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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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연에는 미묘한 자력(磁力)이 있다고 믿었다. 오래전부터 가졌던 믿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그 자력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고, 그 방향은 그가 걸어온 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그토록 단순하게 펼쳐진 부처스 크로싱에서 지낸 단 며칠 동안, 자연이 가진 강박적인 충동의 힘은 너무나도 강해서 그의 의지, 습관, 생각에 충격을 주기 충분하다는 걸 느꼈다... 아직 그 강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강이 그의 본능이 추구해 왔던 자연과 자유를 그 자신과 갈라놓는 광대한 경계선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60~61

 

대학생인 윌 앤드루스는 자연주의에 빠져 하버드 대학을 중퇴하고, 가진 돈을 모아 서부로 향한다. 그리고 캔자스 산골 마을 부처스 크로싱에 도착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하고 평원으로 나가면 신세 망친다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냥하는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삶에서 친숙했던 모든 것 아래 잠재되어 있는 그것, 세상의 원천을 찾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사냥꾼인 밀러를 찾아가 서부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하고, 그에게 들소 사냥에 대해서 듣게 된다.

 

마침 밀러는 작은 규모로 사냥대를 꾸릴 생각이었기에, 앤드루스는 가진 1400달러 중 거의 반인 600달러를 그에게 투자하기로 한다. 그들은 로키산맥에 숨겨져 있다는 들소 떼의 은신처를 습격해 한몫 크게 잡아 보기로 한다. 마을을 떠나기 전 만났던 창녀 프랜신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돌아오겠죠. 하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젊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졌겠죠." 라고. 어쩌면 그녀의 이 말은 앤드루스를 기다리고 있을 내일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이러한 조언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그들은 긴 여정을 시작하고, 들소 사냥은 앤드루스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경험을 그에게 선사한다. 겨우 조금 전만 해도 당당하고 고귀하며 생명의 위엄으로 가득했던 존재가 속절없이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채 죽은 고깃덩이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그는 자기 안에 있던 무언가가 파괴되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가파른 산이 사방을 에워싼 넓고 굽은 고원에서 수 개월을 보내면서 그는 점점 시간 감각을 상실하고, 인간성을 잃어간다.

 

 

 

"젊은 사람들은." 맥도널드는 업신여기듯 말했다. "찾아낼 무언가가 있다고 늘 생각하지... 글쎄, 그런 건 없어." 맥도널드가 말했다. "자네는 거짓 속에서 태어나고, 보살펴지고, 젖을 떼지. 학교에서는 더 멋진 거짓을 배우고. 인생 전부를 거짓 속에서 살다가 죽을 때쯤이면 깨닫지. 인생에는 자네 자신, 그리고 자네가 할 수 있었던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자네는 그 일을 하지 않았어. 거짓이 자네한테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지. 그제야 자네는 세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 그 비밀을 아는 건 자네뿐이니까.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어. 이미 너무 늙었거든."              p.306

 

<스토너>라는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던 작가 존 윌리엄스의 마지막 미번역작이 출간되었다. 존 윌리엄스는 일평생 단 네 편의 소설만 발표했는데, 데뷔작인 <오직 밤뿐인>부터 <부처스 크로싱>, <스토너>, <아우구스투스>까지 모두 국내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번에 나온 <부처스 크로싱>은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를 쓰기 5년 전에 발표한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택하고 있어서 더욱 흥미로웠는데, 기존에 만났던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어떤 이야기와도 달랐기 때문이다. 잔혹한 들소 사냥, 대자연 속에서의 험난한 야생 생활, 지옥과도 같은 산속의 겨울을 버텨내고 다시 부처스 크로싱으로 돌아왔을 때 보스턴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던 대학생 앤드루스는 무엇을 얻었을까. 그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부처스 크로싱'은 존 윌리엄스가 만든 가상의 산골 마을이다. 하지만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품 전반에 걸친 자연에 대한 그림같은 묘사는 우리를 1870년대 캔자스 서부로 데려간다. 2,3000마리나 되는 들소가 이동하는 장면은 페이지로 읽어도 장관이었다. 빽빽하게 자란 소나무 아래, 검은 얼룩이 계곡 위를 움직이는 풍경이라니, 얼룩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에 움직이는 거대한 바다처럼 흔들리는 것이다. 들소가 나타나기 바로 전 광경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땅의 고요와 정적, 완전한 평온같은 시간이었기에 이 대비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잔혹하지만 우아하고, 고요함 속에서도 드라마틱한 감정 변화를 느끼게 해주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긴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스토너>의 감동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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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박물관 붉은 박물관 시리즈 1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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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 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궁에 빠진 사건의 증거품이 여기 오면 나는 그 사건을 한 번 더 검토하지. 물론 검토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아. 그러나 아주 드물게도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어. 그런 관점을 바탕으로 사건을 바라보면 해결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거야."
히이로 사에코가 늘 수사 자료를 읽고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미궁에 빠진 사건을 재수사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p.51

 

전 여자친구인 마이코에게 반년 만에 연락이 왔다. '이런 문제로 상담할 수 있는 상대는 당신밖에 없다'는 그녀의 말에 다카미는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한다. 그런데 아파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제복 차림의 경찰관이 서 있었다. 4층에 사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뒷마당으로 떨어졌다는 거였다. 불길한 예감에 이름을 확인했는데, 마이코였다. 누군가 그녀를 베란다에서 밀어 떨어뜨린 거였다. 돌아오는 길에 다카미는 노트를 한 권 사서 오늘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마이코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경찰은 믿을 수 없었고, 법학부 학생으로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은 쭉 해 왔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생각이다. 그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범인을 추적하고, 그 과정을 담은 일기를 남긴다. 그러나 '붉은 박물관'에 증거품으로 들어온 그 일기 안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는데, 이는 <복수 일기>라는 작품이다.

 

1987년 12월 젊은 남자의 피살체가 하천부지에서 발견된다. 둔기에 의해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고, 피해자의 옷에 다른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용의자가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을 알아내지 못해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십육 년이 지난 현재 한 당시와 같은 나이의 대학원생이 동일한 장소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시체 유기 현황부터 상황, 둔기의 형태, 사망 추정 일시 등 모든 정황이 이십육 년 전 사건과 일치하는 걸로 미루어 수사팀은 동일범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다. 수사1과는 '붉은 박물관'에 방문해 미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가져가고, 다시 수사가 시작된다. 과연 동일범이 이십육 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두 번 벌인 범죄일까, 아니면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따라한 모방 범죄일까? 범인이 검거되고 나서 이후에 밝혀진 범행 동기가 전혀 예상 밖의 그것이라 다소 당황스러웠던 작품이다. 그럼에도 그 임팩트가 상당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수도 있구나 감탄했던 작품으로 <죽음에 이르는 질문>이라는 작품이다.

 

 

 

교환 살인의 공범자가 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돌아가는 JR 사이쿄선의 전차 안에서 사토시는 생각을 해 봤다. 교환 살인의 공범자들은 서로 신뢰 관계를 구축한 운명 공동체라는 점에서는 부부와도 비슷했다. 아니, 부부보다도 더 끈끈한 인연으로 맺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부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이혼할 수도 있지만, 교환 살인의 공범자들은 헤어질 수 없는 것이다. 헤어진다는 것, 즉 상대를 배신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범죄가 발각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결혼식에서 등장하는 이 표현은 부부보다도 오히려 교환 살인의 공범자들에게 더 잘 어울릴 것이다.            p.232

 

경시청 부속 범죄 자료관, 통칭 '붉은 박물관'은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사건 발생 이후 일정 기간이 경과한 뒤 보관하고, 그것을 조사, 연구 및 수사관 교육에 활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붉은 박물관의 직원은 아름다운 외모의 관장 히이로 사에코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수사 1과에서 좌천되어 온 조수 데라다 사토시 두 명뿐이다. 히에로 사에코는 커리어라는 고위직 경찰임에도 이곳에서 수년 째 근무 중이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인형같이 차갑고 단정한 외모로 천재적인 추리 능력을 가졌지만 타인과의 의사 소통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데라다 사토시는 형사를 천직으로 여겼기에 언젠가는 수사 현장으로 돌아갈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어떻게든 범죄 자료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두 사람은 과거 사건 관련 정보들을 등록해 데이터베이스를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작업을 하는 중인데, 수사 서류를 검토하다 미제 사건의 재수사를 하게 되고, 그들의 활약으로 수십 년 동안 감춰졌던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수록된 다섯 작품 모두 예측 불가능한 반전과 트릭, 치밀한 구성과 복선,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수준 높은 추리 과정도 매우 흥미로웠고, 다섯 가지 사건이 연작 형식으로 이어지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완성도가 뛰어나다. 오야마 세이이치로는 본격 미스터리의 거장으로 <붉은 박물관>은 두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붉은 박물관’은 작가가 영국의 범죄 박물관, 통칭 ‘검은 박물관(Black Museum)’이라 불리는 곳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가상의 범죄 자료관인데,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미제 사건을 다루는 추리 소설은 많이 있어 왔지만, 이렇게 범죄 자료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는 거의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독특한 성격의 관장 히이로 사에코도, 그의 조수 데라다 사토시도 생생하게 잘 구축된 캐릭터라 시리즈로 계속 이야기가 이어져도 좋을 것 같다고 읽는 동안 생각했다. 다행히 이미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 나와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벌써부터 설레이는 마음이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기억 속의 유괴>도 곧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어서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엘러리 퀸 스타일의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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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모자, 피노키오를 줍고 시체를 만났습니다 옛날이야기 × 본격 미스터리 트릭
아오야기 아이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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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에. 자경단장님, 아무튼 전 피노키오의 오른팔과 밤새 같은 침대에 있었어요.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죠?"
"이런 일은 처음이군!"
조제프 자경단장은 오징어 모자 밑의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머리는 빨간 모자의 범행을 증언하지만 오른팔은 무죄를 증명한다? 범행 목격자와 부재 증명의 증언자가 동일하다니,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고!"              p.35~36

 

빨간 모자는 숲 속 깊은 곳에 사는 사냥꾼 아저씨의 집에 쿠키와 포도주를 갖다 주러 가는 길에, 나무로 만든 인형의 팔을 줍는다. 손가락 부분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그것은 인형의 오른팔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여 펜을 쥐어 줬더니 자신은 제페토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피노키오로 학교에 가는 길에 서커스단에 스카우트가 되었는데, 억지로 하기 싫은 공연을 1년 동안이나 하고 있는 중이라며 자신을 구해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빨간 모자는 피노키오의 오른팔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엄지 공연단'이 있다는 람베르소 마을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피노키오의 공연을 보고 돌아온 다음 날, 빨간 모자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가 되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살해된 사람은 서커스 단원인 여우 안토니오였고, 피노키오가 우연한 목격자로 빨간 모자를 범인으로 지목한 거였다. 자, 빨간 모자는 다음날 공연 시작 전까지 안토니오를 죽인 진짜 범인을 데려와야만 자신에 대한 의혹을 풀 수 있다고 한다. 공연장에서 공개 처형될 위기에 처한 빨간 모자는 진범을 밝혀낼 수 있을까.

 

 

빨간 모자를 위협하는 공연단장 엄지 공주, 그리고 빨간 모자에게 도움을 준 거짓말쟁이학 박사 질베르토 폰뮌하우젠 남작, 그리고 빨간 모자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준 피노키오의 팔, 틈만 나면 다투는 수박 장수 할아버지와 가면 장수 할머니...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서 재미를 더해준다. 빨간 모자는 이후 피노키오의 부탁으로 피노키오의 몸통과 왼팔, 두 다리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게 된다. 백설 공주와 난쟁이가 사는 숲 속부터, 온종일 음악을 연주하는 도시 하멜른을 거쳐, 아기 돼지 삼 형제가 늑대를 무찌른 뒤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는 도시 부히부르크에 이르는 이 여정은 동화 속 배경에 미스터리의 트릭을 절묘하게 연결시켜 범죄 사건들의 한복판으로 빨간 모자를 데려 간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쥐를 쫓아내 준 뒤 약속한 보수를 주지 않아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으로 끝이 났던 동화 속 이야기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사이 좋은 아기돼지 삼 형제의 파격적인 변신을 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동화 속 캐릭터들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이 시리즈만의 독창적인 부분이라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될 것이다.

 

 

"백설 공주, 넌 왜 이렇게 빵을 잘 만들어?"
"어릴 때 돌아가신 엄마가 가르쳐줬으니까."
"그럼."
빨간 모자는 검지를 들어 백설 공주의 코끝을 가리켰습니다.
"백설 공주, 네 범죄 계획은 왜 그렇게 허술해?"
백설 공주는 대번에 말문이 막힌 듯했습니다. 그러나 빨간 모자는 백설 공주의 눈빛이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는 걸 놓치지 않았습니다.             p.135~136

 

아오야기 아이토의 '옛날이야기 × 본격 미스터리'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자 '빨간 모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1권과 3권은 일본 전래 동화를 기반으로 했고, 2권과 4권은 서양 동화를 기반으로 했는데, 옛날 옛적.. 시리즈와 빨간 모자... 시리즈를 각각 별도로 읽어도 상관없다. 전작이었던 <빨간 모자, 여행을 떠나 시체를 만났습니다>에서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성냥 팔이 소녀의 동화 속 세계를 변주했었다면, 이번 작품 <빨간 모자, 피노키오를 줍고 시체를 만났습니다>에서는 피노키오, 백설공주,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엄지 공주, 아기 돼지 삼 형제, 브레멘 음악대 등의 작품을 본격 미스터리의 세계로 가져왔다.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가 범죄의 증거가 되고,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이 밀실 살인의 배경이 되는 등 기발한 발상과 동화의 색다른 해석으로 재미를 주었던 전작처럼 이번 작품 역시 본격 미스터리 트릭의 다양한 묘미를 보여준다. 이번 작품에서 빨간 모자는 몸이 조각난 목각 인형 피노키오의 잃어버린 다른 몸 조각들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번에도 갖가지 기이한 사건들을 마주하며 조수 피노키오와 함께 명탐정으로 사건들을 해결한다. 빨간 모자 시리즈의 첫 작품 <빨간 모자, 여행을 떠나 시체를 만났습니다>는 최근에 넷플릭스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영상 버전으로도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아오야기 아이토는 옛날 옛적.. 시리즈와 빨간 모자... 시리즈를 교차로 내고 있는데, 올해 일본에서 시리즈 5권이자 옛날 옛적.. 시리즈 3권과 빨간 모자... 시리즈 3권이 각기 나온다고 하니 국내에서도 빨리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동화 속 세계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살인과 실종, 독살 사건이 벌어지는 색다른 미스터리가 궁금하다면 이 시리즈를 읽어 보자. 동화 속 주인공 '빨간 모자'와 함께 다양한 동화 속 세상을 여행하며 신선하고, 기발한 미스터리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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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작가 생활
존 스칼지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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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제발. 정신줄 좀 잡으시라. 이 한 문장에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네. 하나만 들겠다. 환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작가가 환상을 가져봐야 하나 쓸모가 없다. 자신의 재능, 출판계의 상황,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생에 대해 환상을 가진 작가는 분명 계속해서 실망하게 된다. 현실은 당신의 환상에 전혀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반면, 당신이 잘하는 게 뭔지, 출판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당신의 일반적인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면, 작가로서의 당신의 꿈(책이 정식으로 출판되는 것 포함)을 실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p.152

 

이 책의 원제는 ' You're Not Fooling Anyone When You Take Your Laptop to a Coffee Shop(노트북을 들고 커피숍에 가봤자 아무도 속일 수 없어)'이다. 제목만큼이나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하고, 뼈를 때리는 직언으로 가득하지만, 그만큼 또 너무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노인의 전쟁> 시리즈를 비롯, <상호의존성단> 시리즈 등 20여 년간 수많은 SF 소설을 발표해온 존 스칼지가 2001년부터 2006년 초까지 5년간 자신의 개인 블로그 Whatever에 썼던 에세이를 엮었다. 글쓰기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과 금전적인 부분을 비롯한 작가 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작가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들과 SF에 관련된 이야기를 수록했다.

 

글쓰기를 다루는 책이지만, 글쓰기 방법에 관한 책은 아니라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책은 그보다는 작가들이 다른 작가들과 소통하는 방법, 각기 종류가 다른 글에 대한 다양한 생각, 작가와 출판사, 작가와 독자의 소통 방법, 그리고 작가들의 돈벌이에 대해 극사실적인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 무엇보다 스칼지 특유의 블랙 유머와 촌철살인 멘트들이 재미를 주는데, 작가가 되고 싶어요. 뭘 하면 되죠? 라는 질문에 "이런, 글을 써야죠. 멍청한 양반아" 라고 대답한다던가, 글을 한두 편 팔았으니 이제 본업을 그만둬도 되냐는 질문에 "맙소사, 안 된다. 멍청한 짓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여러분보다 재능은 부족한데 돈은 더 많이 버는 사람은 언제든지 있다. 왜냐고? 인생은(그리고 출판계는) 변덕스럽고 잔인하다"고 하는 식이라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내가 만난 고용 작가 중에는 글쓰기가 거룩한 사명이며 영혼의 표현이라는 등등의 헛소리를 끝없이 토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는 전기요금을 내는 문제에서는 뒷전으로 밀리기 때문이고, 어떤 작가가 '말로만 말고 실제로 보여 줘야' 하는 일을 지금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면 그 일에 대해 따로 지껄일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또는 그래야만 한다. 사실 나는 누가 나에게 글쓰기의 거룩한 사명에 대해 지껄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이 물속에서 흡혈 거머리에 뒤덮인 채 점차 산소 부족으로 새파래져 가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재미있어 할 것 같다. 그렇다. 꽤 그럴싸한 이미지다.                p.284

 

존 스칼지가 들려주는 조언들은 그 어떤 글쓰기 강의에서도 얻을 수 없는 팁들이다. 글쓰기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작가란 글쓰기가 낭만적이고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하지 않아도 어쨌든 써야 하는 직업이라는 경고, 그리고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들이 종사하려는 직업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등 프로 작가 경력이 어느 정도 되어야만 알 수 있는 현실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가감없이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작가의 급여가 낮아지게 만드는 비밀, 작가의 고료가 매우 짠데도 불구하고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 출판계에서 연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쓰는 글의 차이점, 원고를 거절하는 방법 등등 작가와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궁금했던 내용이 가득 들어있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 일반인을 위한 글쓰기 팁'도 있다. 작가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글을 더 잘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이다. 자신이 쓴 것을 소리 내어 읽어보고, 구두점을 언제 찍어야 하는지 공부하고, 문장은 긴 것보다 짧은 게 낫고, '빌어먹을' 철자법을 제대로 배워야 하고, 제대로 모르는 단어는 쓰면 안 되며, 요점을 앞에 배치해야 한다는 등 존 스칼지가 알려주는 10가지 팁들은 작가 지망생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다. 현실의 출판 계약, 작가의 수입, 책에 대한 비평, 불법 복제와 저작권, 작가 워크숍 등 20여 년 전에 쓰인 책이지만, 기술적인 일부분을 제외하고 출판계의 현실이 당시와 다르지 않다는 점도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 준다. 작가를 직업으로 하고 싶다면, 출판계 현실이 궁금하다면, 작가 생활의 실제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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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천개산 패밀리 1~2 세트 - 전2권 특서 어린이문학
박현숙 지음, 길개 그림 / 특서주니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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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이 다 나쁜 건 아니야. 좋은 사람도......"
"시끄러워! 너는 똥 더미 위에서 굶고 살았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고 싶니? 네 주인이 누군지 나는 몰라. 하지만 너를 짧은 줄로 묶어 놓고 밥도 안 주었던 걸 보면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나는 살면서 좋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썩은 음식 쓰레기를 주던 농장 주인, 트럭을 몰고 왔던 그 남자, 다 똑같았어."
나는 목에서 넘어오는 울음을 꿀꺽 삼켰다.         - 1권, p.57

 

최근에 충격적인 뉴스 보도를 본 적이 있다. 경기도 화성에서 최대 규모의 불법 강아지 번식장이 적발됐는데, 그곳에서 심각한 동물학대행위가 일어나고 있었던 거다. 무려 1400여 마리가 있는 불법 개번식장의 사진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믿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행히 보도된 곳의 개들은 모두 구조가 되었지만, 사실 알려지지 않은 곳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만약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방치하고 사육한 인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 끔찍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개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편에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천개산 패밀리>는 초등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수상한 시리즈>의 박현숙 작가가 새롭게 시작하는 시리즈이다. 기존 수상한 시리즈가 아파트를 시작으로, 우리 반, 학원, 친구 집, 식당, 편의점, 도서관, 화장실, 운동장, 기차역, 방송실, 놀이터, 지하실, 교장실 등 일상 속 아이들에게 친근한 장소들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면, 이번에는 천개산에 모여 사는 유기견들의 이야기이다. 천개산 산66번지에는 모두 다섯 마리의 개가 살고 있다. 철창 안에서 냄새나는 음식 쓰레기를 먹으며 살다 그 끔찍한 개 농장에서 탈출한 얼룩이, 어깨가 쫙 벌어지고 덩치도 큰 대장, 길고 긴 하얀 털을 가진 덩치가 작은 바다, 주인이 이사 가 버린 빈 동네에 버려진 진돗개 번개, 길에서 똥 더미 위에 묶여 있다가 탈출한 미소까지 모두 주인에게 버려졌거나 방치되어 있다 탈출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개들이다. 그들은 천개산에서 서로 어울려 살면서 때로는 다투기도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위하며 가족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럼 그 사람도 마을 사람들과 같이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거야? 너무해. 우리가 의심을 받고 누명을 쓰고 있으면 절대 천개산 들개들 짓이 아니라고 우리 편을 들어 주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 사람에게 체온을 나눠 주다가 얼마나 아팠는데. 어쩜 그럴 수가 있어? 먹이를 물고 계곡으로 내려가다가 미끄러져서 다치기도 했단 말이다. 그리고 대장과 번개가 싸운 것도, 번개가 여기를 떠난 것도 그 사람 때문이라고. 은혜도 모르는 사람 같으니라고. 너무 화나.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미소야, 우리가 바보 같은 짓을 한 거 같아."            - 2권, p.35

 

그러던 어느 날 천개산 산 66번지 근처에서 부상을 당한 인간이 발견된다. 모두들 사람에게 상처받고, 배신당한 경험이 있어 인간이라는 존재자체를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니 그냥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거긴 깊고 험한 산속이었고, 그들이 모른 척 하면 산속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개들은 인간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 물론 그 중에는 사람이 싫다고 도와주기 싫다는 개도 있었고, 도와주고 싶어도 어떤 식으로 도와주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개도 있었다. 버림받은 주제에 사람 편을 들다니 한심하다고, 왜 그 사람한테 신경을 쓰냐고 화를 내는 개도 물론 있었다. 그렇게 조난 당한 인간을 두고 서로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모아둔 식량이 사라지고, 개들은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

 

추위와 굶주림으로부터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사람에게 배신 당한 경험이 있으면서도 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느냐는 의견도 모두 말이 되기에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식량을 훔쳐간 것은 누구일까. 그리고 개들은 자신들의 아지트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2권에서는 조난 당한 사람이 헬기로 구조되어 가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인 산아래 예쁜 집들이 모인 전원주택 마을에서 닭과 오리가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떠돌이 들개의 소행이라고 의심할테고, 구조 당한 사람은 천개산에 들개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괜히 사람을 도와주는 바람에 이들은 자신들의 아지트를 옮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사라진 번개를 찾아 다니다가 마을에서 사라지는 닭과 오리 사건의 범인이 혹시 번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마을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누런 개의 거짓말에 속아 큰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천개산 패밀리는 위험에서 빠져 나와 번개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개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위험에 빠뜨렸던 인간들을 끝까지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못하는 마음 약한 존재라는 점이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실제 현실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개들은 자신을 버리고 간 주인을 같은 자리에서 긴 시간 기다리기도 하고,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주인을 찾아 헤매다 사고를 당하기도 하니 말이다. 해마다 명절 연휴나 휴가철에는 반려동물 유기가 크게 늘어난다고 한다.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지는 동물이 최근 2년여간 4백 마리가 넘는다고 하니,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개들의 사연을 그저 허구의 이야기라고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버리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사람과 동물이 함께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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