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은네디 오코라포르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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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나를 본 순간부터 알았던 거야. 나만 빼고 다들 알았어.

"에우."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게 이런 뜻이에요?"

여태껏 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고통에서 태어났다는 뜻이지. 사람들은 에우로 태어난 아이들은 결국 폭력적으로 된다고 믿어. 폭력이 더 많은 폭력을 잉태할 뿐이라고 생각하지.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건 알아, 너도 명심하렴."    p.55

종말 후 먼 미래의 아프리카, 밤처럼 피부가 새카만 오케케족은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피부가 태양의 색을 띠는 누루족이 등장했다. 오랜 세월 동안, 무력을 추구하던 누루족은 오케케족을 약탈하여 노예로 삼으며 영역을 확장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폭력을 통해 잉태된 혼혈아인 '에우'라는 존재가 있다. 에우 아이들은 누루족과도, 오케케족과도 다른 외모로 태어나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데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수치로 여겨지기에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천대받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온예손우 역시 '에우'였다. 그녀의 어머니인 나지바는 누루족 무장단체에 의해 오케케족 마을 사람들이 집단 학살되고, 여자들은 모두 강간당하던 그 날, 피해를 당하고 사막에서 홀로 딸을 낳는다. 그리고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라는 뜻의 온예손우란 이름을 지어 준다.

그 최악의 날, 누루족이 오케케 여성들을 단순히 고문하고 수치를 주려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 에우 아이들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했다. 저자인 오코라포르는 2004년 내전 중이던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 여성을 타깃으로 자행되는 강간이 일종의 전쟁 무기처럼 인종 청소를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참상을 취재한 기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러한 전시 성폭력의 처참하고 끔찍한 양상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어 더욱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야기는 온예손우에게 잠재되어 있던 마법적 재능이 발현되기 시작하면서, 소녀 마법사가 차별과 폭력으로 점철된 세계와 맞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물을 좋아한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일어섰다. 내 위로 보이는 건 전부 색깔뿐이었다. 수백 수천만의 색깔, 하지만 대부분 녹색이었다. 그 색들이 고이고, 쌓이고, 늘어나고, 수축되고, 무리짓고, 굽이쳤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는 세계와 공존하고 있었다. 이게 이계였다. 염소들을 보니 기뻐 깡충거리며 메에메에 울고 있었다. 그 행복의 동작이 진한 푸른색을 피워 올렸고 그게 내 쪽으로 흘러왔다. 그걸 들이 마셨더니 냄새가...... 근사했다.    p.277

이 작품은 세계환상문학상을 수상하고 네뷸러 상과 로커스 상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HBO에서 드라마로 만든다는 소식과 함께 「얼음과 불의 노래」의 저자 조지 R. R. 마틴이 제작에 참여하기로 하여 더욱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작가인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마블의 「블랙팬서」의 스핀오프 코믹스 스토리 작가로서 활동할 뿐 아니라 SF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 드라마의 각본을 맡는 등 현재 할리우드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마법 판타지물에서 자주 사용되는 서사가 바로 십대 소년, 소녀인 주인공이 마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 소설일 것이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금 무게감이 다른 것이 종말 후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성별과 인종 불평등, 할례 의식과 제노사이드란 묵직한 주제를 녹여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극중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이 작품은 분명 판타지 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실제로 지금도 전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폭력과 악, 그리고 국내에도 만연한 차별과 혐오의 문제는 더 이상 허구의 그것이라고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한 번 펼치면 내려놓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져들게 만드는 재미와 끔찍할 정도의 현실적인 모습에서 오는 강렬한 아픔이 함께하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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