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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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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고통스럽게, 겨우 읽었다. 이전에도 오츠의 작품인 『좀비』와 『대디 러브』를 읽다 덮은 적이 있다. 현대사회의 각종 미디어, 뉴스 헤드라인을 채우는 폭력적 일상을 산다는 인지 속에서도 유독 오츠의 소설 읽기는 힘들게 느껴진다. 그녀가 택하는 소재가 소설 안에서 전개되는 방식이 주는 현실감이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물과 사건에서 획득하는 생동감? 그러한 파도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기록문학처럼 비정한 현실을 담담하게 들려주는데서 압도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두터운 벽을 사이에 두고 '들여다보았다'는 표현이 나을 것이다. 문학은 허구임을 알고 있음에도 설명하기 힘든, 외면하고 싶은 어떤 감정이 치솟는… 설명이 힘들다.


『그들them』의 배경은 1937년에서 1967년, 대공황 막바지에서 디트로이트 폭동이 일어나는 시기다. 3부로 구성된 작품은 로레타와 그녀의 아들 줄스, 딸 모린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쓰레기장’이라고 지칭되는 빈민가에 사는 열여섯 로레타가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태어난 자녀들의 삶이 부모의 전철을 밟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빈곤과 폭력에 노출된 일상의 삶은 무엇으로,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도 전에 가출을 하고, 집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지만 이 ‘디트로이트’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거대한 도시 위를 흘러가는 30년 세월은 ‘그들’을 화이트트래쉬의 삶에 붙들어두는 덫이자, 인생 그 자체로 기능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 모두는 시대와 환경의 피해자이다. 대공황으로 인한 아버지의 실직과 몰락, 어머니의 부재중 범죄를 저지르는 오빠. 로레타는 비정한 현실과 동떨어진 사랑의 꿈을 꾼다. 첫 경험 후, 동이 트기도 전에 오빠 브록은 동생의 침대에 누운 버니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다. 사건현장을 본 경찰 하워드는 로레타를 강제로 취하고, 임신한 그녀는 웬들이란 성을 얻는다. 첫아이 줄스는 영특하고, 둘째 모린은 외모가 예쁘지만 막내 베티는 그렇지 못해 가정에서도 찬밥 신세다. 한편 2차대전은 대공황으로 침체되었던 이 자동차도시의 경기를 빠르게 회복시키는데, 급격하게 늘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구수는 인종적 긴장을 불러온다.


산업 사고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줄스와 모린은 슬픔을 느끼기보다 탈출의 꿈을 꾼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가르침을 얻지 못한다. 무기력했던 하워드. 로레타는 무책임하며, 생각을 하기보다는 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존재다. 아이들을 사랑하노라 말하지만 가출한 줄스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가 보내오는 20달러에 더 신경을 쓴다. 언제든 사랑에 빠진 여성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 1950년대 웬들 가에서 그나마 모범적인 인물은 열세살의 모린이다. 좀도둑질을 일삼는 베티와 달리, 엄마가 방치한 가정을 돌보면서도 학업에 충실하려 애쓴다. 학급서기를 맡으면서는 비서가 되어 이 가정에서 탈출하기를 꿈꾸지만 학급회의록을 잃어버리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희망이 좌절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줄스는 첫사랑 버니의 아이라 암시되며, 엄마에겐 특별한 존재다. 그녀가 ‘잃어버린’ 아들은 비행기 추락 사고의 현장을 목격하고, 타오르는 불에 매혹되며 이미 두 살 때 가출을 시작한다. 영특함으로 사랑받던 소년은 이제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게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란 평가를 받으며 자란다. 착실한 미래를 준비하는 모린이 탐탁지 않은 로레타는 아이의 노동력을 가정에 구속시키며, 침대를 빼앗아 못 자게 하는 등 감정적인 학대를 일삼는다. 결국 성적이 떨어지고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아이는 집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른 방안을 떠올린다. ‘돈’을 위해 거리에 나선 것이다. 분노한 계부의 구타로 소녀는 혼수상태가 된다.


줄스는 가출했고, 베티의 비행은 통제불능 상태이다. 엄마의 외모를 닮았지만, 알맹이는 너무도 다른 모린이 화이트트래쉬의 삶을 벗어나는 것을 질시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 로레타는 모린에게 학대와 애정이 공존하는 기묘한 태도를 취한다. 아이의 모범적인 기질이 결국 땅으로 떨어지자, ‘엄마’로 돌아온 것이다. 깨어나서도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은 것인지 의도적으로 단 음식을 주기에, 아이의 외모는 점점 변해간다. 모린이 일어날 수 있도록 보살핀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돌아온 외삼촌 브록이다. 한편 줄스는 부촌에 사는 네이딘에게 한 눈에 반하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자동차를 훔쳐 텍사스로 향하지만 줄스가 병을 얻자 그를 떠나 버린다. 오빠가 남부를 돌아다닐 동안, 육체 안에 잠들어 있던 모린도 깨어난다. 다시 10년이 흘러, 1966년이 되었다.


디트로이트로 돌아온 줄스는 성공한 백부와 연락이 닿아 일자리를 얻는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친 네이딘에게 다시 빠져 들고, 정신이 불안정한 그녀에게 총을 맞아 쓰러진다. 독립한 모린은 비서로 일하며 디트로이트 대학에서 야간 수업을 듣는다. 그녀는 부인과 세 아이를 둔 대학 강사 랜돌프와의 미래, 자신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삶을 욕망한다. 소설의 시점을 공유하는 두 남매는 모두 부자의 삶에 대해 애정을 느낀다. 분노와 질투가 아닌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다. 줄스는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에 관련되면서, 타오르는 불로 과거를 정화시켰다고 믿는다. 모린은 웬들이라는 성을 떼냄으로써 과거와의 결별을 이룩했다고 생각한다. 정돈된 삶을 ‘경험’한 로레타는 자신의 과거를 수치로 느끼고 외면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감각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줄스와 자신이 무감각하기에 두려운 모린… 어쩌다 폭동에 가세한 줄스. 그가 인권운동에 투신하계 된 계기와 의도는 이 사건을 조금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게끔 한다.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던 열여섯의 로레타와 스물여섯의 모린의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 결국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느껴지는 모린의 삶… 케네디의 저격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르는, ‘여기 디트로이트에도 간단히 총을 맞는 사람이 있잖아’라고 말하는 모린… 줄스의 지적처럼, 정말 모린은 ‘그들’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그들’이라는 단어가 주는 벽의 느낌, 나는 아직 그 너머로 넘어 갈 용기가 없다. 그 존재와 삶을 인지했을 뿐이다.


 


-7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받은 「Lose yourself」, 영화를 편집한 영상이다.

-1990년대 모타운을 배경으로 한 영화 《8마일》은 에미넴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8마일’은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의 도로 M-102를 가리키며, 부유층과 빈민층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하다. 화이트트래쉬의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 작품에서, 트레일러에 살며 아들의 동창과 사랑에 빠진 엄마 역은 킴 베이싱어가 맡았다. 『그들』에 등장하는 모린의 연령대와 비슷하지만, 로레타의 이미지에 가깝다. 에미넴이 연기한 래빗은 결국 줄스와 모린의 아이들, 그 다음 세대이다. 2014년 파산이 종료된 디토로이트의 현재와 관련, 오츠의 작품과 함께 생각해볼만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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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7 14: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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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7 1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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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7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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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7 2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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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7 23: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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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8 1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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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8 1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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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8 1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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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9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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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9 2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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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0 0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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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0 0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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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0 0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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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2-0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이 책 왜이리 재미없어요. 길기는 왜이리 긴지.. 내용도 없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 자잘하고 의미없는 하찮은 생각만 끝도 없이 반복되네요. 대체 노벨상 후보 기준은 재미없는 개 기준인가...

에이바 2016-02-10 01:35   좋아요 0 | URL
제가 엄청 힘들게 읽었다니까요... ㅜㅠ 전 부분 부분 몰입해 읽었는데 그 흐름이 길게 가질 못하더라고요.

CREBBP 2016-02-15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다 읽고 보니까, 진짜 정리 잘하셨네요. 짧은 글에 이토록 빠짐없이 골고루 스토리를 정리하기도 힘든데 말에요.
저도 오토쇼때 디트로이트 가봤는데, 정말 무서웠어요. 텅빈 도시..

에이바 2016-02-15 18:58   좋아요 0 | URL
오... 감사감사합니다. 이책 무슨 대하소설 같지 않아요? 읽히지도 않고 암튼 리뷰 쓰고 나니 맘이 편해요, 디트로이트 무섭죠 진짜... 가본 친구가 그러는데 진짜 총 맞을 것 같더래요. 전 여기 절대 안 갈 거예요. 대낮에 걸어도 무서울 그런 곳...
 

피아니스트에게 왼손 연주란 어떤 의미일까? 전공자도 아니고, 이제 그 장르 입문자로서 보면 이렇다. 왼손과 오른손을 그대로 건반 위에 올리면 왼손은 낮은 음역, 오른손은 높은 음역이 된다. 선율은 높은 음으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왼손은 자연스럽게 반주를 맡는다. 물론 곡에 따라 왼손이 오른손보다 높은 음역대에 위치하기도 한다. 어쨌든 피아노를 연주하는 입장에서 왼손보다는 오른손의 손가락 움직임에 더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최근 관심 있게 지켜보는 피아니스트의 공연 리뷰를 보면 왼손의 탄탄한 연주가 언급된다. 오른손의 자유로운 루바토를 위해 왼손의 정박을 중시한 쇼팽, 그의 까다로운 작품을 연주하는 입장에서 참 좋은 칭찬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예술계통 종사자 중엔 왼손잡이가 많아 보이지만) 왼손이 주선율을 맡는 피아노 작품은 얼마나 될까? 열 개의 손가락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건반의 음역대가 넓은 작품을 제외하고 말이다. 어쨌든 왼손 위주의 작품은 스크랴빈의 곡, 비트겐슈타인(그 철학자의 형)을 위해 라벨이 쓴 작품 정도가 떠오른다.



위 영상의 8분 38초부터 보면, 필립 카사르가 샤마유의 왼손 연주를 칭찬한다. (카사르는 드뷔시, 슈베르트 스페셜리스트로 여겨지는 듯 하다) 카사르가 파리 음악원을 졸업할 때 스승이었던 주느비에브 주아-뒤티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얘야, 아직 왼손 연주에서 더 훈련할게 남았구나.” 아주 예리한 조언이었다고. 그는 샤마유의 지난 연주활동, 예를 들어 리스트의 《순례의 해》 등에서도 왼손 연주의 풍성함을 봐 왔다며 칭찬한다. 왼손잡이냐 물었더니 샤마유는 오른손잡이라고. 이 젊은 피아니스트는 카사르의 칭찬에 기쁨을 표현하면서 말한다. 그 역시 왼손 연주가 곡을 이끌어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보통 디테일한 오른손 연주에 신경 쓰게 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일까? 반주가 아닌 연주, 왼손의 중요성… 프로의 세계는 알수록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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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01-2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오, 신선한 이야기인데요!^^

그나저나 `루바토`라... 괜히 외워 두고 있어야겠습니다....

에이바 2016-01-29 13:29   좋아요 0 | URL
왠지 음악용어를 알고 있으면 유식해진 것 같지 않나요? 루바토... ㅎㅎ

오거서 2016-01-2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 전공자 아니면 악보를 봐가면서 피아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왼손의 중요성을 안다고 봅니다. 그런 기교를 필요로 하는 음악은 언급하셨다시피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감상자한테 참신한 주제의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에이바 2016-01-29 13:34   좋아요 0 | URL
막연하게 연주를 감상하다가 (저도 악보를 볼 줄 알지만, 진지하게 들은지 얼마 안 되어서요) 연주에서의 구조적인 문제, 즉 연주자는 어떻게 관객에게 자신의 해석을 설득시킬 것인가? 같은 면에서 흥미로웠습니다. 왼손의 기교보다도, 저는 단순히 왼손이 주된 역할을 하는 작품이 궁금했어요.ㅎㅎ

살리미 2016-01-2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피아노를 조금 배웠습니다만, 저는 심각한 오른손잡이여서 왼손치기가 너무 어려웠었어요. 왼손의 힘이 약해서 현란한 연주는 절대로!! 할 수 없고 쿵쿵 반주나 겨우 할 수 있었죠 ㅎㅎ
왼손이 주 선율을 맡는 작품도 있긴 하군요. 이 글을 읽고서야 저도 주로 피아니스트들의 오른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네요 ㅎㅎ
그리고 인터뷰 영상... 하나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샤마유는 너무 착하고 순진해보이네요 ㅎㅎ 은근 매력남!

에이바 2016-01-29 13:37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악기들을 배우긴 했지만 단순한 취미였기에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보통 현악기나 목관악기를 피아노와 함께 배운다고 치면, 피아노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더라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작품을 해석하게 되나 봐요. 아는 사람 눈과 귀엔 그게 보이고 들린다는군요.

물고기자리 2016-01-29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말로 연주를 위한 연주군요^^ 오늘 남은 시간은 왼손처럼 살아볼까 해요:) 마침 잠시 쉬며 커피 한 잔과 함께 읽기에 좋은 글이었어요.. ㅎ

살리미 2016-01-29 13:39   좋아요 1 | URL
물고기자리님~ 저도 커피 한잔 하던중에 음악도 듣고 물고기자리님도 만나고 ㅎㅎ
커피숍에 와 있는 기분인걸요? ㅎ

에이바 2016-01-29 13:44   좋아요 1 | URL
라벨 음악 아름답죠...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서 좋아요. 설득당하는 기분요. 지드의 말처럼, 설득하고 유혹하는 쇼팽으로 진지한 클래식에 입문하니, 어렸을 땐 몰랐던 의문들이 생겨요.ㅎㅎ

물고기자리 2016-01-29 13:44   좋아요 1 | URL
에이바 님이 아니라 깜놀^^ㅋ

그치만 무척 반갑고 좋네요ㅎㅎ
카페에서 한 잔 하는 느낌이에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악과 더불어..^^

프레이야 2016-01-29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왼손이 주선율을 이끄는 곡이 따로 있었군요. 오른손의 자유로운 루바토를 위한 왼손의 정박,이라는 글귀가 쏘옥 들어옵니다. 피아노 치는 작은딸이 좋아하는 쇼팽이 그걸 중시했군요. 잘 읽었어요.

에이바 2016-01-29 18:15   좋아요 0 | URL
쇼팽이 즉흥연주의 대가였다고 해요. 한번은 자신은 정박을 지키고 있다며 지인과 싸우기도 했는데 결국 메트로놈으로 쟀다고 해요. 누가 옳았는지는 비밀입니다. ㅎㅎ

다락방 2016-01-29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짧지만 지적이고 멋진 글이에요, 에이바님. 이래서 에이바님 글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피아니스트, 왼손, 이란 단어들을 들으니 `시드니 셀던`의 소설이 생각나요. 아마도 [별빛은 쏟아지고] 였을 것 같은데요,

그 소설속에서 여자주인공은 피아니스트 남자와 결혼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피아니스트는 되게 유명하고 세계 각지로 공연을 다니는지라 간혹 여자가 외로워했어요. 이 여자는 건축설계 일을 했는데, 여자의 남자동료 한 명이 그런 여자를 안쓰럽게 여겨 피아니스트 남편의 손목을 자른다..는 얘기가 나와요. 일전에 자기들끼리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어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사고로 왼 손을 잃었는데 오른손 만으로도 훌륭한 연주를 했다는 이야기요. 그래서 이 동료 남자는 남편의 오른손을 잘라버려요...


결국 남편은 피아니스트 생명이 끝장나는데, 에이바님의 이 글을 읽으니 그 이야기는 다르게 진행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드니 셀던이 아직 살아서 그 소설을 쓰기 전이었고, 에이바님의 글을 읽었다면 말이죠.

에이바 2016-01-29 18:2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별 것 아닌 글에 이렇게 극찬하시면... ☞☜ 말씀하신 셀던의 소설은 거의 고어 수준인데요. 피아니스트에게 손을 앗아가는 건 죽이는 것보다 더 가혹한 일이잖아요. ㅠㅜ 정말 상상할수록 몸서리쳐지네요... 슈만의 경우가 그래서 피아노를 포기해야 했고, 스크랴빈은 왼손 비중이 높은 곡을 작곡했지만... 레온 플레이셔는 오른손 마비로 연주계를 떠나 제자를 양성하고, 결국 부단한 노력 하에 양손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죠.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시드니 셀던이 플라이셔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 주었더라면! 셀던의 이름 참 오랜만에 들어요 ㅎㅎ

만병통치약 2016-01-2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 국가공인 4단의 입장에서 보면 저 피아니스트의 손이 참 곱군요......^^

오거서 2016-01-29 14:48   좋아요 0 | URL
만병통치약 님은 미처 몰라본 피아노 실력자였군요. 손이 곱다는 디테일까지 캐치하다니 국가공인 4단이라 다르네요 ^^

에이바 2016-01-29 18:22   좋아요 0 | URL
역시 만병통치약님...! 국가공인 유단자다우신 코멘트입니다. ㅎㅎ

사과나비🍎 2016-01-2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좋은 연주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에이바 2016-01-29 18:2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사과나비님^^

서니데이 2016-01-29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에이바 2016-01-29 18:2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AgalmA 2016-01-29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왼손은 거들 뿐 - 슬램덩크 명대사
한유주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소설 생각도 잠시...

에이바 2016-01-29 20:56   좋아요 0 | URL
안선생님...! 피아노가 치고 싶어요...!!! 전 정대만을 좋아했었죠. ㅎㅎㅎ
 
풀잎관 3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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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동맹시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에 맞서는 실로와 무틸루스에게 원조를 제공하려하지만 거절당한다. 오랫동안 웅크린 사자는 마케도니아를 공격하고, 아시아 속주 내부에 소요를 일으키지만 로마 시에선 반응이 없다. 폰토스의 황금에 눈이 먼 소아시아 위원단의 공격으로 잠든 사자는 기지개를 켠다. 2개월 후, 폰토스는 비티니아와 아시아 속주를 거의 함락하며 한 달 후, 은밀한 지령 아래 그리스 주민들의 손에 15만 명의 로마인, 라티움인, 이탈리아인들과 그들의 노예가 살해당한다.

 

로마 시민의 지위를 박탈당했기에 목숨을 부지한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보낸 서신이 원로원을 흔든다. 그중에서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혼란에 빠진다. 로마인의 대의를 옹호했던 그의 뇌리를 친 것은, 미트리다테스의 살육이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을 구별하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외부의 시각에서 그들은 이미 하나였던 것이다. 친우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죽음을 떠올리며, 술피키우스는 원로원과 1계급을 없애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마리우스는 동방 전쟁에 눈을 빛낸다. 임페리움을 얻어 출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현직 집정관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이며, 그는 임페리움을 양도할 생각이 없다. 무엇보다 로마의 국고가 빈지 오래였다. 겨우 군대를 꾸린 술라가 로마를 떠나자 술피키우스는 평민회를 소집하고 법안을 상정한다. 바리우스 특별위원회에서 추방당한 이들을 귀환시키고, 새 이탈리아 시민권자와 해방노예를 각 트리부스에 골고루 배분하는 내용이었다. 전쟁 지휘권을 술라에게서 박탈하여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대가로, 노장군이 그의 법안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었다.

 

로마로 돌아온 술라가 술피키우스 법안을 무효화시키나 이는 폭력 사태로 번지고 만다. 마리우스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한 술라는 군단에게 돌아가고, 법안에 따라 마리우스는 지휘관이 된다. 현직 집정관에게서 임페리움을 빼앗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 공화정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로마로 진군한 술라는 인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코르넬리우스 법안을 제정하여 원로원과 기사들에게 권력을 돌려준다. 술피키우스 법안은 폐기되고 마리우스를 비롯한 이들을 반역자가 된다.

 

술라는 절대권력에서 만족감을 느끼지만 선거에서 자신의 사람을 심는 것에는 실패한다. 인민들은 로마에 군대를 끌고 온 일을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수석 집정관은 전쟁을 위해 아드리아 해를 건넌다. 한편 도주한 마리우스는 민투르나이에 이르고, 노장군의 명성은 킴브리족 노예를 수행원으로 붙여 그의 여행을 돕는다. 19명의 도피자는(술피키우스는 사망) 아이네리아에서 재회하고 시칠리아에 도착, 후일을 도모한다. 마리우스는 자신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함을 느끼고, 젊은 마리우스도 이를 알아차린다.

 

차석집정관인 킨나는 부재중인 술라를 탄핵하려 한다. 그의 법안은 첫째, 새 시민권자들을 트리부스별로 재배분하고 둘째, 도피자 19명의 사면과 귀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만여명이 마르스 평원에 모였다. 이에 앞서, 킨나의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수석집정관 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퇴역병사들을 고용한다. 이들은 군중에 칼을 들고, 백인조회의 수천명이 시체가 되었다. 로마 원로원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 학살사건은 옥타비우스의 날이라 불린다. 이제 폭력은 로마의 정치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킨나와 여섯 호민관들은 추방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고 군단을 모은다. 마리우스가 에트루리아에서 로마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들은 킨나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노장군에게 보낸다. 돌아온 세르토리우스는 마리우스의 정신이 무너졌음을 알리나 킨나는 믿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로마를 포위한다. 한편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군대는 로마 수비 병력의 핵심이 되지만, 식수원을 오염시켜 전염병을 퍼뜨린다. 마리우스의 군대는 노예와 해방노예들로 구성되며 장군의 묵인아래 잔학행위를 일삼는다. 킨나는 그제서야 마리우스의 광기, 복수에 대한 집착을 깨닫는다.

 

스트라보의 사망으로 그의 군대가 마리우스 휘하로 들어가자, 로마 원로원은 킨나(마리우스)와 협정을 맺는다. 술라의 법안은 폐기되고, 마리우스는 부재중투표로 집정관에 선출된다. 예언대로 일곱 번의 집정관임기가 시작된 것이다. 로마에 입성한 마리우스는 취임식을 빠르게 끝내고 복수를 시작한다. 카이사르 일가 또한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광증에 사로잡힌 영웅은 예언의 아이, 카이사르 2세를 유피테르 대제관으로 임명하여 미래를 묶어둔다. 그러나 영민한 눈빛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이다!

 

로마의 건국자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시대가 지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막이 올랐다. 역사가 스포일러지만, 윤색된 상상력이 그 간극을 채워주기에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에 대한 애정은 날로 더해간다. 마리우스의 몰락을 볼 수 없어 잠시 덮어두었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푹 빠져 읽었다. 역시 로물루스께서는 미천한 덕후를 보살피신다. 3부의 한국어판 제목은 『포르투나의 선택』으로 결정된 듯한데, 술라가 벌일 공포 정치는 어떠할까. 모두가 기다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성장과 정계 진출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까. 여름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왜 그런 것인지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저열하고 추잡스럽고 하찮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웠다. 마치 마리우스의 병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옮겨 다니는 듯했다. 나는 어떤가, 하고 세르토리우스는 생각했다. 권력을 향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악한 이 음모에 나도 가담하길 원하는가. 로마의 주인은 로마다. 하지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탓에 이제 사람들은 자기가 로마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_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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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1-28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신간으로 들아와서 냉큼 빌렸어요. 1권 :-) 좀 보다 괜찮으면 사려구요 :-)

에이바 2016-01-28 21:20   좋아요 1 | URL
초딩님 로마의 일인자도 보셨어요? 그게 1부고 풀잎관은 2부 격이에요. 원래는 1권, 2권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세 권으로 분권해서 나왔거든요. 첨부터 사 보셔도 되는데요 ㅎㅎㅎ 강추강추입니다

초딩 2016-01-28 21:24   좋아요 0 | URL
책 뒤 보다 아차했는데 ㅠㅠ 그러네요. 2부부터 읽으면 좀 그럴까요? ㅜㅜ

초딩 2016-01-28 21:26   좋아요 0 | URL
다른 분들을 위해 어서 반납하고 로마의 일인자부터 봐야겠어요 :-)

에이바 2016-01-28 21:35   좋아요 1 | URL
로마의 일인자부터 보시면 시리즈를 더 즐기실 수 있어요. 로마내외 정치와 풍속, 가문 간 관계와 인물의 사회적 위치와 야망 등이 1부에서 충분히 드러나고 있거든요. 정말 재밌습니다, 초딩님. 웰컴 투 롬!

붉은돼지 2016-01-28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잎관 다 보셨군요. 저는 오래전에 1귄보다가 중단한지 오렌지 ㅜㅜ

에이바 2016-01-28 22:12   좋아요 1 | URL
...네? 붉은돼지님... 사과하세요! 서재에서 로마 공화정을 수호하는 건담전사들에게 사과하세요! ㅜㅜ ㅋㅋㅋ

붉은돼지 2016-01-28 22:20   좋아요 1 | URL
에이바님 공화국을 수호하던 전사들 사지 절단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ㅜㅜ
아아아아아 공화국의 앞날이 바람앞에 등불이요, 백척간두에 섰습니다 ㅜㅜ

에이바 2016-01-28 22:27   좋아요 2 | URL
(쨍그랑!) 붉은돼지님, 이럴 때 일수록 강해지셔야 합니다. 원정단을 모아 풀잎관을 엮어 드릴테니 로마를 수호해주시옵소서.... 풀잎관을 읽어주시옵소서.....

살리미 2016-01-29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댓글 보다가 너무 웃겨서.... 마시던 커피를 흘리는 사태가 ㅠㅠ
붉은돼지님의 그 귀엽던 건담전사들이 사지 절단되었다는 비보에 왜 이리 웃음이 나는 건지요 ㅎㅎ 로마를 사랑하시는 에이바님의 열정도 함께요 ㅋㅋㅋㅋ

에이바 2016-01-29 13:45   좋아요 0 | URL
스타워즈 팬인 붉은돼지님께 포스를 이용한 드립을 날리고 싶었지만 제가 잘 몰라서... 어쩔 수 없이 풀잎관 드립을... ㅜㅜ
 

음악이나 시, 영화나 그림 같은 예술의 힘을 느낄 때는 그로 인해 내 감정이 멜랑콜리해질 때다. 대체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인데, 리뷰에 스웨덴어로 부르는 노래를 링크한답시고 켄트의 앨범을 뒤적거리는데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스웨덴과 관련된 추억들, 일상적인 과거는 시간이 덧칠되어서인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제목에 대한 질문은,

켄트 노래를 좋아하세요? 스웨덴어를 아세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까지를 어젯밤에 쓰고선 음주도 안 했는데 감정에 취했는지 두 페이지를 줄줄 써내려갔다. 역시 밤에 쓰는 글은 조심해야 한다. 일단 지우고서,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을 읽는 건 좋은데 생각하기가 싫다. 게을러지는 모양, 아마도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보니 도피처인 독서에서도 어떤 기쁨을 찾기가 힘들어지는 걸까? 슬프다.


그리고선 최근의 나의 리뷰에 대한 불만을 썼다. 붕 떠 있는 기분-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니 퀄이 하급인 것이다. 정보도 찔끔, 감상도 찔끔. 깔끔하고 말끔한 글을 쓰고 싶은데 마음 같지 않다. 그래서 그냥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감정 얘기만.




『닥터 글라스』 리뷰에서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링크한 켄트의 노래다. 마지막 장면의 글라스에게 보내는 내 위로라고 할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은 ‘글라스는 사실 단호하고 차가운 인물이다.’ 이다. 스스로의 독서가 충분치 못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재독, 삼독해도 하고싶은 표현이 두루뭉실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글라스는 ‘어떤 면에서는’ 단호하고 차가운 인물이 맞다. 의사의 의무를 들어 낙태 수술을 요청하는 여성들을 돌려보내는데, 진짜 의무를 중시한다기 보단 번거로운 일이 생기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느낌이다. 현재의 생활에 큰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더한 물욕이나 명예욕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헬가에게는 달랐던 걸까? 헬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위’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순전한 사랑이었나? 아니면 목사에 대한 혐오가 먼저였을까? (기억에 의존하여 쓰는 중이라 왜곡이 있을 수 있다.)


번역 노트에서도 이 얘기가 나오는데, 리뷰에서도 썼듯이 글라스는 천성적인 낭만주의자이다. 스물 셋에 의학 학위를 따겠다는 목표 설정과 결국 이루었다는 것이 배경이 된다. ‘정상적인 길(글라스의 표현)’을 걸었던 사람과 그 길을 좀 더 일찍 걷게 된 영재의 차이는 관심사와 행위에서 드러난다. 소년의 욕구와 성인의 욕구가 같을 수는 없는 법. 성인들이 신체적 욕망과 그 해소를 얘기할 때, 소년은 막연한 사랑을 ‘꿈꾼다’. 그 꿈은 연인이 될 뻔한 여성의 사망으로 지속된다. 첫 키스와 말랑이는 심장박동을 남긴, 축제의 연인. 여기서 주인공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썸녀가 익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짐에도 흔들리지 않고 학위를 따내는 것이다.




-이쯤에서 험버트 험버트가 떠오르지만 그 변태 싸이코랑 다른 것은, 적어도 글라스는 (여기서 밝혀진 바로는) 성인 여성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고보니 글라스는 스물 셋에 첫 키스였잖아? 험버트처럼 유년 시절의 강렬한 기억이었다면...? 설마요.


어쨌든 글라스가 학위를 딴 이후, 어떤 일에도 열의를 잃어버리는 것을 보면 그 죽음의 여파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늦된 연애감정의 싹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데다(그로부터 10년이 지남) 자신의 외모를 비관하고 있기 때문에 헬가의 남자인 클라스 레케를 보고도 좀 방향이 다른 질투를 한다. 헬가의 눈길이 향하는 레케도 부럽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청춘을 누린 레케를 질투한다. 자신과 달리, 사회·신체적 발달에 따른 감정 발산을 제대로 한 것 말이다. 글라스의 경우, 성인으로서의 욕구가 뒤늦게 발현되었지만 손쉬운 해소는 거부감이 들기에 순결을 지키고 있다. 레케처럼, 이상적인 외모를 가졌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그 점이 글라스의 감정이 향하는 방향이다.


그렇다고 글라스가 연애경험이 없다는데 열등감을 느끼느냐?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의 사회적 지위는 여성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며, 호감을 표시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여기서도 메르텐스 양이 그러한데, 그녀의 외모나 조건이 글라스가 생각해온 이상적인 여성에 가깝지만 친구 마르켈이 관심을 표하자, 그럼 니가 잘 해봐 라고 하는 것이다. (헬가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님) 마르켈이 말하길, 메르텐스 양은 너를 좋아해라고 하는데도! 그러니까 글라스는 그녀(the One)을 찾지만- 금사빠도 아니고, 연애에 안달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선택적 솔로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니까 천성적인 낭만주의자라는 것이다. 사랑의 꿈을 꾸는.


헬가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글라스는 헬가를 왜 사랑하게 되는가?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3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남편에게 지속적인 강간(글라스의 표현)을 당한다는 것이, 그에게 기사도를 일깨운 걸까? 글쎄… 이 소설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글라스에게 혐오를 주는 인상을 가진 목사와 마주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헬가를 만나기 전에도 이미, 그레고리우스는 어린 글라스의 혐오 대상이었다는 얘기다. 만나서도 늘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그냥 짜증나는 인물이다. 이 점이 살해 동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낙태를 청하는 환자들도 거절했던 글라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범죄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헬가 역시 결혼 전에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길러진 탓에, 남자의 유혹을 받은 자신이 (막연하지만) 달라졌다고. 뭔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남자가 용서를 청해도 거부했다.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그를 찾아갔지만 되돌아오는 등 안타까운 이야기… 이후로 신앙에 더 매달리게 되었고, 오래 전부터 알던 그레고리우스 목사가 부모를 통해 청혼한 것이었다. 여기엔 어느 정도 목사의 권위와 권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헬가 또한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역겨운 걸 어떡하나. 사랑과 친애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종교가 너무도 옳기에 모든 것을 의무화시키는 30살 차이의 남편과의 잠자리가 말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 자신의 욕망을 죄라고 생각했던 어리숙한 여인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헬가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표현은, 성인으로서의 욕망을 깨달은 글라스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글라스는 정상인답게 이혼하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목사는 예배 중에 의무를 들어, 반복해서 그녀를 벌할 것이라고. 이혼도 안 해줄거라고 헬가가 답한다. 아무튼 문제는 목사가 신에 대한 의무를 들어, 아내에게 관계를 강요하고 아내는 그게 싫은데 응해야 하고, 이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헬가의 정신이 죽어가는 것이다. 글라스는 목사를 찾아, 아내의 건강이 염려되니 잠자리를 좀 삼가라 하지만 이 말도 무시. 결국 의사는 목사의 나이와 건강을 들먹이면서 복상사 얘기를 꺼내고, 헬가는 그제서야 남편 없는 6주간의 휴가를 얻는다. 이쯤되면 독자도 목사가 역겹다.


글라스의 감정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을 통해 증폭된다. 공상과 망상 속에서 감정의 해일에 휩쓸리는 의사는 욕망을 반영하는 묘한 꿈들을 꾼다. 그녀가 보고 싶어 목사가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본다.(그러면 찾아올 테니까) 털어놓을 데 없는 목소리들은 도덕을 논했다가, 완벽한 범죄를 꿈꾸었다가, 두려워했다가, 괴로워한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짐작이라도 했던 걸까? 그가 만들어 놓은 죽음의 숨결은 적절한 장소에서 멋지게 임무를 완수한다.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장애물을 치워버리면 장밋빛은 아니더라도 좀 광명이 비칠 줄 알았더니- 사랑이라는 감정은 한 다리, 두 다리를 거쳐도 퇴색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사람의 일이란,


모른다는데 의의가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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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01-27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가끔 (이렇듯 텍스트와 관련해 씌어진 꼼꼼한 페이퍼도 좋지만)

에이바 님의- 전적으로!- 사적인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ㅎㅎ


뭐, 그렇다는 말입니다요....^^

에이바 2016-01-28 09: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얘기는 지양하는 편이지만 글쎄요,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ㅋㅋㅋ

다락방 2016-01-2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수철님 의견과 같습니다. 아, 물론 리뷰도 고퀄입니다!!

에이바 2016-01-28 09:36   좋아요 0 | URL
한수철님과 다락방님 댓글에 우쭐해집니다. 코가 길어지는 느낌!

서니데이 2016-01-27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에이바 2016-01-28 09:36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댓글이 늦었죠. 좋은 아침입니다. ^^

cyrus 2016-01-2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이나 감상문을 쓰는 데 이렇게 써야 할 규칙이 없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알라딘 이웃님들의 의견들 덕분에 그 사실을 깨달았습죠. 에이바님의 글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으니까 글에 대한 불만족을 가질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

에이바 2016-01-28 09:39   좋아요 0 | URL
cyrus님 감사합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글이지만, 스스로 독자이기도 하기에 제 글엔 보통 유한 평을 주는데요. (팔은 안으로 굽으니까) 요즘은 썩 마음에 차질 않아요.

AgalmA 2016-01-27 1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불안감 없이 모르는 편안함은 언제 갖게 될까요...

에이바 2016-01-28 09:43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 그때 제 답변은 ˝모르니까 더 좋은 거예요˝ 였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갈마님의 불안을 덜만한 방법은 비우시는 것, 저는 반대로 좀 더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저야말로 자기 반성,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닥터 글라스 아티초크 픽션 1
얄마르 쇠데르베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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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동트기 직전에는 언제나 공기에 떨림이 있다. _30쪽


무더운 여름, 글라스는 스톡홀름 시내를 산책하다 그레고리우스 목사가 걸어오는 것을 본다. 목사의 외모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자신의 환자이기에 인사를 건넬 수밖에.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를 한 사람의 머리를 지팡이로 때렸다는 쇼펜하우어의 일화를 떠올린다. 그레고리우스가 어찌나 싫었던지 글라스는 의지의 힘으로 그를 죽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리란 생각을 한다.


며칠 후 목사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헬가가 찾아와 남편이 혐오스럽다고 고백한다. ‘남편의 권리이자 자신의 의무’인 부부관계가 너무도 끔찍하다고 말이다. 그들이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도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글라스를 존경하는 계기가 된 일화도, 이는 의사를 움직여 목사에게 금욕을 권고하게 한다. 서른셋의 남자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기쁨에 마음을 쓰게 된다.


글라스는 욕망을 자제하는 타입이다. 어려서부터 포부가 대단했으며, 스물셋에 의학 학위를 따자 열의를 잃어버린다. 또래보다 일렀던 사회적 성취는 감정적인 면에서는 미숙했다. 다른 성인남성들이 욕망을 토로할 때, 막연한 꿈과 욕망이 있었을 뿐이다. 천성적인 낭만주의자라 할 수 있는 그는, ‘사랑의 꿈’을 믿었고 박제돼버린 스물셋의 첫 키스를 오랫동안 간직한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아름다움을 알기에, 가질 수 없는 여인에게만 끌린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남성의 돈과 명성보다는, 사랑을 쉽게 얻는 남성에게 질투한다. 헬가의 남자인 클라스 레케를 보면서 말이다. 글라스가 느끼는 청춘에의 결핍- 자신이 정상에서 벗어난 느낌을 떠올리게 하는 레케의 이상적인 외모와 ‘잠이 들었던’ 헬가를 깨운 그의 순수한 매력… 그러나 이 감정은 그리 날카롭지 않다. 도리어 자신의 권고를 무시하고 아내에게 의무를 이행할 것을 강제한 목사에 대한 혐오, 이를 끝낼 어떤 행위를 꿈꾸게 된다.


글라스는 사실 단호하고 차가운 인물이다. 임신과 출산이 초래할 고통과 불안을 알면서도, 의사의 ‘의무’를 내세워 환자들을 돌려보낸다. 자신을 사모하는 메르텐스 양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해 별다른 반응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마르켈과 비르크와 대화는 나누지만 마음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여름 밤의 일기가 중요하다. 행복과 구원을 상징하는 ‘등불’을 외치며 깨어난 그 밤, 내면의 목소리들이 벌이는 수많은 대화들. 아주 일품이다.


무의식, 꿈은 강처럼 흘러갔지만 글라스는 그 꿈자락을 기억하고 있었고 외면하지 않았다. 시곗바늘이 없는 아름다운 회중시계 안에 이 모든 일을 끝낼 무언가를 넣었다는 사실은, 글라스의 사랑과 인생-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움, 명예와 지위- 두려움조차 불사할 수 있는 강렬한 빛. 아니, 희미한 가짜일까? 어떤 거름망도 없이, 그의 기록은 내면에서 나타났다 사그라들고 발전되는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담고 있다.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리(낙태, 안락사)와 도덕과 살인에 관한 이슈들은 지금도 불같은 논의를 일으킬 것이다. 1905년에 이런 글을 쓰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이 작품의 진가는 여름에서 가을, 겨울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글라스의 내면 묘사에 있다. 기존의 도덕 체계를 혐오하며 홀로 살아가는 이 남성은 어쩌면, 1905년 그 당시보다도 현대에 더 어울릴 법한 인물이다. 소설의 마무리까지… “내일 쓰인 소설”이라는 윌리엄 샌섬의 표현이 어울린다.


꿈과 현실이 하나가 되는 순간- 우리는 기쁨을 느낄 것인가, 두려움을 느낄 것인가? (별점 4.5/5.0)


 


-책을 펼치면 마주하는 이미지들에서 제발츠의 『아우스터리츠』와 브르통의 『나자』를 떠올렸다. 「번역노트」를 보니 이 작가들에 대한 오마주인 동시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라 한다. 스톡홀름의 이미지들을 위해…

-「번역노트」에 대한 중역에 대한 이야기도 읽어볼 만 하다.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과 함께 읽었다. 아마도 글라스 내면의 ‘흐름’이 라벨의 흐르는 음표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추천은 스웨덴 국민 밴드 Kent의 노래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도 잘 어울린다.


기본적인 생존의 차원을 넘어선 정신문명은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예술과 문학, 음악도 모두 그곳에서 흘러나온다. (...) 효과적이든 아니든 장식용으로 또는 즐거움을 위해 제작된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모두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온다. (...) 그 근원의 이름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향한 꿈이다. _27,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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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토끼 2016-01-26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바님 좋은 밤 되세요

에이바 2016-01-26 21:0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심심토끼님도 따뜻한 밤 되세요.^^

2016-01-27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8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