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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일기 -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
최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19년 9월
평점 :
이별이 만들어진다. 이게 작별이다. 인생에는 많은 만남에서 예외 없이 이별을 거친다. 만남에서 이별까지 이 절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 인생 자체가 만남에서 이별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단번의 타임라인이다. 작별 일기라니 시작부터 먹먹하고 한편으로 홀가분할 것만 같은 이중적인 감정이 뒤섞인다. 이 책은 작가의 모친과의 이별 과정을 표현한 감정의 내밀한 서사이다. 누구나 다 이별을 하지만 아무나 이별의 글은 쓰지 않는다. 어떻게 이별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지, 어떻게 기록으로 개인의 모친과 이별에 따른 상념의 서정을 공유할 것인지, 이런 기록으로써 우리는 공감하고 교감하며 장차 자신의 이별과 타자와의 작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나의 모친이 요양병원에 입원한지 햇수로 몇 년째인지 이젠 오래되다 보니 기억도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이별이 확정적이지만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 길었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언제까지인지 알 수도 없다. 당장 오늘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몇년 더 지나야 할지는 모친의 천명에 달려 있다. 준비 없는 이별도 슬픈 감정을 생산한다. 반대로 이별의 준비가 너무 길어도 지친다. 치매의 고통은 이별의 준비를 너무 길게 끈다. 병원에 한 번 다녀가면 화약이 터져 일시에 산화하는 것같이 진이 일시에 빠져나가 탈진 느낌이 매번 들었다. 인간적인 고뇌가 없을 수가 없다. 서너 해 정도였더라면 적당한 이별의 준비기간이었다고는 하나 너무 빨리도 허탈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너무 길다. 이제는 가족들이 모두가 지쳐간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실감하기도 한다. 나도 진이 빠지고 빠지다가 이제는 무감각해질 정도로 더 이상 이별의 격정이 남아 있을까라는 의문도 든다. 치매는 이렇게 무서운 고통을 만드는 작별의 기록이 책으로 나오니 이왕 하는 김에 가족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도 현재의 당사자가 안고 있는 고민들의 공유라 생각하게 된다.
치매란 그런 거다. 관계의 철저한 단절. 심지어 자신과 세계의 무기력한 단절이다. 뇌세포는 점점 죽어가며 인지력조차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데 몸은 의식만 제거된 상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흡사 로봇이 명령 프로그램 프롬프트를 점진적으로 잃어버린 채 쓰러져 있는 상태와 같은 몸뚱어리가 된 거나 비슷하다. 최소한의 본능은 살아 있으니 생리적인 현상은 유지하나 무의식으로 흡사 깊은 잠을 자듯이 모든 감각이 차단되어 버린다. 느낄수 없음의 상태. 본능적 상태를 말한다. 그런 치매 병으로 사람은 서서히 시간의 고갈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지켜보고 있으니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흡사, 부팅 프로그램은 남아 있으되, 응용프로그램이 하나 둘 지워져 버려 폐기된 채 우두커니 한자리만 차지하는 낡은 컴퓨터와 같다.
모친이 어느 해 한 여름에 탈진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의식에 낌새가 이상함을 느껴 뇌 사진을 찍었고, 중병으로 확정되었던 그때부터 마음은 항상 스탠바이 상태였다. 스탠바이 상태는 늘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유발했다. 안정을 하고 싶은 충동이 강렬할수록 조마조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긴장도가 높아감으로써 따라오는 심리적인 피로감도 등달아 후발 주자로 따라 붓듯이 기생한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조바심은 서서히 사라졌다. 이젠 언제 떠나더라도 더 이상은 조바심을 낼 것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나 보일 마음의 자세는 갖춰진 셈이다. 모친은 중증 치매로 병원 입원했고 첫해와 둘째 해가 제일 힘들어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귀도 닫아 버렸고 눈도 감아 더 이상 뜨지도 않고 의식도 사라져 버렸다. 식물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간헐적인 고통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말에도 정상적인 대꾸가 없었다. 대화도 전혀 할 수 없는,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늘어진 육신만 마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의식의 임계점은 이미 저 멀리 넘어가버렸다.
어느덧 또래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모두 부모 세대를 보내야 할 나이가 되었다. 모친이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장례식장으로 문상을 다녀온 것도 전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몇 번인지 횟수가 잦았다. 이렇게 저렇게 알고 업무차 관계하는 관계자들까지 합치면 얼마나 될지 헤아릴 것도 없이, 죽음이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될 나이라는 거다. 이렇게 죽음은 자신에겐 단 한번 거치는 특별한 통과 과정의 의례이지만 타자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지켜보는 일상이라는 것.
이런 일상적인 죽음에 대해서 제일 서럽게 통곡한 적이 있었다. 모친의 여동생, 즉 이모님의 별세였다. 언니는 병원에서 누운지 몇 해이고, 하나 있는 여동생은 긴 치매로 감금당하다시피 갇힌 채로 몇 해를 지났고 그렇게 이모님은 별세했는데 언니는 여전히 병원에 누워 아픔의 짧은 탄성의 단발성 소리만 내지르니 어찌 가슴이 먹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서로의 의식이 없으니 만난들 무슨 소용도 없는, 무감각의 두 자매의 기막힌 비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모님의 아들, 나에겐 이종사촌 형님은 나를 보고 같은 심정이라는 걸 대번에 느끼고도 남았다. "고생이 많지?" 이 한마디로 다음의 아무런 말이 없이 그저 손만 잡고 울먹일 뿐이었다. 그간의 관계의 조바심과 피로감은 극에 달했을 것이고 회한이 없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간병으로 모시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떠올리고도 남았다. 그렇게 무언가 억울한 거 같기도 하는 그런 존재론적인 서러움이 복받쳐서 장례식장에서 실컷 울었다. 동생을 떠나보내는 것조차 알지를 못하는 인지력이 차츰차츰 사라져 가는 병이 무서운 증상을 동반했다.
의학적으로 육체의 사망진단서를 받아 들고서 나서야 우리들은 흔히 "운명하셨습니다"라거나,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한다. 운명하셨다는 것은 단 한번의 과정. 즉, 운명을 피할 수 없었으며 그게 모든 이들의 가진 운명의 절대성이다. 또한 돌아가셨다는 것도, 반드시 내가 없었던 상태로 환원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탄생은 실로 우연적이고 죽음은 절대적인 필연이다. 삶이란 운명이 우연에서 필연으로, 그리고 다시 필연에서 우연의 상태로 회귀를 의미하며,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나라는 객체의 무의미"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만들어 낸 필연의 유의미에서 다시 무의미의 우연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치매는 의학적으로 정신의 사망진단서나 마찬가지이다. 몸은 살아 있으되, 마음은 벌써 죽어 버린 운명.
치매 노인의 방치는 간단하나, 병이 길수록 간병도 길고 심리적 슬픔과 어쩔 도리가 없다는 지쳐감과 체념의 영향이 환자를 포기하게 만들어진다. 더욱이 경제적인 문제까지 연결된다. 오늘날 노인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갈수록 요양병원 혹은 노인전문 요양소가 늘어나는 수요가 발생하며 이게 다 돈을 들여야 하는 비용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른바 실버케어 산업이며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영리적 장사이다. 나 또한 구체적으로 계산해보지는 않았다. 자칫 그런 모친의 간병 비용을 계산하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위축되는 알게 모르게 받는 일종의 불경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어머니 아픈데 어떻게 돈 계산부터 하냐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런 간병 비용을 부담하는 압박감 또한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자본적 세계에서 태어나는 것도, 성장하는 것도, 죽는 거도 다 돈이 들어간다는 건 누구나 닥친 현실적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보장적 측면의 복지 비용의 투자는 투자로서의 경제성의 가치가 없다. 허나 사람이 살아가는 윤리성이 따르는 필수이기도 하다. 이별의 준비는 심리적인 준비도 아울러야 하는 등의 경제적인 준비 또한 무시할 수가 없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나이 또래의 세대가 부모를 봉양하고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투자해도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는 마지막 세대라는 말을 틀리지 않았음을 느껴 가는 중이다. 나의 세대에 부모는 자신의 노후에 대해 크게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인지도 모른다. 윗 세대의 노인들이 대부분 자식에게 위탁하고 노년을 보냈던 것에 비추어 자신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으나, 나의 세대는 자식에게 더 이상의 기대는 하지 않게 되었다. 자식으로써의 의무와 부모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아야 할 첫 번째 세대가 된 거다. 인생의 재무적 대차대조표를 짜보면 늘 적자 상태를 자신의 땀으로써 커버해야만 하는 울증의 세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준비된 상태, 대비되어 있는 상태가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방식과 방법론의 문제로 귀결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다 떠날 것인지에 대한 동격이며 여기서 삶의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물질적인 준비도 물론이고 아울러 심리적인 대비 또한 반드시 포함해야 할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내 나이 또래 친구들 대부분이 은퇴 시기가 다가옴을 점치고 은퇴 후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오래전부터 준비된 구체적인 계획서를 조금씩 체계적으로 조립되어 있지 못하다면 자신의 삶을 무방비로 방치할 때 찾아오는 준비 없는 이별에 대해, 그때 가서야 알아차리면 늦는다. 늦어서 후회스럽지 말아야 함은 곧 계획서의 작성과 스케줄의 이행, 혹은 스케줄의 오류나 형편에 따른 피드백일 것이다. 은퇴시기에는 꾸준히 수립한 계획을 실천할 단계이지 계획서를 작성할 단계는 지났다는 말과도 같다. 이마저도 안되면 임기응변으로 되는 대로 살다 무계획으로 인한 준비 없음에 대한 후회를 늘어놓게 된다는 것. 불행은 어떤 상황과 선택의 교집합에서 나오는 아주 고역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선택은 오로지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기도 하다. 지나온 삶의 상황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선택은 그래서 남은 사람들이 반드시 심사와 숙고를 거쳐서 나와야 할 인생의 변곡점일 수도 있다는 거다.
세상 한 번 오는데 이유 없이 올 수 없듯이 죽음 또한 이유 없는 죽음도 없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타자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는 길을 찾는 것이 오늘날 살 고 있는 사람들의 각자 저마다의 삶을 대하는 자기 임무가 아닐까 한다. 좀 더 근사하게 살았으므로 더 이상 회한이나 미련 없는 상태를 만들어 생을 완성해 가는 것도 앞으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과정의 숙명이 되었으면 한다.
작가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치밀하게 표현했다. 자칫 가족들의 내밀한 부분까지 들어내므로 우리들 모두가 장차 부모를 보내야 할 사람으로서, 혹은 내가 죽어가야 할 문제에 대해서 각자가 저마다의 생의 과정을 복기해보는 계기가 되고자 하는 책의 의도를 충분히 감지하는 민감성을 높인다. 인생의 끝자락에 관한 과정은 누구도 예외 없이 거쳐야 하는 필연적인 부분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 책을 통하여 각자가 주어진 상황에 따른 교감과 공감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성을 피력한다. 삶이란 그런 거다. 출생과 생존 그리고 끝의 마지막 날숨까지의 삶이란 과정을 타자의 관점에서 담담하고 묵묵히 기록한 점에서 삶을 경건함으로 지켜 성찰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다들 살아가느라 고맙다는 마지막 유언 같은 말 한마디에 결국 나는 또 눈물을 찔끔거렸다. 과연 나 또한 나의 마지막을 딸아이에게 어떻게 보여야 할지 내 삶의 의지가 작동하는 한 계속 고민해야 할 과제를 이 책을 통해 답을 도출해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이 책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