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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미술관에 가다 - 그림으로 본 패션 아이콘
김홍기 지음 / 아트북스 / 2017년 2월
평점 :
어릴 적엔 주는 대로 입던 아이가, 어느 날 독립을 선언했다. 뭐 집을 나가거나 금전적 독립이 아니라 패션 독립! 사실 패션이랄 것까지도 없다. 그저 편한 옷들, 주로 체육복 위주의 옷들을 사주던 대로 입던 아이가 (주로 아웃렛이나 코스트코 인터넷 패션) 자신이 옷을 사겠단다. 단 의복구입비는 달란다. 일단 몇 푼을 쥐어줬더니, 호기롭게 나간다. 아무래도 반바지 한 벌 겨우 살 것 같은 금액을 쥐어줬는데, 뭔가 한 벌 쫘악 빼입고 올 것처럼 꿈에 부플어 나갔다.
그리고 돌아와서 내게 보여준 옷들은, 체육복들
"엄마 나도 모르게 손이 이리로 가는 거 있지?"
내가 골라 준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체육복 바지를 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은 인터넷으로 나름 자신에게 어울리는 웃들을 찾아선, 아주 겸손하고 예의바른 모습으로 아버지의 얼굴과 대면한다. 페이스결제다. 친구 하나는 지문인식 결제인데, 요 녀석이 잠든 아빠 손으로 자꾸 결제를 해서, 홍체인식으로 바꿨단다. 자는 아빠 눈을 조심스럽게 땀까지 흘리며 뒤집는 녀석을 보며 혼을 내려다 너무 웃겨서 등짝만 때려줬다는 이야기들이 나돈다.
맨몸뚱이란 약점을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커버하던 시대에도, 누군가는 맘모스 이빨로 목걸이를 만들고, 비록 방 하나짜리 동굴이라도 혹자는 손바닥을 찍어가며 꾸몄겠지.
온 힘을 다해 주술과 아름다움을 담아 정성껏 빗살무늬를 넣으며, 명품그릇 못지 않게 아끼며 쓰지 않았을까.
예술과 패션이 만나는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몬드리안의 그림들이 입생로랑의 원피스가 되고, 엘지의 에어컨이 되며, 낮에 틀어놓은 홈쇼핑에선 바스키아의 왕관모양이 들어간 티셔츠와 키플링의 대표로고가 찍힌 가방들을 판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모습들을 좀 더 깊이 있게, 그 시대의 흐름과 역사와 함께 다루고 있다.
마리 로랑생이 그린 샤넬 초상화를 본 적이 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어떤 인연으로 만난 것일까. 이 책에서 그 궁금증이 풀렸다.
러시아의 예술기획자 세르게이 댜길레프는 발레뤼스라고 하는 러시아식 역동적 발레를 프랑스에 선보인다.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발레극이 만들어졌다.
그 중 <암사슴들>이란 극엔 마리로랑생이 의상과 세트를, 그리고 1막짜리 발레인 <청색기차>는 샤넬이 의상과 세트를 맡으면서 둘은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청색기차>란 발레는 극본이 장 콕토에 피카소의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이 커튼에 그려졌다니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여담이지만 예전 국어선생님이 떠드는 아이에게 시를 두 편 외워오라고 했는데, 외워온 시가
장콕토의 기차~ 기차는 길다. 쥘 르나르의 뱀~너무 길다 해서 교무실로 끌려가던 기억이 난다. )
제목과 어울리게 샤넬이 등장했다. 그 다음은? 실제로 의복의 역사와 사연들, 그리고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그림과 함께 소개된다.
기억에 남는 것은 언니 바네사 벨이 그려준 <버지니아울프>의 초상화다. 어린 시절 드레스룸에서 의붓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 후 옷 입기와 옷 입는 자신에 대해 예민하고 힘들어 했던 그녀는, 뜨개질을 통해 자신의 옷을 만들어 입었고 뜨개질이 자신의 인생의 구원자라고 할 만큼 애착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언니가 그려준 초상화 속 버지니아 울프는 조금은 편안한 모습으로 뜨개질 중이다.
여인들에게 자유를 준 터키풍 바지와 “패션의 유행은 민주주의를 촉진한다”는 질 지포베츠기의 말. 장베로의 <불로뉴 숲의 자전거 산장>엔 블루머를 입은 여인들이 티타임을 즐기고 있다.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와, 잠시 차를 마시며 그들이 만끽했을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중국풍의 시누아즈리와 일본풍의 자포니슴에선, 중국이민자의 노동파업과 서태후같은 강한 여성에 대한 반발로, 나비부인처럼 헌신적 여성성으로 옮겨진 유행의 흐름을 설명한다.
제임스 휘슬러의 <보라색과 장밋빛>에선
시누아즈리와 자포님즘이 함께 담겨 있다.
상의는 모란과 국화와 나비의 중국풍, 하의는 검은색의 기모노다. 청나라 강희제 시절을 상징하는 6명의 여인이 그려져 있는 청화백자, 휘슬러의 그림은 마치 그 시대의 최고 인기 상품 카탈로그같다.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 중 하나가 <빅토리아>
빅토리아여왕에 대한 이야기인데, 의상을 보는 재미가 크다.
그 시대의 아름다운 의복들과, 빅토리아 여왕의 하얀 드레스.
드라마 속 옷차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제임스 티소의 그림 속 여인들이 튀어나온 듯 하다.
주로 매춘부들이 패션을 선두했고, 그런 패션을 귀족부인들이 따라했다니, 금욕적이면서 순결한 척 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위선이 보이는 듯 하다.
프랑스 나폴레옹 시대에는 아주 얇은 엠파이어 스타일의 모슬린 드레스가 자주 등장한다. 너무 가볍고 천도 많이 들지 않아, 프랑스의 섬유산업 발전에 저해되는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섬유산업 부흥을 위해, 모슬린을 입지 못하도록 난롯불을 끄고 굴뚝을 막게 했지만, 유행을 막을 수는 없는 법, 그들은 폐렴에 걸리면서까지 시스루의 원조격인 모슬린 드레스를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고려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유럽으로 전해 진 쥘부채를 손에 쥐고, 곰보자국을 감추려 애교점을 찍고 상류층의 특권인 기다란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크리눌린을 잡고 마차에 오르는 여인들이 걷는 거리라 낭만적이지만 또 위험한 풍경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너무 부풀린 치마 때문에 화재위험도 많았고, 특히 강이나 바다 쪽을 산책할 때 바람이 불면 휘~~익 날아가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주로 뒤집혀서 빠지게 되는데 그러면 구조에도 애를 먹었다고 한다. 너무 넓은 치마면적 때문에 바람에 날아가 물 속에 뒤집힌 채로 구조를 기다린다니. 목숨을 건 옷차림은 그저 패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집안의 재력과 신분을 나타내기에 거기다 위엄과 권위의 문제이기에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중국에선 길고 긴 손톱과 전족한 발은 그 집안의 여인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됨을 나타내는 부의 상징이었단 글을 본 적이 있다. 서양 또한 마찬가지다. 졸라맨 코르셋과 일상생활을 하기엔 너무 불편한 커다란 치맛단과 엄청난 직물의 양들이 바로 부의 상징이었다. 집안의 부를 보여주는 인형같은 존재에게 활동성이란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나니, 피 묻은 천을 넣어 만든 이잡이용 통이 생각났다. 목에 걸고 자면, 이가 가득했다는 그 통을 불에 태웠다고 한다. 거기다 밀가루를 쏟아부은 머리장식엔 가끔 쥐가 둥지를 틀기도 했다고 한다. 부유한 귀족들의 삶이 이러니 가난한 백성들의 삶은 어땠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상의는 큰아들에게 하의는 둘째에게 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니 의복따윈 그들과 너무 먼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 내가 입고 있는 이 옷들도 그냥 나타난게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필요에 따라 그리고 선호되어지는 삶의 방식에 따라 만들어 진 것, 거기에 평등과 자유가 함께 재단해서 만들어 낸 옷이다. 물론 지금도 의복은 많은 것을 나타낸다. 그 사람의 취향과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 지, 거기에 빈부의 격차가 드러나기도 한다. 예전에 읽은 소설에선 모두가 같은 옷을 입던데, 그 와중에도 그 옷에 단추를 달고 꽃을 장식하는 이들이 있겠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의복이 아닐까
어릴 적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보자기를 허리나 혹은 어깨에 두르고 마치 이 곳의 내가 아닌, 저 편의 공주나 모험가가 되는 상상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그림을 통해 복식사를 설명하며, 그 시대의 이야기로 그 시대의 인물인냥 우리를 이끈다.
재미도 있고 그림 보는 맛도 있다.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패션도 볼 수 있다.