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의 두번째 쇼팽 콩쿠르 실황 앨범입니다. 작년에 발매된 앨범에는 전주곡, 녹턴, 소나타, 폴로네즈(폴로네즈는 갈라 콘서트, 나머지는 컴피티션 연주)가 실렸는데요. 이번에 발매되는 앨범에는 갈라에서 연주한 협주곡 1번과 컴피티션 중에 연주한 연습곡, 환상곡, 발라드, 왈츠, 마주르카가 실립니다. 스케르초는 빠졌네요... 피협은 온라인 스트리밍으로도 제공되었던 첫날 갈라 연주입니다. 갈라 콘서트는 사흘간 열렸고, 이틀과 사흘째 공연은 라디오로 방송되었습니다.

 

이 앨범은 쇼팽 협회 기념반인 블루 시리즈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16회 콩쿠르 수상자들부터 나오기 시작한 앨범인데, 컴피티션이 끝나고 수상자들이 원하는대로 편집한 버전입니다. 올해 2, 3위인 아믈랭과 리우의 음반은 이미 2cd로 발매되었고요. 조성진은 우승자 특전으로 DG(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음반 한 장이 나왔기 때문에, 이 음반에 들어가지 않은 곡들이 수록됩니다. 참고로 쇼팽 콩쿠르 실황 앨범의 수익은 모두 협회에게 돌아갑니다. 높은 앨범 판매량으로 연주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앞으로 찾아올 명성과 연주 기회들입니다. 음악성, 연주능력 그리고 입증된 시장성 때문이죠.

 

어제 있었던 기자회견과 관련 기사에 따르면, 조성진은 DG와 5년간 독점 계약을 맺고 5장의 음반을 낼 예정입니다. 4월 녹음 예정인 첫번째 정규 음반은 쇼팽 앨범인데요. 현재 연주자의 레퍼투아 중 가장 강력하고(?) 색깔이 확실하기 때문일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조금은 안전하게 가는 것도 좋겠죠. 레코딩 앨범에는 정명훈이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 하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네개의 발라드, 왈츠, 마주르카&타란텔라 등이 수록될 예정이라 합니다. 컴피티션의 긴장이 느껴지는(많이 들으면 갈라 버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황 앨범과 다른 분위기일 듯 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투어중인 콘서트 후기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조성진의 연주가 나날이 단단해져간다고 합니다. 무섭도록 성장하는 조성진... 오늘은 쇼팽 콩쿠르 우승자 갈라 콘서트 투어 마지막 날이기도 한데, 2시와 8시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립니다. 원래 8시 공연 밖에 없었는데 2시 공연이 추가되었거든요. 하루에 두 번이나 연주할 피아니스트들이 대단합니다. 

 

현재 구입할 수 있는 '발매된' 조성진의 앨범은 2015년 쇼팽 콩쿠르 실황 앨범 두 가지와 2009년 하마마츠 국제 콩쿠르 실황 앨범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하우스콘서트에서 연주한 음원이 있고요. (이건 저도 아직 안 샀어요) 하마마츠는 야마하 본사가 위치한 곳인데, 3년마다 개최되는 이 콩쿠르에서 조성진이 최연소(당시 15세)이자 동양인 최초로 우승을 거머쥐었죠. 더불어 군면제도... 앨범에는 실려있지 않지만 그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입니다. 하마마츠 콩쿠르 실황앨범은 타 사이트에서 구입할 수 있었는데 현재 일시품절입니다. 아마존 재팬에서 구입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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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6-02-02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질러야지요!!! 질러야지요!!! 에이바님이 알려주시니 ㅎㅎ

에이바 2016-02-02 22:14   좋아요 1 | URL
기다리던 피협 앨범이 나와서 기쁘지만 스케르초가 빠진 것이 너무 아쉬워요 ㅜㅠㅠㅠ

akardo 2016-02-02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상 속 연주도 멋지군요. 앳된 얼굴로는 상상이 안되는 멋진 연주......쇼팽 콩쿠르보다 어릴 때라 그런가 귀염티가 많이 나네요. ㅎ 이번 새로 나온 앨범도 사야겠지만 저 앨범도 사고 싶어집니다ㅠㅠ;;;

에이바 2016-02-02 22:16   좋아요 1 | URL
1악장만 있는 것이 아쉽죠... 저 앨범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없고 파이널 연주였던 베토벤 피협 황제가 수록되어 있어요. 일본 앨범이라 가격이 좀 나가긴 하는데 좋아요. ㅎㅎ 타 사이트나 알라딘에 한번 문의해보심이 어떨까요? ㅠㅠㅠㅠㅠㅠ
 

피아니스트에게 왼손 연주란 어떤 의미일까? 전공자도 아니고, 이제 그 장르 입문자로서 보면 이렇다. 왼손과 오른손을 그대로 건반 위에 올리면 왼손은 낮은 음역, 오른손은 높은 음역이 된다. 선율은 높은 음으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왼손은 자연스럽게 반주를 맡는다. 물론 곡에 따라 왼손이 오른손보다 높은 음역대에 위치하기도 한다. 어쨌든 피아노를 연주하는 입장에서 왼손보다는 오른손의 손가락 움직임에 더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최근 관심 있게 지켜보는 피아니스트의 공연 리뷰를 보면 왼손의 탄탄한 연주가 언급된다. 오른손의 자유로운 루바토를 위해 왼손의 정박을 중시한 쇼팽, 그의 까다로운 작품을 연주하는 입장에서 참 좋은 칭찬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예술계통 종사자 중엔 왼손잡이가 많아 보이지만) 왼손이 주선율을 맡는 피아노 작품은 얼마나 될까? 열 개의 손가락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건반의 음역대가 넓은 작품을 제외하고 말이다. 어쨌든 왼손 위주의 작품은 스크랴빈의 곡, 비트겐슈타인(그 철학자의 형)을 위해 라벨이 쓴 작품 정도가 떠오른다.



위 영상의 8분 38초부터 보면, 필립 카사르가 샤마유의 왼손 연주를 칭찬한다. (카사르는 드뷔시, 슈베르트 스페셜리스트로 여겨지는 듯 하다) 카사르가 파리 음악원을 졸업할 때 스승이었던 주느비에브 주아-뒤티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얘야, 아직 왼손 연주에서 더 훈련할게 남았구나.” 아주 예리한 조언이었다고. 그는 샤마유의 지난 연주활동, 예를 들어 리스트의 《순례의 해》 등에서도 왼손 연주의 풍성함을 봐 왔다며 칭찬한다. 왼손잡이냐 물었더니 샤마유는 오른손잡이라고. 이 젊은 피아니스트는 카사르의 칭찬에 기쁨을 표현하면서 말한다. 그 역시 왼손 연주가 곡을 이끌어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보통 디테일한 오른손 연주에 신경 쓰게 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일까? 반주가 아닌 연주, 왼손의 중요성… 프로의 세계는 알수록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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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01-2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오, 신선한 이야기인데요!^^

그나저나 `루바토`라... 괜히 외워 두고 있어야겠습니다....

에이바 2016-01-29 13:29   좋아요 0 | URL
왠지 음악용어를 알고 있으면 유식해진 것 같지 않나요? 루바토... ㅎㅎ

오거서 2016-01-2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 전공자 아니면 악보를 봐가면서 피아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왼손의 중요성을 안다고 봅니다. 그런 기교를 필요로 하는 음악은 언급하셨다시피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감상자한테 참신한 주제의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에이바 2016-01-29 13:34   좋아요 0 | URL
막연하게 연주를 감상하다가 (저도 악보를 볼 줄 알지만, 진지하게 들은지 얼마 안 되어서요) 연주에서의 구조적인 문제, 즉 연주자는 어떻게 관객에게 자신의 해석을 설득시킬 것인가? 같은 면에서 흥미로웠습니다. 왼손의 기교보다도, 저는 단순히 왼손이 주된 역할을 하는 작품이 궁금했어요.ㅎㅎ

살리미 2016-01-2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피아노를 조금 배웠습니다만, 저는 심각한 오른손잡이여서 왼손치기가 너무 어려웠었어요. 왼손의 힘이 약해서 현란한 연주는 절대로!! 할 수 없고 쿵쿵 반주나 겨우 할 수 있었죠 ㅎㅎ
왼손이 주 선율을 맡는 작품도 있긴 하군요. 이 글을 읽고서야 저도 주로 피아니스트들의 오른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네요 ㅎㅎ
그리고 인터뷰 영상... 하나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샤마유는 너무 착하고 순진해보이네요 ㅎㅎ 은근 매력남!

에이바 2016-01-29 13:37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악기들을 배우긴 했지만 단순한 취미였기에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보통 현악기나 목관악기를 피아노와 함께 배운다고 치면, 피아노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더라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작품을 해석하게 되나 봐요. 아는 사람 눈과 귀엔 그게 보이고 들린다는군요.

물고기자리 2016-01-29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말로 연주를 위한 연주군요^^ 오늘 남은 시간은 왼손처럼 살아볼까 해요:) 마침 잠시 쉬며 커피 한 잔과 함께 읽기에 좋은 글이었어요.. ㅎ

살리미 2016-01-29 13:39   좋아요 1 | URL
물고기자리님~ 저도 커피 한잔 하던중에 음악도 듣고 물고기자리님도 만나고 ㅎㅎ
커피숍에 와 있는 기분인걸요? ㅎ

에이바 2016-01-29 13:44   좋아요 1 | URL
라벨 음악 아름답죠...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서 좋아요. 설득당하는 기분요. 지드의 말처럼, 설득하고 유혹하는 쇼팽으로 진지한 클래식에 입문하니, 어렸을 땐 몰랐던 의문들이 생겨요.ㅎㅎ

물고기자리 2016-01-29 13:44   좋아요 1 | URL
에이바 님이 아니라 깜놀^^ㅋ

그치만 무척 반갑고 좋네요ㅎㅎ
카페에서 한 잔 하는 느낌이에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악과 더불어..^^

프레이야 2016-01-29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왼손이 주선율을 이끄는 곡이 따로 있었군요. 오른손의 자유로운 루바토를 위한 왼손의 정박,이라는 글귀가 쏘옥 들어옵니다. 피아노 치는 작은딸이 좋아하는 쇼팽이 그걸 중시했군요. 잘 읽었어요.

에이바 2016-01-29 18:15   좋아요 0 | URL
쇼팽이 즉흥연주의 대가였다고 해요. 한번은 자신은 정박을 지키고 있다며 지인과 싸우기도 했는데 결국 메트로놈으로 쟀다고 해요. 누가 옳았는지는 비밀입니다. ㅎㅎ

다락방 2016-01-29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짧지만 지적이고 멋진 글이에요, 에이바님. 이래서 에이바님 글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피아니스트, 왼손, 이란 단어들을 들으니 `시드니 셀던`의 소설이 생각나요. 아마도 [별빛은 쏟아지고] 였을 것 같은데요,

그 소설속에서 여자주인공은 피아니스트 남자와 결혼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피아니스트는 되게 유명하고 세계 각지로 공연을 다니는지라 간혹 여자가 외로워했어요. 이 여자는 건축설계 일을 했는데, 여자의 남자동료 한 명이 그런 여자를 안쓰럽게 여겨 피아니스트 남편의 손목을 자른다..는 얘기가 나와요. 일전에 자기들끼리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어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사고로 왼 손을 잃었는데 오른손 만으로도 훌륭한 연주를 했다는 이야기요. 그래서 이 동료 남자는 남편의 오른손을 잘라버려요...


결국 남편은 피아니스트 생명이 끝장나는데, 에이바님의 이 글을 읽으니 그 이야기는 다르게 진행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드니 셀던이 아직 살아서 그 소설을 쓰기 전이었고, 에이바님의 글을 읽었다면 말이죠.

에이바 2016-01-29 18:2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별 것 아닌 글에 이렇게 극찬하시면... ☞☜ 말씀하신 셀던의 소설은 거의 고어 수준인데요. 피아니스트에게 손을 앗아가는 건 죽이는 것보다 더 가혹한 일이잖아요. ㅠㅜ 정말 상상할수록 몸서리쳐지네요... 슈만의 경우가 그래서 피아노를 포기해야 했고, 스크랴빈은 왼손 비중이 높은 곡을 작곡했지만... 레온 플레이셔는 오른손 마비로 연주계를 떠나 제자를 양성하고, 결국 부단한 노력 하에 양손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죠.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시드니 셀던이 플라이셔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 주었더라면! 셀던의 이름 참 오랜만에 들어요 ㅎㅎ

만병통치약 2016-01-2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 국가공인 4단의 입장에서 보면 저 피아니스트의 손이 참 곱군요......^^

오거서 2016-01-29 14:48   좋아요 0 | URL
만병통치약 님은 미처 몰라본 피아노 실력자였군요. 손이 곱다는 디테일까지 캐치하다니 국가공인 4단이라 다르네요 ^^

에이바 2016-01-29 18:22   좋아요 0 | URL
역시 만병통치약님...! 국가공인 유단자다우신 코멘트입니다. ㅎㅎ

사과나비🍎 2016-01-2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좋은 연주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에이바 2016-01-29 18:2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사과나비님^^

서니데이 2016-01-29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에이바 2016-01-29 18:2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AgalmA 2016-01-29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왼손은 거들 뿐 - 슬램덩크 명대사
한유주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소설 생각도 잠시...

에이바 2016-01-29 20:56   좋아요 0 | URL
안선생님...! 피아노가 치고 싶어요...!!! 전 정대만을 좋아했었죠. ㅎㅎㅎ
 

음악이나 시, 영화나 그림 같은 예술의 힘을 느낄 때는 그로 인해 내 감정이 멜랑콜리해질 때다. 대체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인데, 리뷰에 스웨덴어로 부르는 노래를 링크한답시고 켄트의 앨범을 뒤적거리는데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스웨덴과 관련된 추억들, 일상적인 과거는 시간이 덧칠되어서인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제목에 대한 질문은,

켄트 노래를 좋아하세요? 스웨덴어를 아세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까지를 어젯밤에 쓰고선 음주도 안 했는데 감정에 취했는지 두 페이지를 줄줄 써내려갔다. 역시 밤에 쓰는 글은 조심해야 한다. 일단 지우고서,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을 읽는 건 좋은데 생각하기가 싫다. 게을러지는 모양, 아마도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보니 도피처인 독서에서도 어떤 기쁨을 찾기가 힘들어지는 걸까? 슬프다.


그리고선 최근의 나의 리뷰에 대한 불만을 썼다. 붕 떠 있는 기분-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니 퀄이 하급인 것이다. 정보도 찔끔, 감상도 찔끔. 깔끔하고 말끔한 글을 쓰고 싶은데 마음 같지 않다. 그래서 그냥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감정 얘기만.




『닥터 글라스』 리뷰에서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링크한 켄트의 노래다. 마지막 장면의 글라스에게 보내는 내 위로라고 할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은 ‘글라스는 사실 단호하고 차가운 인물이다.’ 이다. 스스로의 독서가 충분치 못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재독, 삼독해도 하고싶은 표현이 두루뭉실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글라스는 ‘어떤 면에서는’ 단호하고 차가운 인물이 맞다. 의사의 의무를 들어 낙태 수술을 요청하는 여성들을 돌려보내는데, 진짜 의무를 중시한다기 보단 번거로운 일이 생기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느낌이다. 현재의 생활에 큰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더한 물욕이나 명예욕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헬가에게는 달랐던 걸까? 헬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위’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순전한 사랑이었나? 아니면 목사에 대한 혐오가 먼저였을까? (기억에 의존하여 쓰는 중이라 왜곡이 있을 수 있다.)


번역 노트에서도 이 얘기가 나오는데, 리뷰에서도 썼듯이 글라스는 천성적인 낭만주의자이다. 스물 셋에 의학 학위를 따겠다는 목표 설정과 결국 이루었다는 것이 배경이 된다. ‘정상적인 길(글라스의 표현)’을 걸었던 사람과 그 길을 좀 더 일찍 걷게 된 영재의 차이는 관심사와 행위에서 드러난다. 소년의 욕구와 성인의 욕구가 같을 수는 없는 법. 성인들이 신체적 욕망과 그 해소를 얘기할 때, 소년은 막연한 사랑을 ‘꿈꾼다’. 그 꿈은 연인이 될 뻔한 여성의 사망으로 지속된다. 첫 키스와 말랑이는 심장박동을 남긴, 축제의 연인. 여기서 주인공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썸녀가 익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짐에도 흔들리지 않고 학위를 따내는 것이다.




-이쯤에서 험버트 험버트가 떠오르지만 그 변태 싸이코랑 다른 것은, 적어도 글라스는 (여기서 밝혀진 바로는) 성인 여성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고보니 글라스는 스물 셋에 첫 키스였잖아? 험버트처럼 유년 시절의 강렬한 기억이었다면...? 설마요.


어쨌든 글라스가 학위를 딴 이후, 어떤 일에도 열의를 잃어버리는 것을 보면 그 죽음의 여파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늦된 연애감정의 싹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데다(그로부터 10년이 지남) 자신의 외모를 비관하고 있기 때문에 헬가의 남자인 클라스 레케를 보고도 좀 방향이 다른 질투를 한다. 헬가의 눈길이 향하는 레케도 부럽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청춘을 누린 레케를 질투한다. 자신과 달리, 사회·신체적 발달에 따른 감정 발산을 제대로 한 것 말이다. 글라스의 경우, 성인으로서의 욕구가 뒤늦게 발현되었지만 손쉬운 해소는 거부감이 들기에 순결을 지키고 있다. 레케처럼, 이상적인 외모를 가졌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그 점이 글라스의 감정이 향하는 방향이다.


그렇다고 글라스가 연애경험이 없다는데 열등감을 느끼느냐?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의 사회적 지위는 여성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며, 호감을 표시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여기서도 메르텐스 양이 그러한데, 그녀의 외모나 조건이 글라스가 생각해온 이상적인 여성에 가깝지만 친구 마르켈이 관심을 표하자, 그럼 니가 잘 해봐 라고 하는 것이다. (헬가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님) 마르켈이 말하길, 메르텐스 양은 너를 좋아해라고 하는데도! 그러니까 글라스는 그녀(the One)을 찾지만- 금사빠도 아니고, 연애에 안달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선택적 솔로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니까 천성적인 낭만주의자라는 것이다. 사랑의 꿈을 꾸는.


헬가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글라스는 헬가를 왜 사랑하게 되는가?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3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남편에게 지속적인 강간(글라스의 표현)을 당한다는 것이, 그에게 기사도를 일깨운 걸까? 글쎄… 이 소설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글라스에게 혐오를 주는 인상을 가진 목사와 마주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헬가를 만나기 전에도 이미, 그레고리우스는 어린 글라스의 혐오 대상이었다는 얘기다. 만나서도 늘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그냥 짜증나는 인물이다. 이 점이 살해 동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낙태를 청하는 환자들도 거절했던 글라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범죄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헬가 역시 결혼 전에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길러진 탓에, 남자의 유혹을 받은 자신이 (막연하지만) 달라졌다고. 뭔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남자가 용서를 청해도 거부했다.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그를 찾아갔지만 되돌아오는 등 안타까운 이야기… 이후로 신앙에 더 매달리게 되었고, 오래 전부터 알던 그레고리우스 목사가 부모를 통해 청혼한 것이었다. 여기엔 어느 정도 목사의 권위와 권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헬가 또한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역겨운 걸 어떡하나. 사랑과 친애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종교가 너무도 옳기에 모든 것을 의무화시키는 30살 차이의 남편과의 잠자리가 말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 자신의 욕망을 죄라고 생각했던 어리숙한 여인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헬가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표현은, 성인으로서의 욕망을 깨달은 글라스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글라스는 정상인답게 이혼하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목사는 예배 중에 의무를 들어, 반복해서 그녀를 벌할 것이라고. 이혼도 안 해줄거라고 헬가가 답한다. 아무튼 문제는 목사가 신에 대한 의무를 들어, 아내에게 관계를 강요하고 아내는 그게 싫은데 응해야 하고, 이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헬가의 정신이 죽어가는 것이다. 글라스는 목사를 찾아, 아내의 건강이 염려되니 잠자리를 좀 삼가라 하지만 이 말도 무시. 결국 의사는 목사의 나이와 건강을 들먹이면서 복상사 얘기를 꺼내고, 헬가는 그제서야 남편 없는 6주간의 휴가를 얻는다. 이쯤되면 독자도 목사가 역겹다.


글라스의 감정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을 통해 증폭된다. 공상과 망상 속에서 감정의 해일에 휩쓸리는 의사는 욕망을 반영하는 묘한 꿈들을 꾼다. 그녀가 보고 싶어 목사가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본다.(그러면 찾아올 테니까) 털어놓을 데 없는 목소리들은 도덕을 논했다가, 완벽한 범죄를 꿈꾸었다가, 두려워했다가, 괴로워한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짐작이라도 했던 걸까? 그가 만들어 놓은 죽음의 숨결은 적절한 장소에서 멋지게 임무를 완수한다.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장애물을 치워버리면 장밋빛은 아니더라도 좀 광명이 비칠 줄 알았더니- 사랑이라는 감정은 한 다리, 두 다리를 거쳐도 퇴색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사람의 일이란,


모른다는데 의의가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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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01-27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가끔 (이렇듯 텍스트와 관련해 씌어진 꼼꼼한 페이퍼도 좋지만)

에이바 님의- 전적으로!- 사적인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ㅎㅎ


뭐, 그렇다는 말입니다요....^^

에이바 2016-01-28 09: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얘기는 지양하는 편이지만 글쎄요,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ㅋㅋㅋ

다락방 2016-01-2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수철님 의견과 같습니다. 아, 물론 리뷰도 고퀄입니다!!

에이바 2016-01-28 09:36   좋아요 0 | URL
한수철님과 다락방님 댓글에 우쭐해집니다. 코가 길어지는 느낌!

서니데이 2016-01-27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에이바 2016-01-28 09:36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댓글이 늦었죠. 좋은 아침입니다. ^^

cyrus 2016-01-2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이나 감상문을 쓰는 데 이렇게 써야 할 규칙이 없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알라딘 이웃님들의 의견들 덕분에 그 사실을 깨달았습죠. 에이바님의 글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으니까 글에 대한 불만족을 가질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

에이바 2016-01-28 09:39   좋아요 0 | URL
cyrus님 감사합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글이지만, 스스로 독자이기도 하기에 제 글엔 보통 유한 평을 주는데요. (팔은 안으로 굽으니까) 요즘은 썩 마음에 차질 않아요.

AgalmA 2016-01-27 1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불안감 없이 모르는 편안함은 언제 갖게 될까요...

에이바 2016-01-28 09:43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 그때 제 답변은 ˝모르니까 더 좋은 거예요˝ 였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갈마님의 불안을 덜만한 방법은 비우시는 것, 저는 반대로 좀 더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저야말로 자기 반성,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말동안 아티초크에서 나온 『닥터 글라스』를 읽었다. 리뷰를 쓰려고 한 번 더 보고 있는 중인데 음악을 함께 듣고 있다. 알라딘에는 아직 등록되지 않았고, 타 사이트엔 예약구매 가능한 베르트랑 샤마유의 라벨 전집이다. 조금 소개해보자면, 프랑스 툴루즈 출신의 젊은 피아니스트는 조성진의 객석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해리슨 패럿이 월드 매니지먼트, 프랑스는 솔레아에서 맡고 있다. 툴루즈 음악원에서 수학한 후, 15세에 파리 국립 고등 음악원에 입학, 장-프랑수아 에세를 사사한다. 이후 런던에서 마리아 쿠르시오를 사사했으며 머레이 퍼라이아, 레온 플레이셔, 드미트리 바쉬키로프, 알도 치콜리니같은 거장들에게서 조언을 받았다. 2001년 롱-티보 국제 콩쿠르 4위에 입상한 후 독주회 등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2015년 프랑스 예술문화공로 훈장인 슈발리에를 받았다. (위키 참고)


앨범을 여는 첫번째 곡인 〈Jeux d'eau(물의 유희, 물의 희롱 혹은 물의 장난) 은 샤마유가 '프랑스 앵테르'에 출연했을 때 들려주었다. 툴루즈 음악원 시절인 여덟살이나 아홉살때쯤, 자신보다 진도가 앞선 친구가 보여준 악보가 이 작품과의 첫 만남이었다고. 음표의 배열이랄까, 이러한 악보를 본 적이 없어 음악이 너무도 궁금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결국 그 자신이 녹음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http://www.franceinter.fr/player/reecouter?play=1218635


-3분 34초 물의 유희. 앨범 수록

-26분 21초 밤의 가스파르, 1곡 옹딘(물의 요정). 앨범 수록


http://culturebox.francetvinfo.fr/musique/musique-classique/interview-le-pianiste-bertrand-chamayou-raconte-maurice-ravel-en-huit-mots-cle-233661


인터뷰) 피아니스트 베르트랑 샤마유가 얘기하는 8개 키워드의 모리스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앨범 수록




거울 모음곡 1번, 밤나방들. 앨범 수록 (프랑스 뮈지크 출연 영상)




거울 모음곡 4번,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앨범 수록




-영어 자막 있음


샤마유가 툴루즈의 생피에르 데 퀴진느 오디토리엄에서의 녹음하는 모습을 담은 앨범 홍보 영상. 라벨의 음악이 자신에게 얼마나 친숙한지, 어떤 의미인지를 이야기한다. 오디토리엄에 대해 조금 찾아보다 말았는데 툴루즈 지방 음악원 사이트 내에 소개되어 있다. 고향에서 라벨 음악 녹음이라 그에게도 의미가 남다른 앨범,


일텐데 알라딘에 등록되지 않았군요... 그래서


https://itunes.apple.com/gb/album/ravel-complete-works-for-solo/id1068269518?app=itunes




아르헤리치 연주도 좋다.



+) 2월 2일 추가, 알라딘에 등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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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2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 드세요.^^

에이바 2016-01-25 19:14   좋아요 1 | URL
날이 많이 찬데, 서니데이님도 따스한 저녁 드세요 ^^
 

신간 목록을 보다가 보고 만 것입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3부 출간예정을! 제목을! 

원제는 『Fortune's Favorites』입니다. 6월 출간 예정이니 올 여름도 로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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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6-01-20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인자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풀잎은 조금 처지네요 ^^

에이바 2016-01-20 21:3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는데ㅋㅋ 확실히 일인자에서처럼 가슴 졸이게 하는 그런게 부족해요. 3권 읽다 말았는데 다시 펼쳐야겠어요! 포르투나! 카이사르를 위하여!

살리미 2016-01-2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학!! 여름이 오기전에 얼른 시작해야겠어요!! ㅋㅋㅋ

에이바 2016-01-20 22:12   좋아요 0 | URL
로마는 쉴 틈을 안 주는 거죠! ㅎㅎㅎ

아말 2016-01-20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소식!! 감사합니다 ㅎㅎ

에이바 2016-01-21 14:33   좋아요 0 | URL
로마로 대동단결해요! ^^

서니데이 2016-01-2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에이바 2016-01-21 20:1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따뜻한 저녁 보내세요^^

서니데이 2016-01-2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좋은 금요일 저녁시간 되세요.^^

에이바 2016-01-22 22:43   좋아요 1 | URL
주말의 시작이네요.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