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시간 형사 베니 시리즈 2
디온 메이어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매일 밤, 죽음과 폭력을 끌고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가장의 삶이란 어떤 걸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따뜻한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에서 행복한 미소가 아니라 이들도 언젠가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부터 느껴야 한다면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범인들을 검거하는 형사일지라도,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내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니까 말이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여전히 안나를 사랑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술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안나와 별거를 시작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매일 밤, 죽음과 폭력을 끌고 집으로 돌아올 일이 없으니까. 현관문을 들어와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들도 언젠가 뼈가 부러지고 사후경직으로 빳빳이 굳은 모습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야기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 열심히 일하고, 초과근무를 하면, 언젠가는 계급도 올라가고, 승진도 하고, 그리고 결국은 정의가 승리할 거라고 믿었던 남자. 그저 그거 하나면 충분했던 그 시절의 그는 이제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경찰에서 26년을 일했지만, 여전히 경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나쁜 놈들은 점점 늘어나고, 반대로 경찰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상대가 피해자이든 범죄자이든, 타인의 상황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한 경찰이었던 그는 이제 알코올중독자 신세다. 그 뛰어난 능력 덕분에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를 버텨내기 위해 술을 마셔야만 했던 것이다. 희생자들이 누워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면 비명 소리가 들리고, 그것은 한 번 들리고 나면 머릿속에 붙박인 것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지쳐갔고, 결국 그의 아내는 6개월 안에 술을 끊지 않으면 이혼이라는 통보를 받고 집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리고, 술은 끊은 지 156일째가 되는 날부터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 시작된다.

 

이야기는 배낭 여행 중이던 한 미국 소녀가 의문의 추격자들에게 쫓기면서 문을 연다. 대체 무슨 이유로, 누구에게서 도망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그녀의 친구가 어젯밤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잡히게 되면 그녀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될 거라는 것밖에. 그녀는 그렇게 줄기차게 도망을 치고, 무려 380여 페이지가 지나서야 소녀는 우리의 주인공 베니 그리설과 연결이 되며, 그 즈음 추격자들과도 만나게 된다. 신입들의 멘토링을 맡고 있는 베니는 부수무지 은다베니가 맡고 있는 미국인 소녀 살인 사건과 프란스만 데커가 맡고 있는 음반계의 스타 프로듀서 살인 사건을 오가며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전혀 별개의 사건처럼 각각 진행되던 이 두 사건의 교집합은 작품의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나며, 누군가에게 쫓기며 홀로 공포에 떨고 있는 소녀를 구하기 위한 13시간의 사투가 시간대별로 차근차근 교차로 보여진다. 그렇게 새벽 5 36분에 시작했던 이야기는 저녁 7 51분에 이르러서야 마무리가 된다. 무려 550여 페이지 동안 펼쳐지는 스토리는 사실 짧다면 짧은 시간이고, 길다면 꽤 길기도 한 시간이다. 13시간은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시간이고, 누군가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시간이며, 누군가가 죽을 지도 모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과연 베니 그리설은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아내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과연 그는 두 사건을 해결해서 소녀를 구하고,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까. 과거를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문득 주버트는 한평생 지켜봐 온 동료이자 친구인 그리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설이 품고 있는 에너지에 비해 그의 활동 반경은 너무나 좁아서, 때로 그 에너지가 진동하며 쓰나미와 같은 열정의 파동을 뿜어낼 때가 있었다. 20년 전 그리설의 얼굴은 장난꾸러기 요정 같았다. 두 볼에는 궁정 광대처럼 장난기가 어렸고, 반짝이는 슬라브족의 눈과 커다란 입속에는 중독성 있는 웃음과 말도 안 되는 재치가 숨어 있다가 기회만 주면 언제든 활짝 기량을 펼쳤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얼굴에서 지난날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세월에 침식된 가느다랗고 깊은 주름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작년에 국내에서 처음 만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디온 메이어는 <오리온> <프로테우스>라는 작품으로 굉장히 인상적인 조우를 선사했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국가가 가지는 특수성을 잘 활용해서 매우 견고한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사망과 고문, 화학무기와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살인 목록과 비밀 작전에 관련된 문서 등 온갖 기만과 협잡에 관련된 문서들. 인종차별 정책의 근간이던 흑백 분리법과 인구등록법이 폐지되고 나서도 여전한 흑백의 차별. 그렇게 나라를 하나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비밀과 기만을 가지고 개인의 과거가 국가의 과거와 연결되어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오리온>의 주인공 판 헤이르던이라는 인물에게 푹 빠졌었는데, 그는 전직 형사였지만 현재는 사설탐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사소한 시비에도 주먹질을 해대며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는 인물이었다. 과거의 그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았었지만, 우연한 사고로 동료가 죽게 되고 그 순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을 발견하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거였다. 그 사건으로부터 3년이 지났고, 사람들은 이제 그를 쓰레기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인칭으로 진행되는 그의 과거와 3인칭으로 전개되는 그의 현재와 교차 진행되는 방식 때문인지, 그가 원래 가지고 있는 면들이 더 도드라지게 부각되어 현재의 그 쓰레기 같은 인물에게 숨겨진 그것에 더욱 몰입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대체 왜 판 헤이르던이 시리즈로 작품이 출간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력 만점의 캐릭터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드디어, 내가 고대하던 디온 메이어의 '시리즈'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베니 그리설 시리즈는 현재까지 5편이 출간되었고, 그 중 3편은 영화 판권이 계약되어 '형사 베니 시리즈' 3부작 영화가 제작될 예정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시리즈 첫 번째인 <악마의 산>과 두 번째인 <13시간>이라는 작품이다. 알콜 중독때문에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고 집에서 쫓겨난 형사라는 설정 자체가 특별할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니 그리설이라는 인물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그런 캐릭터였다. 구제 불능의 알골 중독에 마흔 네 살에 경위 자리를 못 벗어난 채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평범한 형사, 술김에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고는 집에서 쫓겨나 6개월 안에 술을 끊지 않으면 이혼이라는 통보를 받고 잘 곳이 없어 살해된 피의자의 집에서 잠을 자는, 정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이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수사에 있어서만큼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사건의 플롯을 따라가면서 인물에 저절로 감정 이입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랄까. 작년에 만나봤던 디온 메이어의 작품 속 캐릭터들과 완전히 다르면서도 매력 넘치는,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인물이다. 시리즈 다음 작품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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