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돌보다 -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
린 틸먼 지음, 방진이 옮김 / 돌베개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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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자기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해야 하는 사람들, 작은 것 하나라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변하면 길길이 날뛰는 사람들을 좌절시킨다. 삶은 완전하고 완벽한 통제를 허락하지 않는다. 삶은 남쪽 북쪽 사방팔방으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p.33~34

 

아무런 예고 없이, 어머니는 어느 날 중병에 걸렸다. 어머니의 상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어머니를 돕는 올바른 방법인지, 어떤 것을 다르게 또는 더 잘 할 수 있을지, 그 일은 가족 전체를 뒤흔든다. 게다가 어머니의 병은 수천 년 동안 존재했지만 이름이 없었던, 희귀 질병이었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약 11년 동안 상주 간병인과 함께 자신의 아파트에서 지내며, 세 딸들의 돌봄을 받았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자전적 에세이이다.

 

어머니는 여든여섯 살 반이 되었을 때 문제가 있다는 징후를 보였고, 가족들은 어머니가 이상하게 행동한다는 것,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신경과 전문의와의 진료 상담을 예약했고, 의사는 알츠하이머병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MRI를 통해 뇌 영상을 읽는 행위에 1000퍼센트 확신이란 것은 없었다. 이후에 명의라는 내과의를 추천받아 진료를 받았고, 그 의사는 어머니가 '정상뇌압수두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 내린다. 당시에 그 병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는 병이다. 가족들은 그렇게 여러 병원을 전전했고,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동시에 한데 몰려든다.어려운 의학적 문제들, 확신의 부족, 선택지와 가능성이 적거나 없다는 느낌으로 가족들은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힘들었다. 어머니가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거나 예전 만큼 신체, 정신 능력을 회복하기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으니 말이다. 저자는 삶의 일부를 포기해야 했고, 삶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낀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슬퍼하거나 어머니를 애도하지 않았다. 나는 안도감에 마비되었고 피로로 녹초가 되었다. 환희가 아니라 현기증을 느꼈다. 11년이라는 짐, 어머니라는 짐이 떠났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죽었다. 그러나 그 짐, 그 심리적 짐이 완전히 소멸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는 종종 불안해졌다. 내가 처리해야 할 뭔가를 잊어버렸다고 착각했다.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간다. 그러나 내가 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삶은 반사작용으로 가득하다.           p.205~206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린 틸먼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소설가로 '작가들이 존경하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과 어머니, 가족의 내부 역학을 공개하는 것이 매우 낯설고, 불편하고, 혼란스럽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경험을 소설의 재료로 삼을 때는 있지만, 그 경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들어가지는 않기 때문에, 자전적 이야기를 쓰는 데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써야만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는 좋은 딸 역할을 연기했지만 거기에는 내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고 대신 내 양심은 담겨 있었다'라는 문장을 비롯해서, 린 틸먼은 이 책의 곳곳에서 어머니가 싫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 늙고 병든 부모를 돌보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의무였는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사랑보다는 의무때문에 돌봄을 수행하는 이들의 죄책감, 가족을 돌보는 일의 두려움,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노동의 가치, 척박한 노인 의학의 현실... 이 책 속에 담긴 내용들은 나도 언젠가 겪게 될 일이고, 지금도 누군가는 겪고 있는 일일 것이다. 나이 듦과 병듦, 돌봄과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니 말이다. 이 책은 매우 현실적이고 냉철하게, 서늘하고 치열하게 돌봄 노동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부모를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 돌봄 노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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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밀크
데버라 리비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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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초가 널린 바위에 털썩 앉았고, 잉그리트도 앉았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파란 하늘에 떠오르는 파란 연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연이 갑자기 쭈그러지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나는 저 넘실대는 파도와 함께 멀리멀리 빠져나가 다른 삶을 시작하기를 평생을 바라왔다. 하지만 그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어떻게 그 삶에 다다를지는 알지 못했다.           p.72

 

우연히 티비 방송을 보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겠다며 친딸을 협박하는 엄마에 대한 사연이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딸이 보는 앞에서 극단적 시도를 했고, 폭력과 폭언을 했으며, 알코올 중독과 약물 오남용을 일삼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엄마와 이혼한 아빠도, 엄마의 가족인 이모나 외할머니들도 모두 손놓고 있는 상황에 이십대 초반의 딸 혼자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하고 있었다. 딸이 엄마로부터 오는 연락을 끊지 못하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직 고등학생인 남동생에게 엄마가 해코지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딸의 입장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엄마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간에 어른으로서 무책임했고, 자식에게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과 말들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 사연을 보면서 데버라 리비의 소설 속 주인공 소피아와 그녀의 어머니 로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학위 취득을 코앞에 두고 있었음에도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헌신했지만 상황은 무엇 하나 나아지는 게 없었고, 자신의 일상들을 모두 희생했으나 누구 하나 만족스럽게 웃을 수 없는 나날들이라니... 이렇게 모순으로 점철된 관계가 또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다리 마비 증상은 사실 걸을 수 있지만 심리적인 이유로 걷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고, 유명 클리닉에 가보지만 의사의 진단 방식과 처방은 이해할 수 없고, 급기야 로즈는 고통을 호소하며 다리를 잘라버리겠다고 억지를 부리는데... 소피아는 자신을 붙드는 그 관계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 관계란 것이 쉽게 끊어낼 수도, 모른 척 할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마냥 사랑할 수도, 훌훌 털어낼 수도 없는 관계, 누구나 한번쯤 겪어 봤거나 들어봤을 법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되는 그런 작품이었다.

 

 

 

나는 괜찮지 않다. 전혀. 꽤 오랫동안 괜찮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얼마나 좌절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더는 회복할 자신도 없는 것이, 거대한 삶을 바라면서도 바라던 일에 도전할 만큼 담대하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도 말하지 않았다. 별자리에 나도 그녀처럼 영락한 인생으로 끝날 거라고 쓰여 있을까 봐, 그 두려움 때문에 그녀가 제 다리로 세상과 소통하는 일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쓰고 있지만, 그녀의 척추가 잘못되었을까 봐 또는 그녀에게 중대한 질병이 있을까 봐 죽도록 겁난다는 이야길 하지 않았다.           p.223

 

데버라 리비의 자전적 에세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살림 비용>을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유년 시절부터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고군분투했던 여성이자 작가로서의 삶에 대해, 그리고 사회가 여성, 특히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망상과 가해 온 억압들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과 사유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것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데버라 리비의 장편 소설이다. 2016년 맨부커상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던 이 작품은 몇 년째 종잡을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하며 제대로 걷지 못하는 어머니와 그를 간호하기 위해 일상을 포기한 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병원을 전전하며 여러 검사를 했음에도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지만 어머니는 늘 고통을 호소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곁에서 머물고 있는 딸은 평생 어머니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게다가 그런 딸에게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통통하고 게으른 데다 고령의 자신에게 얹혀살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어머니라니. 모녀간의 묵은 갈등과 억압된 열망, 상처와 애증은 결국 파국으로 향하게 된다. 어머니가 탄 휠체어를 도로 한가운데로 밀고 가서는, 그곳에 남겨놓고 떠나버린 것이다. 멀리 대형 트럭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어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의사가 말한다. "그게 모든 슬픈 어머니의 자식들이 두려워하는 일이죠. 자식들은 매일 자문합니다. 왜 어머니는 살아 있는데 죽어 있는가?"라고. 슬픔과 비탄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고, 날카로우며, 위트와 뭉클함도 잊지 않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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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전하는 도시락 가게 코하나
오치아이 유카 지음, 유보라 그림, 김지영 옮김 / 다산어린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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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시락 가방을 열고 보따리를 풀었다. 오늘의 도시락은 샌드위치와 국 통에 담긴 미네스트로네다. 샌드위치는 빵이 한쪽만 구워져 있어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니 맛있었다. 미네스트로네에는 깍둑썰기 한 채소가 듬뿍 들어 있어서 색깔로 예뻤다. 쪽지에는 '오늘도 도와줘서 고마워요. 11월에 들어서 조금 쌀쌀해졌으니, 따뜻한 음식을 준비했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교환 도시락' 중에서, p.67~68

 

나는 14년간 살아온 인생에서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게임 센터에 놀러 갔다가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갑자기 수상한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나를 인질로 잡은 것이다. 그대로 나는 게임 센터의 지하 창고로 끌려왔고, 인질범은 경찰에게 돈을 요구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인질범의 요구로 도시락이 도착했고, 도시락을 가져온 것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젊은 남자였다. 도시락 가게 <코하나>의 점장이라는 그는 인질범 몰래 나에게 재빨리 속삭이고 돌아섰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이었다. 무슨 말일까 의아해하는 사이, 인질범은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땀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것 아닌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문밖으로 뛰쳐나가 무사히 구출된다. 그런데 도시락은 자신도 같이 먹었는데, 왜 범인만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걸까.

 

 

리호는 우연히 본 SNS의 게시물을 보고 깜짝 놀란다. 바로 자신이 남편을 위해 만든 도시락 사진이었던 거다. 아내표 도시락이라는 태그로 올려진 게시물들은 계란말이가 탔다든지, 국물이 흘러서 샜다든지, 너무 달다는 식의 불평 불만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시락을 만들 때 참고하려고 SNS에서 요리 사진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 계정이 남편의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매일 밤, 시간을 들여 반찬 준비를 하고, 아침형 인간도 아닌데 애써 일찍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며 요리했던 도시락들인데... 그렇게 만들어 준 도시락을 SNS에 올리고, 게다가 무시하는 듯한 글까지 덧붙이다니 너무 괘씸했다. 어떻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리호는 남편에게 도시락으로 복수를 하기로 마음 먹는다. 리호는 남편에게 제대로 복수할 수 있을까? 이들 신혼 부부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야기를 들은 점장은 “흐음.”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에는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점장이 보인 그 표정에, 리호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좋아요, 복수해 볼까요.”
점장은 두 손을 딱 맞부딪치더니 리호를 향해 웃었다. 기분 탓인지, 그 미소가 사악해 보였다.          -'복수 도시락' 중에서, p.133

 

이 책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로 도시락 가게 <코하나>를 배경으로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이 맞이하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도시락 빨리 먹기 시합에서 이기고 싶어 하고, 자신에게만 이상한 맛의 주먹밥을 주는 야구부 매니저에게 미움받고 있는 것 같다고 고민하고, 엄마가 만들어 준 종말 도시락을 먹으며 곧 지구가 멸망할 거라는 메모를 읽는 아이도 있고, 어느 날 도시락 가방이 바뀐 것을 계기로 교환 도시락을 하게 되어 매일 점심 시간만 설레이며 기다리는 아이도 있다. 결혼을 앞둔 친구를 위한 도시락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응원하는 도시락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과 함께 거짓말쟁이 도시락, 최애 도시락, 심장 저격 도시락, 벚꽃놀이 도시락, 츤데레 도시락, 아이돌 도시락 등등 맛도 효력도 특별한 <코하나>의 도시락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또한 입 속에서 밥이 부드럽게 뭉개지면서 큼직한 속 재료가 얼굴을 쑥 내미는 주먹밥, 씹으면 육즙이 쭉 흘러나오는 닭튀김, 부드럽고 달콤한 꽃 모양 계란말이 등 음식에 대한 묘사를 읽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 분량이 짧아서 아이들이 읽기 쉽다는 점도 장점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오치아이 유카는 제57회 고단샤 아동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일본 작가이다. 이 책은 저마다의 고민과 사연을 가진 손님들을 위해 특별한 도시락을 만들어 주는 도시락 가게를 배경으로 다양한 사건들이 소소하게 펼쳐지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국내 출간 버전에서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삽화를 그린 유보라 작가의 포근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더해져 더 사랑스러운 책이 만들어졌다. 이상한 과자 가게 시리즈를 좋아했다면 또 다른 분위기의 도시락 가게 코하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위험에 빠진 상황에서 절호의 기회를 만드는 맛이 궁금하다면, 차일수록 맛있어지는 맛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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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리 테일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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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에서 뭘 보았는지 아빠에게 얘기하고 싶은 충동을 조금이라도 느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우선 보디치 씨가 비밀 엄수를 신신당부했다. 보디치 씨의 주장에 따르면 "그 금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훔친 게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그는 그걸 찾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뜻이라고 대답하고 끝이었다. 나는 좀 더 자세히 알기 전까지 보디치 씨의 말을 고스란히 믿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나는 17살이었고 이렇게 짜릿한 사건은 내 평생 처음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래서 나는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p.147~148

 

11월의 어느 토요일, 엄마는 저녁에 먹을 치킨을 사오겠다고 집을 나섰다. 7살이던 찰리는 아빠와 함께 대학 미식축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엄마는 영영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치킨을 사서 다리를 건너던 엄마는 언덕을 내려오던 트럭에 치여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빠는 장례식 이후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고, 이후로 계속 조절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 여의 시간이 흘렀고, 알콜 중독으로 인해 아빠는 결국 다니던 보험 회사에서 잘리고 만다. 다달이 갚아야 하는 대출금은 여전히 어마어마했고, 찰리는 곧 은행에 집이 넘어가서 노숙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다 개학을 앞둔 어느 날, 찰리는 아빠가 술을 끊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어떻게든 보답하겠다고 말이다.

 

몇 년 뒤, 아빠는 전 직장동료의 도움으로 알코올중독자 모임에 다니기 시작했고, 드디어 술을 끊고 조그만 사무실을 하나 내고 손해사정사로 다시 일을 하게 된다. 찰리는 열심히 공부했고, 학점을 잘 받았으며, 미식축구와 야무를 하며 모두 학교 대표 선수로 뛰었다. 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찰리는 하느님과 한 거래를 절대 잊지 않았다. 그리고 17살이었던 어느 날, 야구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개가 짖는 소리와 누군가의 외침을 듣게 된다. 그 집으로 달려가 노인의 목숨을 구한 찰리는 늙은 대형견과 단둘이 사는 괴짜 노인 보디치와 비밀스러운 우정을 맺게 된다. 보디치의 집은 '사이코 하우스'라 불리며 동네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던 곳인데, 보디치 씨 역시 성질이 좋은 편은 아니라 첫인상이 별로였다. 하지만 오래 전 하느님과한 거래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찰리는 그를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반려견 레이더에게도 특별한 애정이 생기게 된다. 보디치 씨는 집안 어딘가에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기색에, 비밀스러운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호기심 많은 10대 소년이었던 찰리에게는 오히려 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내가 정말 개의 기분에서 봤을 때 이미 살 만큼 산 노견을 위해 목숨을 걸고 아빠와 학교가 기겁할 만한 문제를 일으키려는 건지 자문해 보았다. 답은 '그렇다'였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경이로움, 신비로움 때문이었다. 내가 다름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발견했다. 초록색 탑이 있는 도시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 심장부에 커튼 뒤에 숨어서 말을 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고그마고그라는 끔찍한 괴물이 있다는 것만 다를 뿐 그곳이 정말로 오즈의 나라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해시계를 찾아내 실제로 보디치 씨가 얘기한 그런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가장 큰 이유는 개였다. 나는 레이더를 사랑했고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p.335

 

보디치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집을 비롯해 엄청난 유산을 모두 찰리에게 남긴다. 그리고 찰리는 그가 남긴 녹음 테이프를 통해 보디치 씨 집의 뒷마당에 동화 속 세계와 통하는 우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디치 씨의 나이는 사실 120살이었고, 동화 속 세계에 다녀오고 몇 년 뒤 40살쯤 된 젊은이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도 말이다. 찰리는 그의 말을 듣고 45구경 총을 꺼내 들고 그곳으로 향한다. 죽은 벌레들을 흩어져 있는 그곳에 지름이 1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구멍을 널빤지와 콘크리트 블록이 덮고 있었다. 그 동화 속 세계에 있는 해시계가 장수의 비결이었다는 걸 알게 된 찰리는 노견이 되어 살날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는 개 레이더를 그곳에 데려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레이더를 살리기 위해 동화 속 세계에 뛰어들게 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 펼쳐질 테니, 2권도 어서 빨리 읽어봐야겠다.

 

이 작품은 스티븐 킹이 처음 쓴 '동화'라는 점에서 읽기 전부터 호기심을 자아냈다. 제목에 걸맞게 <잭과 콩나무>, <오즈의 마법사>, <아기돼지 3형제> 등 다양한 동화들을 오마주했지만,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그런 동화 속 분위기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오직 스티븐 킹만이 쓸 수 있는 동화 속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위기에 빠진 세계와 공주를 구하는 왕자’라는 동화적인 클리셰와 오컬트적인 공포를 배제한 영웅 서사담을 보여주지만, 스티븐 킹 특유의 오싹한 서스펜스와 스릴 넘치는 이야기로 버무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매력적이고, 특별한 동화 서사를 만날 수 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반려견을 살리기 위해 우물 속 동화의 세계로 뛰어들며 겪게 되는 모험담은 스티븐 킹 특유의 페이지터너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들었다. 곧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하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작품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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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페이지 저자, 송섬별 역자 / 반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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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이란 사회의 기대에 깔끔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뜻이다. 선을 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미리 쓰여 있던 완벽한 여주인공의 여정대로.... 나는 어머니가 할 수 없었던 일이, 탐험할 수 없었던 세계가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해 본다. 그런 제약들이 어머니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도. 내가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풀어내야 했던 온갖 일들 속에서도, 그 어떤 갈등, 또는 거리를 느낀 순간에조차,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p.51~52

 

<주노>, <인셉션>, <엑스맨> 시리즈의 배우 엘리엇 페이지의 회고록이다. 그는 2014년 성소수자청소년을 위한 컨퍼런스 연설에서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해 큰 반향을 불러왔고, 2020년 12월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커밍아웃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트랜스젠더 배우가 되었다. 그는 겨우 여섯 살 때 어머니에게 묻는다. 남자가 될 수 있냐고. 맥도날드에서 해피밀을 주문할 때 남아용 장난감을 갖겠다고 우겼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녔으며, 액션피규어를 좋아했다. 왜 자신이 남자가 아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에게 상상력은 생명줄이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배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연기를 시작하고 배우 생활을 했던 시절을 거쳐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놀랄만큼 솔직한 글들이 이어진다. 다른 모든 이들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앞세워, 더 이상 까다로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삭제를 허용하고, 환멸에 찬동하는 삶이란 어떤 건지 알게 되면서, 그가 스스로에게 충분히 귀를 기울이게 될 수 있기까지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이해하게 된다. 긴 세월 동안 겪어온 혼란과 고통, 수치심과 취약함, 몸에 대한 불편감, 할리우드라는 산업 안에서 ‘여배우’로서 강요받은 ‘여성스러움’, 가족으로부터의 배제, 두 번의커밍아웃... 놀랄만큼 솔직한 글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의 다양한 경험을 쓰고, 읽고, 나누는 행위에 대해서...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들어 준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편하고 수치스러운 옷을 상상해 보라. 피부 속에서부터 몸을 뒤튼다. 너무 딱 붙어서 몸에서 벗겨 내고, 찢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지나간다. 그런데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 고통 없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생각하면, 수치심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홍수처럼 쏟아져 나간다. 그 목소리가 맞았던 거다. 너는 그런 수치심을 느껴 마땅해. 너는 혐오스러운 존재야. 너는 너무 감정적이야. 너는 진짜가 아니야.           p.288

 

현대사회에서 자존감을 지켜내면서 살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할 수 없음에도 완벽하려고 하고, 억지로 괜찮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한테만 엄격하게 굴곤 한다. 이 책을 읽으며 ‘트랜스젠더’라는 관념 자체를 넘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 인생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지 말이다. 퀴어의 삶을 다룬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여전히 사회적 인식을 넘어서서 자유롭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퀴어를 비롯한 소수자와 약자들의 서사는 언제나 고통스럽고, 힘겹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런 이들을 지지해준 우정과 사랑의 힘이 언제나 존재한다. 엘리엇 페이지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의 다양한 경험을 쓰고, 읽고, 나누는 행위는 우리를 침묵시키려는 이들에게 맞서기 위한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 연대의 힘을 위해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누군가의 정체성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방향에 대해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것이 타인의 기대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굽어지고 틀어지는 그 여정의 끝을 향해 가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커밍아웃을 한 뒤, 충격적이게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내 삶은 나아졌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절벽 끝에 서 있는 것 같더라도, 거기서 눈을 감고 걸어 나오는 순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엔 그렇게 많은 끝과 시작이 있다. 우리의 삶은 결국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나답게 산다는 건 어떤 건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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