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던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9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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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건은 이렇다. 스물 두 살의 여자가 자정 무렵 살해된다. 범인은 육중한 것으로 여자의 두개골을 내려친 다음 복부를 칼로 세 번 찌른 것으로 추정된다. 범행 현장 근처에서 술에 곯아떨어져 잠들어 있던 노숙자가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그는 범행에 대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증언한다. 그다지 특별해 보일 것 없어 보이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담스베르그 반장을 만나면서 완전히 다른 사건이 된다.

"난 사실을 믿지. 그가 돌아왔고, 나에겐 다시 기회가 찾아왔어. 더구나 난 그 조짐을 미리 느꼈다네."

"조짐이라뇨, 무슨 조짐이오?"

"경고 말일세. 술집 여종원원, 포스터, 일렬로 꽂혀 있는 압핀."

당글라르도 당황한 나머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느님 맙소사, 조짐이라뇨? 서장님, 이젠 신비주의자가 되셨나요? 도대체 무슨 허끼배를 따라다니시는 겁니까? 귀신? 유령? 그 귀신은 어디에 산답디까? 서장님 머릿속에 둥지를 틀었나요?"

 

평범해보이는 사건으로부터 특별한 것을 이끌어내어 우리의 주인공과 연결해내는 방식에서 작가만의 개성이 가장 드러나게 마련인데, 프레드 바르가스의 방식은 정말 이상하기 그지 없다. 우리는 우선 강력계 형사 스물네 명을 추위에 떨게 만든 보일러 고장에 대해 알아야 하며, 아담스베르그 반장을 비롯해 주요 인물들이 곧 퀘벡에 가서 DNA 연수를 받게 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중 비행 공포증이 있는 당글라르는 그들이 타게 될 비행기가 대서양 상공에서 공중 폭발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연수를 가지 않으려 하는 중이고, 일년 전 자취를 감춘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는 아담스베르그의 여자 카미유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도 알게 된다. 게다가 아담스베르그 반장이 문제의 이 사건과 맞닥뜨리는 방식은 더욱 기묘한데,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등을 내려친 폭풍 같은 충격으로 전조를 만들고 있다. 그는 당글라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길을 걷다가,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그것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특별한 사건과 제대로 연결되기 까지 우리는 오십여 페이지를 넘게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세발작살 살인 사건과 아담스베르그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드디어' 그 전모가 밝혀지지만, 거기서 이야기는 곧바로 이들의 퀘백 연수로 연결된다. 이어지는 백여 페이지 동안 현재 벌어지는 사건과 거의 상관없어 보이는 퀘백에서의 일상이 길게 늘어지더니 그들이 다시 일상으로 복귀 하고 나서야, 그러니까 이백오십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사건은 급 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전혀 연결될 것 없어 보이던 퀘백 에서의 그것에서부터 비롯되어 아담스베르그 서장의 발목을 잡고 그를 과거로부터 옭아매는 귀신 과도 같은 세발작살이 그의 현재 삶을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딱 이 책의 중간 정도 되는 분량인데, 이렇게 느긋하게 흘러오던 이야기는 이후 가속도가 붙어 엄청나게 속도감이 생긴다. 빨리 마지막 페이지가 보고 싶어 조바심이 나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안달이 날 수밖에 없도록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이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들이 두툼한 두께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에 있다. 정말 치밀하게 날줄과 씨줄로 연결된 플롯을 거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여유 넘치는 흐름으로 끌고 가다가, 어느 순간 시계 톱니바퀴 마냥 딱딱 이가 맞는 순간이 오면 그때부터는 뭐 게임 끝이다. 그 누구도 프레드 바르가스의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입조심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소리를 믿으라고 설득하지 말게.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자네가 용감하고, 정신이 똑바로 박혔다고 믿네. 악마를 찾아내게. 악마를 찾아내서 법의 올가미로 옭아 넣을 때까지는 남의 관심을 살 행동일랑 하지 말게."

아담스베르그는 내내 난간에 기대서서 순수함으로 빛나는 이마를 지닌 캐나다 동료의 말에 위안을 얻었다.

"그런데 상스카르티에 자네는 왜 나를 미친놈 취급하지 않나?"

"그거야 자네가 미친놈이 아니니까 그렇다네. 아주 간단하지. 밥 먹으러 갈 텐가, 갈 텐가 벌써 정오가 지났네."

 

수십 년에 걸쳐 무려 열 세 명이나 되는 살인을 저지른 무시무시한 연쇄 살인범이 등장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범인은 그 존재 유무만 의심스러웠지 이야기의 시작부터 밝혀 놓고 있기 때문에 살인 사건 수사 자체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작품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아담스베르그 서장을 비롯한 캐릭터들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페이지를 찢고 인물이 뚜벅뚜벅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담스베르그는 세상에서 가장 느긋하고 여유로운 형사로 느림의 미학을 말과 행동으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세상에, 살인 사건 조사에 '느림의 미학'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 싶지만, 때로는 멈춘 듯한 시간 속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주가 숨어 있다고 믿는 그의 감각이 분명히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것도, 천재적인 수사 감각을 가진 것도 아닌 주인공이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홀린 것처럼 그에게 점점 사로잡히고 마는 마력의 캐릭터이다.

그의 충직한 보좌관 당글라르는 직관에 의존하는 자신의 상사와는 달리 논리로 무장한, 웬만한 정보들은 모조리 습득하고 있는 만물박사이다. 다섯 명의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 홀아비인 그는 바람둥이 상사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한 그의 여자 카미유를 몰래 도와주는 다정다감함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는 이 작품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치는 여자 형사 르탕쿠르이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그렸을 법한 우람한 체구를 자랑하는 그녀는 어디에서든 적응력이 뛰어나며, 지적이고 전략적인 사고에 행정 처리 능력도 우수하고 몸싸움에도 지지 않는데다 사격 솜씨 또한 일품인 강력계의 다재 다능한 대들보이다. 특히나 그런 그녀의 에너지를 불가시성으로 변환시키는 능력은 가히 놀라울 만한데, 작품의 후반부에 그녀가 아담스베르그를 어떻게 돕는지 그 활약은 정말 멋지기 그지 없다. 뿐만 아니라 퀘백에서 만난 상스카르티에, 아담스베르그의 오랜 친구인 클레망틴 할머니와 그녀의 절친인 할머니 해커 조제트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이 두 할머니의 역할은 이 작품에서 매우 놀라운 분위기 전환과 사건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아 정말 이 두 할머니는 너무 사랑스럽고 흥미진진한 캐릭터이다.

 

대부분의 범죄, 스릴러, 추리 소설들을 읽으면서 책장들을 다시 휘리릭 넘겨보며 놓쳤던 단서와 복선과 디테일들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을 읽을 때는 그럴 일이 거의 없다. 정교한 플롯과 탁월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는 이야기지만, 페이지마다 너무도 여유롭고 침착하게 진행이 되어 그것들을 인물들과 함께 고스란히 즐기기만 한다면,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레 막바지를 향해 속도를 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이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만 않는다면, 읽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만나더라도 그 어떤 단서도 놓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책은 그 동안 꽤 많이 출간되었었다. 물론 현재는 모두 절판 상태지만 말이다. 우선 아담스베르그 서장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파란 동그라미의 사나이>, 그리고 이번 <트라이던트>의 바로 전 작품인 <4의 비밀>이 있고, 다른 시리즈 작품인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도 있다. <트라이던트>는 지난 2008년에 <해신의 바람 아래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작품의 개정판이고,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도 올해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될 예정이다. 아담스베르그 서장 시리즈의 가장 최신작(그래 봐야 2011년 작이지만)은 작년에 비채에서 출간되었던 <죽은 자의 심판>이다. 9권의 시리즈 중에 국내에 출간된 것이 4권이니, 나머지 시리즈도 곧 출간되기를 기다려본다. 특히 시리즈의 최신작이 바로 작년에 출간되었으니, 국내에도 최신작부터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아무래도 그 전에 원서부터 사 모으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긴 하지만, 아담스베르그 시리즈의 다음 작품을 빨리 국내에서 만나보고 싶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이야 말로 내가 왜 미스터리 소설을 사랑하는지 제대로 이해할만한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누가 범인인가' '대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국내 출간된 추리, 미스터리 분야의 소설이 이백사십 여권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중에 내가 읽은 책이 팔십 프로가 넘는다. 거의 매년 그렇게 해왔으니 꽤 많은 책들을 읽어 온 셈이다. 그런데 그 어떤 작가도 프레드 바르가스처럼 쓰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소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구성, 배경, 등장인물이 완벽하게 조합되어 있는 기막히게 멋진, 아름답게 쓰인 이야기를 읽고 싶은가.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을 만나보라. 특히나 그녀의 작품 중에 <트라이던트>는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 당신도 무조건 그녀에게 빠져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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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31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의 원제와 출간연도를 꼼꼼하게 정리한 글이 좋습니다. 이런 정보가 있어야 독자는 특정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

피오나 2016-03-31 19:00   좋아요 0 | URL
하핫. 감사합니다ㅎㅎ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수요가 있어야 새로운 책들이 계속 번역 출간될테니까요^^

ICE-9 2016-03-3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프레드 바르가스의 팬이셨군요. 반가운데요, 저도 팬.
오, `해신의 바람 아래서`와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가 원래 저런 표지였군요. 저게 초판본이겠지요. 제 것은 파란 동그라미 사나이와 같은 디자인인데, 아무래도 나중에 통일되었나 보군요. 그건 그렇고 작년 국내 출간된 미스터리의 80%를 읽으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도 부지런히 읽어야될텐데...ㅠ ㅠ;

피오나 2016-04-01 08:43   좋아요 0 | URL
하핫. 역시 헤르메스님도 프레드 바르가스의 팬이시군요ㅎㅎ 저야 워낙 특정 장르에 편중된 독서를 해서 그렇구요. 헤르메스님처럼 폭 넓게 읽는게 더 어렵지요^^
 
후와후와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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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그림책이라니! 읽기도 전에 궁금증이 마구 샘솟았다. 그가 자타공인 애묘인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가 들려주는 어릴 적 고양이 친구 단쓰와의 추억에는 애정이 마구 묻어 있다는 것이 첫 페이지부터 느껴진다. 게다가 마치 아이들의 동화책처럼 컴팩트한 판본에, 산뜻한 봄 날씨처럼 가벼운 무게에, 표지 또한 구름처럼 폭신폭신하다. 제목인 '후와후와'가 구름이 가볍게 둥실 떠 있는 모습 혹은 소파가 푹신하게 부풀어 있는 모습 또는 커튼이 살랑 이는 모습을 비롯해 고양이 털처럼 보드랍고 가벼운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라는데, 제목의 뜻을 책 표지에 고스란히 구현할 생각을 하다니! 책을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도 고스란히 상상이 되는 이미지가 동화를 읽는 내내 설레 이게 만들었다.

 

 

하루키는 온 세상 고양이를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유는 해의 온기를 잔뜩 머금은 고양이 털이 생명이란 것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에 관해 가르쳐주기 때문이란다.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털에 손을 뻗어, 통통한 목덜미며 끝이 동그래진 차가운 귀 옆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는' 그 기분을 나도 느껴 본 적이 있다

나는 고양이 숨결에 맞춰,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천천히 그 숨을 내뱉는다.

살며시, 살며시-주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다행히 고양이의 시간은 내가 느끼고 있다는 걸 아직 모른다.

나는 그 사실이 좋다. 고양이는 그곳에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곳에 있으면서, 그곳에 없다.

 

어릴 적에 몸집이 커다랗고, 검정색에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를 몇 달 키운 적이 있다. 길 고양이였고 자주 보여서 먹이를 주다가 우리 가족과 친해진 경우였는데, 하루키의 고양이 단쓰 처럼 꽤 나이를 먹어서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강아지만 키우다가 처음 만난 고양이였기에, 어린 나에게 고양이는 예쁘긴 하지만 자신의 곁을 쉽사리 내주지 않는 차가운 동물처럼 느껴졌었다. 게다가 고양이는 우리 가족 중에 유독 아빠만 따랐었는데, 한참 찾아봐도 안 보이다가 아빠만 등장하면 어느 샌가 그 곁에 등을 대고 얌전히 앉아 있곤 했었다. 새끼 때부터 키운 게 아니라서 정을 많이 주지는 못했었지만, 그래도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 내는 가르릉 거리는 소리와 고양이의 조그만 귀를 만졌던 그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하루키는 제법 많은 것을 고양이에게 배웠다고 그 시절을 추억한다. '생명체에게 한결같이 소중한 것을. 이를테면 행복이란 따스하고 보드라우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든가' 말이다. 어린 아이들은 대부분 동물을 좋아하는데, 실제로 아이에게 동물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면 정서적으로 훌륭한 교육이 된다고 한다. 아마도 하루키가 느낀 것처럼 생명의 소중함과 따스하고 보드라운 행복을 동시에 알게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곳곳에서 특유의 느슨한 듯 자유스러운 그림 체로 활약했던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은 하루키의 글과 더불어 폭신폭신, 말랑말랑한 단쓰와의 추억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한 편의 시인 듯 동화인 듯, 따뜻한 시심과 예쁜 동심으로 써 내려간단쓰에 대한 단상에 안자이 미즈마루 특유의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그림을 얹었다'는 책 소개 문구에서 유독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이라는 문구에 시선이 간다. 실제로도 더할 나위 없이 '대충' 그린 것 같은 일러스트인데도, 묘하게 하루키의 글과 어우러져 그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고양이 이야기이니 고양이를 그리면 되겠지만,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표현해야 하는 것은 그후와후와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는 그의 말처럼 '후와후와'가 마구 느껴지는 그림책이 아닐 수 없다. 살랑살랑 따뜻한 바람 부는 봄 날씨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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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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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 장편소설이자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익사>를 읽었고, 그 전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었었다. 두 작품 모두 제목에서 비롯되듯이 모두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강렬한 이야기였고, 작가의 자전적인 부분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는 작품이었다. 사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들은 읽기가 마냥 편하고 쉬운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에 그의 단편들을 만나보니, 그런 생각이 더 확고하게 들었다. 장편도 물론 좋았지만, 단편이야말로 작가의 번뜩이는 기지와 재치, 그의 삶을 관통하는 사상과 생각이 제대로 드러나는 글들이기 때문이다. 장편은 일단 호흡이 길기 때문에 둘러 갈 수도 있고, 숨겨 두었다가 은근하게 보일 수도 있고, 하고자 하는 그것에 다가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 인 반면, 단편은 짧은 이야기 속에 그 모든 것을 다 담아야 하기 때문에 에둘러 가지 못하고 정면 승부해야만 하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전쟁 때 너는 아직 어린애였겠지?

긴 전쟁 동안 나는 죽 성장했어. 나는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는 것만이 불행한 일상의 유일한 희망인 것 같은 시기에 성장해 왔다. 그리고 그 희망의 징조가 범람하는 가운데 나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전쟁이 끝나고 그 시체가 어른의 뱃속 같은 마음속에서 소화되고, 소화가 불가능한 고형물이나 점액이 배설되었지만, 나는 그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도 흐지부지 녹아 버렸다.

-나는 너희의 그 희망이란 걸 온몸으로 짊어지고 있던 셈이지. 다음 번 전쟁은 너의 차지가 되겠구나.

 

이번 단편집은 오에 겐자부로가 60년 가까운 작가 생활 동안 발표했던 모든 단편소설 중에서 직접 스물세 편을 가려 뽑아 고쳐 썼다고 한다. 그가 소설 집필을 그만둔 뒤 자신이 발표했던 작품들을 다시 읽고 고르고, 거기다 문장까지 모두 꼼꼼히 손을 본 보물 같은 작품집이니, 그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기에는 이만한 책이 또 없을 것이다. 스물 세 편의 단편들은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뉘어 실려 있는데, 그의 작품들을 어렵게만 느끼는 이들에게도 초기의 이야기들은 꽤 수월하게 읽힐 것이다. <기묘한 아르바이트> <사자의 잘난 척>에서는 죽음을 대하는 독특한 시선을 볼 수 있고, <사육>에서는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인간들의 반응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며, <인간 양>은 지금 현대의 우리 모습을 보는 듯 사회의 한 단면을 그리고 있다.

중기로 넘어가면 연작 소설들로 단편이 진행되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중기에 실린 이야기들에 마음이 갔는데, 다들 알다시피 그의 첫아이는 뇌에 치명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성인이 된 큰아들은 천재적인 음감을 지닌 음악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일상 생활은 미숙하다. 먹는 것, 입는 것, 말하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고, 가끔은 간질 발작도 한다. 그는 아들의 삶에 쉽사리 간섭하지 않는데, 아들을 바라보는 강인하면서도 담담한 아버지로서의 시선은 가슴 깊은 곳 어딘가를 건드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 고통, 그리고 절망을 넘어서 문학으로 보편성을 다루게 된 대 작가의 눈물겨웠던 삶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후기로 들어가면 자신의 자전적인 부분을 넘어서는 더 깊이 있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확실히 집중력을 요하고, 그만큼 어렵긴 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내밀한 작가적 성향, 색깔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이요는 지상 세계에 태어나 이성의 힘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고 무언가 현실 세계의 건설에 힘을 보태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블레이크에 의하면 이성의 힘은 오히려 인간을 착오로 이끌며 이 세계는 그 자체가 착오의 산물이다. 그 세계를 살면서 이요의 영혼의 힘은 경험에 의해 손상되지 않았다. 이요는 순수한 힘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이요와 내가 이윽고 '레인트리' 속으로, '레인트리'를 지나서, '레인트리' 저 너머에 이미 합일을 이루었으나 개체로서 더욱 자유로운 우리가 귀환한다. 그것이 이요에게나 나에게 의미 없는 삶의 과정일 뿐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스스로 장애를 가진 큰아들과의 공생과 블레이크의 시에서 환기된 영감을 하나로 엮어서 일련의 단편집을 완성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아들을 중심으로 아내와 여동생 남동생을 포함한 가족의 지금까지의 나날들을 돌아보고 앞날을 전망해 보고 싶었다고 말이다. 오에는 누구나 꿈꾼다는 노벨 문학상을 받으며 작가로서 성공했지만 그의 삶 자체는 순탄하지 못했다. 하지만 친한 친구의 자살, 장애가 있는 아들, 작품성에 대한 비판 등 그는 고난의 순간에도 책을 놓지 않았고, 그 모든 경험들은 그의 문학으로 승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

젊은 나이에 시작해 버린 소설가로서의 삶에 본질적인 곤란을 평생 느끼며 살아 왔다는 오에 겐자부로. 그는 자신이 쓴 것을 고쳐 쓰는 습관으로써 그것을 극복해 왔다고 말한다. '긴 시간을 들여 경험을 통해 그것을 기른다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커다란 곤란을 만났을 때, 그 습관이 도움이 된다'고 말이다. 위대한 노작가가 평생에 걸쳐 이룩한 '삶의 습관'을 엿볼 수 있는 이 책은 두툼한 두께만큼이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묵직한 무언가를 남겨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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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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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낯선 도시를 향해 나아갔던 여인, 블랑쉬는 현대인의 욕망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보여지던 캐릭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추구하고, 그것 앞에서 흔들리다 결국 굴복하고 만다. 그래서 혹자는 욕망을 삼키는 건 독약을 삼키는 것과도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각자의 기준으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바람이 그들이 가진 욕망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독약을 삼키게 되더라도 멈출 수 없는 것이 또 당연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 자신의 욕망에 순수하게 충실했던 또 한 명의 여인이 있다. 스토리만 보자면 신파, 통속 멜로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감춰진 것들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도발적이며, 사실적이고, 무자비하고, 날카롭다.

행복한 가정 분위기는 이 세상의 꽃이다. 그보다 더 부드럽고 섬세한 것은 없으며, 그 안에서 보살피고 키워야 할 본성들을 강하고 올바르게 만들기 위해 그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은 세상에 없다. 이러한 행복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어째서 눈가에 눈물이 반짝이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 나라 국민들의 마음을 묶어주고 황홀하게 하는 신비스러운 화음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의 기본 플롯은 다소 평범하다. 대도시로 상경한 시골 처녀가 배우로 성공 하기까지를 그리고 있는데, 19세기 말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순진한 소녀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지와 젊음의 환상으로 가득 찬, 수줍으면서도 밝은 열여덟 처녀 캐리는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향한다. 여행 경험이 전무한 그녀에게 난생처음으로 경험하는 대도시는 그 자체로 굉장한 사건이다. 그녀는 언니네 집에 거주하면서 일자리를 구하기로 하는데, 언니네 역시 궁핍하고 팍팍한 생활의 고단함에 그녀를 딱히 반기는 기색은 아니다. 언니인 미나도, 형부인 핸슨도 캐리가 일자리를 얻어서 숙식비를 낸다는 조건 하에 그녀를 받아들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 경력직을 구하는 터라 아무 것도 해본 적이 없는 촌뜨기 시골 소녀를 환대해 줄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다 경우 구두공장에 주급 사 달러 오십 센트에 취직을 하게 되지만, 언니에게 숙식비로 사 달러를 주고 남은 오십 센트로 일주일을 버텨 내는 것 또한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일은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저속한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사내들의 추파도 부담스러웠으며, 함께 일하는 여자 동료들 또한 가깝게 지내고 싶은 부류가 아니었다. 퇴근해서 언니에게 일에 대한 불평을 해도 그녀를 위로해주는 말 한마디 들을 수 없었으며,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캐리에게는 당장 겨울 옷을 살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다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그나마 구했던 일자리마저 잃게 되고, 그녀는 어깨가 축 처져서 사흘 동안 거리를 헤매며 일자리를 찾으러 다닌다. 그러다가 우연히 거리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삶이 그 순간 이후로 조금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시카고로 오는 열차에서 만나 자신에게 호감을 보였던 드루에는 그녀를 데리고 최고의 요리와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크고 안락한 식당으로 데려가 식사를 하게 해주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녀의 처지를 듣고는 옷부터 사야겠다며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녀는 잠시 거절했지만 결국 그에게 매혹적인 십 달러짜리 초록색 지폐 두 장을 받는다. 캐리는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희망차고 다 잘 될거라는 낙관적인 분위기에 휩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가 자신을 곤란에서 끌어내준 듯한 느낌에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는 형부와 언니네에 더 이상 함께 있기도 어려운 상황에, 고향에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던 그녀에게 드루에와의 만남은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직 본능을 대신하여 인간을 완벽하게 이끌어줄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했고, 인간은 본능과 욕망에만 귀 기울이기에는 너무 현명해졌으나 본능과 욕망을 압도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나약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과연 누가, 이 어린 처녀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녀가 욕망에 눈이 멀어 누군가를 속이거나,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려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앞에 다가온 손을 거절하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다. 나는 캐리가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이 좋았다. 그녀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본능과 이성, 욕망과 이해가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 싸우고 있었지만, 사실 대부분의 인간들 중에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이들이 얼마나 있겠느냐 말이다.

사실 이것은 이 방대한 이야기의 아주 미약한 시작에 불과하다. 그녀가 드루에와 어떻게 지내고, 그를 통해 알게 된 허스트우드와 또 어떤 관계로 발전하고, 그것이 결국 두 남자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변하게 만들지, 그리고 예쁘지만 촌스러웠던 시골 처녀가 어떻게 대도시의 유명 배우로 성공하게 되는지에 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굳이 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직접 책을 읽으면서 만나게 될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애정의 영역에 속하는 욕망에 있어서는 돈도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중에 백오십 달러를 쥐고도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돈 그 자체는 만질 수도 있고 바라볼 수도 있는 분명한 실체를 지닌 것으로, 며칠간은 기분 좋게 해주었지만, 그런 기분도 곧 사그라졌다. 호텔 요금으로 돈을 쓸 필요는 없었고, 옷도 당분간은 충분했다. 며칠 지나면 또 백오십 달러가 들어올 것이다.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데 그 돈은 놀랄 만큼 별 필요가 없었다. 더 나은 일을 하고 싶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무려 1900년에 쓰인 작품이다. 그런데 2016년인 지금 읽기에도 현대적이고, 감각적이며, 공감적이다. 게다가 이 작품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첫 작품이란다. 세상에 첫 작품을 이렇게 써내다니! 놀랍고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페이지 내내 밑줄 긋고 싶은 섬세한 문장들, 그리고 행간 속에 숨겨져 있는 인물들의 감정들, 가슴을 두근거리고 만드는 순진한 처녀의 욕망과 설레임을 가장한 내면의 치열한 전쟁, 본능과 이성, 욕망과 이해가 다투는 세밀한 심리 묘사들이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 세트처럼 가득 들어 차 있다. 이렇게나 평범하고 단순한 플롯으로, 이렇게나 뻔하고 예측 가능한 인물들로,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사회를 보여주고, 직설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내다니,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작품이다.

도덕성도 지성도 완벽하지 않은, 나약함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물이라서 더욱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고, 연민이 들어 감정 이입이 되는 것도 있다. 그 누구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에, 우리 모두는 한때 캐리였던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때 단순히 개인의 능력으로 모든 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환경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발표 당시 비도덕적이라는 여론의 비난에 작가가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자살까지 결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무려 10년 후에야 두 번째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고.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 작가의 어마어마한 이 작품은 단연코 올해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상위에 놓아 두고 싶을 만한 매혹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급히 찾아 봤더니 다행히도 그의 다른 작품이 아직 판매 중인 걸로 확인된다. 무려 1999년에 출간되었던 <미국의 비극> 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서 더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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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앤 폰테인이 감독한 영화 <투마더스(Two Mothers)>는 개봉 당시 꽤나 충격적인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 친구였던 두 여인이 각자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평범한 중년의 부인들이 되었는데, 그들의 관계는 어릴 때부터 친 가족처럼 지내온 것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쭉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서로의 두 아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너무도 가족처럼 지내던 이들이라 단순히 불장난이라기 보다는 근친상간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던 영화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기에 실제로는 이들의 사랑이 10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이야기에 더욱 놀랐었다. 암튼..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잔잔하고 영상도 아름다웠고, 두 여배우의 섬세한 감정 연기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금기의 판타지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은 바로 도리스 레싱의 <그랜드마더스>를 원작으로 했었다.

"우리 우아하게 늙자." 릴이 말했다.

"천만에." 로즈가 말했다. "나는 절대로 순순히 끌려가지 않겠어."

늙기는커녕 아직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흔을 넘겼고, 아이들은 누가 보기에도 이제 아이가 아니었으며, 거침없이 아름답던 시절도 지나갔다. 이젠 그 둘, 강하고 자신만만하고 잘생긴 두 젊은이를 봐도 그들이 한때 갈망이나 사랑 못지않게 경이로움으로 눈길을 사로잡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두 여자는 자신들의 두 아이가 젊은 신 같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기하며 사진첩을 뒤졌지만, 자신들의 예전 사진에 그저 예쁜 소녀들만 있을 뿐 그 이상이 아닌 것처럼 그 또렷한 기억의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도리스 레싱은 이 소설에서 서로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는 젊은 두 아들의 친구에게서 이 금기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림 같은 해변, 그림 같은 두 집, 그림 같은 두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사회적 금기와 도덕적 관습을 초월하여 서로에게 빠져드는 두 어머니와 두 아들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보다 소설을 통해서 더 담담하고, 위험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완벽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세상을 속이는 사랑은 그들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의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서 그 파급효과를 적나라게 하게 드러낸다.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가>에서는 빈부격차와 인종갈등이라는 배경 아래 중산층 백인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된 하층민 흑인 여자의 모성애를 그리고 있다. 운명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무슨 일이 왜 일어나는지 모른 채 하릴없이 발버둥 친 무기력한 존재에서 딸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다는 이유로 강인한 여인이 되어가는 빅토리아는 짧은 사랑의 댓가를 온 생애를 통과하며 겪어 낸다.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간직했던 환상, 사랑에 빠졌다고, 심지어 서로 사랑했다고 믿고 싶었던 그것. 하지만 사실 그들은 사랑하는 것과 한참 거리가 멀었었지만 말이다.

그렇잖아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빅토리아의 머릿속으로 뭔가 엄청난 진실이 비집고 들어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그 말은 마치 이 방이 집의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모네 집 거실에서 간이침대를 펴고 자는 빅토리앙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포옹하듯 감싸주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엄지를 입 속에 넣었는데, 그러면서도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아기가 아니야. 이러면 안 돼.

<그것의 이유>는 조금 특별한 상황 설정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가상의 고대국가인 로다이트 왕조의 흥망성쇠를 기록하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그 이유를 집요하게 파고 든다. 나라가 황폐해지고 타락해가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 그들이 보지 못했던 그것.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후대의 왕을 선택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그저 아들의 엄마였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해맑게 매력적이고 유쾌하지만 멍청한 그녀의 아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국가를 통치했던 12인 위원회들 또한 그 순간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지만 막지 않았다 한 국가의 흥망을 파헤치면서, 결국 그 속에 있었던 것은 빗나간 모성애였던 것이다. <러브 차일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영국 군인 제임스의 사랑과 집착에 대해 그리고 있다. 도리스 레싱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을 통해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때문에 얼마나 어리석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작가의 일은 질문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는, 누구든 자신의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면 좋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이 작품집 속에서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를 다양하게 경험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그것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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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3-28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 마더스]가 도리스 레싱의 소설이 원작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그 소설이 바로 이것이었군요!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요. 사실 영화 자체는 저는 별로였거든요. 오히려 원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가>도 끌리네요. `짧은 사랑의 댓가를 온 생애를 통과하며 겪어`내는 게 어떤 건지, 보고싶어요.

피오나 2016-03-28 17:06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는 그닥.. 원작 소설이 훨씬 좋더라구요^^ 어쩐지 이 책..다락방님 역시 좋아하실 것만 같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