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힘 - 영원한 세일즈맨 윤석금이 말한다
윤석금 지음 / 리더스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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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는 개인의 역량이 최대화되었을 때 성공할 수 있는 분야다. 거기에 지식, 정보, 경험, 언변, 호감도가 혼합되어야 성과를 높일 수 있다. 그렇다고 세일즈맨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해서는 곤란하다.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회사의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탁월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회사가 아무런 뒷받침도 하지 않고 모든 걸 세일즈맨 개인의 능력에 떠맡기면 지속적인 성과를 유지하기 어렵다.

오랜 시간 기업을 경영해 온 한 회사의 수장이 자신은 언제나 '사람의 힘'을 믿고 이를 활용해왔다고 한다는 것부터 뭔가 뭉클한 부분이 있었다. 사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나. 하지만 직장 생활을 몇 년 만 해보았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작 회사에서 중요한 게 여겨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윤석금 회장이 운영하는 웅진그룹에 다니는 사원들은 참 행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문화, 학벌, 고향, 성별로 차별을 두지 않는 공정한 인사제도와 윤리적이고 투명한 기업 경영으로 쌓은 노사 간의 신뢰를 통해 사람이 가진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회사란 절대 흔치 않으니 말이다. 이 책은 윤석금 회장이 오랜 사업 경험을 토대로 영업과 세일즈에 대한 애정과 사람 경영을 하며 얻은 정신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제는 부모에게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는 흙수저라는 표현이 익숙해진 사회,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끔찍한 뉴스 보도가 이어지고 있는 헬조선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취업이란, 그리고 꿈을 이루는 것이란 희망보다는 좌절에 가까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윤석금 회장의 사례는 엄연히 흙수저도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금수저가 될 수 있고, 위기와 좌절을 겪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과서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영어로 된 백과사전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한 세일즈맨이라는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회사를 설립해, 창업 10년 만에 최고의 교육문화 기업으로 성공시킨 윤석금 회장. 게다가 건설 사업 실패로 기업회생을 신청했을 때도 그가 믿는 '사람의 힘'으로 14개월 만에 기업회생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기업 운영의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일방적으로 지시만 하는 리더 밑에서 어떻게 조직원의 창의력과 조직의 경쟁력이 자랄 수 있겠는가. 리더가 새로운 의견이나 정보를 무시한 채 자신의 경험만을 결정의 잣대로 삼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훌륭한 리더는 아랫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접하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과 종합해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가 사업을 하면서 스토리를 많이 활용해왔다는 부분이었다. 경쟁 제품과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고, 고객이 그 제품에 특별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모두 '스토리의 힘'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알려주는 훌륭한 스토리텔링을 위한 10가지 법칙으로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다. 첫마디에서 호기심을 끌어야 하고, 진실해야 하며, 제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소재가 풍부해야 좋은 스토리가 나오며, 무엇보다 쉬워야 하고,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법칙들은 영업이라는 경험이 전혀 없는 내가 읽기에도 마음을 이끄는 대목들이 많이 있었다. 현재 세일즈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매력적인 영업인이 되는 10가지 방법, 실무자들을 위한 효과적인 코칭 10계명,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리더가 해야 할 일 다섯 가지, 임원이 꼭 지켜야 할 20가지, 팀장 이상의 관리자들이 지켜야 할 사항 20가지 등등... 실제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거나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실용적인 정보들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이 책을 그룹 회장이 자신의 성공담을 들려주는 자서전 식으로 보면 안 된다. 이 책은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도, 실제 사회 생활을 하며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오래 전에 먼저 겪은 사회 선배의 경험담으로 읽어야 한다. 웬만한 자기 계발서 못지 않게 밑줄 긋고 싶은 대목도 많았고, 경영과 영업에 대한  성공 사례들이 담겨 있어서 흥미로웠다. 딱딱하고, 교과서적인 정보만 나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실제 경험을 통한 드라마가 함께 있는 이야기라 술술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도 장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기업의 그룹 총수가 이렇게 사람 냄새나는 인물일 수도 있다는 어떤 사회적인 편견을 깨주는 책이기도 해서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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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 시곗바늘 위를 걷는 유쾌한 지적 탐험
사이먼 가필드 지음, 남기철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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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가 우연인가, 아니면 모든 일은 정해져 있는 것인가? 우리가 만든 물건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것인가? 30초 일찍 경기장을 나섰다면, 좀더 세게 페달을 밟아 한 바퀴만 더 빨리 달렸다면.... 나를 수술했던 의사는 일찌감치 귀가하여 아내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 연결되어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시간 탓이 아니었다. 각자 스스로 결정한 일들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조정되어 온 현대적 스타일의 배합이다. 나는 이러한 배합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매번 새 책이 한 가득 도착할 때마다 생각한다. 왜 하루는 스물 네 시간밖에 안 되는 걸까. 책을 구입할 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도 같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항상 시계에 맞춘 삶을 살고 있으며, 좀처럼 오랫동안 시간의 여유를 갖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처럼 하루 24시간 중 많은 시간을 활용하려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까 고심하기도 하고 말이다. 과거에는 수동적으로 시간을 소비했던 사람들이 요즘에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시간을 이용한다. 시간이 사람들의 일상사를 지배하는 모습을 초창기 시계를 만든 장인들이 보았다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사이먼 가필드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인간들의 시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시간 측정, 시간 통제, 시간 판매, 시간에 관한 영화 만들기, 약속 시간 이행, 시간의 불멸화, 그리고 시간의 의미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들이 등장해 지난 250년간 시간이 어떻게 우리 일상에 파고들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최근에 시간이라는 복잡한 관념을 고대의 문명사를 통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현대사를 거의 반세기 동안 연구해온 역사학자가 저자였던 터라 굉장히 흥미로운 역사서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반면 이 책은 시간을 비현실적인 존재가 아닌, 우리 삶의 주인공, 때때론 우리 가치의 유일한 척도가 되는 실질적인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더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느끼는 그런 감각에서 지나치게 감아버린 시계태엽처럼 팽팽하던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시간에 관한 모든 것이 뒤집히는 경험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새 역사를 쓰기 위한 새롭지만 혼란스러운 달력을 만든 사례를 소개하면서, 숫자가 10시까지만 적혀 있는 벽시계도 등장하는 등 시간 흐름의 방향을 바꾸려는 프랑스의 오랜 전통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따라 각각 다른 시간으로 공연되는 점을 보여주면서, 예술에 절대성이란 없으며 인간의 감정은 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그날의 그 중요한 시간에 버넷은 라이카 카메라의 필름을 갈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사용하던 라이카는 필름을 끼우기가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카메라였다. 버넷 기자도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비행기와 시커먼 연기를 뚫고 뛰어오는 베트남 사람들을 보았다... '한 순간에...., 닉 우트가 정치와 역사를 초월한 장면을 포착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전쟁의 공포를 상징하는 장면이지요. 사진은 시간과 감정 등 온갖 요소를 포착하며 절대 지워지지 않습니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기차가 대륙을 가로지르기 시작하면서 기차 사고를 면하려 표준시간을 채택하게 된되면서 어쩔 수 없이 시간에게 우선권을 내주었던 사례도 있었고, 저장 장치의 용량 한계로 인해 대부분의 앨범이 재생시간 70분 내외로 정해진 기준에 맞춰서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우리가 항상 시간이라는 것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거기다 현재를 잡아두는 사진기자, 영화 속 장면들로 24시간을 표현한 영화감독에게서는 시간의 새로운 해석을 엿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들의 사례가 너무도 다양하고 무궁무진해서, “책 속에 들어있는 거대한 시간박물관이라는 표현이 너무도 와 닿는 느낌이었다. 철학적 개념도 과학 이론도 없이 오감으로 시간을경험하는 것은 오로지 사이먼 가필드라서 가능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읽을 거리들이 풍부해 너무도 재미있는 시간 여행이었다.

자동차 조립 라인에서부터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직접 시계 제조회사 작업실에서 시계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까지 등장하고 있다. 거기다 시계 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스위스의 시계는 대체 무엇이 다른지, 시간에 대한 강박 관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운동 선수들의 사례와 어떻게 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전략까지 수록되어 있다. 시간이라는 테마가 얼마나 폭넓은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지에 대한 그 결정체라고 느껴지는 이 책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금방 이야기에 빠져들 정도로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어 누구라도 부담 없이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야말로 제목처럼 '시곗바늘 위를 걷는 유쾌한 지적 탐험'을 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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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7번째 기능
로랑 비네 지음, 이선화 옮김 / 영림카디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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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죽었어요."

"하지만 누가 그를 죽였다는 겁니까?"

"시스템이죠. 당연히."

푸코가 사용한 '시스템'이라는 단어는 바야르가 막연히 품고 있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기호학자이자 문예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 그는 타고난 관찰자이며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날은 이런 저런 생각들과 근심들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걷고 있었다. 바로 그 덕분에 사무실까지 불과 몇 십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트럭에 부딪히고 만다. 1980 2 25일 오후, 그렇게 롤랑 바르트는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결국 그렇게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것은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저자인 로랑 비네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그게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다면? 사고 직전 롤랑 바르트가 괴력의 비밀문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세상을 뒤집을 만한 위력을 가진 문서였다면? 그렇다면 과연 누가 롤랑 바르트를 죽였을까. 라는 질문에서 이 작품이 시작된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정보국 수사관 바야르 경위가 파견되고, 그는 롤랑 바르트의 주변 인물들 탐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바르트의 죽음과 연루된 '실존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의 대가인 미셸 푸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해체주의를 주창한 자크 데리다, 기호학자이자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해서 실제 언어학자와 철학자, 작가, 비평가 등이 등장해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당연히 바야르 경위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거의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 대다수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겠다. 기호학이라니, 그 이름만으로도 어쩐지 뜬구름 잡는 듯 실체가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학문처럼 들리지 않나. 나 역시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이라는 저서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상이나 이론 체계는 전혀 알지 못했던 평범한 독자이기에 초반을 견뎌내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주요 인물들이 떠들어내는 어려워 보이는 그 이론들을 전부 이해하지 않아도 이 소설을 즐기는데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그저 중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저는 압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실마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저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작가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애쓰며 이 문제에 관해 사람들이 쓰는 모든 글을 읽으려고 애쓰며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 혹은 알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모든 진실을 알아 내려고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로랑 비네는 인상적인 데뷔작 <HHhH>이후 5년 만에 두 번째 작품으로 이번 작품을 내놓았다. <HHhH> 역시 역사 속 하이드리히 암살작전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에 대해 그리며 기존의 그 어떤 이야기와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소하고 낯설게 역사를 그리는 작품이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고증하는 소설도 있고, 실제 일어난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소설도 있고, 왜곡까지는 아니지만 역사적 진실이라는 벽을 교묘히 우회하는 역사 소설도 있다.' 하지만 로랑 비네는 자신이 역사를 픽션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며, 매 순간 모든 장면이 실화라는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 날 수 있게 글을 쓰고자 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래서 <HHhH>에서는 대놓고 작가의 시선이 개입되는 부분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작가 노트와 소설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 구성이었는데, 이번 <언어의 7번째 기능>에서도 중간 중간 그런 부분이 있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다음 장에서 '이 이야기에는 맹점이 있다. 이야기의 시발점이기도 하다'라고 단언하며 문제의 그 날에 대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실존 인물들은 절대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소설 속에서는 언제든 끄집어내어 밝혀낼 수 있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렇게 다혈질 수사관 바야르와 풋내기 기호학자가 20세기 최고의 지성들 사이에서 롤랑 바르트의 죽음과 숨겨진 괴문서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이 작품은 일반적인 형태의 스릴러,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굉장히 지적이고, 당대 최고 지성인들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당돌함과 수수께께를 풀어가는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호학과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동안 만나본 적 없는 독특한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나 유명한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팩션이 또 있었나 싶을 만큼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작품이니,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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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보이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박현주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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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흑인 소년이 운동장으로 걸어 들어온 순간, 이언은 무언가 바뀌는 느낌을 받았다. 지진이 나면 이런 기분일까, 땅이 재배치되면서 믿을 수 없게 변했다. 학생들은 거의 1년을 함께하며 무리를 확고히 짓고 지도자와 추종자의 위계를 이루었다. 그 조직은 원활히 굴러갔다. 한 소년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뒤흔들기 전까지는. 단 한 번 공을 어마어마하게 멀리 차고, 단 한 번 소녀의 뺨을 만진 것만으로 질서가 바뀌었다.

1974년 워싱턴 교외의 한 초등학교. 백인 아이들로 가득한 그곳에 검은 피부를 가진 소년이 전학을 온다. 아버지가 가나 외교관인 그 소년의 이름은 오세이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흑인 남자애라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반응인 것에 반해, 교내 최고의 인기 여학생인 다니엘라는 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오세이는 자신을 ''라고 부르라고 했고, 다니엘라 역시 친구들 모두 자신을 ''라 부른다고 했다. 그 단순한 유대 덕분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디는 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힘으로 아이들을 지배해온 이언 역시 새로운 전학생의 존재를 금방 알아본다. 이언은 가장 키가 크지도, 가장 빠르지도 않았고, 운동을 제일 잘하는 것도, 공부를 잘하지도,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있는 아이도 아니었지만, 가장 계산적이고 가장 교활한 아이였다. 새로운 상황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고, 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꿀 줄 아는 아이였다. 그래서 늘 운동장을 지배했고, 자기 영역에 들어선 새로운 사람의 존재는 늘 바로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이언은 디가 오와 금방 가까워지는 걸 보고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흑인 소년과 금발 소녀의 우정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으면서, 그렇게 그들의 아주 길고도 끔찍한 하루가 시작된다.

 

이언은 더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슬슬 들었다. 독은 효과를 보이고 있었고, 이언은 이제 뒤로 물러나서 퍼지는 걸 구경만 하면 되었다. 그저 초연한 척 보이도록 조심하면서 관련이 있다는 걸 부인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이제 홈런을 차 줄 거야. 내가 이곳을 얼마나 확실히 지배하는지 똑똑히 보여 주지.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는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현대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자신만의 문학관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쓰는 기획이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주자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원작자 트레이시 슈발리에이다.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셰익스피어 전성기의 대표작인 <오셀로>이다. <오셀로>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선정적이고 격정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베니스의 무어인 오셀로가 이아고가 꾸민 계략에 의해 죄 없고 고결한 자신의 젊은 아내 데스데모나를 냉혹하게 살해하는 이야기는 트레이스 슈발리에에 의해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70년대 워싱턴의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좀 더 색다르고 신선하게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오셀로는 가나 출신의 소년 오가 되고, 데스데모나는 미국인 소녀 디, 책략가 이아고는 교활한 소년 이언이 되고,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는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소녀 미미가 된다. 이렇게 오셀로의 인물과 플롯을 고스란히 가져왔지만, 이 무시무시한 플롯이 초등학생들의 우정과 질투, 사랑이라는 관계로 변주되면서 독특한 재미를 발산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보다 훨씬 더 술술 쉽게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는 짧은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17세기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그것은 현대에도 여전히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는 현재 총 다섯 권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지넷 윈터슨의 <겨울 이야기>, 하워드 제이컵슨의 <베니스의 상인>, 앤 타일러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마거릿 애트우드의 <템페스트>,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오셀로>이다. 그리고 출간 예정인 작품들로는 에드워드 세인트오빈의 <리어왕>, 요 네스뵈의 <맥베스>, 길리언 플린의 <햄릿>이 있다. 특히 요 네스뵈와 길리언 플린이 어떻게 셰익스피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이야기를 그려낼지 너무 기대가 된다. 특히나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가장 두려움이 가득한 작품이기도 하고, 가장 잔혹하게 아름다운 작품이기도 해서 북유럽 스릴러 작가가 새롭게 창조해낼 이미지가 너무 기대가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고전을 고스란히 무대에 올려도 훌륭하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거나 공연 외에 음악이나 발레, 영화 등으로 변주되어도 여전히 그 가치가 있다. 그 중에서도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가 흥미로운 것은 여러 작가가 자신만의 색깔로 작품을 직접 고르고, 원작 희곡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킨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마치 시리즈처럼 기획되어 이어지고 있으니,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는 프로젝트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것 같다. 에드워드 세인트오빈의 <리어왕>이 올해 5, 요 네스뵈의 <맥베스>가 올해 7월 출간예정이라고 하니 손꼽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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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읽는 그랑 르노르망 카드
김세리 지음 / 북레시피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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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르망 카드를 읽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접해야 할 두 신화는 '이아손과 황금양털' 신화와 '트로이 전쟁' 신화입니다. 다시 말해, 어쩌면 모든 문학과 예술의 근본적인 주제인 '돈에 속고 사랑에 우는' 고전 판 '사랑과 전쟁'의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배신과 불륜, 사랑과 우애, 생존과 윤리에 대한 대표적 서사시들이지요.

저자는 프랑스 유학 생활 중 자주 가던 헌책방에서 이상한 카드 한 벌을 발견하게 된다. 꽤 묵직하고 큰 종이로 된 카드집이었는데, 개봉이 되어 있어 카드 몇 장을 꺼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카드 한 장 한 장이 지닌 묘한 매력에 빠져서 카드집을 구매하게 된다. 그녀는 카드를 해독해보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고, 덕분에 이렇게 한국에 책으로 소개가 된다. 54장으로 구성된그랑 르노르망 카드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이미지들을 읽어나가며 미래를 예견하는 매우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견만 보자면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어다 보면 타로 카드와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이다. 기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타로카드에 비해 르노르망 카드의 배경은 '이아손과 황금양털' 신화와 '트로이 전쟁' 신화이며, 그 밖에도 다른 지역의 신화 및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다양한 테마들을 엮어 카드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한때 타로카드며 그 밖에 여러 점술카드들이 유행처럼 번졌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관련 책들도 쏟아졌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 78매의 카드를 뽑아서 문제를 분석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일종의 점술인 타로카드는 그것을 위한 카페가 있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었다. 타로카드의 그림들은 운명의 수레바튀부터 정의의 여신, 죽음의 여신, 교수형을 당한 죄인 등 세상의 만물을 대변하고 있어 수만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 있다는 느낌도 있었고, 그만큼 재미도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된 그랑 그로르망 카드는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의 카드점술가였던 마리 안느 아델라이드 르노르망이 창안한 것인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지력이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로베스피에르, 장 폴 마라, 나폴레옹의 부인 조제핀 등을 고객으로 두며 유명해진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났고, 우연히 죽으며, 우연히 무사하다가도 우연히 사고를 당합니다. 우연히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우연히 재회하고, 때론 우연히 헤어져 외딴곳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치 우리가 카드를 뽑는 행위처럼 전부 우연일 수 있겠지요.

이 작품은 책과 카드가 한 세트로 이루어진 카드 해독 지침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화 속 이야기와 더불어 그 문화와 역사 속 이야기들이 풍부해 인문학적인 재미까지 주고 있다. 저자는 그랑 르노르망 카드가 단지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타로 카드와 더불어 서양 문화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그만큼 흥미로운 대목이 많은 책이기도 했다. 우선 이 카드를 창안한 마드무아젤 르노르망에 관한 것부터, 카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등 카드 해독의 기본 지식부터 배열법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특히나 그랑 르노르망 카드의 배경이 되는 다섯 가지 주제들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아손과 황금양털 신화, 트로이 전쟁 신화, 연금술 혹은 결혼, 뜻밖의 사건들, 시간의 질서와 별자리.. 그래서 이 책에서는 트럼프의 모양과 순서에 따라 카드를 해설하는 게 아니라 주제별 구분에 따라 그에 속하는 카드를 해설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신화 속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그에 속하는 카드의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진행되고 있어 카드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야기로 파악하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운명의 원형적인 이야기인 신화뿐 아니라 별자리, 꽃말, 흙점, 알파벳점 등 보조적인 상징코드들도 함께 소개되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고 싶은 이들에게, 혹은 단조로운 일상에 설레는 비밀을 갖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아마도 타로카드 만큼이나 재미있고, 또 그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부분이 많아 만족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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