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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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가 겨울에 어디 가는지, 기러기의 음악이 무슨 뜻인지도 배웠다. 시처럼 온화한 알도 레오폴드의 단어들로부터 생명이 응축된 토양은 무엇보다 풍요로운 지구의 자산이라는 사실도 배웠다. 습지의 물을 빼면 그 너머 수십 킬로미터에 걸친 땅이 메마르고 물길 따라 살아가는 식물과 동물이 죽어버린다는 것도 알았다. 어떤 씨앗들은 바짝 마른 흙 속에서 잠을 자며 수십 년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물이 다시 집에 돌아오면 흙을 뚫고 힘차게 솟아올라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도 알았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자연의 경이와 실제 삶의 지식, 누구나 알아야 하는데, 버젓이 주위에 노출되어 있는데 씨앗처럼 은밀하게 숨어 있는 진실들.   p.141

여섯 살 카야는 다섯 아이 중 막내였고, 언니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이들은 비좁고 조잡한 판잣집에 바글바글 끼어 살았는데, 어느 날 카야는 엄마가 한 켤레밖에 없는 외출용 신발을 신고 작은 여행용 가방을 들고 걸어 나가는 걸 본다. 바로 손위 오빠지만 일곱 살이나 나이가 많은 조디가 집에서 나와 카야에게 말한다. 엄마는 돌아오실 거라고. 엄마들은 자식을 두고 가지 않는다고. 원래 그렇게 못한다고. 하지만 엄마는 그날 이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가 떠나고 몇 주에 걸쳐서 큰오빠와 언니 둘도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다 도망가버린다. 마지막 남은 형제인 조디 조차 아버지한테 심하게 맞은 어느 날, 더는 여기서 못 살겠다며 카야에게 조심하라고 말하고는 떠난다. 그렇게 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에 가족들이 모두 불뿔이 흩어지고, 여섯 살짜리 여자애 하나가 홀로 남겨진다.

 

이야기는 야생에 남겨진 어린 소녀가 대자연의 동물처럼 홀로 서는 법을 배워가는 성장의 플롯과 17년 후 벌어진 살인 사건의 미스터리 플롯으로 교차 진행된다. 카야가 여섯 살이던 1952년부터 차곡차곡 진행되는 시간과 1969년 마을의 인기 스타 체이스 앤드루스가 해변의 습지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나서 사람들의 의심이 습지에서 홀로 살아남은 카야에게로 향하는 과정이 동시에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는 진행되면서 점점 매혹적인 로맨스소설이 된다. 야성적이지만 아름다운 카야, 남성적인 매력을 지닌 체이스, 그리고 습지와 생물학에 관심이 많고 다정한 테이트, 이들 세 남녀의 로맨스 또한 잠시도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특히나 다양한 생명이 숨 쉬지만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가혹한 환경인 습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 너무도 아름다운 묘사와 밑줄 긋고 싶어지는 문장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카야는 논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구름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곤충 암컷은 짝짓기 상대인 수컷을 잡아먹고,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포유류 어미는 새끼를 버리며, 많은 수컷이 경쟁자보다 더 잘 파정하기 위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방법들을 고안해낸다. 생명의 시계가 똑딱똑딱 돌아가는 한, 천박하건 무례하건 아무 상관없다. 카야는 이것이 자연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그저 모든 위험요소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창의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인간이라면 물론 그보다는 훌륭하게 행동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p.229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해온 한 생태학자가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출간한 첫 소설이다. 그리고 미국 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뱅크스의 해안 습지를 배경으로 한 소녀의 성장담은 미국 출판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아마존 독자 리뷰 수가 12,000개를 넘어서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와 아마존 판매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고, 결국 올해 3100만 부 판매로 밀리언셀러에 등극했다. 계기는 미국 도서 업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헬로 선샤인 북클럽' 운영자이자 할리우드 스타인 리즈 위더스푼이 이 책을 발굴해 추천작으로 소개했기 때문인데, 그 이후로 놀라운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 것은 바로 이 작품이 가진 힘 때문일 것이다.

 

작가인 델리아 오언스는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연구 성과를 정리한 논픽션 세 편으로 이미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친 학자이다. 그러니 미국 남부 습지의 비현실적인 풍광, 나뭇가지마다 유령처럼 걸린 스패니시 모스와 무른 흙, 드넓은 늪과 못에 떠다니는 물풀들. 호소와 늪을 지나 개펄과 바다로 이어지고,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고 섞이는 습지에 대한 이해와 묘사는 작가가 평생을 관찰하고 연구해 온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단단한 땅에 발붙이고 사는 평범한 이들에게 습지는 재빨리 메워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들어야 할, 미완의 지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기에 배척당하며, 익숙지 않기에 거부당하는 습지라는 환경을 야생에 버려 저 홀로 서기를 해야 했던 한 소녀의 삶에 이입해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을 향한 경이로운 찬가이자, 가슴 저미는 러브스토리, 감동적인 성장소설이 되었고, 반전을 거듭하는 미스터리와 땀을 쥐게 하는 법정 스릴러이기도 한 매혹적인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평생을 야생과 벗 삼은 생태학자가 길어낸 이야기의 힘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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