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관의 조건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평점 :
자신의 직업에 무려 '긍지'라는 것을 가지고 임하기란 사실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이 실제 꿈꾸던 일이랑 전혀 상관없는 것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오랜 시간 바래왔던 일을 하고 있지만 현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름에 좌절하는 사람에게도, 별 생각 없이 매일매일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일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은 어디 딴 세상 일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가족들을 돌볼 수도 없고, 매 순간 자신의 안위마저 저당 잡혀야 하고, 그렇다고 그만큼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의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가가야가 체포되었을 당시는 경시청 내부는 물론, 뒷 세계에서도 쾌재를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적을 만들기 쉬운 임무를 맡아 화려한 생활을 누려왔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2심이 시작되면서 가가야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각성제 수사나 권총 적발을 둘러싼 조직의 속사정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상사 명령이나 상사와의 관계에 대해 증언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경찰의 위신을 지켰다는 것이었다. 그와 연관되었던 뒷 세계나 폭력조직 관계자도 가가야를, 제 몸을 챙길 수 있었을 텐데도 그들을 팔아넘기지 않은 남자로 보기 시작했다. 폭력배들의 말에 따르면 가가야야말로 조폭 담당 형사의 귀감이라는 것이었다.
전작인 <경관의 피>에서 세이지, 다미오, 가즈야에 이르는 삼대가 모두 경찰로 일하는 모습을 그려내어 경찰 수사극보다는 가족 드라마에 가까운 이야기를 그려내었던 사사키 조는 이번 <경관의 조건>에서 가즈야를 중심으로 제대로 된 경찰 수사극을 보여주고 있다. 전작에서 아버지인 다미오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에, 아버지와 그다지 각별하지 못했던 아들 가즈야도 결국 경찰이 되었다. 가즈야는 가즈야는 문제 경찰관을 대상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라는 임무를 받게 된다. 폭력단을 담당하는 민완 형사 밑에서 일을 배우다 언젠가 증거를 쥐고 그의 뒤통수를 때릴 수밖에 없는 비밀 업무를 맡게 되었다. 아버지가 했던 잠입 수사와 색깔은 다르지만, 어찌되었던 비밀 업무를 말이다. 가즈야의 아버지 다미오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신결 질환으로 폭력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였고, 그 덕분에 가즈야는 살아 생전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지 못했었다.
<경관의 조건>은 <경관의 피>로부터 구 년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가즈야의 비밀 업무가 끝이 나면서 시작한다. 가즈야는 바로 어젯밤까지 아버지처럼 따랐던 상사 가가야를 각성제 소지 및 복용 의혹으로 상부에 고발한다. 각성제 단속법 위반으로 체포하는 건 가가야와 함께 밤을 보낸 여성 나가미 유카도 함께다. 나가미 유카는 얼마 전까지 안조 가즈야와 사귀었던 여성이다. 하지만 가즈야의 고발은 배신당한 여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 정해진 수순이었다. 가가야 히토시 경부는 폭력조직을 담당하는 수사원으로 도쿄의 뒷 세계에서 독자적인 정보 수집 루트를 구축했고, 권총 적발이나 각성제 거래 정보를 수집하는 데도 뛰어난 실적을 거둔 인물이었다. 다만 사생활이 엉망이라 뒷 세계와의 유착이 의심되었기에 상부에서는 그에게 부하를 붙여 그 소행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애초에 가즈야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가야는 의원면직되고, 가즈야는 상사를 팔아 넘겼다는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되지만,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구 년 후, 마약시장의 판도가 바뀌면서 상부에서는 가가야의 복직을 통해서 그 혼란을 해결하려 하고, 가가야와 가즈야는 상사와 부하가 아니라 라이벌로서 다시 대면하게 된다.
아버지, 어째서 죽었습니까?
언젠가 아버지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맹세했는데,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에게, 어느 날 언젠가 손가락질을 하며 이제 당신이 폭군으로 군림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고 통고해줄 작정이었는데,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에 당신이 충격을 받고,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눈길을 떨어뜨리고, 몸을 작게 움츠릴 날을 기대했는데. 언젠가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그 괴로운 사춘기를 가출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지키며 참아냈는데.
그런데 아버지, 당신은 그 기회를 내게 주지도 않고, 멋대로 떠나버렸어요. 우리 가족 중 누구 하나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마지막 순간까지 이기적으로 가족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은 가족들 앞에서 사라진 겁니다.
사사키 조야 워낙 경찰 소설의 대가이지만, 새삼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경찰이라는 조직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탐구, 조사 없이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가야가 조직의 비정한 음모 속에서 경시청과 조폭단 양 조직으로부터 전설이 되는 과정도 대단하고, 이후 다시 만난 가가야와 나름 자신의 자리에서 동분서주하는 가즈야와의 대립 구도도 매우 흥미진진하다. 특히 실제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던 유명 연예인 각성제 사건을 모티프로 경찰의 조직개편 관련된 이야기는, 사사키 조가 이 작품의 구상부터 집필에 이르기까지 무려 사 년이라는 시간을 들였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경관의 피>와 <경관의 조건>은 모두 가즈야가 부는 호루라기 소리로 끝이 난다. 경찰의 필수 소지품인 호루라기는 범죄자를 쫓는 순간에도, 위험에 직면했을 때 동료를 부르기 위해서도 사용되는 소품이다. 가즈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재직 중에 몇 번이고 긍지를 품고 불었을 그 호루라기의 음색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이 배신했던 상사의 진심을 뒤늦게 알아 차리고 오열하듯이 호루라기를 분다.
가가야와 가즈야의 매우 흥미로웠던 구도가 마지막 장면에서 "대부님." "속 썩이기는."으로 마무리되면서, 아무래도 이 다음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되기도 한다. 사실 주인공은 가즈야였지만, 캐릭터로서의 임팩트는 다소 약했고, 가가야라는 인물이 훨씬 압도적이었어서 시리즈가 더 이어질까 우려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경관의 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호루라기가 <경관의 조건>에서는 더욱 묵직한 감동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시종일관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던 이야기의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해주고 있다. 그 호루라기는 상관을 과감히 고발했던 가즈야도, 부패와 탐욕의 상징이었던 가가야도, 그리고 자살로 처리되어 순직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할아버지 세이지도, 공안부의 스파이 노릇을 하다 불안신경증을 얻게 되어 아들의 존경을 받지는 못했던 아버지 다미오도, 역시나 모두 경관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코야마 히데오도, 곤노 빈도 일본 경찰 소설하면 언제나 제일 먼저 거론되는 작가들이지만, 사사키 조만큼 인간적인 경찰을 그리고 있는 작가는 없는 것 같다. '경관 안조' 시리즈 외에도 '제복경관 카와쿠보' 시리즈도, 나오키 상 수상작이었던 단편집 <폐허에 바라다>에서도 범죄를 수사하는 인물의 마음까지 그려내고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