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앤 폰테인이 감독한 영화 <투마더스(Two Mothers)>는 개봉 당시 꽤나 충격적인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 친구였던 두 여인이 각자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평범한 중년의 부인들이 되었는데, 그들의 관계는 어릴 때부터 친 가족처럼 지내온 것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쭉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서로의 두 아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너무도 가족처럼 지내던 이들이라 단순히 불장난이라기 보다는 근친상간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던 영화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기에 실제로는 이들의 사랑이 10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이야기에 더욱 놀랐었다. 암튼..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잔잔하고 영상도 아름다웠고, 두 여배우의 섬세한 감정 연기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금기의 판타지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은 바로 도리스 레싱의 <그랜드마더스>를 원작으로 했었다.

"우리 우아하게 늙자." 릴이 말했다.

"천만에." 로즈가 말했다. "나는 절대로 순순히 끌려가지 않겠어."

늙기는커녕 아직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흔을 넘겼고, 아이들은 누가 보기에도 이제 아이가 아니었으며, 거침없이 아름답던 시절도 지나갔다. 이젠 그 둘, 강하고 자신만만하고 잘생긴 두 젊은이를 봐도 그들이 한때 갈망이나 사랑 못지않게 경이로움으로 눈길을 사로잡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두 여자는 자신들의 두 아이가 젊은 신 같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기하며 사진첩을 뒤졌지만, 자신들의 예전 사진에 그저 예쁜 소녀들만 있을 뿐 그 이상이 아닌 것처럼 그 또렷한 기억의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도리스 레싱은 이 소설에서 서로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는 젊은 두 아들의 친구에게서 이 금기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림 같은 해변, 그림 같은 두 집, 그림 같은 두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사회적 금기와 도덕적 관습을 초월하여 서로에게 빠져드는 두 어머니와 두 아들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보다 소설을 통해서 더 담담하고, 위험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완벽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세상을 속이는 사랑은 그들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의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서 그 파급효과를 적나라게 하게 드러낸다.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가>에서는 빈부격차와 인종갈등이라는 배경 아래 중산층 백인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된 하층민 흑인 여자의 모성애를 그리고 있다. 운명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무슨 일이 왜 일어나는지 모른 채 하릴없이 발버둥 친 무기력한 존재에서 딸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다는 이유로 강인한 여인이 되어가는 빅토리아는 짧은 사랑의 댓가를 온 생애를 통과하며 겪어 낸다.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간직했던 환상, 사랑에 빠졌다고, 심지어 서로 사랑했다고 믿고 싶었던 그것. 하지만 사실 그들은 사랑하는 것과 한참 거리가 멀었었지만 말이다.

그렇잖아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빅토리아의 머릿속으로 뭔가 엄청난 진실이 비집고 들어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그 말은 마치 이 방이 집의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모네 집 거실에서 간이침대를 펴고 자는 빅토리앙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포옹하듯 감싸주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엄지를 입 속에 넣었는데, 그러면서도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아기가 아니야. 이러면 안 돼.

<그것의 이유>는 조금 특별한 상황 설정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가상의 고대국가인 로다이트 왕조의 흥망성쇠를 기록하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그 이유를 집요하게 파고 든다. 나라가 황폐해지고 타락해가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 그들이 보지 못했던 그것.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후대의 왕을 선택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그저 아들의 엄마였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해맑게 매력적이고 유쾌하지만 멍청한 그녀의 아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국가를 통치했던 12인 위원회들 또한 그 순간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지만 막지 않았다 한 국가의 흥망을 파헤치면서, 결국 그 속에 있었던 것은 빗나간 모성애였던 것이다. <러브 차일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영국 군인 제임스의 사랑과 집착에 대해 그리고 있다. 도리스 레싱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을 통해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때문에 얼마나 어리석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작가의 일은 질문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는, 누구든 자신의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면 좋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이 작품집 속에서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를 다양하게 경험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그것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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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3-28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 마더스]가 도리스 레싱의 소설이 원작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그 소설이 바로 이것이었군요!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요. 사실 영화 자체는 저는 별로였거든요. 오히려 원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가>도 끌리네요. `짧은 사랑의 댓가를 온 생애를 통과하며 겪어`내는 게 어떤 건지, 보고싶어요.

피오나 2016-03-28 17:06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는 그닥.. 원작 소설이 훨씬 좋더라구요^^ 어쩐지 이 책..다락방님 역시 좋아하실 것만 같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