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다. 가끔은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알 수 없고, 때로는 이 길이 맞는지 의문도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나 자신 만의 길 위에 서서 앞으로 가야만 한다. 누군가는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가기도 하지만, 결국 남겨지는 것은 혼자이며, 우리는 그 외롭고 힘겨운 길 위에서 버텨내야만 한다. 인생이란 결코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을 허용하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여기 두 소녀가 있다. 집이 있지만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던, 스스로 자신이 좋은 방향으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열세 살 천재 소녀. 그리고 매일 어디서 자야 할 지 찾아야 하는,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는 열여덟 노숙자 소녀.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언제나 혼자라고만 느꼈던 그들이, 함께 걷게 된다.
책에는 주요한 순간들을 구분하는 장들이 있어서 시간이 흐르거나 상황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때로는 부로 나뉘어 그림에 붙은 제목처럼 '만남' '희망' '몰락' 하는 식으로 어떤 전망이 실린 제목이 붙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에는 그런 게 없다. 제목도 없고, 플래카드도 없고, 표지판도 없다. '위험하니 조심하시오' '붕괴사고 자주 일어나는 곳' '실망 임박'을 가르쳐 주는 표시는 전혀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옷 한 벌 걸쳤을 뿐이지 완전히 혼자요, 행겨 그 옷이 완전히 누더기일지라도 별수 없다.
열세 살의 루 베르티냐크는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글 읽기를 다 뗀 천재 소녀이다. 몇 학년을 월반하고 현재는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지만, 너무 어린 탓에 좀처럼 같은 반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발표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녀는 무심코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노숙자라는 테마로 다음 발표 주제를 정하게 되고, 거리에서 사는 여자아이를 인터뷰해보겠다고 선언해버리게 된다. 그리고 평소에 자주 떠나는 열차를 구경하러 가던 역에서 열여덟의 소녀, 노를 만나게 된다. 살아오는 내내, 자신이 언제나 바깥에 있다고 느끼면서 지내왔던 루는 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처음으로 어딘가에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노라면, 진짜 인생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루의 가족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슬픔이 목 끝까지 차올라 정상적인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수족관과도 같았다. 엄마는 벌써 몇 년째 집에만 처박혀 지내고, 아빠는 욕실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 그들의 하나뿐인 딸은 자신이 늘 혼자라고 느낀다. 루가 여덟 살 때 그녀의 동생을 갖기 위해 애쓰던 부모는 아기를 가진다. 모두의 축복 속에 루의 여동생이 태어났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영아 돌연사로 세상을 떠나 버리고, 그렇게 시간이 멈춰 버리고 만다. 엄마는 루를 더 이상 어루만지거나 안아주지 않았고, 식구들은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딴 세상 가서 살고 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면 거실 한가운데 앉아 있는 엄마는 딸을 보며 일어나서 오늘 하루 잘 보냈냐고 묻지만, 질문은 매일같이 토씨 하나 안 다르고 똑같았으며, 루의 대답들은 그저 허공으로 흘러가버린다. 그들은 그렇게 엄마 역할, 딸 역할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전에는 '사정에'에 존재 이유, 숨겨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그런 의미가 세상의 구조를 관장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이유, 나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다. 그런 면에서 문법은 명제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공부를 하면 그 논리를 파헤칠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일종의 기만이다. 숱한 세월을 거쳐 이어온 기만. 이제는 나도 인생이 휴지와 불균형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한 연속에서, 질서는 그 어떤 절박한 필요에도 결코 부응해주지 않는다.
세상과 소통할 수 없어 외로웠던 소녀는 노숙자 소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노는 루에게 자신의 하루하루를 말해주며,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묘사해준다. 루는 그 모든 것을 노가 자신에게 주는 나름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색깔이 달라 보이게 하는 선물, 모든 이론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문제 삼는 선물. 사람들은 노를 가리켜 '너하고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애야.'라고 말하지만, 루는 자신이 세상들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 겹치는 곳에 속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삶이 아무 단절 없이 쭉 이어지는 곳, 만사가 불현듯 이유 없이 멈춰버리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맥주를 마시고, 손톱을 물어뜯고, 자신의 삶의 송두리째 들어 있는 바퀴 달린 트렁크를 끌고 다니는 열여덟의 노. 말수가 적고 순종적인 만년 일등 열세살의 루. 그리고 거칠 것 없는 반항아에 아이들 사이에선 왕 같은 존재인 열일곱의 뤼카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우정의 풍경은 어른 들의 세계에서 소외된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해내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는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으며, 어른이 되려면 분명히 그런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차츰 깨닫게 된다.
홈리스는 전 세계 도시의 공통된 문제이다. 극중 루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어가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걸 이해할 수 없어 하고, 노를 자신의 집에 데려오기로 결심하고 부모님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매우 뭉클하다. 사실 어른들은 그럴 수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길을 걷다 노숙자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는 것을 보며 불안해하거나, 무섭다고 느낀다. 노숙자는 인간의 실존적 두려움을 상징하니 어쩔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회학자 로라 휴이는 노숙자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사회적 또는 도덕적 수모를 수반하는 감정이고, 궁핍해지거나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아직 순수한 열세 살 소녀는 노숙자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 들인다. 그녀는 '원래 그런 것과 원래 그렇지 않은 것에 부딪히기로 결심한다면, 분명 많은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텅 빈 눈과 집 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 모든 슬픔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도 싫었던 소녀는,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함께인 거지, 루? 우리는 함께야?
노가 가끔 길에 멈춰 서서, 다짜고짜, 뚜렷한 이유도 없이 묻던 질문은, 루가 노와 함께 평생을 거리에서 살겠다고 집을 떠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렇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슬픈 진실.
이제 다시는 우리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나는 노와 함께 평생을 거리에서 살 거야.
루는 노를 통해서 자신이 속한 부분 집합에서 벗어나고, 자기 인생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도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떤 지침서나 사용설명서에도 나와 있지 않는 삶의 부작용들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그런 폭력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루는 한걸음씩 성장해나간다. 그녀는 이 일을 통해서 성장했고, 이제 더 이상 삶이 두렵지만은 않다. 그렇게 루는 자신 만의 길 위에서 더 이상 외롭지만은 않다. 그 길이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그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