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책 두 권인데요. 간단한 리뷰 겸 소개하겠습니다. 심도 있는 리뷰 형식은 아니니 그저 편하게 읽고 감상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을 찍어 왔고 사진 책을 리뷰하고 사진 책을 보고 있으니 알라딘 이웃분들께서 역시 사진 책을 종종 보내 주십니다. 네 성향 맞춤형이었죠.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리고요. 이번에 받은 두 책은 사진으로 의미가 있어서 항상 취향에 딱 들어맞았지요. 하나는 체르노빌을 담은 사진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래스카의 풍경 사진이 아주 많이 담긴 에세이 책이었습니다.
체르노빌과 알래스카. 네. 전혀 엉뚱한 환경의 너무 다른 극명인 차이가 나는 풍경이었습니다. 체르노빌은 아시다시피 핵발전소가 폭발되면서 그 일대가 방사능으로 초토화 되었고, 몇십 년이 흐른 지금의 낡고 쇠락한 모습의 사진입니다. 기본적으로 체르노빌의 모든 사진은 인류가 핵을 다루는 것에 대한 경고성 의미가 대부분입니다. 반대로 알래스카 사진은 그야말로 자연의 때뭍지 않는 순수한 풍경 그 자체입니다. 당연히 자연의 보존가치에 대한 것이 주제이기도 하죠. 체르노빌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알래스카는 아주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더 극적이기도 하죠. 그래서 이 두 개의 책이 대표하는 주제는 인공물의 낡음과 자연의 아름다움, 이 두 개가 주제였습니다.
두 책은 성향이 전혀 다른 사진입니다만, 그러나 희한하게도 두 개의 주제에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아니 이 공통점이 너무 크게 부각됩니다. 바로, 사람의 발길은 끊겼고 인적이 드물다는 것에서 같은 효과가 있는 사진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의 손길이 멀면 멀어질수록 자연이 제 스스로가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더군요.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는 사람 발길이 끊겼거든요. 고농도의 방사능 때문에 인적이 끊겼지요. 그야말로 무인지대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알래스카는 극지의 오지라서 접근성이 대단히 어렵기에 (사람 발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구밀도가 상당히 낮습니다. 사람과 자연. 이 두 개의 카테 로리의 접점이 찾아지는 부분입니다. 체르노빌의 사고 이후에 나타나는 자연의 놀라운 복원력과 시간이 인간의 흔적을 어떻게 지우개처럼 지워져 내는 건지, 그리고 여전히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또한 알래스카는 언제든 사람의 발길이 많아질수록 체르노빌처럼 경고를 내고 있을 것만 같더군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을 때라는 전제 조건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어떻게 변화로 이어지는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이야 전혀 다른 내용이라서 따로따로 해야 정상인데 이 두 개의 의미가 만나는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자, 그럼 체르노빌부터 먼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게임 제작사로 유명한 베데스타 게임 스튜디오라는 회사에서 나온 풀아웃 시리즈가 있습니다. 풀( FULL) 아웃(OUT). 즉 모든 것이 아웃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핵 전쟁 이후는 모든 것이 풀 아웃이 되었거든요. 기존의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 체제에서 아웃된 이후이기도 하죠. 기존의 질서의 체제는 핵 전쟁으로 무너지고 모른 것이 새롭게 약육강식처럼 재편된 이후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사라져 버렸고 일부 핵 전쟁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게임이었습니다. 도시는 모두 폐허로 변했고 방사능에 오염된 환경을 상상하듯 이미지화시켜낸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핵 전쟁에 대비한 벙커에서 냉동 상태에서 깨어나 수십 년 만에 나온 사람들이 만나는 도시는 낡고 쇠락했으며 시간이 경과 됨으로써 모든 것이 퇴색된 풍경이었거든요. 일부는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접근이 불가능하고 동식물들도 대부분 죽었습니다. 일부 살아남은 동물들은 방사능으로 인해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고 괴물이 되어 가고 사람들도 괴물처럼 변했습니다. 일부 냉동에서 나온 사람들의 분투는 함마디로 이대로 끝나는 절망을 게임 전체가 아우르고 있죠.
체르노빌 이야기에 왠 풀 아웃 게임 이야기냐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게임의 배경이 되는 이미지가 체르노빌 사진집에서 봤던 모습을 똑같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흡사 베데스타 스튜디오에서 게임의 이미지와 배경을 체르노빌을 참고했나 의심이 들 만큼 닮았습니다. 쇠는 녹이 슬어가고 페인트는 온통 뜯어지고 합판은 분리되어 일어나는 등등 그냥 똑같은 모습이었죠. 사람이 사라져 버린 도시가 어떻게 늙어가며 변화하는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방사능은 측정기를 가져다 대면 삑삑삑 경고음을 울리며 접근을 경고하는 환경. 그야말로 풀 아웃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체르노빌 사진에서 보여주는 이미지가 주는 인간에 대한 소거의 두려움과 방사능이란 경고가 퇴락하는 인간의 구조물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차라리 그렇게 퇴락하는 도시에서 제염되지 않는 방사능을 반감기를 거치기도 전에 자연은 어떤 기제로 이런 인공구조물의 도시를 변모시켜가는지 사진은 담담하게 관찰하였던 것입니다.
사회비평가였던 수전 손택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밝혔듯이, 사진은 끝없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으나 이제 사진에서 나오는 이미지는 자극적일 뿐 더 이상 경고의 의미도 퇴색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슨 사회적 고발 사진에서는 인간의 행동에 경종을 울리긴 했어도 인간이 과연 핵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만한 것으로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상당히 부정적이기까지 합니다. 자극은 더욱 강해져도 결국 마약환자처럼 중독되어 더욱 강력한 경고를 받아도 행동의 변화는 요원하다는 말이겠지요. 아무리 붉은 경고등이 점멸되고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것처럼 행동의 변화가 없다는 것으로도 여겨지게 됩니다. 결국 인간이 얼마나 우매한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죠. 경고등이 켜져도 행동의 변화와 작동을 멈춘 인간은 결국 후쿠시마의 재앙에 대해 과거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절대 건들이지 말아야 할 핵은 경제성이란 이유로 자본의 충실한 이용물이 되었으나 방사능은 자본으로도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인간이 시간을 정복하지 못한 이상 방사능의 반감기는 정복할 수 없는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 동안 사진작가 내지 사진 기자가 전쟁터에서 죽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전쟁의 고통과 참상을 알리는 그 현장에서 정작 사진가는 목숨을 걸었고 현장에서 죽어 나갑니다. 그러나 그런 목숨까지 내 걸었던 사진을 통해서 전쟁이 줄어들거나 사라진다는 상상이 되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체르노빌의 현실을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의 양식을 바꾸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사진은 현장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한 작업이니 방사능이 오염된 지역으로 작가가 직접 들어갔으니까요. 그렇다면 대체 이런 사진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사진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비극의 극점에서 벌어지는 참상에서 사진으로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소귀에 경일뿐이니까요. 문제는 또 있습니다. 그렇게 고발하는 사진에서 현실적으로 재현되었을 때의 인간은 결국 간악한 모습을 보입니다. 경고를 무시할 때 벌어지는 불상사는 곧 뒤늦은 후회를 남기고야 말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닥쳐서야 그제서야 후회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질 중에 제일 악질적인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사진은 후회하는 인간에 대한 일종의 조롱하며 욕을 퍼붓는 거 같아 보입니다. "아휴 꼬습따 이세끼들아" 라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뜻은 아닐까 하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자신의 고향 땅에서 살아가는 일부 극소수의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소거된 빈 곳에서 버릴 수 없는 고향이 체르노빌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그 경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살아가는 것일 테니까요. 권력과 합쳐진 자본은 땅을 헤집고 핵발전소를 지어댈 것입니다. 다만 그 권력이 이런 경고를 무시하지 않는 권력자의 안목과 지혜만이 공감대를 얻고 나아가 전체의 시민들이 각성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각성 앞에 있어서 경제적인 이유로 자본은 끝없이 오해하도록 만듭니다. 전기료가 싸진다는 이득의 꼬임에 당하기 일쑤기 때문입니다. 당장에 내 주머니에서 돈이 적게 나가는데 반대할 이유는 멀리 있거든요.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일본 사진작가 고, 호시노 미치오의 "영원의 시간을 여행하다"라는 책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치오 작가의 알래스카에 대한 사진을 담고 있습니다. 알래스카의 광활한 대지, 각종 동식물들의 생태 사진들이 가득하고 원주민들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의 사진들은 흡사 한 편의 NGO 다큐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알래스카는 오지에 추운 지방이니 인구 밀도가 일반 도시에 비해 현저히 낮습니다. 그만큼 사람 발길이 드물었으니 자연 환경이 상당히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알래스카도 유전이 발견됨으로써 인한 환경 오염이 직면했음을 사진작가는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유전으로 발생되는 오염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생태환경 작가의 경고를 사진에 담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뷰 파인더로 보이는 황홀한 장관을 오랫동안 지켜낼 수 없다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자원의 약탈적인 힘 앞에 무력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자연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드넓은 습지, 숲들과 야생의 들판들이 여름과 겨울을 바꿔가며 옷을 갈아입으며 태양의 빛으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의 일거수 일투족 낱낱이 카메라로 기록하는 것은 자연의 숭고함에 대한 경배와도 같은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위대함은 속절없는 탐욕 앞에서 허물어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이루기는 무척 긴 세월이 걸렸지만 파헤치는 것은 순식간인 것처럼 위대한 자연이 순간이 오염지대로 변모하는 것의 두려움과 공포를 사진 첩 속에 숨겨 놓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들어가서 오염된 지역을 복구시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인간이 들어가서 탐욕으로 파괴시키는 것은 한계가 없더라는 메시지를 작가는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 적인가요. 지구 혹은 자연의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일까. 지구나 혹은 자연도 완벽한 것도 아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럼 지구 혹은 자연의 오류는 무엇일까? 바로 지구라는 자연환경이 인간을 만들어낸 오류나 실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 지구에서 만에 하나 가정을 해봅시다. 지구에서 사람이 없다고 하면 과연 지구는 어떤 모습을 하게 될 것인가?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구는 큰 축복이었을 테고.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축복인지 아닌지 몰랐다가 나중에 보니 인간이 지구에 대해 하는 행실머리로 봐서는 앗 이거 아닌 거 같아?라고 탄식을 내뱉을 것만 같았거든요. 인간이 머물다간 자리에 쓰레기만 쌓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쓰레기조차 자연의 일부로 동화시켜 버립니다. 체르노빌의 모든 인공 구조물이 자연의 동화화로 진행 중인 걸 보면 결국 인간의 흔적을 서서히 지워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심각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야 인간의 모든 행위가 자연에게 쓰레기나 내뱉겠지만 40억 년 지구 나이에 인류의 세월은 고작 몇백만 년도 되지 않을 테니까요. 앞으로 몇 백 년이 지나 그때까지 인류가 남아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지구는 자신의 모순을 끌어안고 태양을 따라 볼텍스 운동으로 은하의 외곽으로 나아 가겠지요. 앞으로 몇백억 년 뒤,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가 안드로메다은하와 충돌할 때, 지구의 모습은 지금을 상상할 수야 없겠지만 자연의 장관을 기록한 그 순수했던 모든 영혼들은 우주 어딘가에서 또 다른 씨앗이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다음 영상하나 재미로 보세요.^^.
동영상에서 보시다 시피 별이 저 정도로 휘몰아 치면, 태양의 위성인 지구는 가루조차 남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무엇이라야 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저기에선 무위가 따로 없거든요. 그래서요. 한가지 떠오른 생각은 "겸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