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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평점 :
정상적인 판단력과 합리적인 사고로 인지되는 세계만이 현실이라면, 비합리적인 관념으로만 감지되는 세계는 없는 것인가? 마쓰다는 그곳이야말로 영혼의 거처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혼이란 마치 한 편의 이야기나 음악, 혹은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 속에서만 발현되는 무언가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듯 영혼과 교감할 수 있지 않을까? p.121
1994년 도쿄, <월간 여성의 친구>라는 여성 잡지사에서 '심령 특집' 기사를 기획한다. 독자의 공포심이나 위기감을 부추기면 잡지 매출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마침 제보가 있었던 것은 철도 건널목에서 나타난 유령 사진과 영상이었다. 열차가 나타난 순간, 건널목 안에서 무언가 뿌연 것이 떠오르더니 증기처럼 흔들리다 사라진 영상과 상반신만 허공에 뜬 것처럼 찍힌 여성의 옆모습 사진이었다. 유명 일간지의 이름난 사회부 기자였지만 아내가 병으로 죽은 뒤 현재는 해당 잡지사에서 계약직 기자로 일하고 있는 마쓰다는 이 사건을 취재하며 실화라고 주장하는 유령 목격담에 서서히 빨려들게 된다.
조사를 이어가던 마쓰다는 실제로 그곳에서 기관사가 흐릿한 사람의 실루엣을 발견하고 열차를 급정차한 일도 몇 번이나 있었었고, 결정적으로 그 건널목에서 사고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죽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년 전에 살인 사건이 있었고, 살해당한 사람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젊은 여자였던 것이다. 사실 해당 사건을 조사하던 전임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을 하는 바람에 마쓰다가 이 기획을 맡게 되었는데, 마쓰다에게도 점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불규칙적으로 새벽 1시 3분이 되면 걸려 오는 전화가 있었고, 선로 가까이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1시 3분이 여자가 살해된 시간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신원 미상인 20대 여성의 영혼이 어떤 목적으로 떠돌고 있는 건 분명했다. 발로 뛰는 취재를 통해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시선을 가진 마쓰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직접 겪으면서, 점점 신원을 알 수 없는 희생자의 삶에, 그 죽음의 진상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마쓰다는 고개를 전방으로 돌리고서 건널목 맞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변을 알아챘다. 주검이 쓰러져 있던 지점에 하얗고 길쭉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떠 있었다. 얼핏 연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뿌연 실루엣은 바람에 휘날리지 않고 한곳에 머문 채 허공에서 흐느적흐느적 흔들렸다. 취재진 모두가 할 말을 잃고서 괴기한 현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윽고 그것이 서서히 여자의 형상을 띠더니 이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취재진 모두 뒷걸음질 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을 텐데도 몸이 경직돼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p.292
마쓰다는 자신이 사회부 기자였던 시절에 너무 일에만 매달리느라 아내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고, 가장 사랑하던 아내에게 충분히 뭔가를 해주지 못했다는 자책에 그녀의 죽음에 더욱 상심했다. 그리고 여전히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내의 영혼과 만나고 싶다고 바랐을 정도로 말이다. 그랬던 그가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새벽마다 울린 전화 속에서 고통에 겨워하는 여인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공포에 삼켜지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먹으면서, 점점 억울하게 죽은 이의 영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지 않았을까. 덕분에 마쓰다는 이 사건에 대해서 온 힘을 다해서 취재해야만 한다고, 더욱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여인의 신원은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도록 밝혀지지 않고, 한 개인에서 시작한 죽음의 진상은 유흥가와 조직 폭력단, 그리고 부패 정치인으로 이어지며 규모가 커지기 시작한다. 과연 그는 포기하지 않고, 죽은 이의 신원을 밝혀내고 사건의 진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13계단>, <제노사이드> 등의 인상적인 걸작을 썼던 다카노 가즈아키가 무려 11년 만에 선보이는 신간으로 제169회 나오키상 후보작이기도 하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다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도 '유령'이라는 존재를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심령 서스펜스의 매력도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다. 게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오싹하고,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 가슴 먹먹해지는 감정도 여운처럼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상실의 슬픔과 이 세계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향한 연민, 그리고 산자가 결코 접해서는 안 되는 세계와 초현실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애도의 순간들까지... 담담하지만 묵직한 서사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존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들과는 결이 좀 다르지만, 정말 오랜 만에 만나는 거장의 귀환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