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한번 건성으로 읽었다. 요점정리가 안되서 두번째 읽는데 문득 책을 읽다가 내가 왜 이걸 읽고 있나 되묻게 되는 책이었다. 사실 이거 몰라도 현재의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별것도 없다. 고고인류학자가 아니니 연구의 가치를 따지는 것도 아닐 테고 현실적인 교훈이나 가르침도 아니다. 선사시대를 거처 오늘날까지 인간이 지구에서 문명과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이어가는 과정의 모든 해답을 풀어낸 책이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왔던 과정을 조금이라도 담아 냄으로써 인간이 가지는 속성에 다가 서려는 시도를 비추고자 한 것은 아니겠는가 싶었다. 본질이란 실체를 만나기 전에는 잘 모른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록도 없는 지구가 품은 인간이 저지른 미량의 흔적을 발견하고 유추하고 추측해내는 과정을 통해서 일 뿐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문득 저런 연구라도 할 요량으로 카메라를 들고 지구의 방방곡곡을 쫓아다녔더라면 얼마나 발걸음이 가벼움을 느낄까 생각했다. 본질성이 무엇인지는 모르더라도 인류가 시작한 그 행동의 반추하는 의미로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내가 당면한 현실은 억지스럽게도 출근하면서 법원으로 달렸다. 서류를 발급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책의 내용이 내 삶이 무슨 상관이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이 산다는 이 과정의 반복이 사사롭거나 중대하거나 다 관계가 있는 행위들이다. 돌도끼로 다듬은 나무에 뾰쪽한 석촉을 달고 사냥을 나가는 원시 석기인들처럼 나도 자동차를 몰고 법원의 서류 발급기에 서 있던 걸 문득 비슷한 동류적 의식이 느껴졌다. 짐승을 사냥해서 먹이를 찾았듯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는 사냥이란 대신에 일이란 걸로 치환한다. 오늘은 어디 들판으로 나가 지나는 가젤 영양 한 마리 잡거나 혹은 늑대 한 마리와 조우해서 도망을 쳐야 하는 야생생활과 전혀 삶의 방식이 다르다. 그러나 산다는 것의 행위는 방식이 다를 뿐 본질은 비슷하다. 지금의 시대는 야생의 시대가 야만의 시대가 된 것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어느 지역의 모녀가 자살로 추정된다는 불행한 소식이 들려왔다. 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 자본과 멀어져 있는 사람들과 같이 자본에 소외된 사람들의 소식이 그래서 야만적이다. 야생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본의 야만에 저항도 못하고 지긋지긋하게 산다. 오늘도 야만에 굴복된 채로 마치 선사시대 원시인이 야생의 늑대를 만난 것과 닮았다. 야생이야 도망이라도 치면 살 수가 있지만 자본의 야만은 도망도 칠 수도 없이 끈질기고 악착같다. 과연 오늘날의 문명의 법이란 것과 자본이라는 시스템은 야생이 아니라 야만적인 것이라는 두려움에 불안한 오늘을 살고 있는 셈이다. 오래전에는 생존의 필수 조건이 근력이라고 하는 힘이었다면 오늘날의 생존에 대한 필수 조건은 관심과 연합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 스스로가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소외당하면 살 수가 없는 이치이다.

야생의 수렵과 사냥했던 인류는 늘 기아에 허덕였다. 포식하는 것은 순간이고 지속적인 배고픔의 상태에 빠진 위험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를 사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본의 기아라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과 뭐가 다른지 차이를 찾지는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허기와 기아는 항상 공존의 수레바퀴처럼 이어나갔던 그들처럼 오늘 우리도 늘 갈증의 자본이란 사막에 걷는 유랑자가 된 거다. 오늘날 수렵이라고는 없다. 사냥도 야생 동물도 없이 사냥이 있을리가 없을 것이고 모든 것들에서 법과 제도에 따른 소유자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지금은 야생이란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어느 강가에 물고기라도 잡을려고 한다면 어업허가가 필요한 것처럼 누구 것의 소유가 있는 시대와 누군가의 소유권이 없던 시대와는 삶의 방식이 처절하게 다를 뿐이었다. 농업의 기술적인 발전이 하이테크 트리를 타면서 생산량이 부족해서 기근에 빠지고 기아로 죽는 경우보다 자본적인 불균등한 소외로 죽는 경우에 직면한 인류가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이라는 점이다. 하물며 질병으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로 죽거나 자살 당하기도 하고 혹은 온갖 오염물질에 노출되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암이라는 자기 복제의 오류 질병으로 죽는 경우가 더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인간이 끝없이 발전을 이야기하며 나왔지만 늘 새로운 위기는 상존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지금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저출산에 직면한 것도 이때까지 인구 숫자는 늘어 왔던 경험에 비추어 새로운 위기에 봉착했다. 인구감소로 야기되는 경제적인 자본의 축소는 항상 팽창하던 물질세계의 소비 축소를 의미하고 소비 축소는 순서대로 경제적인 이익에 위기가 진행되고 심화를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인구가 불어나는 문제도 식량 토지 소비재의 공급 부족에 대한 문제에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키는 정조준이었다면 인구감소에 대한 오조준은 지금도 우리 시대가 앞으로 부닥쳐야 할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이 제일 큰 위기는 자신이 자기를 죽이는 반 본능적 행태가 나타나고 자멸화의 과정에 빠지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살아가도록 진화된 인간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스스로 죽으려는 것이 제일 큰 위기라는 것은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살기 위해 발전한다고 믿어 왔다. 그리고 계속 대를 이어 살기 위해 발달시켜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처럼 자기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자폭장치가 가동되는 사회는 대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발전이 꼭 살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뭔가 어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연 과거의 연구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지침서가 될 수 있을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단순한 화승총에서부터 출발한 화약 산업이 이젠 핵폭탄으로 옮겨가는 것이 과연 발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루어낸 업적과 문명에서 식량(먹거리)와 무기, 그리고 질병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토로한다. 마침 지구상의 어느 지역에서 화학무기 살포로 수백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어쩌면 여전히 인간은 이 책에서 서술한 이야기의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8-04-10 16: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명의 발달로 우리 삶이 풍족해져도, 한 구석의 부족함은 인류와 함께 계속 갈 것 같습니다...

yureka01 2018-04-10 17:12   좋아요 2 | URL
어느 사회이든 그 수준을 보자면, 약자들도 골고루 소외되지 않는 사회겠지요....
그게 복지선진국 아닌가 싶어서요..
한편에선 넘치는데 구석진 곳은 결핍된다는 게 정말 고민 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강옥 2018-04-12 0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구상에서 가장 독한 종족이 인간 아닐까요?
먹이사슬의 상위에서 온갖 횡포를 일삼는 종족
그러나 결국 자멸하고 말지도 모르죠.
지혜가 자승자박이 되는 날이 올 겁니다.

yureka01 2018-04-12 08:55   좋아요 0 | URL
인간도 지구의 일개 부속품.....
지구가 부속품 교체를 요구할 때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고..말이죠..

2018-04-16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7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