 그것이 말이 되어 소리가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소녀의 등은 온통 불과 피, 천사, 악마 모양의 문신으로 뒤덮여 있다. 대체 누가 이 어린 소녀에게 이런 짓을 한 걸까. 대체 소녀에게 1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슈나이더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이 자리는 빈의 오페라극장 무도회가 아니다. 우리는 특수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하루 종일 살인 사건에 몰두하고, 시신이나 심하게 몸이 훼손된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그 누구와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 배우자에게 '오늘 아주 흥미로운 사건을 접했어. 다섯 살짜리 여자애를 성폭행하고 죽인 사건이지. 크림 좀 줄래, 자기야?' 이렇게 말하겠나? 이런 사건을 접하면서 살아가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 없이는 여기서 2년을 버틸 수 없다."
전작인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에서 범인에게 어머니를 살해 당한 초보 여형사 자비네와 엄청난 괴짜 천재 프로파일러 슈나이더는 사건을 함께 해결하게 되면서 나름의 동료애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일반 적인 동료애와는 거리가 먼 사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뭐 슈나이더는 남을 배려할 줄은 당연히 모르고, 오로지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인물이라 그 누구와도 친분 관계를 가지기 어려워 보이는 캐릭터이긴 하다. 하지만 그 능력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기에, 항상 범죄심리 분석을 하고 싶었기에 프로파일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자비네가 그와 함께 일을 하게 된 것이 묘한 재미를 주었었다. 작품의 마지막에 슈나이더가 범죄수사국 국장과 얘기를 했다며, 비스바덴에 최고의 인재들을 교육하는 아카데미에 자비네가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을 했었다. 하지만 자비네는 슈나이더의 제안을 생각하며 세 딸을 혼자 돌보는 언니 모니카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 그러는 마음 한 켠으로 학창 시절 사귀었던 친구 에릭 도르퍼를 떠올리며 설레어 하기도 했었다.
자, 이번엔 마르틴 슈나이더와 자비네 콤비의 두 번째 시리즈이다. 매년 연방범죄수사국 아카데미에 지원서를 냈지만 늘 합격하지 못했던 자비네가 그토록 염원하던 연방범죄수사국 아카데미에 입학 허가를 받아 2년간 교육을 받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동안 매년 수 차례 지원서를 냈었으나 거부당했는데, 이번에는 시험 하나 보지 않고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도착해서 한달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이자 연방범죄수사국에서 근무하는 에릭이 수사 중에 총에 맞아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빈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아동 성폭행 사건을 전담하고 있는 멜라니 디츠 검사는 등에 문신이 새겨진 채 반라 상태의 피투성이로 발견된 소녀 클라라를 면담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실종된 지 1년 만에 발견된 클라라의 등에는 어깨 밑부터 꼬리뼈까지 온통 불과 피, 천사, 악마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등장하는 시였다. 이후 클라라가 발견된 숲에서 3명의 여자아이 시신이 연이어 발견되고, 죽은 소녀들은 하나같이 등 전체 피부가 벗겨진 상태였다. 범인을 추적할 유일한 단서가 바로 등의 문신이었던 것이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너무 빈약한 이론이오. 분명 범행 방법이 다른 사건들이란 말이오. 그리고 혹시라도 이 세상에 실제로 매번 범행할 때마다 다른 방법을 쓰는 범인이 있다면 우리는 절대 그 범인을 잡을 수 없소.”
"그러니까 굉장히 지능적이라는 겁니다." 자비네가 반박했다.
"그럼 범인이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저도 모릅니다." 자비네는 인정했다.
한편 비스바덴의 슈나이더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자비네를 비롯한 신입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미제 사건들로 수업을 시작한다. 수감 중인 연쇄살인범의 수법을 모방해서 빌라에 살고 있던 일가족이 무참하게 살해되었고, 심리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이 정신병원 환자에 의해 살해당하고, 텔레비전 방송 사회자가 식인 성향을 가진 동성애자의 관습 및 의식을 연출해 살해당하고, 정치인이 S&M 장면에서 독이 묻은 채찍으로 살해되었다. 전혀 다른 범행 방법으로 공통점 없이 벌어진 살인 사건들에서 자비네는 연관성이 있다고 믿고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혀 패턴이 다른 사건들이었기에 공통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아카데미 연수생이라는 그녀의 신분 또한 번번히 길을 가로 막는다.
전작에서 과거와 두 가지 현재가 동시 진행되면서 궁금증을 자아내는 구조로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시켰던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이번 작품에서는 전혀 다른 곳, 다른 인물들이 완전히 다른 사건을 만나 조사하는 걸로 이야기를 교차 진행시킨다. 오스트리아 빈의 멜라니 검사와 독일 비스바덴의 자비네와 슈나이더가 쫓는 사건은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용의자들이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연쇄살인이 등에 문신이 새겨진 소녀 클라라의 실종 사건으로 이어지고, 자비네의 남자친구 에릭이 총에 맞은 사건과 만나면서 복잡한 플롯들이 하나로 정리되면서 거대한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기를 죽이고 스트레스를 주는 슈나이더의 성격도 여전하고, 사건을 재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해 절대 멈추지 않는 자비네의 무한 추진력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흥미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작가의 다른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마르틴 스나이더&자비네> 시리즈 두 번째 작품과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발터 풀라스키 형사>의 첫 번째 작품이다. 보통은 작가들이 한 시리즈를 길게 가져가거나, 시리즈 외에 스탠드얼론으로 작품을 쓰는데,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각각 시리즈의 주인공인 형사만 무려 세 명이다. 그렇다고 하면 각각의 캐릭터들엑 공통점이 있거나,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을까 싶을 수도 있는데, 흥미로운 건 각 시리즈의 인물들이 전혀 다른 색깔과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출간된 각각의 시리즈를 비교해보면서 읽는 재미도 놓치지 말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캐릭터는 마르틴 스나이더&자비네 시리즈가 조금 더 매력적이라 마음이 가고, 플롯은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된 발터 풀라스키 형사 시리즈가 조금 더 복잡하고 탄탄해서 재미있었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여름의 복수>와 <지옥이 새겨진 소녀>의 구성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하나의 사건 재구성을 위해 전혀 다른 곳의 다른 인물 둘이 양쪽에서 교차 진행되며 사건을 파고드는 구성이다. 오스트리아의 젊은 여변호사와 독일에 조기 퇴직을 앞두고 있는 늙은 형사,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열혈 여검사와 독일의 천재 프로파일러와 경찰 아카데미 학생 신분의 여형사로 각각 진행되다 작품의 후반부에 양쪽에서 쫓던 사건의 교집합이 생기는 순간의 짜릿함이란 엄청난 재미를 선사한다. 두 작품 모두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속도감 있고, 스릴 넘치는 완벽한 스릴러 작품이기도 했고 말이다.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줄 수 있는 궁극의 즐거움을 거의 무한대로 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이 두 작품으로 이제 무조건 믿고 보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다음 시리즈도 어서 빨리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