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7번째 기능
로랑 비네 지음, 이선화 옮김 / 영림카디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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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죽었어요."

"하지만 누가 그를 죽였다는 겁니까?"

"시스템이죠. 당연히."

푸코가 사용한 '시스템'이라는 단어는 바야르가 막연히 품고 있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기호학자이자 문예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 그는 타고난 관찰자이며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날은 이런 저런 생각들과 근심들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걷고 있었다. 바로 그 덕분에 사무실까지 불과 몇 십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트럭에 부딪히고 만다. 1980 2 25일 오후, 그렇게 롤랑 바르트는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결국 그렇게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것은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저자인 로랑 비네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그게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다면? 사고 직전 롤랑 바르트가 괴력의 비밀문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세상을 뒤집을 만한 위력을 가진 문서였다면? 그렇다면 과연 누가 롤랑 바르트를 죽였을까. 라는 질문에서 이 작품이 시작된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정보국 수사관 바야르 경위가 파견되고, 그는 롤랑 바르트의 주변 인물들 탐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바르트의 죽음과 연루된 '실존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의 대가인 미셸 푸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해체주의를 주창한 자크 데리다, 기호학자이자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해서 실제 언어학자와 철학자, 작가, 비평가 등이 등장해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당연히 바야르 경위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거의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 대다수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겠다. 기호학이라니, 그 이름만으로도 어쩐지 뜬구름 잡는 듯 실체가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학문처럼 들리지 않나. 나 역시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이라는 저서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상이나 이론 체계는 전혀 알지 못했던 평범한 독자이기에 초반을 견뎌내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주요 인물들이 떠들어내는 어려워 보이는 그 이론들을 전부 이해하지 않아도 이 소설을 즐기는데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그저 중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저는 압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실마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저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작가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애쓰며 이 문제에 관해 사람들이 쓰는 모든 글을 읽으려고 애쓰며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 혹은 알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모든 진실을 알아 내려고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로랑 비네는 인상적인 데뷔작 <HHhH>이후 5년 만에 두 번째 작품으로 이번 작품을 내놓았다. <HHhH> 역시 역사 속 하이드리히 암살작전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에 대해 그리며 기존의 그 어떤 이야기와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소하고 낯설게 역사를 그리는 작품이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고증하는 소설도 있고, 실제 일어난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소설도 있고, 왜곡까지는 아니지만 역사적 진실이라는 벽을 교묘히 우회하는 역사 소설도 있다.' 하지만 로랑 비네는 자신이 역사를 픽션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며, 매 순간 모든 장면이 실화라는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 날 수 있게 글을 쓰고자 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래서 <HHhH>에서는 대놓고 작가의 시선이 개입되는 부분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작가 노트와 소설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 구성이었는데, 이번 <언어의 7번째 기능>에서도 중간 중간 그런 부분이 있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다음 장에서 '이 이야기에는 맹점이 있다. 이야기의 시발점이기도 하다'라고 단언하며 문제의 그 날에 대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실존 인물들은 절대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소설 속에서는 언제든 끄집어내어 밝혀낼 수 있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렇게 다혈질 수사관 바야르와 풋내기 기호학자가 20세기 최고의 지성들 사이에서 롤랑 바르트의 죽음과 숨겨진 괴문서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이 작품은 일반적인 형태의 스릴러,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굉장히 지적이고, 당대 최고 지성인들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당돌함과 수수께께를 풀어가는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호학과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동안 만나본 적 없는 독특한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나 유명한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팩션이 또 있었나 싶을 만큼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작품이니,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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