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 독이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나의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고 짐짓 독기를 담아 위협한다. 벗이 한숨을 쉬며 대꾸한다.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와 나마저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자라 모래알이 될 터인데, 허무하고 허무한데,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하고 허무하다. p.13
오랜만에 정말 '지독한' 작품을 만났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빽빽한 단어들은
시종일관 '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읽는
시간도 힘겹거니와,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나 조차도 어떠한 형태의 독에 잠식되는 듯한 기분이다.
리트머스 종이에 살짝 닿아도 순식간에 전체 색깔을 바꿔 버리는 그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독자들을 서서히 물들인다. 독과 약, 선과
악, 성과
속,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속으로. 그리하여 '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인다.
기본적인 서사는 한 남자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독을
몸에 지니고 있던 그는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그 독을 더욱 키우고,
그 독을 약으로 사용하고,
그러다가 독과 약을 동시에 품고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또한 이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과 약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극중 몽구는 말한다. 일상적인 삶이라는 건 너절하기 때문에,
삶이라는 음식에 죽음이라는 소스가 살짝 뿌려지는 거야말로 정말 근사한
거라고. 그래서 비소 먹고
죽은 고기를 먹고, 복어 회에
복어 독을 조금 떨어트려 혀에 톡 쏘는 맛을 느끼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분명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비일상적인
분위기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고 있다.
서사가 뚜렷한 이야기들만 읽다가 이렇게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글을 읽으려니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천천히, 꼭꼭 씹으면서
읽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독이 아닌 게 없거든.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독'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약'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너는 늘
두통에 시달리느라 거기에 신경이 집중 되어 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한 순간도 멍하니 보내는 일이 없이 항상 깨어 있는
거야. 네 두통은 너를
마비시키지 않고 각성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독이자 약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p.198~199
지난 해 겨울, 화자인 ‘나’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구급차에 실려 한 종합병원으로
옮겨진다. 그곳 응급실에서
위세척을 받고 하제와 해열제를 투여 받은 후 집중 치료실에 수용되었다.
담당 의사에 따르면,
위에서 보툴리누스 균과 프토마인 균이 검출되었으며, 그 균들로부터 방출된 독소가 몸에 흡수되면서
혈액을 통해 장기를 공격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몸 전체가 독성 물질에 감염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혼몽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다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입원한 지
며칠 만에 처음으로 상체를 약간 일으켜 같은 병실 안에서 한 남자,
조몽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 남자는 낮은 어조로 뭔가를 쉬지 않고 읊조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웅얼거리는
그 소리는, 저주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했다.
조몽구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체질이었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강한 독성 물질로 작용하는 것처럼 알레르기와 습진 등 잦은 병치레를 했다. 그리고 또한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렸는데, 그로 인해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폐소공포증처럼
문이 잠겨 있는 공간에선 패닉 상태가 되었으며,
두통을 어쩌지 못해 쩔쩔 매며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낸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게
되고, 독의 세계에 심취되어
몰두하고 있는 환경운동가이자 행위 예술가인 삼촌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데,
그로 인해서 두통이 발생한 원인이 아니라 두통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독에 맞서 싸우는 대신
독과 더불어 살아가게 될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게 된다.
소설은 조몽구의 자전적 진술을 서술자인 '나'가 전하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독으로 시작되어 독으로 끝나는 소설'이라는 작품 해설의 문구처럼 시종일관 자기 안의
독과 세계의 독에 대해서 한 남자의 외로운 고군분투기를 그리고 있다.
최수철 작가는 10여 년 전부터 '독'에 대한 작품을 구상해왔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래서 이 소설은
오랜 시간 사유의 결과물이자 실험적인 작가 정신의 결정체처럼 보인다.
하지만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 읽기에는 상당히 버거운 시간이었다. 극중 인물의 표현대로
해보자면 '페이지마다 독이
묻어 있어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작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 속의 독에 취할 자신이
있다면, 끝까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비로소 작가가
전하려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독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