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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은네디 오코라포르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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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나를 본 순간부터 알았던 거야. 나만 빼고 다들 알았어.

"에우."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게 이런 뜻이에요?"

여태껏 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고통에서 태어났다는 뜻이지. 사람들은 에우로 태어난 아이들은 결국 폭력적으로 된다고 믿어. 폭력이 더 많은 폭력을 잉태할 뿐이라고 생각하지.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건 알아, 너도 명심하렴."    p.55

종말 후 먼 미래의 아프리카, 밤처럼 피부가 새카만 오케케족은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피부가 태양의 색을 띠는 누루족이 등장했다. 오랜 세월 동안, 무력을 추구하던 누루족은 오케케족을 약탈하여 노예로 삼으며 영역을 확장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폭력을 통해 잉태된 혼혈아인 '에우'라는 존재가 있다. 에우 아이들은 누루족과도, 오케케족과도 다른 외모로 태어나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데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수치로 여겨지기에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천대받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온예손우 역시 '에우'였다. 그녀의 어머니인 나지바는 누루족 무장단체에 의해 오케케족 마을 사람들이 집단 학살되고, 여자들은 모두 강간당하던 그 날, 피해를 당하고 사막에서 홀로 딸을 낳는다. 그리고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라는 뜻의 온예손우란 이름을 지어 준다.

그 최악의 날, 누루족이 오케케 여성들을 단순히 고문하고 수치를 주려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 에우 아이들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했다. 저자인 오코라포르는 2004년 내전 중이던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 여성을 타깃으로 자행되는 강간이 일종의 전쟁 무기처럼 인종 청소를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참상을 취재한 기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러한 전시 성폭력의 처참하고 끔찍한 양상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어 더욱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야기는 온예손우에게 잠재되어 있던 마법적 재능이 발현되기 시작하면서, 소녀 마법사가 차별과 폭력으로 점철된 세계와 맞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물을 좋아한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일어섰다. 내 위로 보이는 건 전부 색깔뿐이었다. 수백 수천만의 색깔, 하지만 대부분 녹색이었다. 그 색들이 고이고, 쌓이고, 늘어나고, 수축되고, 무리짓고, 굽이쳤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는 세계와 공존하고 있었다. 이게 이계였다. 염소들을 보니 기뻐 깡충거리며 메에메에 울고 있었다. 그 행복의 동작이 진한 푸른색을 피워 올렸고 그게 내 쪽으로 흘러왔다. 그걸 들이 마셨더니 냄새가...... 근사했다.    p.277

이 작품은 세계환상문학상을 수상하고 네뷸러 상과 로커스 상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HBO에서 드라마로 만든다는 소식과 함께 「얼음과 불의 노래」의 저자 조지 R. R. 마틴이 제작에 참여하기로 하여 더욱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작가인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마블의 「블랙팬서」의 스핀오프 코믹스 스토리 작가로서 활동할 뿐 아니라 SF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 드라마의 각본을 맡는 등 현재 할리우드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마법 판타지물에서 자주 사용되는 서사가 바로 십대 소년, 소녀인 주인공이 마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 소설일 것이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금 무게감이 다른 것이 종말 후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성별과 인종 불평등, 할례 의식과 제노사이드란 묵직한 주제를 녹여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극중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이 작품은 분명 판타지 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실제로 지금도 전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폭력과 악, 그리고 국내에도 만연한 차별과 혐오의 문제는 더 이상 허구의 그것이라고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한 번 펼치면 내려놓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져들게 만드는 재미와 끔찍할 정도의 현실적인 모습에서 오는 강렬한 아픔이 함께하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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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에번 핸슨
밸 에미치 외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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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뼈에 사무쳐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안타깝게도 그건 상상이 아니다. 가공을 거치지 않은 100퍼센트 천연 유기농 현실이다. 셔먼 선생님이 있지만 선생님은 시간제로 돈을 받는다. 아버지가 있지만 나한테 눈곱만큼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 나라의 반대편으로 이사 가지 않았을 거다. 엄마가 있지만 오늘 저녁에는, 어제 저녁에도, 그 전날 저녁에도 부재중이다. 농담이 아니라 곰곰이 따져보면 누가 있을까?

내 앞의 컴퓨터 화면 위에는 이름 하나뿐이다. 에번 핸슨. 나다. 나에게는 그것뿐이다.   p.40

 

뮤지컬 팬들에게는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겠지만,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표를 구하기 힘든 작품 중 하나는 바로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이다.

2017년 브로드웨이 최고의 화제작으로 제71회 토니상 9개 부문 노미네이트, 최고의 뮤지컬상을 포함 6개 부문 수상했고, 2018 그래미 어워드에서도 수상했다. 라라랜드와 위대한 쇼맨의 작사/작곡가로 잘 알려진 Benj Pasek Justin Paul이 작사와 작곡을, 뮤지컬 <렌트> <넥스트 투 노멀>의 연출을 맡았던 Michael Greif이 연출로 참여한 뮤지컬이다. 사회 불안 장애를 앓는 학생이 스스로에게 쓴 편지로 인해 친구가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는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보다 책이나 소설을 훨씬 더 잘 이해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킥젝 선생님의 비평적인 분석 전략을 방금 전에 목격한 실제 행동에 아무 문제없이 적용할 수 있다. 우리의 아름답고 지당하신 여주인공 조이 머피가 점심을 쓰레기통에 버린 건 화자에 대한 평가를 상징하는 행동이다. 조이 머피의 눈에 에번 핸슨은 쓰레기인 것이다.   p.145

 

고등학생인 에번 핸슨은 사회불안장애를 겪고 있다. 주기적으로 심리 치료를 받고 있으며, 항우울제를 먹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그에겐 너무도 어렵기만 하다.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아빠는 꽤 먼 곳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셨으며, 엄마는 병원 일과 수업 때문에 너무 바빠서 집에 거의 없다. 심리 치료사는 에번 핸슨에게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숙제를 내주었었다. 새 학기 첫날도 어깂 없이 투명인간처럼 보내고, 혼자 컴퓨터실에서 숙제인 편지를 쓰고 있는데, 학교의 문제아 코너가 나타나 그 편지를 가로채버린다. 편지를 돌려받지 못해 불안한 에번은 코너가 자신의 편지를 사람들에게 유포해서 웃음거리가 되어버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한다. 하지만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고, 어떠한 폭탄도 터지지 않은 채 하루, 이틀이 지나간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전해지는 코너의 자살 소식, 게다가 코너의 가족들은 그의 옷에서 발견된 에번의 편지를 유서로 오해하게 된다. 에번 핸슨에게,로 시작해서 너의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친구인 내가,로 끝나는 그 편지를 코너가 에번에게 쓴 편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졸지에 에번은 코너의 절친이 되어 버리고, 작은 오해로 시작된 그 일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지게 된다.

 

가족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에번은 자신이 코너의 비밀친구였다는 거짓말을 시작하게 되는데, 거짓말은 거듭될 수록 점점 몸집이 불어나 상황은 점점 더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외로움으로 사무치던 한 사람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유쾌하고, 따뜻하고, 뭉클하게 펼쳐진다. 사회불안장애를 겪는 한 아이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일에 휘말려 조금씩 사회성을 갖게 되는 과정을 통해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또다시 기본값으로 설정된 반응을 보인다. 장난치는 거겠지. 내 앞에서 까부는 거겠지. 하지만 나의 직감은 아니라고 한다. 그가 한 얘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사건은 벌어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얘기에 담긴 정신과 그의 전달 방식은 묘하게도 진짜처럼 느껴졌다. 그가 진심을 담아서 하는 얘기 같았다.   p.233

 

사실 뮤지컬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이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음악 때문이었다. 뮤지컬 넘버들이 굉장히 현대적이면서도 대중적이라, 한번 들으면 그 멜로디가 계속 귀에 남는다. 라라랜드와 위대한 쇼맨의 곡을 만들었던 작가, 작곡가의 음악이라 더욱 매력적이고, 가사들이 모두 희망적이고, 힘을 주는 메세지를 안고 있어 듣고 있으면 정말 심장이 쿵쿵 뛰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 작품은 곧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인데, 뮤지컬 넘버들이 너무 좋아서 제2 <라라랜드>가 되지 않을까 기대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에 뮤지컬을 원작으로 하는 소설이 나올 예정이라 가제본으로 미리 만나보게 되었는데, 너무도 뭉클하고, 따뜻하고,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음악으로만 들었던 내용을 소설을 통해서 깊이 있게 알게 되니,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듣는 뮤지컬 넘버들의 감동은 그야말로 두 배가 되었다.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핫한 뮤지컬이라 언젠가는 국내에서도 공연이 될 것 같은데, 그 전에 소설과 영화로 먼저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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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태어났으니 산다 - 열심히 살기는 귀찮지만 잘 살고는 싶은 나를 향한 위로의 한마디
해다홍 지음 / 놀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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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소중하고 사랑 받을 만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존재가 굳이 소중해질 필욘 없다. 그냥 내가 나로서 살아 있어도 충분한 환경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게 전부다. '장점 찾으면 좋은 거지, 좋게 생각해' 따위의 말은 지겹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할까? 큰돈을 벌지 않아도, 인형처럼 생기지 않아도, 모든 분야에 다재 다능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나대로 존재하고 있는데.    p.17

일단 태어났으니 산다? 열심히 살기는 귀찮다? 뭐 이런 무기력한 제목이 다 있나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때 있지 않나. 충전해도 방전되는 배터리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쉽게 지쳐버리고, 일상이 무기력해지는 그런 경험 말이다. 뭐든 잘해야 한다는 강박과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압박을 잠시 잊고 싶은 순간, 당신은 좀 대충대충 살 필요가 있다.

네이버 블로그 방문자 약 12만 명, 페이스북 페이지 구독자 약 5천 명 그리고 수백 명의 독자들이 선택한 독립출판물까지, 연일 화제를 일으키며 대중의 진심 어린 지지를 받은 해다홍 작가의 이야기가 새 옷을 입고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일과를 끝내고 집에 들어가는 길엔 얼른 들어가서 누울 생각에 설레고,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그래도 '일단 태어났으니 살고 있는'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웃픈' 마음을 위로해 준다. 열심히 살기는 귀찮지만 잘 살고는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세상엔 노력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보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사실 더 많다... 열심히 하면 다 되는 시대는 지나 간지 오래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그래도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며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최선을 다했던 많은 사람이 노력이 부족했다는 식의 자책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다. 자책하며 땅굴 파고 싶을 땐 그냥 남 탓, 세상 탓을 해서라도 스스로를 지키기를.   p.73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상처를 받더라도 감정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어른이라고 별 수 없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한 척 돌아서지만 해묵은 감정들을 한쪽에 쌓아두거나,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혼자 끙끙대거나, 결국 스트레스로 고스란히 쌓이게 된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왜 그렇게까지 애써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마음도 함께 비집고 나오게 마련이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얼른 퇴근하고 싶고, 사소한 것에 쉽게 싫증 나고, 사소한 것에 쉽게 동요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평범한 모습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책이 필요하다. 일상의 무게에 지쳐 아무것도 되지 않을 자유를 원하지만, 막상 아무것도 아닌 나를 받아들일 자신은 없는 '요즘 것들의 감성'을 제대로 저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말한다. 요즘 가장 부러운 건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왜냐하면 그럼 자신의 구차한 모습 따위는 안 봐도 되니까. 품위를 잃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고, 생각보다 구차하고, 처량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 속 이야기들이 모두 부정적이고, 우울한 내용들이지만 만화를 읽으면서 그렇게 어둡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누구나의 속마음이 그러하지 않을까. 매사에 불평이 많다고 해서 삶에 대한 애착까지 없는 건 아니니 말이다.

소심하지만 너무도 유쾌한, 귀여운 투덜거림들이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될 것 같다. 편안하고 친근한 그림체로 가끔은 익살스럽게 또 가끔은 진지하게 풀어내는 일상의 소소한 고민들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때로는 버겁고 비뚤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일상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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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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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 독이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나의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고 짐짓 독기를 담아 위협한다. 벗이 한숨을 쉬며 대꾸한다.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와 나마저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자라 모래알이 될 터인데, 허무하고 허무한데,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하고 허무하다.   p.13

오랜만에 정말 '지독한' 작품을 만났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빽빽한 단어들은 시종일관 ''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읽는 시간도 힘겹거니와,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나 조차도 어떠한 형태의 독에 잠식되는 듯한 기분이다. 리트머스 종이에 살짝 닿아도 순식간에 전체 색깔을 바꿔 버리는 그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독자들을 서서히 물들인다. 독과 약, 선과 악, 성과 속,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속으로. 그리하여 ''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인다.

기본적인 서사는 한 남자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독을 몸에 지니고 있던 그는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그 독을 더욱 키우고, 그 독을 약으로 사용하고, 그러다가 독과 약을 동시에 품고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또한 이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과 약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극중 몽구는 말한다. 일상적인 삶이라는 건 너절하기 때문에, 삶이라는 음식에 죽음이라는 소스가 살짝 뿌려지는 거야말로 정말 근사한 거라고. 그래서 비소 먹고 죽은 고기를 먹고, 복어 회에 복어 독을 조금 떨어트려 혀에 톡 쏘는 맛을 느끼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분명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비일상적인 분위기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고 있다. 서사가 뚜렷한 이야기들만 읽다가 이렇게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글을 읽으려니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천천히, 꼭꼭 씹으면서 읽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독이 아닌 게 없거든.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너는 늘 두통에 시달리느라 거기에 신경이 집중 되어 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한 순간도 멍하니 보내는 일이 없이 항상 깨어 있는 거야. 네 두통은 너를 마비시키지 않고 각성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독이자 약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p.198~199

지난 해 겨울, 화자인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구급차에 실려 한 종합병원으로 옮겨진다. 그곳 응급실에서 위세척을 받고 하제와 해열제를 투여 받은 후 집중 치료실에 수용되었다. 담당 의사에 따르면, 위에서 보툴리누스 균과 프토마인 균이 검출되었으며, 그 균들로부터 방출된 독소가 몸에 흡수되면서 혈액을 통해 장기를 공격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몸 전체가 독성 물질에 감염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는 한동안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혼몽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다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입원한 지 며칠 만에 처음으로 상체를 약간 일으켜 같은 병실 안에서 한 남자, 조몽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 남자는 낮은 어조로 뭔가를 쉬지 않고 읊조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웅얼거리는 그 소리는, 저주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했다.

조몽구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체질이었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강한 독성 물질로 작용하는 것처럼 알레르기와 습진 등 잦은 병치레를 했다. 그리고 또한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렸는데, 그로 인해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폐소공포증처럼 문이 잠겨 있는 공간에선 패닉 상태가 되었으며, 두통을 어쩌지 못해 쩔쩔 매며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낸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게 되고, 독의 세계에 심취되어 몰두하고 있는 환경운동가이자 행위 예술가인 삼촌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데, 그로 인해서 두통이 발생한 원인이 아니라 두통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독에 맞서 싸우는 대신 독과 더불어 살아가게 될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게 된다. 소설은 조몽구의 자전적 진술을 서술자인 ''가 전하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독으로 시작되어 독으로 끝나는 소설'이라는 작품 해설의 문구처럼 시종일관 자기 안의 독과 세계의 독에 대해서 한 남자의 외로운 고군분투기를 그리고 있다.

 

최수철 작가는 10여 년 전부터 ''에 대한 작품을 구상해왔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래서 이 소설은 오랜 시간 사유의 결과물이자 실험적인 작가 정신의 결정체처럼 보인다. 하지만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 읽기에는 상당히 버거운 시간이었다. 극중 인물의 표현대로 해보자면 '페이지마다 독이 묻어 있어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작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 속의 독에 취할 자신이 있다면, 끝까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비로소 작가가 전하려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독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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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 배틀왕 미스터리 과학 도감 2
아마나 / 네이처 & 사이언스 엮음 / 서울문화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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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과학 도감 그 두 번째 이야기는 수중 생물이다. 단순히 수중 생물들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 배틀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는 시리즈라 더욱 흥미진진하다. 이 책은 연안 생물, 바다 생물, 극지방 생물, 심해 생물, .호수 생물 등 다양한 수중 생물들을 서식지 별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바위가 많은 바닷가에 살고 있는 생물들은 몸을 숨길 곳이 많아 매우 다양한 종류가 살고 있다고 한다. 날카로운 가시투성이의 가시복, 강력한 독을 지닌 불가사리인 별불가사리, 커다란 집게발로 탕탕 큰소리와 파동을 만들어 내는 딱총새우, 독을 지닌 바다의 달팽이 군소 등이 있다. 먼저 대표 선수들의 랭킹과 주요 능력 등을 보여주고 수중 생존 전략과 방어 자세, 번식 방법 등을 알려 준다. 그리고 나면 가상의 배틀이 만화로 그려져 있는데, 첫 번째 배틀은 가시복과 샌드타이거상어의 대결이다. 상어의 뾰족한 이빨이 부풀어 오른 가시복을 뚫을 수 있을지 흥미롭게 대결이 펼쳐진다.

수중 생물들의 사냥 방법, 번식 방법, 천적, 공생 관계 등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한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어 과학 도감으로서도 아이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닥이 얕은 바다인 연안에 사는 희귀한 생물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난바다에 살고 있는 공포의 생물들, 남극과 북극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인 극지방의 위험한 생물들, 수심이 200미터 이상 되는 심해에서 생활하는 신비한 생물들, 염분이 거의 없는 담수로 이루어진 강, 호수, 연못에 사는 오싹한 생물들까지 독특한 수중 생물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만화로 표현된 수중 배틀 과정은 매우 세밀하고 역동적인 일러스트로 그려져 있어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듯한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한참 동물과 수중 생물, 곤충 등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 피규어를 가지고 놀 때도 항상 싸우고, 대결을 벌이곤 하기 때문에 이 또래 아이들이 읽기에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아기자기한 테마들이 많았는데, 대표 선수로 선정된 수중 생물 외에 비슷한 종류의 생물들이 소개되어 있는 페이지도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 같다. 가시복의 친구들로는 적의 입보다 몸을 크게 해서 잡아 먹히지 않도록 방어하는 뿔복, 복섬, 흰점꺼끌복, 거북복 등이 소개되어 있다. 날아다니는 물고기인 날치의 친구들로는 몸이 매우 가늘고 긴 동갈치, 학꽁치, 꽁치아재비 등이 있다. 날카로운 이빨의 포식자인 향유고래의 친구들로는 잠수 실력이 뛰어나 깊은 바다에서 먹이를 잡아먹는 민부리고래, 황제펭귄, 에델바다표범이 있다고 한다.

다양한 동식물, 생물들을 다루고 있는 과학 도서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렇게 마치 게임처럼 즐길 수 있는 시리즈라면 아이들이 더욱 흥미를 잃지 않고 집중하지 않을까 싶다. 생생한 사진을 통해 다양한 수중 생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태적인 특징과 수중 생존 전략 등을 배우고, 그들 가운데 순위를 매기고 배틀을 시키는 등 재미있는 요소들이 너무 많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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