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는 사진 책이 드물어서 가끔 오래전에 출간된 사진 책을 종종 찾는다.  찾다 보니 걸려든 책이다. 저자 조민기라는 책에 포커스가 맞혀졌다.

 

훤칠한 외모와 영락없는 배우스러운 스타일, 연기력도 선이 굵고 성격도 짙은 지명도가 꽤 있는 배우였다. 언젠가 일전에 아빠와 딸이 함께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해서 예능성도 보였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가정적인 그런 아빠였던 모습으로 연출된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지방 사립대학에서 연기를 지도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어엿한 교육자였기도 하고 평교수가 아니라 학교에서 보직도 있는 공헌도가 상당했던 걸로 안다. 또한 그는 사진가로써도 명성이 적지 않았다. 배우이니 만큼 배우로서의 주목도를 바탕으로, 사진 관련하여 다큐 르포 프로그램에도 출연해서 그의 사진을 담아내는 모습을 기억하기도 한다. 이만하면 그의 이력과  타이틀 정도로 봐도 외적으로 보이는 부분으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유명한 배우이자 연기 전공의 교수, 사진작가까지. 참 부러운 모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나름대로 보이는 부분은 잘 나가는 배우였다고 결론낼 수 있다. 더욱이 교수이기도 해서 책까지 내기도 하였다. 이 책을 찾아 주문하려 했지만 품절이었다. 물론 출간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터라 재고가 남아 있을 거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투 운동이 활발히 벌어질 당시 그도 역시 미투 운동의 중심에서 각종 피해자의 증언과 하소연을 하여 경찰의 조사 대상이 되는 와중에서, 그가 쌓았던 명성과 타이틀의 도덕적 타격은 심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안타까운 결말을 스스로 지어 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소위 잘 나가고 있던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불행의 중심에 있었고,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람이 잊힌다는 건 순간이다. 그런 인지도와 영향력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혀간 전직 배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나 오류, 혹은 실수에 대해 스스로 드러내어 자성과 함께, 피해자들에게 정중하고도 진정성의 행동으로써 사과하며 형사적, 민사적인 죗값을 치르고, 그럼으로써 반성하여 다시는 그런 오류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닌가. 명성이 한순간에 추락해도 다시 반성과 용서로 재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얼마나 용기가 없었던 건지, 그저 자신의 삶을 마감시켜 버림으로써 덮어가려 할까? 우리가 뉘우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잘못한 사람이 진정성 있는 용서를 구하고 반성하는 순수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래서 큰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으로써 용서를 받고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천명을, 받들 수 있음에도 이를 활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더 안타까운 것은, 그는 사진을 찍어 왔던 사진작가가 아니었던가. 사진은 피사체를 렌즈로 통해 사색의 근원을 짚으려 하는 모티브이다. 사진을 통해서 사유하고 자신에 대한 철학적이며 관념적인, 나아가 예술의 지향성을 추구하는 삶이다. 이는 껍데기의 사진이 아니라 사진의 철학적 근간으로 들어가려는 예술의 순수성에 대한 자기 추구이다. 당연히 자신의 삶을 사진에 이입시키는 사색의 골몰이다. 결국 그의 불행한 선택은 이런 사진의 가르침을 통해서 배운 삶이 아니었단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껍데기의 사진에 치중하는 부분이 있는지 다시금 한번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아닐까라는 질문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사진은 물론 보여주는 부분이 전부라 하지만 반드시 전부도 아니다.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진은 자신의 삶에 이입시켜 투영하는 삶이라야 한다. 사진의 명성, 경력, 어디 수상 이력의 공명감 따위에 사진에 골몰하게 되면 사진에서 그 가르침을 배울 수 없다. 그런 공명심이란 것도 반드시 사진 아니라도  얼마든지 쌓을 수 있다. 특히 그는 배우였으니 배우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할 수 있는데, 굳이 사진은 왜 추가되었을까라는 부분이다. 따라서 성찰과 되돌아보는 계기의 사진이 되지 않는다면 사진은 그저 허영과 사치의 사진이 되고 만다. 특히 여기서 사진의 예술론으로써의 허영과 사치가 될 때, 사진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꼴이다. 사진의 허영과 사치는 결국 표피적 외형적인 보여주는 과시용으로 전락하고, 수상 경력과 사진 이력에 집착하기도 하고 때로는 카메라의 뽀대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경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작은 똑딱이 카메라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진을 담는 작가들의 과시하지 않는 진솔한 모습은 그래서 더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은 사회적 위치와 명성, 혹은 권력이 높아갈수록 유혹에 빠질 위험성은 증가한다. 이는 욕망의 사이즈가 커지는 결과를 만들어 위험한 유혹에 빠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으로부터 얼마만큼 자신을 절제시켜 제어할 수 있는 자성과 자각이 폭주의 욕망에 따른 위험성과 비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유혹의 파멸적 위험성에 비례하는 자성은 늘 부족하거나 따라가지 못하게 될때 사고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그가 사진으로 자신의 진실한 내면과 마주하였을까라는 점이다. 사회적 명성이 높아도 오롯한 자신의 내면적 사진이 아니었다는 결과적인 결론이 무척이나 아쉬운 점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끝이 없는 자신과의 대화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과의 질문과 대화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자각은 유혹의 위험성으로부터 조절되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물론 사진은 외형적 이미지로만 보일 뿐이고, 그게 자신의 내면적인 질문과 대화인지는 자신만이 안다. 그래서 사진심리학에서는 움직이는 동선과 행위로써 사진이 내면으로 오버랩으로 덧대진다. 많은 사진가들이 사진 따로, 삶의 행위 따로인 경우를 보게 된다. 사진과 삶의 합치성은 사진 활동에 중요한 덕목이다. 아무리 사진을 잘 찍고 외형적 이미지가 절묘해서 대단한 작품성으로 돋보인다 하더라도 그 삶이 사진의 보이는 의도와 전혀 다른 이중성으로 포장되었다면 사진의 철학은 자동 격하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외로 사람의 평가에 있어서 한 번의 실수를 너무 가혹하게 치부해버린다. 항변해도 아무런 소용도 없고 한 번의 낙인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 이와 비슷하게 사업에 실패하고 알거지가 된 사람도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재기할 여력조차 깡그리 박탈해버린다. 너무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세워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애 버리는 경향이 있다. 실수에 대한 온갖 비난과 매도, 살아온 삶의 전부 그 자체까지 부숴버린다. 한치의 용서조차 허락하지 않는 섬찟함이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누구라도 완벽한 사람이 없다고는 하나 전부 완벽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누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라고 예수께서 가르쳤으나, 우리는 비난 비판을 너무 쉽게 한다. 직간접적인 피해자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아무나 마구 돌부터 던지고 있는 셈이다. 세상엔 용서받지 못할 자는 없다. 세상엔 용서 구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용서에 어찌나 인색한지 사람 하나 죽이는 건 눈도 깜짝하지 않을 만큼 강렬하다. 욕먹을 짓 했다 해서 욕만 날리는 것도 아니었더란 거다. 역시나 비난은 쉽고 자성은 어렵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다른 산의 돌을 보고 내 산의 돌을 생각하는 것. 이것을 타산지석이라고 했다. 타인의 행위에 돌을 던지기보다는 타인의 악행에 나를 비추어 나의 돌은 얼마나 연마할 것인지를 먼저 따지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어느 일방의 잘못을 매도하기에는 후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그 가족일 것이다. 아빠를 잃었고 남편을 잃었다. 명망 높았던 교수라는 것에 가리어져 수치감에 치를 떨었을 학생들이었다. 정작 본인 스스로가 파국으로 끝을 맺어 버렸으나 그들이 입은 상처는 크고도 깊다. 앞으로도 상흔이 많이 남았다. 상처의 아픔을 이겨 내고 극복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애 버렸다는 점이 더 가슴 아픈 부분이다.

 

타산의 돌을 보고 내 산의 돌이나 더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을까, 오점을 남기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나의 돌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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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0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0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10-10 15: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름 좋아했던 배우였는데 안타깝게 됐죠.
모르긴 해도 그런 일을 당할 때 자신이 어떻게 처신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선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선 애꿎은 사람만 죽어나갔다고 미투운동을 비난하곤 하죠.
연출가 이윤택 씨는 복역중인 걸로 아는데 그의 책은 아예 품절되었더군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고은 씨도 그 리스트에서 제외된 것 같구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번은 통과해야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명예는 높은 도덕성과 함께 온다는 걸 이 나라 셀럽들은 이제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yureka01 2019-10-10 15:27   좋아요 2 | URL
명예는 도덕성과 함께라는 것이 핵심이네요..
누군가 억울하고 부당한 피해자가 있다면 그 명예는 허울이 되어 버리거든요.

왜 평생을 쌓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유념하지 못했을까 이게 너무 미스테리하거든요.
특히 남여의 성적인 부분은 예민한 거라서 말이죠.
흔히 권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자의적으로 해석해버리는 독선에 빠지게 될때. 발생하거든요..

매우 안타까웠던 이유입니다.

강옥 2019-10-11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네거티브에 약하더군요
여태 쫗게만 보던 사람도 나쁜 소문이 돌면 금방 손가락질 해요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보더라구요
한 사람을 지목해 그를 탈탈 털어 왕따시키는 행태가 서울 강남에서 횡행햇다고 하더군요
같은 무리들 속에서도 미운 넘 하나 골라 자빠뜨리는-
광화문파와 서초파가 격돌하는 작금의 세월이 내란같이 불안한데 과연 누굴 믿어야할까요?

yureka01 2019-10-11 11:46   좋아요 1 | URL
항상 크로스 체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한쪽의 주장만으로 판단하면 자칫 오해할수도 있거든요.
주장에 타당성.주장의 신뢰성 이게 보완되어야 할 거예요.
요즘 뉴스가 뉴스라기보다는 의혹으로 소설같아서요.
일반적으로 팩트쳌라고는 하지만 이게 간단한게 아니라서요.

2019-10-12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0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