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이란 학문은 꽤 재미있으면서도 심리, 즉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연구하는 흥미로운 학문이기도 하다. 인간학과 동물학인 생물학적 관점에서 나아가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고 이 심리를 통해 벌어지는 인간 세상의 다양한 면모를 심리적인 요인으로 분석하고 해석한다. 왜 이놈 이런 발언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할까"라는 물음에 심리학이 출발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현대 사회는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하며 과거의 단순한 체계에서 복합적 복잡으로 나아간다. 따라 심리학도 이런 복합적인 인간 세상의 해석이 더 정교해지고 정밀해지는, 그래서 심리학이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며 이 내면의 파악이 현실계의 행위로써 나타나는 것을 해석하고자 한다. "이세끼가 똘끼를 품게 되었을까""에 인간사의 병리적인 행불행을 심리로 파악하기 위한 휴머니즘이라고 본다.
특히, 이 책의 저자인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 (Abraham H. Maslow, 1908-1970)에 대해 처음 접한 것은 안전과 관련된 기사 자격증 시험공부하다가 알게 되었다. 기사 시험공부가 단순히 달달 외우는 것에서부터 하겠지만 외우고 나서부터는 이해가 필요한 단계로 접어 든다. 이해가 먼저이든 외우는 게 나중이든 간에, 시험 문제에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라는 도식적인 순서와 이에 대한 사례를 응용한 문제가 반드시 출제되었기 때문이다.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 5단계설이 바로 이 책에서 이론이 나온다. 이 욕구 5단계가 바로 이 책에서 처음 출몰되었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비록 간략한 핵심적인 이론만 나왔어도 반갑기까지 했다. 이론이 바로 이 책에서 나왔다고 하는 신기함이랄까. 안전에 관한 공부였기에 매슬로우의 두 번째 단계인 안전에 관한 이야기가 반드시 나오는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은 생존에서 나아가 안전한 환경과 조건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기본적인 삶이 불안하다는 것이 그 포인트였기에 안전공학을 공부하고 자격증을 취득함에 있어서 반드시 그 이론을 알아야 했으니 나왔던 까닭이기도 하다.
매슬로우의 존재 심리학에서 나온 5단계 이론은 << 생존 - 안전 - 소속, 애정(인정) - 존경 - 자아실현>>이라는 다섯 개의 카테고리로 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굳이 이 5단계 이론을 다 설명할 필요 없으니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자.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들이 이 다섯 개의 카테고리에 함축적으로 끼워 넣어도 별로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생존이란 것이 욕구의 기본적인 첫 시작이다. 이 생존이라는 카테고리에 아이템은 인간의 본능과 연결되어 있으니 쉽게 말해 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 배고프니 먹어야 하고 갈증으로 인해 마셔야 하고 배설하고 기본적인 생존적인 욕구에 대한 것이야 누구나 감각으로 느껴지는 활동들이고 누구나 다 느끼는 부분이니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 두번째 안전이란 항목도 생존의 확장판이라는 점에서 결부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생존의 각종 위험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결국은 생존이란 욕구와 연결되어 있으니, 안전이란 것도 생존에 필수적이다. 이 두 가지를 욕구의 하위 단계를 이룬다.
생존과 안전을 이루면 소속과 애정, 인정이라는 사회적인 관계망에서의 연결된다. 즉 관계의 안전을 욕구로 보았던 거다. 관계를 맺고 이 관계에서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이다. 인간관계에서 집단을 이루고 이 집단에서 서로가 인정하고 인정받는 것. 그리고 소속감을 느끼고 안전에서 나아가 안정이라는 욕구이다. 관계의 최소단위인 가족관계, 친족관계, 동창관계, 사회적인 친구관계, 혈연에서부터 지연과 학연까지 하다못해 산악회 모임까지 두루 포함된다. 어떤 집단에 끼이지 못할 때의 외톨이가 되거나 소외감을 느끼고 집단에서 배제될 때 오는 소속감의 결여는 생존은 할지라도 사회적인 관계로서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관계를 이어가고 새로 맺고 멀어지는 등의 사회적인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집단에서 인정과 애정을 받을 때 소속감으로 공존할 수 있는 심리적인 근거가 된다. 너와 내가라는 단독자로서의 존재이기도 하지더라도 집단 속에서의 우리라는 것으로부터 안정과 교류로 관계가 성립해야 사람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싫든 좋든 내가 선택했던 비선택적이든 우리는 일정 부분 다 관계에서 삶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런 집단 속에서 그 존재감을 인정받고 인정하고 우리라는 테두리 속으로 받아들여질 때 사람도 불안해지지 않는 원인이다. 매슬로우는 이런 단계를 심리학적으로 지적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나아가 단순히 인정 받고 이해받는 존재감에서 나아가 한 단계로 그 집단에서 우러러보며 경외감이나 존경을 받는 목표가 설정될 수 있다. 집단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생기며 소속된 집단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리더가 곧 이런 역할을 하고 존경은 명예심과 공명심으로 발휘된다. 매슬로우는 여기에 더 나아가 최종 단계가 자아실현이 단계라고 봤다. 하위의 결핍 동기에서 상위의 성장 동기로 옮겨가는 심리적인 현상을 강조했던 부분이다. 쉽게 말하면 자아 정체성의 실현이라고 해야 할까 싶었다. 이 책에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역시 자아실현 단계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이 지칭하는 이 자아라는 게 뭘까?
자기 자신을 말하는 건 알겠는데, 자기 정체에서 과연 내 정체는 뭐냐는 것. 내가 나를 지칭하고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 타자가 나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의 갭도 없을 수가 없다. 사회적으로 정체를 표시하는 간단한 방법이 신분증으로 증명사진과 등록번호와 주소를 넣으면 이놈은 언제 태어났고 어디서 살며 언제 몇 번째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기록한 증명서로 신분에 대한 증명을 한다. 아 그래 넌 그런 정체를 가졌구나.라고 여긴다. 물론 이건 내가 나의 정체를 밝히는 자아가 아니라 사회와 타자가 나를 구분 짓는 증명서일 뿐이다. 흔히 내가 나를 모르는데 누가 나를 어찌 알겠냐라고 구성진 가요의 가사가 그래서 와닿는 부분이다.
자기 자신을 특징짓고 구별할 수 있는 자기 정체성.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만큼 비극적인 것도 없다. 누가 내 슬픔을 알아줄까라고 했을 때 누가 내 정체를 알아야만 "아 누가 슬프구나, 위로해줘야지"라는 반응이 작용할 수 있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나의 정체를 파악하고 누가 나의 정체를 파악하고 이렇게 서로 간에 교집합이 도출되었을 때나 가능한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자아의 실현. 이게 가능할까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너의 정체를 밝혀라라고 영화 대사에서 알리바이를 대라고 추궁하는 장면이 있다. 그래 우리 삶에 너의 정체에 대한 알리바이가 뭐냐라고 묻는다면 과연 나는 자신 있게 내 정체성이 이러이러 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사진을 오래 찍어 와서 그런지 나의 사진의 심리에 대해 이 책과 결부 지어 보고 싶었다. 내가 찍고자 하는 사진은 그럼 결핍 동기일까, 성장 동기일까? 아니면 결핍 동기도 아니고 성장 동기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사진을 찍으려는 마음을 먹고 행동화하는 걸까? 혹은, 결핍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면 나는 무엇이 결핍된 동기이며 성장 동기라면 무엇이 성장 동기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내 사진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왜 여전히 사진이란 것을 찍고 있을까. 단순히 배가 고파서 사진 찍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생물학적인 결핍의 동기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을 팔아서 돈을 벌고 이 돈으로 밥 사 먹을까도 이제까지는 아니었다. 사진 찍어서 돈 벌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럼 결핍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진으로 내 삶의 인생 정체성이 건물의 전면 즉 파사드처럼 전부 드러나서 나의 자아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인가? 사진 찍는다고 내 삶 전체가 다 들어낼 진면목이라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모호에서 모호로 확대되는 존재의 심리학에 대한 고민이 아닐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여전히 모르겠다이다. 흡사 전체를 모르는 각기 조각조각의 퍼즐과 같이 흩어져 있는 정체를 모으다 보면 과연 무엇으로 보일지 추측도 안된다. 지금의 결핍에 대한 동기는 그럼 다른 무엇인가. 혹은 성장 동기는 무엇이어야 할 것이며 어떤 자아였길래 실현이 될 수 있기나 한 것인가?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의 이론을 접목 시켜 봤을 때 과연 나의 사진은 어떤 단계인지 헛웃음까지 나온다. 이게 이렇게 모호하다 라면, 과연 나의 사진에 대한 정체성이 뭘까 싶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마다 추구하는 목적이 있다. 아니 없다 해도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이입시키기도 한다. 아니면, 분명하고자 하는 분야나 삶의 목표도 설정하기 마련이다. 이도 저도 아무것도 없이 하루 살 이처럼 사는 사람도 있긴 하다마는, 과연 궁극적인 소원 하나씩은 다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로또라도 한번. 아니면 사업이 번성해도 돈이라도 왕창 모으고 싶은, 그야말로 바라는 것이 없을 수가 없다. 이 바람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적에서 나아가 공적화시키든 간에 필요한 덕목이고 욕망이다. 욕망 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평생 산사에 틀어박혀 도를 닦고 달관하고 성불하고 싶은 욕망도 역시 바람을 가진 욕망이 아닐 수가 없다. 인간이 살면서 완벽한 무욕의 삶이란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다 채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다 비워지지도 않는 것이 어쩌면 삶의 정체가 아닐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쏟고 치는 이 욕망이라는 것. 욕구에서 발전되고 확대된 욕망의 그 뫼비우스를 우리는 어쩌면 산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는 게 뭐냐. 욕망의 기제가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이 지배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를 부각시켜 나고자 하는 것. 삶이란 곧 욕망이다. 매슬로우는 이 욕구 욕망을 심리학적인 분석을 통해 연구했던 인본주의 심리학자였다는 것. 그리고 책은 중간에서 멈추었다.
PS : 이 책은 인내심을 가지게 되는 책중 하나다. 물론 내가 아직 이 책의 수준에 미치지 못해서 난독이라고 자백한다. 번역서를 웬만해서는 잘 읽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문장이 너무 길고 난해하다. 정독하다시피 또박또박 읽어도 문장이 길어 얽힌다. 대체 어디까지가 주어인지, 어디까지가 서술인지, 수식에 수식을 거듭하다 보면 문장이 이해가 안 돼서 또다시 앞으로 가서 재차 읽게 된다. 아 내가 무식해서 난독이겠지. 그러고 보면 나도 문장 문맹인가 보다. 이 책을 번역자 역시 번역에 애를 먹었다고 실토하기도 한다. 각종 강의록을 발췌한 글을 번역했으니 이야기가 서술될 때 자칫 포인트가 어긋나게 번역되지나 않을까라는 거다. 여기서 어떤 외국 서적을 번역할 때 꼭 번역가에 문학가의 검토를 받고 함께 공동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어떨까. 안 그래도 저작 전문 분야에 문학가의 문장이 가미될 때 독자는 이해가 더 빠르지나 않을까라는 공상을 하게 된다. 이 책이 읽기 참 어려웠다. 물론 욕망의 5단계 이론의 핵심만 읽고 나서 나머지 부분의 내용은 중간에서 멈췄다. 도저히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길 제어력이 발동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