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너에게 겨울에 내가 갈게
닌겐 로쿠도 지음, 이유라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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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 좋지."
"그렇네요. 역시 실제로 보니까 박력도 있고, 사람들이 이렇게 모인 느낌도 좋아요."
"아니야. 금방 사라져버리니까 좋은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불꽃놀이는 아무것도 남지 않잖아. 그래서 '지금 곡 봐야지!'하고 노력하니까, 좋은 추억으로 남는 거라고 생각해."  
연속해서 무수한 작은 빛이 쏘아 올려졌다. 칠흑의 캔버스가 빛의 샤워로 빈틈없이 채워졌다.       p.50

 

대학의 문학부 신입생인 나쓰키는 아직은 동아리 술자리가 불편하기만 하다. 적당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시간이 빨리 가기만 바라고 있는데, 별안간 집에 가고 싶다며 기세좋게 먼저 자리를 뜨려는 여학생이 있었다. 나쓰키는 용기를 내어 그 여학생을 따라 나섰고, 그렇게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된다. 여학생은 미술학과 유화 전공인 2학년 유키였고, 나쓰키는 어두운 밤을 여왕의 망토처럼 걸친 매혹적인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하게 만다. 그렇게 두 사람은 꿈처럼 달콤한 여름을 보내지만, 언젠가부터 유키가 학교에 나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 결국 나쓰키는 수소문 끝에 그녀의 본가를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커다란 의료용 침대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유키는 알 수 없는 희귀병으로 겨울이면 식물인간처럼 내내 잠들어 있는다는 거였다. 다섯 살 때부터 이르면 10월 말부터, 보통은 2월 말까지 기묘하게도 깊은 잠에 빠져 있어야 했다. 언젠가는 1년 넘게 잠에서 깨지 못한 때도 있었다고 하니, 이번에도 깨어날지는 가족들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현대판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도 된 것처럼 겨울잠을 자는 동안에는 식사도 배설도 제대로 할 수 없기에, 생명을 완전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과연 겨울이라는 계절을 잃어버린 여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연애를 지속할 수 있을까.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가끔 상상해요. 하지만 길은 아득히 먼 곳에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뉘어 있어요. 원래 한 길이었던 자매는 합류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런가... 타인이기에 느끼고 있던 거리감도, 유키를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는 초조함도 후유미에게는 전부 손에 넣기 힘든 것들이었다. 타인이기 때문에 비로소 같은 길을 나아간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언젠가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야 할 후유미는,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p.274

 

이 작품은 “결말이 아름다워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말았다”는 심사위원의 극찬을 받으며 제28회 전격소설대상 미디어워크스문고상을 수상했다. 겨울이 시작되면 식물인간처럼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 희귀병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믿기 힘든 비현실적인 병이긴 하다. 아주 오래 전에 동물들의 겨울잠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인간도 동물처럼 겨울잠을 잔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실제로 동물은 겨울잠을 자는 동안 가끔 일어나서 먹기도 하고, 다시 잔다고 하는데, 어찌되었든 몇 달을 푹 자고 일어나면 계절이 완전히 바뀌어 있는 경험이란 정말 신기할 것 같았다. 사실 계절 중에 여름을 너무 싫어해서 여름은 건너띄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기에, 선택할 수 있다면 여름잠이 더 좋을 것 같긴 하다. 잠시 자고 일어나면 내가 싫어하는 한 계절을 훌쩍 건너뛸 수 있으니 좋을 것 같긴 한데, 이 작품 속 주인공처럼 매년 강제적으로 반복이 되어야 한다면, 게다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를 기약할 수 없다면 솔직히 무서울 것 같기도 하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기다려야 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은 더 힘이 들테고 말이다.

 

이 소설은 겨울잠을 자야 하는 유키가 아니라 그런 유키를 사랑하는 나쓰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각 장의 끝마다 다시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유키의 꿈결같은 이야기가 짧은 에피소드처럼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서사는 유키의 가족들과 나쓰키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는 가족의 입장에서 그들의 안타까운 삶을 이해하게 된다. 병명도 찾지 못하는 희귀병으로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의 무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독특한 소재의 이 작품은 작가인 닌겐 로쿠도가 오랜 투병 생활을 했던 경험을 토대로 쓰였기에, 섬세하고 간절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랑의 기적을 믿는다면, 눈처럼 순도 높은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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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오기 전에
김진화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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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당장이라도 물에 뛰어 들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푸르른 바다 빛깔 때문에 책을 펼치기도 전부터 시원한 기분이 드는 그림책을 만났다.

 

여름이 오기 전에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하필 아빠는 앞니가 부러지는 바람에 여행을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다. 엄마와 나, 그리고 길쭉이 셋만의 여행이다. 서둘러 호텔에 짐을 풀어 놓고 커다란 야자수 나무와 바다가 반겨주는 곳으로 달려간다. 꼭 사이다 속으로 빠지는 것 같은 기분으로 다이빙을 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백 번은 한 것 같다. 하지만 물에 젖을 까봐 방에 두고 온 길쭉이가 자꾸 생각이 나서 서둘러 호텔로 돌아온다. 그런데 길쭉이가 사라졌다. 침대에서, 금고에도, 가방에도 없는 길쭉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여행이 끝날 때까지 길쭉이를 찾지 못해 걱정인 나와 그런 아이를 찾아 다니는 길쭉이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되는 이 사랑스러운 그림책은 누구나 거쳐 온 유년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

 

애착 인형처럼 어린 시절에는 언제나 함께했던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다. 장난감일수도 있고, 인형일수도 있고, 반려동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좋아하는 물건들은 꼭 한번씩 잃어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이 작품 속에서 길쭉이가 사라진 것도,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 잃어 버렸던 길쭉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이상한 것이 눈물이 날 것만 같다고 아이는 생각한다. 과연 아이는 길쭉이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될까?

 

 

이 그림책은 부드럽게 번지는 질감과 투명한 색채들로 전부 다른 여름의 물빛을 보여주며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의 설레임과 낯선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들, 언제봐도 너무 좋은 바다와 하늘까지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페이지 마다 가득하다.

 

20년 가까이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려온 김진화 작가가 글과 그림을 모두 창작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그림책 작가로서의 모습도 더 많이 보여주기를 기대하고픈, 너무도 사랑스럽고 예쁜 작품이었다.

 

 

누구나 잊지 못할 여행의 순간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길을 못 찾아서 한참을 헤매거나,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로 비에 쫄딱 젖거나, 여행지에서 중요한 물건을 잃어 버리거나, 무거운 짐을 낑낑거리고 끌고 오느라 고생했던 기억 등 당시에는 짜증나고 힘들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으로 남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반짝이던 그 여행의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

 

아이는 여러번 잃어 버리고 다시 찾았던 길쭉이와 보냈던 시간이 많다. 길쭉이랑 같이 있으면 아무것도 겁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의지했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아이도 언젠가 자라서 어른이 될테고, 바쁜 일상에 치여서 길쭉이의 소중함을 잊어 버리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년기를 다시 떠올릴 때마다 그 시간 속에 길쭉이가 있을 것이고, 길쭉이를 잃어 버렸던 여행의 풍경들이 기억날 것이다. 그 반짝이는 시간들이 다시 매일을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 되어줄 테고 말이다. 이 그림책을 통해 나의 지난 시간들을 뭉클하게 해 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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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개냥이 수사대 시즌 2 : 1 - 슈퍼 꿀맛 복숭아 도난 사건 천하무적 개냥이 수사대 시즌2 1
이승민 지음, 윤태규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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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독자들의 사랑과 지지를 한 몸에 받은 '천하무적 개냥이 수사대'가 시즌 2로 돌아왔다! 세상에서 둘도 없이 친한 개와 고양이가 주인 아저씨가 일하러 나가는 것과 동시에 두 발로 서서 개냥이 수사대로 변신해 사건을 해결하는 이 시리즈는 다섯 권으로 시즌 1이 마무리 됐었다. 마지막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던 주인아저씨가 개코와 나비의 비밀 생활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한 눈치를 보여주며 끝이 나서 다음 이야기가 더욱 궁금했었다.

 

시즌 2에서는 502개 사건을 해결하고 은퇴한 전설의 콤비 개코 형사와 나비 형사가 세운 '개냥이 경찰학교'에서 배출된 뭉치 형사와 까미 형사, 엉부 연구원과 SQ 연구원이 새로운 개냥이 수사대를 꾸려 활약한다.

 

 

이 시리즈의 매력은 바로 캐릭터에 있다. 세상에서 둘도 없이 친한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니 말이다. 승우네 가족과 함께 사는 개 뭉치, 그리고 길거리 다리 밑에 사는 고양이 까미는 개코 형사와 나비 형사가 그랬던 것처럼 환상의 콤비이다.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시리즈에서만은 예외이다.

 

달콤한 음식과 고기를 좋아하는 뭉치 형사는 머리보다 몸이 앞서고 수영을 잘한다. 사고뭉치여서 이름이 '뭉치'가 되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까미 형사는 몸이 까매서 '까미'가 되었다. 차분하며 냉철하게 추리하고, 특기가 무술이다. 새로운 두 명의 멤버인 SQ 연구원은 증거물을 분석하고, 개냥이 수사대의 보안을 담당한다. 엉부 연구원은 기계를 조립하고, 증거물을 분석하는 천재 연구원이다.

 

 

개냥이 수사대 시리즈는 각 권이 완성된 하나의 스토리라서 따로 읽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시즌 2가 이제 시작되었지만, 이 책을 읽고 재미있다면 시즌 1이 다섯 권이나 나와 있으니 찾아 보면 좋을 것 같다. 개냥이 수사대의 아기자기한 매력에 빠지게 되면, 시리즈를 처음부터 정주행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테니 말이다.

 

시즌 1에서부터 이어지는 수사대 원칙에 따라 증거 수집과 분석, 탐문 수사, 방문 수사 등 단계별로 진행되는 수사 과정을 따라 가는 재미도 있다. 추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라 아이들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같이 수사를 진행하는 느낌으로 범인을 추측해 보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간단한 퀴즈도 수록되어 있어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특히나 시즌 2에서는 수사 전용 스마트 워치를 통해 드론을 날리고, 복장을 변신시키고, 블랙박스 영상을 옮기고, 레이더 앱으로 냄새를 추적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신속하게 수사를 진행시키며 전문적인 과학 수사를 보여주어 더욱 흥미진진하다. 일반 복숭아보다 스무배는 비싼 슈퍼 꿀맛 복숭아가 사라졌다는 신고 전화를 받고 출동한 개냥이 수사대는 현장에서 수집한 증거물을 토대로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복숭아에서 시작된 사건은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으로 점점 규모가 커지는데, 과연 새로운 개냥이 수사대는 범인을 검거하고 임무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외모만 보면 너무 귀여운 뭉치 형사와 까미 형사는 치밀하고 꼼꼼한 추리력으로 차근차근 사건을 수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즌 2부터는 두 명의 수사 대원이 추가되어 더 스마트하고 흡입력있는 추리동화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계속 보게 되는 개냥이 수사대의 다음 활약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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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평범한 가족
마티아스 에드바르드손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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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야말로 평범한 가족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가치 있는 인생을 구축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만, 망치는 건 한순간이면 족하다. 한 사람의 가감 없는 현재를 만드는 데는 오랜 세월이(몇 십 년, 어쩌면 평생이) 걸린다. 그 여정은 거의 늘 우회적인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시행착오가 쌓여 이뤄지는 법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한 시도와 시련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올가을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p.18

 

만약 평범한 내 자식이 살인 혐의를 받게 된다면 어떨까, 갑자기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어 구금된 상태로 만날 수 조차 없게 된다면, 드러나는 증거를 믿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을 믿을 것인가? 여기, 완벽하게 평범한 가족이 있다. 아빠는 스웨덴 국교회의 존경받는 목사인 아담, 엄마인 올리카는 커리어의 정점에 선 잘 나가는 변호사였고 똑똑하고 예쁜 열여덟 살 딸 스텔라까지 세 식구의 일상은 평화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텔라가 젊은 사업가 크리스토퍼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면서 그들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만나는 사이였고, 남자가 살해된 날 스텔라가 그의 집에 왔던 걸 목격한 이웃이 있었다. 게다가 핏자국으로 뒤덮여 있는 스텔라의 옷도 집에서 발견된다.

 

아담과 올리카는 정말 우리 딸이 살인범이라면 어쩌지? 싶은 두려움이 들었지만, 딸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아버지인 아담과 딸 스텔라, 그리고 어머니 울리카의 시점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같은 사건을 대하는 다른 화자의 시점이라는 점도 흥미롭지만, 사건의 시작 지점에서부터 마지막 법정에 이르기까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어 인물의 시점대로 사건의 변화를 따라갈 수 있어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부모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사건의 진위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해서 뭘 할 수 있느냐부터 먼저 생각하게 될테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불안감,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일이 없다는 절망에 휩싸인다.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바닥부터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담은 자신의 도덕규범을 지키는 문제에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가족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다. 사람은 자기 가족을 지킬 수만 있다면 윤리와 도덕은 얼마든지 치워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식을 변호하는 문제에서 사람들은 가장 엄격한 규율조차 얼마든지 박살 낼 수 있다. 거짓말, 죄책감, 비밀. 이것들이야말로 가족을 세운 근거들이 아닐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다른 두 사람은 부모라는 존재로 바뀐다. 자녀를 향한 사랑은 법 앞에 복종하지 않는다.           p.453

 

부모가 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없으면 죽고 못 살 것 같은 연인도, 피를 나눈 형제자매도, 평생 갈 것 같았던 친구도 떠날 수 있지만, 자식만은 포기가 안 되니 말이다. 부모는 자식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종종 터무니없는 허세를 부린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폭언도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떠한 도전도 물리칠 수 있으며, 어떠한 시련도 견딜 수 있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세상 어떤 부모도 '완벽할' 수만은 없다.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기에, 거의 무조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면, 내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거라면 어쩌겠느냔 말이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인 아담은 딸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심란스럽기만 한데, 어떻게든 딸을 돕기 위해 목격자를 만나고, 의심가는 인물을 찾아 가고, 딸의 알리바이를 위해 경찰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아내까지도 자신에게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말이다.

 

구치소에 갇혀 있는 신세인 딸 스텔라는 자신이 여기 있을 짓을 했고, 피해자가 아니며, 누구도 자신을 동정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그 곳의 고독이 무섭고, 싫고, 불안하다. 특히나 그녀가 과거에 있었던 끔찍했던 사고의 순간에도 피해자 역할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두가 자신이 그럴 거라고 믿는 '강한 여자애'가 되고 싶었다는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대체 스텔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정말 크리스토퍼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재판 절차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이야기의 시점은 어머니인 울리카로 바뀐다. 그리고 딸을 위해 올리카가 어떤 일을 벌였는지, 그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어느 순간 아이가 친근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지점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진짜인지, 내가 아이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지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가족을 위해 무슨 일까지 할 수 있느냐고.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드는, 재미 면에서나 구성적인 면에서도 정말 잘 쓰인 스릴러 작품이다. 곧 넷플릭스 TV 시리즈로도 공개될 예정이니, 원작 소설부터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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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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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판단력과 합리적인 사고로 인지되는 세계만이 현실이라면, 비합리적인 관념으로만 감지되는 세계는 없는 것인가? 마쓰다는 그곳이야말로 영혼의 거처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혼이란 마치 한 편의 이야기나 음악, 혹은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 속에서만 발현되는 무언가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듯 영혼과 교감할 수 있지 않을까?         p.121

 

1994년 도쿄, <월간 여성의 친구>라는 여성 잡지사에서 '심령 특집' 기사를 기획한다. 독자의 공포심이나 위기감을 부추기면 잡지 매출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마침 제보가 있었던 것은 철도 건널목에서 나타난 유령 사진과 영상이었다. 열차가 나타난 순간, 건널목 안에서 무언가 뿌연 것이 떠오르더니 증기처럼 흔들리다 사라진 영상과 상반신만 허공에 뜬 것처럼 찍힌 여성의 옆모습 사진이었다. 유명 일간지의 이름난 사회부 기자였지만 아내가 병으로 죽은 뒤 현재는 해당 잡지사에서 계약직 기자로 일하고 있는 마쓰다는 이 사건을 취재하며 실화라고 주장하는 유령 목격담에 서서히 빨려들게 된다.

 

조사를 이어가던 마쓰다는 실제로 그곳에서 기관사가 흐릿한 사람의 실루엣을 발견하고 열차를 급정차한 일도 몇 번이나 있었었고, 결정적으로 그 건널목에서 사고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죽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년 전에 살인 사건이 있었고, 살해당한 사람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젊은 여자였던 것이다. 사실 해당 사건을 조사하던 전임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을 하는 바람에 마쓰다가 이 기획을 맡게 되었는데, 마쓰다에게도 점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불규칙적으로 새벽 1시 3분이 되면 걸려 오는 전화가 있었고, 선로 가까이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1시 3분이 여자가 살해된 시간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신원 미상인 20대 여성의 영혼이 어떤 목적으로 떠돌고 있는 건 분명했다. 발로 뛰는 취재를 통해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시선을 가진 마쓰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직접 겪으면서, 점점 신원을 알 수 없는 희생자의 삶에, 그 죽음의 진상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마쓰다는 고개를 전방으로 돌리고서 건널목 맞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변을 알아챘다. 주검이 쓰러져 있던 지점에 하얗고 길쭉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떠 있었다. 얼핏 연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뿌연 실루엣은 바람에 휘날리지 않고 한곳에 머문 채 허공에서 흐느적흐느적 흔들렸다. 취재진 모두가 할 말을 잃고서 괴기한 현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윽고 그것이 서서히 여자의 형상을 띠더니 이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취재진 모두 뒷걸음질 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을 텐데도 몸이 경직돼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p.292

 

마쓰다는 자신이 사회부 기자였던 시절에 너무 일에만 매달리느라 아내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고, 가장 사랑하던 아내에게 충분히 뭔가를 해주지 못했다는 자책에 그녀의 죽음에 더욱 상심했다. 그리고 여전히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내의 영혼과 만나고 싶다고 바랐을 정도로 말이다. 그랬던 그가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새벽마다 울린 전화 속에서 고통에 겨워하는 여인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공포에 삼켜지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먹으면서, 점점 억울하게 죽은 이의 영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지 않았을까. 덕분에 마쓰다는 이 사건에 대해서 온 힘을 다해서 취재해야만 한다고, 더욱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여인의 신원은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도록 밝혀지지 않고, 한 개인에서 시작한 죽음의 진상은 유흥가와 조직 폭력단, 그리고 부패 정치인으로 이어지며 규모가 커지기 시작한다. 과연 그는 포기하지 않고, 죽은 이의 신원을 밝혀내고 사건의 진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13계단>, <제노사이드> 등의 인상적인 걸작을 썼던 다카노 가즈아키가 무려 11년 만에 선보이는 신간으로 제169회 나오키상 후보작이기도 하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다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도 '유령'이라는 존재를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심령 서스펜스의 매력도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다. 게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오싹하고,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 가슴 먹먹해지는 감정도 여운처럼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상실의 슬픔과 이 세계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향한 연민, 그리고 산자가 결코 접해서는 안 되는 세계와 초현실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애도의 순간들까지... 담담하지만 묵직한 서사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존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들과는 결이 좀 다르지만, 정말 오랜 만에 만나는 거장의 귀환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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