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신저 23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 옮김 / 단숨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매년 수십 명의 승객들이 크루즈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그곳만큼 완벽한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난간에서 한번 뛰어내리기만 하면 그걸로 끝, 시체도 목격자도 찾을 수 없으며, 실패할 확률도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이런 일들이 이 작품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꽤 많은 사람들이 크루즈선과 페리에서 바다로 떨어져 사라지고 있다.

 

"지금 현재 대양을 누비고 다니는 모든 크루즈선에서 우리는 매년 평균23명의 승객들이 뛰어내려 자살을 한다고 추정합니다."

그래서 패신저 23이군!

이제 그녀는 다니엘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명확히 깨달았다.

"당신들 배에서 또 한 명이 실종되었나요?"

우리 배에서 패신저 23이 발생했어요!

"아뇨." 다니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그런 걸 감추는 것쯤이야 우린 밥 먹듯이 하니까요."

 

잠입 수사관인 마르틴 슈바르츠는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잃은 후, 삶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당신은 최대한 빨리 배를 타야만 해요."

술탄호는 크루즈선으로 5년 전 마르틴의 아내가 아들을 뱃전 밖으로 던져 버리고, 스스로 50미터 아래로 뛰어 내려 자살을 했던 바로 그 배였다. 그는 그날 이후,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이상 크루즈선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다짐했었지만, 그는 그 배에 탈 수밖에 없었다. 이름 모를 노파가 전화로, 아재가 자발적으로 죽으려 뛰어내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가족들이 어쩌면 아직 살아 있다는 단서일지도 모르겠다며, 그에게 누더기가 된 조그만 테디 곰 인형 하나를 건네준다. 그것은 아들 테디의 것이었다.

같은 시간, 열다섯 딸 리자와 함께 배에 오른 율리아는 남편의 배신 이후로 3년동안 삭막한 시간을 보내오다, 이번 크루즈 여행을 통해 딸과 호젓한 휴가를 보낼 꿈에 부푼다. 그런데 딸의 멘토 교사이자 잠깐 연애 상대였던 톰이 전화를 해서, 딸이 남자와 함께 등장하는 지저분한 영상의 존재에 대해 알려주고, 그것이 인터넷에 퍼져 리자가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당장 배에서 내리라고 말하지만, 이미 배는 출발한 상태였고, 리자는 이 넓은 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현재 이 배의 관계자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사건은 바로, 8주 전 술탄호에서 어머니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나타난 아누크라는 여자아이였다. 해운 회사의 오너는 마르틴에게 그 아이의 실종에 대한 수사를 해달라고 제안한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크루즈선은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낸다면 마르틴이 가족의 죽음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당신의 생각 하나하나가 시럽에 젖어 유리 가루 범벅이 된 듯한 느낌이 들 겁니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당신이 따님을 간절히 생각할수록 그 생각들은 당신의 마음속의 드러난 상처에 더욱 피가 나도록 비벼댈 겁니다.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적어도 두 목소리가 동시에 외칩니다. 한 목소리는 당신의 따님이 도움이 필요했을 때 당신이 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느냐고, 어째서 그 징후를 알아보지 못했느냐고 외치죠. 또 다른 목소리는 당신의 삶의 의미가 사라져버린 마당에 무슨 권리로 손을 놓고 여기에 우두커니 앉아 있느냐고 비난에 차서 묻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갈래로 진행된다. 실종되었다가 다시 나타난 아이를 통해 사라진 자신의 가족에 대한 단서를 수사하는 마르틴과 딸이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율리아는 선장과 함께 수색에 나서고, 누군가에 의해 특정 공간에 갇힌 채 살면서 자신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을 고백해야만 하는 여자가 등장한 다.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는 크루즈선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밀도 있는 스토리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무엇보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재미는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음'에 있다. 그동안 만나왔던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두툼한 페이지를 숨쉴 틈 없이 달려가 범인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해결과 해소의 안도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그 어떤 예정된 것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까지 차오르게 만들어주는 이야기. 치밀하게 계산된 설계도를 따라 가다 보면, 결국 지나쳐 온 모두가 복선이 되어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반전도 재미있지만, 그 모든 것의 결론이 난 뒤에도 남아 있는 주인공에게 벌어질 일들에 대한 우려는 너무도 오싹하고, 충격적이고, 당황스럽다. 그렇게 항상 여운(?)을 남기는 그의 작품은 사이코 스릴러라는 장르에 걸맞게 파격적이고, 끔찍하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감정적인 부분들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사이코 스릴러, 심리 스릴러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본인은 가족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인다고는 하지만,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것은 가족들 속에 근원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여전히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언젠가 후회하게 될 그 순간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못하곤 한다. 누군가의 죽음에 직면해서야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들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미 나쁜 결말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내가 그때 왼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갔더라면 이라는 선택에 대한 후회,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래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한 행동으로 인한 파급효과들은 어쩔 수 없이 비극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만, 다시 한번 시간의 끝을 잡고 돌아가고 싶은 회한의 선택들. 하지만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한들, 나라는 인간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결국 내가 하는 선택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생에서 하는 수많은 결정들로 인해, 결국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는 것처럼, 미리 조심하지 못하고 물이 엎질러진 다음에야 우리는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늘 그렇지 않은가. 그 가슴 아픈 회한의 순간으로 피체크는 우리를 초대한다.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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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0-2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피체크 마니아시군요! ^^

피오나 2016-10-21 23:17   좋아요 0 | URL
하핫. 좋아하는 작가예요! 반전이 특히 매력있는 작가인데, 감정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거든요! ㅎㅎ
 
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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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다. 가끔은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알 수 없고, 때로는 이 길이 맞는지 의문도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나 자신 만의 길 위에 서서 앞으로 가야만 한다. 누군가는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가기도 하지만, 결국 남겨지는 것은 혼자이며, 우리는 그 외롭고 힘겨운 길 위에서 버텨내야만 한다. 인생이란 결코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을 허용하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여기 두 소녀가 있다. 집이 있지만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던, 스스로 자신이 좋은 방향으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열세 살 천재 소녀. 그리고 매일 어디서 자야 할 지 찾아야 하는,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는 열여덟 노숙자 소녀.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언제나 혼자라고만 느꼈던 그들이, 함께 걷게 된다.

책에는 주요한 순간들을 구분하는 장들이 있어서 시간이 흐르거나 상황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때로는 부로 나뉘어 그림에 붙은 제목처럼 '만남' '희망' '몰락' 하는 식으로 어떤 전망이 실린 제목이 붙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에는 그런 게 없다. 제목도 없고, 플래카드도 없고, 표지판도 없다. '위험하니 조심하시오' '붕괴사고 자주 일어나는 곳' '실망 임박'을 가르쳐 주는 표시는 전혀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옷 한 벌 걸쳤을 뿐이지 완전히 혼자요, 행겨 그 옷이 완전히 누더기일지라도 별수 없다.

열세 살의 루 베르티냐크는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글 읽기를 다 뗀 천재 소녀이다. 몇 학년을 월반하고 현재는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지만, 너무 어린 탓에 좀처럼 같은 반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발표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녀는 무심코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노숙자라는 테마로 다음 발표 주제를 정하게 되고, 거리에서 사는 여자아이를 인터뷰해보겠다고 선언해버리게 된다. 그리고 평소에 자주 떠나는 열차를 구경하러 가던 역에서 열여덟의 소녀, 노를 만나게 된다. 살아오는 내내, 자신이 언제나 바깥에 있다고 느끼면서 지내왔던 루는 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처음으로 어딘가에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노라면, 진짜 인생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루의 가족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슬픔이 목 끝까지 차올라 정상적인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수족관과도 같았다. 엄마는 벌써 몇 년째 집에만 처박혀 지내고, 아빠는 욕실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 그들의 하나뿐인 딸은 자신이 늘 혼자라고 느낀다. 루가 여덟 살 때 그녀의 동생을 갖기 위해 애쓰던 부모는 아기를 가진다. 모두의 축복 속에 루의 여동생이 태어났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영아 돌연사로 세상을 떠나 버리고, 그렇게 시간이 멈춰 버리고 만다. 엄마는 루를 더 이상 어루만지거나 안아주지 않았고, 식구들은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딴 세상 가서 살고 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면 거실 한가운데 앉아 있는 엄마는 딸을 보며 일어나서 오늘 하루 잘 보냈냐고 묻지만, 질문은 매일같이 토씨 하나 안 다르고 똑같았으며, 루의 대답들은 그저 허공으로 흘러가버린다. 그들은 그렇게 엄마 역할, 딸 역할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전에는 '사정에'에 존재 이유, 숨겨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그런 의미가 세상의 구조를 관장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이유, 나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다. 그런 면에서 문법은 명제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공부를 하면 그 논리를 파헤칠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일종의 기만이다. 숱한 세월을 거쳐 이어온 기만. 이제는 나도 인생이 휴지와 불균형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한 연속에서, 질서는 그 어떤 절박한 필요에도 결코 부응해주지 않는다.

세상과 소통할 수 없어 외로웠던 소녀는 노숙자 소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노는 루에게 자신의 하루하루를 말해주며,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묘사해준다. 루는 그 모든 것을 노가 자신에게 주는 나름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색깔이 달라 보이게 하는 선물, 모든 이론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문제 삼는 선물. 사람들은 노를 가리켜 '너하고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애야.'라고 말하지만, 루는 자신이 세상들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 겹치는 곳에 속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삶이 아무 단절 없이 쭉 이어지는 곳, 만사가 불현듯 이유 없이 멈춰버리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맥주를 마시고, 손톱을 물어뜯고, 자신의 삶의 송두리째 들어 있는 바퀴 달린 트렁크를 끌고 다니는 열여덟의 노. 말수가 적고 순종적인 만년 일등 열세살의 루. 그리고 거칠 것 없는 반항아에 아이들 사이에선 왕 같은 존재인 열일곱의 뤼카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우정의 풍경은 어른 들의 세계에서 소외된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해내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는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으며, 어른이 되려면 분명히 그런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차츰 깨닫게 된다.

홈리스는 전 세계 도시의 공통된 문제이다. 극중 루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어가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걸 이해할 수 없어 하고, 노를 자신의 집에 데려오기로 결심하고 부모님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매우 뭉클하다. 사실 어른들은 그럴 수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길을 걷다 노숙자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는 것을 보며 불안해하거나, 무섭다고 느낀다. 노숙자는 인간의 실존적 두려움을 상징하니 어쩔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회학자 로라 휴이는 노숙자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사회적 또는 도덕적 수모를 수반하는 감정이고, 궁핍해지거나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아직 순수한 열세 살 소녀는 노숙자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 들인다. 그녀는 '원래 그런 것과 원래 그렇지 않은 것에 부딪히기로 결심한다면, 분명 많은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텅 빈 눈과 집 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 모든 슬픔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도 싫었던 소녀는,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함께인 거지, ? 우리는 함께야?

노가 가끔 길에 멈춰 서서, 다짜고짜, 뚜렷한 이유도 없이 묻던 질문은, 루가 노와 함께 평생을 거리에서 살겠다고 집을 떠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렇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슬픈 진실.

이제 다시는 우리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나는 노와 함께 평생을 거리에서 살 거야.

루는 노를 통해서 자신이 속한 부분 집합에서 벗어나고, 자기 인생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도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떤 지침서나 사용설명서에도 나와 있지 않는 삶의 부작용들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그런 폭력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루는 한걸음씩 성장해나간다. 그녀는 이 일을 통해서 성장했고, 이제 더 이상 삶이 두렵지만은 않다. 그렇게 루는 자신 만의 길 위에서 더 이상 외롭지만은 않다. 그 길이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그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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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단처럼 검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3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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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노우화이트 신드롬'을 일으키며 스칸디나비아 스릴러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가 드디어 완결되었다. <피처럼 붉다>, <눈처럼 희다>, <흑단처럼 검다>로 이어지는 3부작은 백설공주 동화를 고스란히 변주하며, 그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들로 새로운 히어로를 탄생시켰다.

 

"내게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이 흑단 창틀처럼 검은 아이가 있었으면."

바늘에 손가락을 찔린 왕비의 바램처럼, 눈처럼 흰 피부와 피처럼 붉은 입술, 그리고 흑단처럼 검은 머리를 가진 백설공주, 루미키의 그 마지막 여정은 아름답고 잔인한 비밀 속으로 향한다.

널 사랑해.

내뱉긴 쉽지만 진심을 담긴 힘든 말이지. 하지만 난 진심이야. 이건 그냥 말이 아니라 나의 일부야. 내가 말하는 순간 이건 너의 일부가 되기도 해. 내 사랑이 네 안으로 스며드는 거지. 그 사랑 덕분에 넌 더욱 아름답고 강렬하고 눈부시게 빛나.

널 밤하늘의 어떤 별보다도 반짝이게 만들 수 있어.

넌 완전히 내 것이 되었어. 그게 바로 네 운명이야. 내 운명이고.

전작인 <눈처럼 희다>에서 프라하 여행 중에 컬트 종교단체의 집단자살에서 사람들을 구해내고 영웅이 되어 돌아온 루미키는 학교에서 공연하는 연극 '검은 사과'에서 주연을 맡는다. 이 작품은 '백설공주'라는 작품을 새롭게 해석한 연극으로 유리로 만든 관에 누워 왕자에 의해 눈을 뜬 백설공주는 왕자의 신부가 되는 걸 원치 않고, 왕자 역시 공주의 외모에 반했을 뿐 그녀의 마음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강렬하고 충격적인 작품이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고결하고 도덕적이지 않다는 점이, 지극히 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색다른 작품이다. 루미키는 여행에서 돌아와 삼프사라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 와중에 스토커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며, 전 남자친구인 블레이즈 마저 등장하게 된다. 항상 루미키를 지켜보고 있다며, 그녀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스토커로부터 이상한 쪽지와 문자는 계속된다. 그리고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언니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부모에 대한 의심은 여전하고, 그녀는 점차 어둡고 잔인한 진실에 다가가게 된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전작들에 비해 분량이 상당히 짧은 만큼, 군더더기 없고 간결한 문체로 스피디하게 진행된다. 중심 플롯도 스토커의 존재와 루미키의 대립만으로 흘러가서, 지나치게 심플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임팩트가 강하기도 하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에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냈던 루미키의 과거와 비밀들이 두 번째 작품에 이어, 세 번 째 작품에서야 깔끔하게 다 밝혀지면서 정리가 되어 시리즈로서의 완결성도 가지고 있다.

목소리는 루미키의 위에서 들려왔다. 움직이는 그림자. 목소리가 귀에 익었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동화 속 공주보다는 강할 줄 알았어. 어떤 독약도 널 오랫동안 잡아둘 수 없지. 넌 전사니까. 그렇게 싸우며 살아왔잖아. 날 맞아서도 그랬고. 한 순간도 두려워하지 않았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안개가 조금씩 걷혔다. 마침내 루미키는 장벽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녀는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연극 소품인 유리관.

누구의 삶도 하나의 사건만 발생하고 마무리 되는 법은 없듯이, 누군가의 이야기도 여러 번에 걸쳐서 존재한다. 영원히 행복한 사람도, 영원히 불행하기만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공평하게 말이다. 시리즈에 걸쳐서 수많은 동화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변주하면서, 루미키의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나온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지게 될 것이다. 열일곱 소녀가 열여덟이 되고, 고난과 역경을 거치면서 조금 더 단단하게 성숙해져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듯이 말이다. 무엇보다 고독한 소녀였던 루미키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아무리 광활한 우주 속의 미약한 존재라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는 세상에 없으며,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인물은 없으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비밀은, 그 자체로 이미 치명적인 독과도 같다. 숨겨져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비밀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알 수 없기에 아름답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누군 가에게는 잔인할 수밖에 없는 비밀. 그것을 간직한 사람은 매혹적일 수 있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뤄야만 한다. 아마도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는 독을 품은 사과처럼 아름답지만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누구라도 한입 베어 물고 싶을 만큼 치명적이고 유혹적인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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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희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2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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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 라르손이 창조한 히로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작가, 살라 시무카의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을 만났다.

젤렌카의 마지막 한마디가 얼음송곳처럼 루미키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녀는 젤렌카를 부둥켜안고 계속 설득하고 싶었다. 그녀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 있는지 기어이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도 알려주고 싶었고. 원한다면 그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수줍음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습관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누구든 쫓아다니지 마. 사랑이나 우정이나 신뢰를 위해 절대 애원하지 마.

열일곱의 루미키는 모든 문제에 대해 신중히 고찰하는 성격으로 급우들의 장난에도 가담하지 않고, 학교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고 늘 혼자 식사를 하면서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는 당찬 소녀이다. 그녀는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으려 애쓰며, 항상 모든 일에 방관적 입장을 유지했는데, 그저 투명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무난하게 살고 싶었던 그녀는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도 휘말리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하지만 뭐, 인생이란 것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굴러가겠느냔 말이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피 묻은 돈 3만 유로로 인해, 그녀의 평화롭고 조용했던 생활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그렇게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피처럼 붉다>에서 어쩌다 보니 국제적인 범죄에 말려들게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열일곱 소녀의 파란만장한 모험기를 그렸었다.

이번 <눈처럼 희다>에서는 전작에서 피에 젖은 돈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국제적인 마약조직에 쫓겨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난 뒤, 체코 프라하로 혼자 여행을 떠난 루미키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허벅지에 총을 맞고 병원에 있다 퇴원한 지 이제 겨우 석 달 반이 지난 상태로, 일주일 뒤면 프라하 여행을 마치고 핀란드로 돌아가 가족과 여름을 보낼 예정이었다. 오로지 혼자 있고 싶어서 떠나온 낯선 도시에서 중부 유럽의 향긋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낯선 여자가 다가와 말한다.

"내가 네 언니인 것 같아."

스무 살인 젤렌카는 엄마와 함께 살다 자신이 열다섯 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겨졌다고 말하며, 루미키에게 말을 건넨다. 과거에 루미키의 아빠가 프라하에 관광객으로 여행을 왔다가 그녀의 엄마를 만났다는 것이다. 아빠가 또 다른 딸을 두고 있었다니, 자신의 언니를, 그것도 바로 이곳에. 루미키는 혼란스럽고,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달라질 거라는 사실 말이다.

"뭐 없어진 거 있어요?" 루미키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며 물었다.

그녀가 아파트에 놓아둔 것이라고는 옷과 세면도구 가방뿐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닳아 해진 요 네스뵈 소설과 여권이 든 지갑만 지니고 다녔다. 소설을 챙겨 다니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조용히 책을 펼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루미키의 옷은 무사히 남아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녀의 브래지어들이 전부 뜯겨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침입자는 그녀가 얇은 컵 안에 국가 기밀이라도 숨겨놓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는 책의 판본도 작고, 페이지 수도 작은 편이라 가볍고 빠르게 읽히는 시리즈인데, 이번 두 번째와 세 번째 작품은 그 분량이 더 가벼워졌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자가 나타나 갑자기 자신이 언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상하고,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작위적인 만남이기도 했지만, 평소 자신의 가족이 엄청난 비밀을 숨겨왔다고 의심하던 루미키였기에 젤렌카의 말을 조금씩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가족'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수상한 분위기의 컬트 종교단체였다. 위험천만한 종파나 컬트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조사해온 기자 이르지와 함께 펼쳐지는 루미키의 모험은 무대를 낯선 도시 프라하로 옮겨서도 그치지 않는다. 사실은 자신을 언니라 주장하는 젤렌카에 대해 자신의 부모에게 전화로 직접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자신의 지적 능력에 의지해 직접 비밀을 파헤치는 것을 선택한다. 과연 젤렌카는 진짜 루미키의 언니일까? 루미키는 집단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수상한 종교단체에서 젤렌카를 무사히 구출할 수 있을까? 프라하에서도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루미키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죽는 시간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신께서 정하시면 난 받아들일 뿐이라고."

"반드시 그래야 할 의무는 없어요. 당신 운명은 당신이 결정하는 거라고요."

그리고 전편에서 모두의 궁금증을 자아냈던 그녀의 옛 남자친구에 대한 에피소드가 이번 작품에서 비로소 공개가 되어, 스토리가 한층 풍성해지고 있다. 성질이 불 같고, 늘 흥분한 상태였으며, 변덕스럽고, 따뜻하고, 신랄하며, 잘생긴,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블레이즈는 그녀의 과거 속에서 등장하다,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 이르면 현재의 이야기 속에 드디어 나타나게 된다. 게다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건조하고, 너무도 시크 하고, 지나치게 독립적인 캐릭터로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려는 소녀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루미키가 블레이즈와 함께하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또 다른 매력을 만날 수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며, 아무리 암담한 상황에서도 포기를 떠올려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던 소녀 루미키의 마지막 여정이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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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간 형사 베니 시리즈 2
디온 메이어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매일 밤, 죽음과 폭력을 끌고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가장의 삶이란 어떤 걸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따뜻한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에서 행복한 미소가 아니라 이들도 언젠가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부터 느껴야 한다면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범인들을 검거하는 형사일지라도,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내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니까 말이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여전히 안나를 사랑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술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안나와 별거를 시작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매일 밤, 죽음과 폭력을 끌고 집으로 돌아올 일이 없으니까. 현관문을 들어와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들도 언젠가 뼈가 부러지고 사후경직으로 빳빳이 굳은 모습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야기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 열심히 일하고, 초과근무를 하면, 언젠가는 계급도 올라가고, 승진도 하고, 그리고 결국은 정의가 승리할 거라고 믿었던 남자. 그저 그거 하나면 충분했던 그 시절의 그는 이제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경찰에서 26년을 일했지만, 여전히 경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나쁜 놈들은 점점 늘어나고, 반대로 경찰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상대가 피해자이든 범죄자이든, 타인의 상황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한 경찰이었던 그는 이제 알코올중독자 신세다. 그 뛰어난 능력 덕분에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를 버텨내기 위해 술을 마셔야만 했던 것이다. 희생자들이 누워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면 비명 소리가 들리고, 그것은 한 번 들리고 나면 머릿속에 붙박인 것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지쳐갔고, 결국 그의 아내는 6개월 안에 술을 끊지 않으면 이혼이라는 통보를 받고 집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리고, 술은 끊은 지 156일째가 되는 날부터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 시작된다.

 

이야기는 배낭 여행 중이던 한 미국 소녀가 의문의 추격자들에게 쫓기면서 문을 연다. 대체 무슨 이유로, 누구에게서 도망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그녀의 친구가 어젯밤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잡히게 되면 그녀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될 거라는 것밖에. 그녀는 그렇게 줄기차게 도망을 치고, 무려 380여 페이지가 지나서야 소녀는 우리의 주인공 베니 그리설과 연결이 되며, 그 즈음 추격자들과도 만나게 된다. 신입들의 멘토링을 맡고 있는 베니는 부수무지 은다베니가 맡고 있는 미국인 소녀 살인 사건과 프란스만 데커가 맡고 있는 음반계의 스타 프로듀서 살인 사건을 오가며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전혀 별개의 사건처럼 각각 진행되던 이 두 사건의 교집합은 작품의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나며, 누군가에게 쫓기며 홀로 공포에 떨고 있는 소녀를 구하기 위한 13시간의 사투가 시간대별로 차근차근 교차로 보여진다. 그렇게 새벽 5 36분에 시작했던 이야기는 저녁 7 51분에 이르러서야 마무리가 된다. 무려 550여 페이지 동안 펼쳐지는 스토리는 사실 짧다면 짧은 시간이고, 길다면 꽤 길기도 한 시간이다. 13시간은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시간이고, 누군가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시간이며, 누군가가 죽을 지도 모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과연 베니 그리설은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아내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과연 그는 두 사건을 해결해서 소녀를 구하고,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까. 과거를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문득 주버트는 한평생 지켜봐 온 동료이자 친구인 그리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설이 품고 있는 에너지에 비해 그의 활동 반경은 너무나 좁아서, 때로 그 에너지가 진동하며 쓰나미와 같은 열정의 파동을 뿜어낼 때가 있었다. 20년 전 그리설의 얼굴은 장난꾸러기 요정 같았다. 두 볼에는 궁정 광대처럼 장난기가 어렸고, 반짝이는 슬라브족의 눈과 커다란 입속에는 중독성 있는 웃음과 말도 안 되는 재치가 숨어 있다가 기회만 주면 언제든 활짝 기량을 펼쳤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얼굴에서 지난날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세월에 침식된 가느다랗고 깊은 주름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작년에 국내에서 처음 만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디온 메이어는 <오리온> <프로테우스>라는 작품으로 굉장히 인상적인 조우를 선사했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국가가 가지는 특수성을 잘 활용해서 매우 견고한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사망과 고문, 화학무기와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살인 목록과 비밀 작전에 관련된 문서 등 온갖 기만과 협잡에 관련된 문서들. 인종차별 정책의 근간이던 흑백 분리법과 인구등록법이 폐지되고 나서도 여전한 흑백의 차별. 그렇게 나라를 하나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비밀과 기만을 가지고 개인의 과거가 국가의 과거와 연결되어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오리온>의 주인공 판 헤이르던이라는 인물에게 푹 빠졌었는데, 그는 전직 형사였지만 현재는 사설탐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사소한 시비에도 주먹질을 해대며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는 인물이었다. 과거의 그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았었지만, 우연한 사고로 동료가 죽게 되고 그 순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을 발견하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거였다. 그 사건으로부터 3년이 지났고, 사람들은 이제 그를 쓰레기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인칭으로 진행되는 그의 과거와 3인칭으로 전개되는 그의 현재와 교차 진행되는 방식 때문인지, 그가 원래 가지고 있는 면들이 더 도드라지게 부각되어 현재의 그 쓰레기 같은 인물에게 숨겨진 그것에 더욱 몰입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대체 왜 판 헤이르던이 시리즈로 작품이 출간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력 만점의 캐릭터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드디어, 내가 고대하던 디온 메이어의 '시리즈'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베니 그리설 시리즈는 현재까지 5편이 출간되었고, 그 중 3편은 영화 판권이 계약되어 '형사 베니 시리즈' 3부작 영화가 제작될 예정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시리즈 첫 번째인 <악마의 산>과 두 번째인 <13시간>이라는 작품이다. 알콜 중독때문에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고 집에서 쫓겨난 형사라는 설정 자체가 특별할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니 그리설이라는 인물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그런 캐릭터였다. 구제 불능의 알골 중독에 마흔 네 살에 경위 자리를 못 벗어난 채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평범한 형사, 술김에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고는 집에서 쫓겨나 6개월 안에 술을 끊지 않으면 이혼이라는 통보를 받고 잘 곳이 없어 살해된 피의자의 집에서 잠을 자는, 정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이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수사에 있어서만큼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사건의 플롯을 따라가면서 인물에 저절로 감정 이입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랄까. 작년에 만나봤던 디온 메이어의 작품 속 캐릭터들과 완전히 다르면서도 매력 넘치는,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인물이다. 시리즈 다음 작품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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