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리어 왕> 4, 왕이 실성하는 장면이 극장에서 상연되는 중이었다. 리어 왕 역할을 맡은 51세의 배우 아서는 이 장면을 연기하다 심장마비로 죽게 된다. 그리고 세계는 급작스럽게 퍼지는 독감 바이러스로 응급실에 환자들이 넘쳐나고, 서서히 혼란스러운 상황이 만들어지려는 찰나였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끝이 나고, 20년 뒤 종말 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커스틴은 그 만화책을 애지중지했지만, 이젠 책장 모서리가 여기저기 접혀 있고 가장자리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1호를 펼치면 두 페이지에 걸친 그림이 나온다. 황혼녘, 닥터 일레븐이 거무스름한 바위에 서서 쪽빛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작은 배들이 섬들 사이를 오가고 수평선 위에서는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다. 그는 중절모를 들고 있다. 작은 하얀색 동물이 그의 곁에 서 있다. ……그림 아래쪽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나는 파괴된 내 집을 바라보면서 달콤했던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문명이 몰락하고 20년 후, 셰익스피어의 극을 공연하는 유랑 악단이 등장한다. 20년 전, 아서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리어 왕>에서 대사 없는 아역이었던 커스틴이 어느덧 숙녀가 된 채로 유랑 악단에서 공연 중이었다. 독감이 핵폭탄처럼 지구를 강타한 후 충격적인 문명의 몰락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다들 정착 가능한 곳을 찾아 정착했다. 안전을 위해 화물트럭 휴게소나 대형 레스토랑, 낡은 모텔 같은 곳에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딘가에 정착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길 위에 있었다. 그들은 클래식과 재즈, 문명 몰락 이전의 대중가요를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연주하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상연했다. 커스틴은 어린 시절 아서에게 받은 닥터 일레븐 만화책 두 권을 애지중지 여겼는데, 문명 몰락 20년이 되어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질 무렵 이 두 권을 몽땅 외우다시피했다. 이 만화책은 각 호가 딱 10분 세상에 존재하는 판본이었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스테이션 일레븐>은 아서의 첫 번째 아내였던 미란다가 그려낸 그래픽 노블로 자비로 출간했기에 세상에 딱 10부만 존재하는 만화책, 닥터 일레븐의 시리즈 제목이다. 물리학자인 닥터 일레븐이 작은 행성과 유사하게 설계된 첨단 우주정거장에서 살며,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한다.

만화책에서의 상황과 실제 현실의 상황이 교묘하게 겹치면서 묘한 울림을 주고, 세상이 끝나기 전의 상황과 그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이야기들이 교차되며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는 이 작품은 매우 놀랍다. 종말을 다룬 꽤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어 왔지만, 그 어떤 작품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끔찍하고, 무서운 장면들 대신,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라고나 할까. 이런 분위기의 종말 소설을 만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에, 읽는 내내 감탄했다. 아마도 내가 만난 가장 밝고 따뜻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닥터 일레븐 시리즈를 그려내는 미란다라는 캐릭터였는데,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 지독하게 외로울 때, 삶이 공허할 때,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해 괴로울 때.. 언제나 그녀를 위로해주었던 것은 바로 그녀가 그려내는 허구의 세계였다.

"당신 작품이군." 아서가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데? 이 첫 번째 권의 표지는 LA의 스튜디오 벽인 것 같은데, 아닌가?"

"기억하네." 언젠가 아서가 말했던 이미지는 영화의 배경 장면 같았다. 도시의 날카로운 섬들과 거리들과 건물들과 바위들, 그 사이의 높은 다리들. 검은 바다 저 밑에는 언더시로 이어지는 기밀식 출입문들이 거대한 괴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아서가 첫 번째 권을 무작위로 펼치자 바다와 다리로 연결된 섬들과 황혼녘의 풍경과 포메라니안과 함께 바위 위에 서 있는 닥터 일레븐의 모습을 그린 두 페이지에 걸친 펼침 그림이 나타났다. 밑에 지문이 나와 있었다. 나는 파괴된 내 집을 바라보면서 달콤했던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연기 학교를 졸업하고 할리우드에서 작은 역할들을 맡다가, 이제 막 좀 더 큰 역할로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한 배우 아서는 어느 날 밤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다. 동네 잡화점 카페에서 일하던 수지의 조카딸 미란다가 이제 열일곱 살인데, 미술학교에 진학하려고 최근에 토론토에 갔다며, 아서가 만나서 점심이라도 한번 사주지 않겠느냐고. 열일곱의 미란다와 스물아홉의 아서는 그렇게 잠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여러 해 동안 서로를 잊은 채로 생활하다, 아서가 서른 여섯, 미란다가 스물 네 살이 되었을 때,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때 미란다는 해운업체의 이사 비서로 일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상사는 거의 매일 출장 중이라 대부분의 일은 오전에 금방 끝나 버렸고, 널찍한 비서실에서 그녀는 오후 내내 자신이 집필 중이던 그래픽 노블 시리즈를 스케치를 하면서 보내곤 했다. 함께 사는 남자친구 파블로는 일도 하지 않고 그림도 팔지 않는 화가였고 그녀의 유일한 낙은 바로 자신이 집필 중인 그래픽 노블 '스테이션 일레븐 시리즈'였다.

주인공 닥터 일레븐은 뛰어난 물리학자로 근처 은하계에 살던 적대적인 문명이 지구를 점령하자, 수백 명의 반군들을 조직해 우주정거장 스테이션 일레븐을 타고 웜홀을 통과해 깊은 우주 속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에 숨어 살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녀가 상상하는 우주선과 별, 외계의 행성들.. 그리고 붉은 사막 풍경들,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하늘은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아름다운, 난파된 우주정거장을 만들어낸다. 달콤했던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외로운 닥터 일레븐의 모습은 미란다의 실제 삶과도 교묘하게 겹쳐진다. 미란다는 남자친구 파블로와 헤어지고, 인기 배우 아서와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하고, 결혼 3주년 기념일에 파티의 낯선 사람들 틈에서 스스로가 낯선 행성에 고립되어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서와 그의 영화 관계자들 무리에 속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이상한 만화나 그리는, 친구도 없이 혼자 다니길 좋아하는 사람으로만 치부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스테이션 일레븐 시리즈 만화를 그리는 순간에만 자유롭고, 행복했다. 그리고 넉달 후 미란다는 스물입곱 살의 이혼녀가 되고, 이어 4~5년 후에는 여행가방을 끌며 전 세계를 제집처럼 드나들게 되고, 30대 중반이 되면 드디어 세상살이에 능숙해지고 퍼스트 클래스로 대양을 넘나들며 일에 빠져 살게 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밤마다 호텔 방에서 다시 스테이션 일레븐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 만화는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뒤, 그러니까 문명이 완전히 몰락한 뒤에도 남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며 읽힌다.단지 생존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유랑 극단과 마치 사이비 교주같기도 한 예언자라고 불리는 청년과 예전 세계의 공항에서 발전된 문명 박물관의 사람들까지. 흥미로운 건 종말을 다루고 있는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의 세계는 종말 후의 풍경이 평화롭고,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거다. 생존을 위한 다툼이나 학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그저 살아남는 것 외에,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종말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다 읽고 나면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를 되돌아보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세상이 모두 끝이 나 버린 다음에도 존재하는 그 삶에 대하여, 작가가 그려내는 묘사는 매우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고통스럽지만 끔찍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지만 너무도 아름답다. 종말 직전 아서의 죽음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종말 이후 20년 뒤 미래와 그 이전의 과거를 차례로 교차시켜 가다 다시 아서가 죽는 그날 밤으로 돌아간다.  세상이 끝이 나버렸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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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7-13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성격이 이상한가봐요 디스토피아 소설이 본능적으로 끌리더라구요 헐 ㅋ 이 소설도 꽤나 재밌어 보여요 혹시 추천 해 주실 디스토피아 소설 있나요? 1984는 읽었어요 ㅋ

피오나 2016-07-14 10:34   좋아요 0 | URL
하핫..디스토피아 소설에 본능적으로 끌리신다니 이 작품 어떨까 싶어요! 휴 하위의 <울> 이라는 작품 읽어보셨나요? 저는 재미있더라고요^^

루쉰P 2016-07-15 00:17   좋아요 0 | URL
<울>은 못 읽어 봤습니다. ㅋ 한번 읽어 볼께요 ㅎ 왜 저는 디스토피아 소설이 그리 끌리는지 몰겠어여 허허 그렇다고 염세적이거나 그런 성격은 아닌디....

책 추천 감사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