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처럼 희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2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스티그 라르손이 창조한 히로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작가, 살라 시무카의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을 만났다.

젤렌카의 마지막 한마디가 얼음송곳처럼 루미키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녀는 젤렌카를 부둥켜안고 계속 설득하고 싶었다. 그녀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 있는지 기어이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도 알려주고 싶었고. 원한다면 그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수줍음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습관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누구든 쫓아다니지 마. 사랑이나 우정이나 신뢰를 위해 절대 애원하지 마.

열일곱의 루미키는 모든 문제에 대해 신중히 고찰하는 성격으로 급우들의 장난에도 가담하지 않고, 학교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고 늘 혼자 식사를 하면서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는 당찬 소녀이다. 그녀는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으려 애쓰며, 항상 모든 일에 방관적 입장을 유지했는데, 그저 투명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무난하게 살고 싶었던 그녀는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도 휘말리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하지만 뭐, 인생이란 것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굴러가겠느냔 말이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피 묻은 돈 3만 유로로 인해, 그녀의 평화롭고 조용했던 생활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그렇게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피처럼 붉다>에서 어쩌다 보니 국제적인 범죄에 말려들게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열일곱 소녀의 파란만장한 모험기를 그렸었다.

이번 <눈처럼 희다>에서는 전작에서 피에 젖은 돈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국제적인 마약조직에 쫓겨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난 뒤, 체코 프라하로 혼자 여행을 떠난 루미키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허벅지에 총을 맞고 병원에 있다 퇴원한 지 이제 겨우 석 달 반이 지난 상태로, 일주일 뒤면 프라하 여행을 마치고 핀란드로 돌아가 가족과 여름을 보낼 예정이었다. 오로지 혼자 있고 싶어서 떠나온 낯선 도시에서 중부 유럽의 향긋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낯선 여자가 다가와 말한다.

"내가 네 언니인 것 같아."

스무 살인 젤렌카는 엄마와 함께 살다 자신이 열다섯 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겨졌다고 말하며, 루미키에게 말을 건넨다. 과거에 루미키의 아빠가 프라하에 관광객으로 여행을 왔다가 그녀의 엄마를 만났다는 것이다. 아빠가 또 다른 딸을 두고 있었다니, 자신의 언니를, 그것도 바로 이곳에. 루미키는 혼란스럽고,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달라질 거라는 사실 말이다.

"뭐 없어진 거 있어요?" 루미키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며 물었다.

그녀가 아파트에 놓아둔 것이라고는 옷과 세면도구 가방뿐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닳아 해진 요 네스뵈 소설과 여권이 든 지갑만 지니고 다녔다. 소설을 챙겨 다니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조용히 책을 펼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루미키의 옷은 무사히 남아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녀의 브래지어들이 전부 뜯겨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침입자는 그녀가 얇은 컵 안에 국가 기밀이라도 숨겨놓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는 책의 판본도 작고, 페이지 수도 작은 편이라 가볍고 빠르게 읽히는 시리즈인데, 이번 두 번째와 세 번째 작품은 그 분량이 더 가벼워졌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자가 나타나 갑자기 자신이 언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상하고,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작위적인 만남이기도 했지만, 평소 자신의 가족이 엄청난 비밀을 숨겨왔다고 의심하던 루미키였기에 젤렌카의 말을 조금씩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가족'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수상한 분위기의 컬트 종교단체였다. 위험천만한 종파나 컬트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조사해온 기자 이르지와 함께 펼쳐지는 루미키의 모험은 무대를 낯선 도시 프라하로 옮겨서도 그치지 않는다. 사실은 자신을 언니라 주장하는 젤렌카에 대해 자신의 부모에게 전화로 직접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자신의 지적 능력에 의지해 직접 비밀을 파헤치는 것을 선택한다. 과연 젤렌카는 진짜 루미키의 언니일까? 루미키는 집단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수상한 종교단체에서 젤렌카를 무사히 구출할 수 있을까? 프라하에서도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루미키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죽는 시간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신께서 정하시면 난 받아들일 뿐이라고."

"반드시 그래야 할 의무는 없어요. 당신 운명은 당신이 결정하는 거라고요."

그리고 전편에서 모두의 궁금증을 자아냈던 그녀의 옛 남자친구에 대한 에피소드가 이번 작품에서 비로소 공개가 되어, 스토리가 한층 풍성해지고 있다. 성질이 불 같고, 늘 흥분한 상태였으며, 변덕스럽고, 따뜻하고, 신랄하며, 잘생긴,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블레이즈는 그녀의 과거 속에서 등장하다,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 이르면 현재의 이야기 속에 드디어 나타나게 된다. 게다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건조하고, 너무도 시크 하고, 지나치게 독립적인 캐릭터로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려는 소녀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루미키가 블레이즈와 함께하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또 다른 매력을 만날 수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며, 아무리 암담한 상황에서도 포기를 떠올려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던 소녀 루미키의 마지막 여정이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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