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너에게 겨울에 내가 갈게
닌겐 로쿠도 지음, 이유라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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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 좋지."
"그렇네요. 역시 실제로 보니까 박력도 있고, 사람들이 이렇게 모인 느낌도 좋아요."
"아니야. 금방 사라져버리니까 좋은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불꽃놀이는 아무것도 남지 않잖아. 그래서 '지금 곡 봐야지!'하고 노력하니까, 좋은 추억으로 남는 거라고 생각해."  
연속해서 무수한 작은 빛이 쏘아 올려졌다. 칠흑의 캔버스가 빛의 샤워로 빈틈없이 채워졌다.       p.50

 

대학의 문학부 신입생인 나쓰키는 아직은 동아리 술자리가 불편하기만 하다. 적당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시간이 빨리 가기만 바라고 있는데, 별안간 집에 가고 싶다며 기세좋게 먼저 자리를 뜨려는 여학생이 있었다. 나쓰키는 용기를 내어 그 여학생을 따라 나섰고, 그렇게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된다. 여학생은 미술학과 유화 전공인 2학년 유키였고, 나쓰키는 어두운 밤을 여왕의 망토처럼 걸친 매혹적인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하게 만다. 그렇게 두 사람은 꿈처럼 달콤한 여름을 보내지만, 언젠가부터 유키가 학교에 나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 결국 나쓰키는 수소문 끝에 그녀의 본가를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커다란 의료용 침대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유키는 알 수 없는 희귀병으로 겨울이면 식물인간처럼 내내 잠들어 있는다는 거였다. 다섯 살 때부터 이르면 10월 말부터, 보통은 2월 말까지 기묘하게도 깊은 잠에 빠져 있어야 했다. 언젠가는 1년 넘게 잠에서 깨지 못한 때도 있었다고 하니, 이번에도 깨어날지는 가족들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현대판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도 된 것처럼 겨울잠을 자는 동안에는 식사도 배설도 제대로 할 수 없기에, 생명을 완전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과연 겨울이라는 계절을 잃어버린 여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연애를 지속할 수 있을까.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가끔 상상해요. 하지만 길은 아득히 먼 곳에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뉘어 있어요. 원래 한 길이었던 자매는 합류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런가... 타인이기에 느끼고 있던 거리감도, 유키를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는 초조함도 후유미에게는 전부 손에 넣기 힘든 것들이었다. 타인이기 때문에 비로소 같은 길을 나아간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언젠가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야 할 후유미는,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p.274

 

이 작품은 “결말이 아름다워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말았다”는 심사위원의 극찬을 받으며 제28회 전격소설대상 미디어워크스문고상을 수상했다. 겨울이 시작되면 식물인간처럼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 희귀병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믿기 힘든 비현실적인 병이긴 하다. 아주 오래 전에 동물들의 겨울잠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인간도 동물처럼 겨울잠을 잔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실제로 동물은 겨울잠을 자는 동안 가끔 일어나서 먹기도 하고, 다시 잔다고 하는데, 어찌되었든 몇 달을 푹 자고 일어나면 계절이 완전히 바뀌어 있는 경험이란 정말 신기할 것 같았다. 사실 계절 중에 여름을 너무 싫어해서 여름은 건너띄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기에, 선택할 수 있다면 여름잠이 더 좋을 것 같긴 하다. 잠시 자고 일어나면 내가 싫어하는 한 계절을 훌쩍 건너뛸 수 있으니 좋을 것 같긴 한데, 이 작품 속 주인공처럼 매년 강제적으로 반복이 되어야 한다면, 게다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를 기약할 수 없다면 솔직히 무서울 것 같기도 하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기다려야 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은 더 힘이 들테고 말이다.

 

이 소설은 겨울잠을 자야 하는 유키가 아니라 그런 유키를 사랑하는 나쓰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각 장의 끝마다 다시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유키의 꿈결같은 이야기가 짧은 에피소드처럼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서사는 유키의 가족들과 나쓰키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는 가족의 입장에서 그들의 안타까운 삶을 이해하게 된다. 병명도 찾지 못하는 희귀병으로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의 무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독특한 소재의 이 작품은 작가인 닌겐 로쿠도가 오랜 투병 생활을 했던 경험을 토대로 쓰였기에, 섬세하고 간절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랑의 기적을 믿는다면, 눈처럼 순도 높은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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